1. 홍대용 문집,『담헌서(湛軒書)』
한때 동양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담헌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과학사상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덕보(德保)인데 담헌이라는 당호로 더 유명하다. 홍대용의 과학사상은 그의 문집인 『담헌서』에 전해지는 「의산문답(醫山問答)」 이라는 글에 전모가 드러나 있다. 여기서 그는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중국과 오랑캐, 즉 화이의 구분을 부정하는 한편,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실로 대범한 주장을 펼쳤다. 「의산문답」과 「주해수용(籌解需用)」 등 홍대용의 대표작이 실려 있는 ?담헌서?는 원래 15책이었으며, 이것이 7책으로 다시 편찬되어 발행된 것은 1939년이었다. 후손 홍영선에 의해 활자본으로 발행된 『담헌서』는 서문을 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에 의해 과학사의 주요한 저작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2. 북경 사행과 「의산문답」
석실서원 김원행(金元行)의 제자이기도 한 홍대용이 과학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66년 초 북경을 방문하여 서양과학을 접하면서부터였다. 60여 일 간 북경에 머물면서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경험은 이후 자신의 사상을 살찌우는 산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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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의산문답」 의 배경, 의무려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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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용의 과학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의산문답」 은 실제 북경 여행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이기도 하다. 의무려산(醫巫麗山)에 숨어사는 ‘실옹’과 조선의 학자 ‘허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글은 그가 실제로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이 그 배경이다. 「의산문답」 은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믿는 허상을 풍자한 과학소설이라는 점에서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 에 비견되는 글이다. 세속적인 허례허식과 공리공담만을 일삼는 ‘허자’의 물음에 실학적인 인물인 ‘실옹’이 답하는 형식의 「의산문답」 은 30년간 성리학을 익힌 허자의 학문이 헛된 것이었음을 풍자하고 있다.
그렇다면 홍대용은 왜 소설의 배경으로 의무려산(醫巫麗山)을 택했을까? 북경 방문길에 들렸던 소설 속 배경인 의무려산은 지리적으로 화이(華夷)의 구분을 짓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가 의무려산에서 무한우주관을 제시한 것은 최종적으로 중국과 오랑캐, 즉 화와 이의 구분을 부정하는데 있었다. 의무려산에 사는 실옹은 상하 및 구분 의식에 쩔어(?) 있는 허자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크고 넓은 하늘은 육합의 구분도 없는데 어찌 위와 아래가 있겠느냐? 네 발은 땅에 떨어져 있는데 네 머리가 하늘에 떨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
허자는 위와 아래의 형세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무엇을 의심하느냐는 투다. 너무나 당연하여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회의... 서양에서는 갈릴레이에 의해 천동설이, 한국에서는 홍대용에 의해 중화주의가 신랄하게 도전받았다.
3. 중심주의를 해체한 세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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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홍대용 사상의 전환점이 된 북경여행에서 돌아와 지은 「을병연행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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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방문을 계기로 홍대용은 기존의 우주관에 회의를 품으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중요한 이론인 지전설과 무한우주관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홍대용의 이론은 금성, 수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행성은 태양 둘레를 돌고 태양과 달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의 체계를 바탕으로 한 우주관에 지전설만을 덧붙인 것이었다. 따라서 홍대용의 지전설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는 “지전설은 송나라 장횡거(張橫渠, 1020-1077)가 그 원리를 조금 밝혀냈으며, 서양 사람도 배에 타고 있으면 배가 나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주행안행설(舟行岸行說)로서 추설해냈다”고 하여 지전설을 서양천문학을 통해서 알게 되었음을 밝혔고, 아울러 이 설이 이미 송대에 제기되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홍대용의 우주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와 같은 지전설이라기보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우주론’이다. “우주의 뭇 별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무한우주론은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론 중국 고대에도 선야설이라 하여 무한의 공간을 상정한 우주론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홍대용처럼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지구로 칠정(태양계)의 중심이라 한다면 옳은 말이지만, 이것이 바로 여러 성계(星界)의 중심이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물에 앉아 하늘 보는 소견이다”라는 홍대용의 우주관은 탈지구중심론이라는, 그 당시로는 실로 대담한 인식론적 대전환이었다.
홍대용의 우주관을 두고 그 이전에 비해 얼마나 과학적으로 진보했고 독창적이었나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가 무한우주론을 주창하게 된 배경이다. 무한우주론을 바탕으로 홍대용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과학만이 아니었다. “지구 세계를 저 우주에 비교한다면 미세한 티끌만큼도 안 되며 저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한다면 십수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라는 그의 발언은 곧 중심주의의 해체를 의미했다. 숭명사대의식과 소중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선 선비들에 대한 질타였던 것이다. 결국 헤아릴 수 없는 별의 세계가 우주에 산재하고 있다는 홍대용의 우주관은 세계 중심이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사상과 화이관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홍대용의 무한우주론에는 과학적 의미를 넘어서 역사적 현실 비판 의식이 담겨져 있다. 근대 과학이 추구한 도전 정신이 현실 비판의식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과언일까?
필자 : 정성희(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 참고문헌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담헌서(湛軒書)』, 민족문화추진회, 2008 박성래, 「홍대용 지전설의 뜻」, 『한국과학사학회지』1, 1979 정성희, 『우리조상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책세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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