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풍습

조상 제례(祭禮)

설레임의 하루 2009. 7. 26. 05:00

*출처:다음블로그- yeongun52    작성자- 필수창       http://blog.naver.com/yeongun52/80009539914

   

 

조상 제례(祭禮): 사망한 부모와 살아있는 자식의 매개 역할

 

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행위의 기본이 되는 생각, 즉 우리나라 사람이 갖고 있는 조상관을 이해해야 한다.

조상은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조상의 죽음은 자손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변형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조상의례를 매개로 사망한 부모는 자식들과 의존성을 유지하고 자식들은 제사를 통하여 효의 의무를 다한다.

조상은 자손의 기억에서 점차로 사라져가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결코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당에서의 차례
특히 조상에 대한 제사는 효를 기초로 한 것으로 유교문화권에서는 효가 최고의 기본윤리가 된다.
따라서 왕은 버릴 수 있어도 어버이는 버릴 수 없다는 말이 생겼으며 효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제사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은혜를 갚는다는 보본(報本)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가족과 인류를 유지하는 기본 틀이 어버이 그리고 할아버지로 올라가는 조상이 있었기 때??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효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물질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해드리는 것이며 또 하나는 어버이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제사로 이어진다.

제사라는 의미가 반드시 부모가 사망했기 때문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살아 있을 때도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상, 즉 부모들은 크게 4단계로 나뉘어 후손들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첫째는 '산 조상' 단계. 과거에는 환갑까지 사는 예가 드물어 환갑 이후는 현실 생활에서 떠나 죽음을 준비하는 비활동 단계로

여겼다.

환갑 때부터 사망까지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공경받는 '산 조상'으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둘째는 사망에서 탈상까지의 단계. 부모가 사망한 후에는 3년 동안 장남의 집에 상청을 마련해놓고상식(上食)도 올리고

생신도 지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은 제일 먼저 상청에 인사를 드린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마치 집안에 살아 계신 어른처럼 대접받았던 것이다.

셋째는 사당에 모셔진 기간 동안의 단계. 사당에 모셔진 기간 동안 1년에 4번 이상 자손으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곧 본인의 기제삿날과 배우자의 기제삿날, 설날과 추석이다.

설날과 추석날 대이동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상이 사당에서 제삿밥을 얻어먹은 기간은 보통 4대, 약 100년 동안 계속된다.

마지막 단계는 1년에 한 번씩 묘를 자손들이 찾아가는 시제이다.

종손으로부터 4대조 이상이 되는 사당의 신주는 묘 옆에 묻히면서 먼 조상이 된다.

이때부터 시제의 대상이 되는데 시제 대상이 된 조상은 1년에 한 번씩, 문중의 자손들이 묘에서 올려주는 제례를 받게 된다.

이 시제는 영원히 계속된다.

 

■ 4대봉사

제사는 주로 네 가지로 나뉘어 치러진다.

조상의 사당을 집안에 모시고 지내는 사당제, 조상에게 철따라 지내는 사시제, 묘에서 지내는 묘제, 사망한 날에 지내는

기제가 있다.
묘제종손을 중심으로 5대조 이상을 받드는 것으로 높은 조상의 묘부터 순서대로 내려오면서 지낸다.

(경북 안동군 문화유씨 문중)

사당은 가묘(家廟)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 지내는 사당제는 벼슬아치나 선비 등 특별히 뼈대있는 집안에서 3, 4대의 조상 위패를 모시고 지내는 것으로 사당이

없는 일반인들은 사당제를 지낼 수 없었다.

사시제는 일반적으로 시제라고도 하는데 계절에 따라 네 번, 즉 설날 한식 추석 동지에 지낸다.

계절에 따라 새로운 음식을 올린다는 뜻도 있어 그 의식이 간단하며 차례(茶禮)라고도 한다.
묘제는 날을 잡아 조상의 묘에서 지내는 제사로, 보통 음력 10월에 지냈다.

시조에서 어버이까지 지내기 때문에 해당되는 직계자손들이 전부 참석했는데 자손이 많은 집은 묘제가 아주 거창했다.

기제는 4대조까지만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삼대 봉사(三代奉祀) 또는 4대 봉사는 일찍이 선조 가운데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 있으면, 후대에 큰 인물이

없더라도 습성화된 의식이 지속된 결과라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국가적 규례를 넘는 과도한 숭조(崇祖)사상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현재 모든 가정에서 4대 봉사를 지내는 것은 자신들이 선비의 지위에 있었음을 내보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대 봉사의 의미는 조상신이 존재하는 기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대 봉사가 지났다고 하여 선조와의 연을 끊는 것은 아니다.

시조나 조상 중에서 공을 세운 분의 제사는 시제를 통해 계속하여 이어나갔고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분은 4대 봉사 전에

한꺼번에 제사를 지내는 묘안도 지켜졌다.

어떤 식으로든 조상과의 연을 계속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례 책임과 재산 상속
제사를 치르려면 많은 자금이 든다.

제사에 들어가는 자금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바로 제사를 잘 치르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요인인데 선조들은 바로 이 문제를 재산 상속으로 해결했다.

즉 조상의 유산으로 가족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바로 종손을 통해서, 즉 종통(宗統)의 자리를 고수하는 제도를 만들어 종족을 거느리거나 이끌어가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 상속의 근본이다.
따라서 종통을 이어받는 장자는 다른 자손보다 재산을 많이 확보하도록 했다.

만일 장자의 후손이 없으면 그 종통이 차순위의 형제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손 중에서 뽑아 종손의 양자를 삼았다.

 

종통이 이와 같이 엄격하게 대를 이었으므로 아무리 종손이 어리더라도 제주는 종손이 되었다.
제주의 일차적인 책임은 장남이 졌고, 차남 이하는 이차적이고 보충적인 책임을 졌다.

이차적인 책임이란 장남과 같은 정도의 책임은 아니지만 조상 제례의 책임을 부분적으로 분담한다는 의미이다.

보충적인 책임이란 장남이 죽었을 때 차남이 장남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장남이 자손 없이 죽었으면 장남의 역할을 하며 장남이 어린 아들을 낳고 죽었을 경우에는 조카가 성장할 때까지 장남의

제사를 지낸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재산 상속이 이루도록 한 것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종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는 선조의 뜻을 받아 사망한 사람이 원하는 것,

바로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에 충실하게 된다.

두번째로는 종통에게 재산을 몰아줌으로써 재산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 제사와 같이 예산이 많이 드는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 성묘
현대인들은 이럴 경우 당연히 장남, 즉 종통을 잇지 못한 차순위 형제들로부터 불만의 요인이
되겠지만 선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순위 형제들도 자신이 성공하여 일가를 얻는다면 자식들이 자신을 따로 제사지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시쳇말로 해서 제삿밥을 얻어먹는 것은 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 후손들로부터 어떻게 평가받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악착같이 자식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자신이 살아서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하더라도 자식들이 성공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들이 죽어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요건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부터 1600년대 중엽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철저하게 아들·딸 구별이 없이 균등하게 재산이 상속되었다.

 

그러나 1600년대 중엽 이후부터 이러한 균분 상속 형태의 비율이 줄어들었으며 자녀의 성별과 출생 순위에 따른 차등상속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례제도의 변동과 제사 방식의 변경에도 기인한다.
고려시대의 상제(喪祭)는 불가의 법을 숭상했기 때문에 매장이 아닌 화장에 의해 유골을 절에
안치하고 불교식 제사의식인

제(齊)를 거행했다.

제사의식도 절에서 대행했기 때문에 제사 목적으로 재산을 아들과 딸, 장남과 차남간의 차등으로 구분할 이유가 많지 않았다.

제사 상속에 있어서도 적자주의에 따른 장자 봉사가 행해지지 않았다. 

부모의 재산을 균분 상속했으므로 부모에 대한 제사도 자녀간의 분할이나 윤회봉사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때만 해도 상제는 유교식의 상제법을 따르면서도 장남만이 제사를 상속하거나 상례를 주관하지 않고 아들과 딸

혹은 외손 등이 모두 상례절차를 주관했다.

제사를 상속하거나 시행하는 경우에도 아들과 딸이 분할하여 각기 담당한 제사를 봉사하게 하거나 그들 사이에 윤회하며

봉사하는 형태를 취했다.

문제는 부모의 생각이다. 부모 측면으로 볼 때 자신의 직계 자손들이야 제사를 잘 지내겠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도 후대의

자손들이 자신을 기리며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이때 도입된 성리학은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장자 단독 봉사로 굳힌다면 과거의 조상들에 대한 제사도 일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확실하게 제사지내줄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일단 사망하면 모든 인연이 사라진다는 불유쾌한 상황을 제사를 통해 영원히 후손들과 인연을 맺고 싶어하는 염원이야말로

인간의 소박한 소망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소망이 부모의 재산을 적장자가 단독으로 상속하거나 차남 이하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상속 지분을 갖는

적장자 우대의 상속제도로 변한 것이다.

 

■ 정성이 담긴 제사

조상의 이미지에 대한 남녀간의 차이는 여자들의 결혼과 무관하지 않다.

결혼한 후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복리는 시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따라 결정되었다.

특히 자식들이 태어나면 바로 그 순간부터 남편 가문의 조상이 되었고, 남계에 의한 제례가 충실히 지켜지는 한 시집에서

다시 조상으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들은 친정집 부모보다

시부모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바로 이 점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조상에 대한 개념이 다소 자유로웠다.

하지만 아들을 낳아야만 그 집안의 조상이 되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간다고 믿었다.
그 점에서 아들이 지는 짐은 제법 무거웠다. 딸은 출가하면 남의 집 식구가 되어 그곳에서 조상이
되지만 아들은 자신의 조상을

모시며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바로 이 점이 후손이 끊어지는 것, 즉 아들이 없는 것을 크게 걱정하는 이유이다.

자손이 없을 경우 혈족에게서 양자를 들여오는 풍습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조상은 무덤에 머물며 제사와 차례 때 종손의 집으로 온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제례를 지낼 때에는 방문을 열어 영혼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다.

또한 자정을 전후하여 제사를 올리는 것은 첫닭이 울기 전이어야 영혼들이 비교적 쉽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사를 치를 때는 반드시 예물을 올리게 되는데,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깊은 만큼이나 최고의 것을

사용하려 한다. 사실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예민한 부분이고 또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준다.

그러나 예의는 물질적인 것 이전에 마음의 세계가 중요하다는 참뜻을 잃지 않는다면 형편에 알맞은 검소한 태도가 더욱

값어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술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널리 습성화된 음식물 중에 하나이지만 크고 작은 의식을 거행할 때 필수적인 예물로 제사에서

특히 중요시된다.

술을 이와 같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에서 지성을 나타낼 정도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술을 만드는 데 지극히 정성을 쏟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이 제사에서 술이 갖는 비중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제사용 술로는 화학주가 아닌 곡주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술이 '지성'의 상징물이었으므로 제사할 때 필수 물품이긴 하지만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물도 대신한다.

그 대신 '맑은 물'을 올릴 때에는 '물'이라 하지 않고 '무술' 또는 '현주(玄酒)'라고 부른다.

현주는 알코올 성분이 없는 의미상의 술일 뿐이다.
한편 오늘날 예물로 흔히 꽃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실 우리 동양의 전통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동양인의 의식 속에는 사람의 기호(嗜好)를 위해 꽃의 생명이 꺾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전통제례에 의한 기제사 지내는 순서◎

비록 친족일지라도 부모 제사 이외에는 정확하게 제삿날을 기억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제주(祭主)는 제삿날이 다가오면 제사에 참여할 친족들에게 두루 연락을 해서 많이 모이도록 한다.

 

기제사의 참석 범위는 그 조상의 직계 후손들을 원칙으로 모두 참석하고 형제나 가까운 친지들도 참석할 수 하는게 좋다.

제주(祭主)나 친족들은 제사 하루전쯤 제소(祭所)주변 청소와 제구와 제기를 내어 깨끗이 닦고 제주(祭酒), 제수(祭水), 제사

집전에 쓰일 용구를 준비하고 지방과 축문도 미리 작성하여 둔다.

 

기제시간

돌아가신 날 자시에 행한다. 자정(12시) 부터 인시(5시)까지 날이 새기 전 새벽에 기제를 올리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바쁜 사회생활은 그것을 지키기가 어려워 가정의례준칙에서 처럼 별세한 날 일몰 후 적당한 시간에

지내게 되었다.

대부분 퇴근후 지내기에 오후 8시나 9시에 지내는 집들이 많다.

간혹 잘못 알고 별세한 전일 오후 7~12시경에 지내는 사람이 있는데 기제는 별세한 날에 지내는 제사이므로 별세한 전일에

지내는 것은 잘못이다.


기제일(忌祭日)과 재계(齋戒)
별세(別世)하신 전일(前日)이 입제일(入齋日)이고 별세(別世)한 날이 기일(忌日)로서 정재일(正齋日)이고 그 다음날이 타재일

(타齋日)이다.

이 삼일간은 재계(齋戒)를 해야한다.

입제일(入齋日)에는 제주(祭主)와 주부(主婦)가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음주(飮酒)를 삼가며

가무(歌舞)를 하지 않고 상가(喪家)의 조문(弔問)도 하지않으며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고인(故人)의 생존시(生存時)를 회상

(回想)하면서 추모(追慕)하는 법이다.

 

기제사 지내는 순서

①영신(迎神): 먼저 대문을 열어 놓고, 제상의 뒤쪽(북족)에 병풍을 치고 젯상을 놓고 제수를 진설한

   다음 지방을 설치하여 재사 준비를 마친다.

   옛 제례에는 출주라 하여 사당에서 신주를 모셔 내오는 의식도 있었다.

②강신(降神): 영혼의 강림을 청하는 의식으로서, 제사드릴 신을 제상으로 강림시키는 절차이다.

   강신이란 신을 제사상으로 강림시켜 신위께서 음식을 드시기를 청한다는 뜻이다.

   강신은 제주 이하 모든 참사자가 참석한 뒤 제주 혼자 신위 앞에 나아가 꿇어 앉아 분향하고

   동집사가 상에 있는 잔을 들어 제주에게 건네주고 잔에 술을 조금 따라 주면, 제주는 두손으로

   잔을 들고 향불 위에서 세번 돌린 다음 모사(茅沙) 그릇에 조금씩 세 번에 나누어 붓고 빈잔을

   집사에게 다시 돌려 주고 일어나서 두 번 절한다.

   그런데 향을 피움은 위에 계신 신을 모시고자 함 이요.

   술을 따르는 것은 아래계신 신을 모시고자 함이다.

③참신(參神):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고인의 신위에 참배하는 절차로서 모든

   참사자가 일제히 두번 절하며, 첫 문안 인사이다.

   남자 제관은 두 번 절하고 여자 제관은 네 번 절한다.

   이는 음양의 이치에 따라 양의 수는 1, 음의 수는 2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산 사람에게는 양의 도를 따르기 때문에 한 번씩만 절하고 죽은 사람에게는 음의 도를 따르기

   때문에 두 번씩 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음의 도에 속하기 때문에 두 번씩 두 번 절하는 것이라 한다.

   미리 제찬을 진설하지 않고 진찬이라 하여 참신 뒤에 제찬을 올리기도 한다.

   진찬 때는 주인이 육, 어, 갱을 올리고 주부가 면, 편, 메을 올린다.신주(神主)인 경우에는 참신을

   먼저하고 지방(紙榜)인 경우에는 강신을 먼저 한다.

④초헌(初獻): 제주가 첫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제주는 고위의 신위부터 차례로 첫잔 드리기를 행한다.

   서면 집사가 먼저 고위의 잔반을 받들어 제주에게 주면 동면 집사가 서향하여 잔에 술을 가득

   붓는다.

   제주는 오른손으로 잔을 들어 향불 위에서 세번 돌리고 모사 그릇에 조금씩 세번 부은 다음

   두손으로 받들어 좌(서면)집사에게 준다.

   좌집사는 잔을 받아 메그릇과 갱그릇 사이의 앞쪽에 놓고 제물 위에 젓가락을 올려 놓는다.

   제주는 두번 절한다. 비위의 잔에도 같은 방법으로 한다.

   과거에는 초헌 때 육적을 즉석에서 화로에 굽고 소금을 발라 젯상에 올렸다 한다.

⑤독축(讀祝): 축문 낭독의 절차로 초헌이 끝나고 참사자가 모두 꿇어앉으면 축관이 옆에 앉아서

   축문을 읽든가 제주가 엄숙한 목소리로 천천히 크게 읽어야 한다.

   축문을 읽는 동안 참사자들은 모두 엎드려 고인을 추모한다.

   축문 읽기가 끝나면 모두 일어나 두 번 절한다.

   옛날에는 독축 뒤에 직계 자손들은 곡을 하였으며, 부모의 기제사는 반드시 곡을 해야 했고 조부

   이상의 조상 제사에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⑥아헌(亞獻): 신위에 두번째 술잔을 올리는 의식으로 원래는 주부가 올린다.

   초헌 때와 같으나 모사에 술을 따르지 않으며, 주부가 잔을 올리고 절할 때는 4배를 한다.

   아헌은 [가례]의 예서에서 모두 주부가 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이는 "제사는 부부가 함께

   한다(夫婦共祭)"는 정신에서 나온 예법이지만 전통적으로 여자가 헌작하는 풍습이 드물었으로

   아헌은 주로 제주 이외의 친족 형제들이 행하였다.

   이때 잔을 올리고 싶은 사람은 올려도 되며 잔을 올린 사람은 절을 두 번 하도록 한다.

⑦종헌(終獻): 세 번째 마지막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다.

   삼헌이라고도 하며 아헌자의 다음 가는 근친자가 아헌 때와 같이 한다.

   잔은 7부쯤 부어서 올리고 재배한다.

⑧첨작(添酌): 유식(侑食)이라고도 하며, 종헌이 끝나고 조금 있다가 제주가 다시 신위 앞으로

   나아가 끓어 앉으면 집사는 술주전자를 들어 종헌 때 7부쯤 따라 올렸던 술잔에 세 번 첨작하여

   술잔을 가득 채우거나, 서집사가 술잔을 내려 축관이나 제주에게 주면 동집사가 줄주전자를 들고

   세번에 나누어 채워주면 다시 축관이나 제주는 그 잔을 집사에게 주고 집사는 원래 위치대로

   술잔을 놓는다.

   근래에는 다른잔에 술을 부어 집사에게 주면 집사는 세번에 나누어 잔에 채우도록 하기도 한다.

⑨계반(啓飯) 삽시정저(揷匙正箸): 첨작이 끝나면 주부가(요즈음은 집사가 함) 메 그릇의 뚜껑을

   열고 숟가락바닥이 동쪽으로 가도록 메 그릇의 중앙에 꽂는다.

   젓가락을 세 번 고른 뒤 어적이나 육적 위에 가지런히 옮겨 놓는다.

   삽시정저가 끝나면 제주는 두 번, 주부는 네 번 절한다.

   가문에 따라 계반을 초헌 때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저를 시접에 바르게 하는 경우도 있으며 저를

   적에 올리는 가문도 있다.

※ 유식(侑食): 영위에게 음식을 권하는 의식으로 첨작과 삽시정저의 두절차를 통틀어 유식이라고

   하는데 집사자가 잔에 첨주한 다음 젯메에 숟가락을 꽂고 젓가락을 시접 위에 올려 놓되, 손잡이

   부분이 서쪽으로 가게 한다.

⑩합문(閤門): 합문이란 조상신이 안심하고 식사를 할 수 있게 사람들이 잠시 피하는 의식이다.

   참사자가 모두 잠시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기다린다.

   대청마루에 제상를 차렸으면 뜰 아래로 내려가 읍한 자세로 3~4분 기다린다.

   단칸방의 경우에는 제자리에 엎드려 몇 분 동안 있다가 축관이 세 번 기침하면 일어선다.

   참사자 이하 남자들은 문의 동편에 서서 서쪽으로 향하고, 주부 이하 여자들은 문의 서편에 서서

   동으로 향하는데 이는 음식을 드시는 조상을 정면으로 향하기가 미안해서이다.

⑪계문(啓門): 합문후 닫았던 문을 여는 절차이다.

   축관이 헛기침을 세 번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참사자가 모두 뒤따라 들어가면 된다.

   합문하지 않았으면 계문철자는 생략된다.

⑫헌다(獻茶): 갱을 내리고 숭늉 또는 제수를 올린 뒤 메 세 술을 떠서 물에 말아 놓고 저를 고른다.

   숟가락은 손잡이가 서쪽으로 가게 걸쳐 놓는다.

   이때 참사자는 모두 머리를 숙이고 잠시 동안 조용히 2, 3분간 궁극하고 있다가 축관이 큰 기침을

   하면 참사자들은 평신한다.

⑬철시복반(撤匙覆飯): 제주는 서쪽을 향하고 축관이 동쪽을 향해서 이성(利成)을 고한 다음

   숭늉그릇에 놓인 수저를 거두고 메 그릇에 뚜껑을 덮는다. 이성을 고하지 않는 가문도 있다.

⑭사신(辭神): 신에 대한 작별인사의 의식이며 고인의 영혼을 전송하는 절차로서 참사자가 신위

   앞에 일제히 두 번 절한 뒤, 지방과 축문을 불사른다. 지방은 축관이 모셔 내온다.

   신주일 때는 사당으로 모신다. 이로써 제사를 올리는 의식 절차는 모두 끝난다.

⑮철상(撤床): 제상 정리의 절차로 제상 위의 모든 제수를 집사가 뒤쪽에서부터 차례로 물린다.

   제사에 사용한 잔, 주전자, 퇴주그릇 등에 있는 술은 모두 병에다 부어 보관하는데, 이것을 복주

   (福酒)라고 한다.

   과일, 채소, 나물, 고기, 기타 음식들은 모두 일반 그릇에 옮겨 담고 제기는 잘 세척하여 보관한다.

 

▶음복(飮福): 음복이란 조상께서 주시는 복된 음식이란 의미로 참사자가 한자리에 앉아 제수를 나누어 먹는데 이를

음복이라 한다. 음복을 끝내기 전에는 제복을 벗거나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

고례에는 준()이라 하여 참사자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웃들에게 제사 음식을 나누어 주고 이웃 어른들을 모셔다가 대접하기도

했다.

제례에 사용되고 있는 "동서(東西)"와 "좌우(左右)"라는 용어에 종종 혼동이 있어 불편함이 있어, 그 개념을 확실히 정립하고자

하며, 제례나 상례에서 적용되고 있는 용어사용에 애매모호함을 배제코자 한다.

 

1. 제례의 "동서(東西)"에 대한 개념
* 제례에서 사용되는 "동서(東西)"는 지리학상의 동서남북(東西南北) 개념과 달리,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는 곳을 무조건

"북(北)"으로 간주한다.
* 제상의 위치가 방의 동서남북 어느 위치에 놓여 있더라도, 항상 신위(神位)가 위치해 있는 쪽을

"북(北)"으로 간주하므로, 신위를 중심으로 보면 좌(左)측이 "동(東)"쪽이 되고, 우(右)측이 "서(西)"

쪽이 되게 된다.
* 따라서 신위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좌우가 뒤 바뀌는 혼동이 일어나게 된다.

2. 제례의 "좌우(左右)"에 대한 개념
* 신위(神位)를 바라보는 사람(예:제주)의 입장에서 보아, 평상시 그대로 왼쪽은 "좌(左)"측이고,

  오른쪽은 "우(右)"측이 된다.

3. "동서(東西)"와 "좌우(左右)"의 개념 정립
* "동서(東西)"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신위(神位)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 "좌우(左右)"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신위(神位)를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 이와같이 하면 "동서" 및 "좌우"의 혼동이 없어지게 된다.
- 위와같이 정립된 개념을 기준으로 실제 제례나 상례에 적용되는 어귀(語句) -

<동서(東西)의 개념 적용 사례>
* 홍동백서(紅東白西) 생동숙서(生東熟西) 어동육서(魚東肉西) 동병서면(東餠西麵) 두동미서

  (頭東尾西) 합동로서(盒東爐西) 서고동비(西高東卑)
<좌우(左右)의 개념 적용 사례>
* 좌포우혜(左脯右醯) 건좌습우(乾左濕右) 반좌갱우(飯左羹右) 남좌여우(男左女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