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지식창 글쓴이-미래영웅 .2011-06-17 00:30 출처 : 뉴스 & 블로그
다른 분들이 훈민정음에서 말하는 중국이란 용어에 대해 궁금해 하기에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훈민정음에서 "나라의 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못 한다"라는 중국은 쥐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가운데 즉 국내를 뜻하는 國中을 뜻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세종대왕 당시에 중국이라는 국호를 쓰는 나라가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이 1446년이고 중국(쥐나민국)이라는 국호는 1911년 짱골라 손문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고구려발해 또다른 후예 청나라를 무너뜨린 후에 생겨난 공식적인 국호로 세종대왕때보다 무려 465년 후의 일입니다.
<오제본기> 제1에 기록된 '제왕소도위중帝王所都爲中 고왈중국故曰中國과 <목천자전>의 수우중국樹于中國, <맹자>의 진양북학우중국陳良北學于中國 등에 기록된 중국中國이라는 글자는 그 나라 내에서 임금이 있는 가운데 장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민족국가개념에 있어서도 쥐나와 미국은 전혀 다릅니다. 미국은 건국초부터 이민을 받아들여 세워진 다민족국을 처음부터 표방한 나라이고, 쥐나는 그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이민족왕조들이 약해진 틈을 노려 세워진 그것도 짱골라 한족만을 위하는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짱골라왕조는 한, 송, 명 3왕조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왕조들은 모두 동이계와 흉노계 그리고 융족계가 건국한 것입니다. 수,당마저도 흉노계 선비족국가들이죠.
과거 짱골라의 한나라는 북쪽 흉노와 동쪽 북부여의 속국이었습니다. 송나라는 흉노계 거란의 요나라와 고구려발해 후예 여진의 금나라의 속국이었으며 끝내는 흉노계 몽골의 원나라에 멸망당합니다. 명나라는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여진(만주)족의 청(후금)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입니다. 짱골라들이 실제 조공을 받을 수 있었던 적은 명나라때 뿐입니다. 청나라 때의 자금성은 원래 고구려 성곽 축조 방식이었는데, 짱골라들이 허물고 쥐나식으로 개축했죠.
고등학생때 국어선생이 하던말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많으므로 내 이를 민망히(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나라 이름이 아니라 중원 즉 나라의 한 가운데,천하(天下)의 중심지(中心地)이며, 中國이란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나라이름으로 사용치 못하도록 1911 년 이후에 나라이름으로 처음 사용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입니다.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입니다)
청나라의 경우 여진족인데 그것은 우리와 뿌리가 아주 비슷한 형제와 같은 만주족들입니다. 어길시 참형에 처하는 봉금정책을 써왔던 민족입니다 나라가 없었으므로 한족의 나라로 해석하는것은 무리가 많다는것입니다 위해 소리글자를 사용것 뿐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피지배층의 백성들 말이 서로 달리 쓰였으므로 이런 취지로 훈민정음을 보다 널리 사용할 이유가 된 겁니다. 편입시키는 개념이죠. 이 때문에 백성들이 그 폐단을 받은지 대개 여러 해입니다. 힘이 있는 자는 많이 점령하고 세력이 없는 자는 적게 얻었습니다. 그 토산(土産)이 있는 비옥한 땅을 다투어 먼저 점령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한 현(縣)의 땅이 혹은 몇 군(郡)의 경계(境界)에 섞여 들어가고, 혹은 몇 군(郡)의 밖으로 끊겨 들어가서, 백성들의 공부(貢賦)·요역(?役)·사송(詞訟)이나 짐바리를 싣고 왕래할 때에 동일한 관부(官府)인데도 몇 군(郡)을 지나고 3, 4식(息) 밖까지 말을 달려가서 반드시 청단(聽斷)하게 됩니다. 동일한 적자(赤子)인데도 수고하고 평안한 것과 고생하고 쉬는 것이 이처럼 현격하게 다르니, 다툼이 힘의 세기에 따라 지역의 강역 크기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날숙하여 일반 백성들은 고생이 심하다는 것이다. 행사하자는 의견인 것입니다 세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약간씩 다른것이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아 지방마다 또는 중앙정부와의 교류시 어려움이 많아서 사용하게 된 것이 한글입니다. 쥐나도 당나라 이전부터 써왔었습니다. 온갖 역사가 쥐나의 것이되는 헤프닝이 될것입니다 중국이라는 국호는 앞으로 안 써주셨으면합니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돌궐은 북방 유라시아 유목민족 가운데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다. 남아 있는 몇 기의 돌궐 비문에 의해 확인되는데, 그 형태가 고대 게르 민족이 사용했던 룬 문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룬체문자’라고도 하지만, 양자간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셈계 아람문자나 고대 소그드 문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일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문자를 가지고 있으리만큼 발달한 사회문화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 돌궐은 제1 제국 때부터 벌써 멀리 비잔틴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비잔틴 역사가 메난토로스가 전하는 비잔틴 사절단의 돌궐 방문기를 보면, 칸이 기거하는 천막은 한마디로 황금과 비단으로 차고 넘친다. 천막 내부는 화려한 비단으로 장식되고 침상이나 의자, 식기류는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 파스파문자 아니라 중국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 등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자음 30자, 모음 8자, 기호 9개로 이뤄진 표음문자다.
훈민정음의 기원으로 몽골의 파스파문자와 신라시대에 들어온 인도의 산스키리트어가 거론되고 있지만 큰 연관성이 없으며, 중국의 전서체도 획의 굵기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다.
한글 연구자인 고려대 정광 명예교수는 “훈민정음의 자형(字形)은 발음기관과 천지인 삼재를 본딴 상형문자”라면서 티베트 문자(서장문자)를 변개해 만든 파스파문자와 차별했다. 자모의 외관상 한글의 초성자와 파스파문자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 ‘ㄱ’, ‘ㄲ’, ‘ㄷ’, ‘ㄹ’ 등 자모와 닮은꼴 글자가 파스파문자 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태생적으로 다른 두 글자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위대한 한글의 우수성
그만큼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어쩌면 한자가 쓰이는 동안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불완전한 문자라는 말이다. 로마자 표기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 유독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거의 완벽한 한글에 비해 로마자는 표현할 수 없는 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수를 써도 한글로 쓴 것을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게 반자음인 W, Y이다. 'ㅐ, ㅒ, ㅚ' 등도 불가능하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재창제 완료하고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반포함.) 그것은 표음 문자이다. 문자로 알고 그 뜻을 읽어내려고 머리가 빠지고 벗겨지고 희어지도록 아둥바둥 애만 태웠다. 연구한 결과, 마침내 이를 다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동그라미가 왕을 뜻한다든지 하여 약간의 표의 문자적 요소도 있긴 있었다. 그 그림을 일일이 외워서 그린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를 대폭 간소화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구약 성경을 기록한 셈족의 문자이다. 그런데 이 두 문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음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중에는 그 발음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호와나 야훼나 문자 상으로는 똑같다. 로마자로 표기하면 둘 다 'YHWH'이다. 대신에 그 발음을 정확히 하려면 굉장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되었다. 늘어 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원동력은 바로 자음에 이은 모음의 발명이었다. 그래서 알파벳의 제일 첫 자와 끝 자를 모음으로 장식했다. 알파벳이란 말도 첫 두 자, 곧 모음 하나와 자음 하나를 일컫는다. 알파베타(Alphabeta)라고 하던 것을 나중에 영어에서 알파벳(Alphabet)이라고 한 것이다. 모음으로 나누어 있는 알파벳(음소 문자)이 그것이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만들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졌다. 득의만면하고 있었는데, 15세기초에 벌써 이런 것을 완벽하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g, k]를 혀가 입천장에 닿는 모양을 본떠서 아예 글자 모양과 비슷하게 [ㄱ, ㅋ] 더 나아가 된소리까지 표현하여 [ㄱ, ㅋ, ㄲ]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아주 간단히 만들 수 있다. 덧보탠 것이었다. 있다. 아래에서 위로 치받치게 되어 있다. 로마자는 풀어쓰기 때문에 척 보고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가 없다. 있게 되어 있다. 간과하고 완성형을 택했기 때문이다. 역시 똑똑한 조상 덕에 간단히 미국의 천재를 바보로 만든 것이다. 응용할 수 있는 24개의 디지털 기호이다. 속기사는 전부 공병우식을 쓰고 있다. 현재 방식으로는 아무리 빨라야 7백 타, 8백 타가 한계이다. 위정자가 서양 흉내내느라고 우리 좋은 것을 다 버렸으니 말이다. 한글 전용을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한글의 이 장점 때문이다. 있어서 표의 문자 구실도 제법 훌륭히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말로 할 때와는 달리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받침에 'ㅍ'을 써서 '잎'이라고 함으로써 척 보면 이것이 나무에 달린 잎이구나, 라고 알게 된다.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한글을 배우면 웬만한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안다. 음성을 나타내되, 시각적인 효과로 뜻글자 구실도 훌륭히 해 내는 것이다. 말뜻을 아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고 바보 학생도 천재가 되어 새로운 말을 척척 만들어낼 수 있다.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 글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그것은 훈민정음 창제와 작곡이다. 말도 아주 직설적이었다. 만약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물어봤던 것이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훈민정음은, 한글은 결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한단 말인가. 한글 재창제하는 것처럼 창의적으로 머리를 쓰면 열흘 놀고 하루 일해도 능히 선진국을 앞설 수 있는 법이다
한글은 쉽습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어렵죠. 그러나 외국어는 한국어만큼이나 어렵습니다.
혹시 알파벳과 영어가 동의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겠죠.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야겠습니다!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대륙에선 통일이 오래되면 갈라지고, 분열이 오래되면 통합됐다. 진시황 통일 이후 2200년간 치세와 난세가 교차했다. 역대 왕조들의 영토는 확장과 수축을 시계추처럼 반복했다. 한송명 3개 한족 왕조의 ‘소(小)중국’이 분열 시대를 겪다가 이민족과 혼혈 왕조가 세운 ‘대(大)중국’으로 바뀌곤 했다.
진(秦)·한 나라는 현대 중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넓이였다. 북방한계선은 만리장성, 서쪽은 실크로드를 겨우 개척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선비족 왕조인 당(唐)은 북방과 서방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송(宋)은 다시 한나라와 비슷한 ‘소중국’으로 돌아갔다. 요(遼), 금(金), 서하(西夏) 이후 등장한 몽골 제국은 ‘대중국’으로 부활했다. 주원장이 세운 명은 ‘소중국’에 머문 반면 만주족의 청은 ‘대중국’을 복원했다. 청나라 멸망 이후 외세 침략과 혁명, 내전 등 수십 년간의 혼란 끝에 어부지리로 한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다 . ‘대중국’ 중에서도 최대 판도를 자랑한 몽골인의 대원(大元)과 만주족의 대청(大淸).대원과 대청은 내륙아시아에서 탄생한 정치세력이 중국을 정복한 다음, 대륙 고유의 정치·경제·문화 역량을 흡수·포용하면서 세계 제국으로 우뚝 섰다.
몽골과 만주족은 또 중국을 둘러싸고 있던 이민족들에 대해 정복·응징·포섭을 통해 거대한 연대를 이뤄냈다. 티베트, 위구르, 남만(南蠻) 등을 묶는 이른바 ‘이민족 연방’을 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대원·대청 제국을 한족의 다른 왕조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이를 ‘중국 왕조’ 중 하나로 당연시하는 것은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성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이적(夷狄)의 제국’이 구축한 외경(外境)을 중화제국의 외경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역사의 실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중국이 비(非)중국에 편입된 것이지 중국이 비중국을 흡수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지금의 간쑤(甘肅)성 일대는 탕구트 족이 세운 독립왕조 서하(西夏·1038~1227)가 지배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중국 정벌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서하에 침입했다. 서하의 군주는 항복하고 군대를 지원했지만 훗날 칭기즈칸이 서아시아 원정에 나설 때에는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서하는 몽골과 동맹을 파기하고 여진족과 연대했다. 서하의 배신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1225년 서하를 철저하고 잔혹하게 말살했다. 정복이나 복속과는 다른 차원의 동맹관계였다.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지시로 모든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특히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팍빠를 종교적인 스승으로 모셨다. 둘이 만나면 팍빠를 윗자리에 앉힐 정도였다. 칸에 즉위한 쿠빌라이는 팍빠를 나라와 황제의 스승으로 선언하고, 대보법왕(大寶法王)에 책봉했다. 즉 세속 정치는 몽골 칸이, 영적인 종교 문제는 티베트 라마교가 맡는 일종의 분업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런 관계는 명나라 시기에 명목적인 조공관계로 이어지다 청 제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부활됐다.
淸제국 영토, 현대 중국의 1.5배
청이 파견한 칙사들은 한인 관료가 아닌 팔기(八旗) 출신 고관들이었다. 같은 조공국이었던 유구·안남에 직급이 낮은 한족 문관을 파견했던 것과 격이 달랐다. 청은 조공 사절에게 베푼 공식 연회 요리에서도 조선 사절, 몽골 부마,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에게는 5등급의 요리를 하사했다. 다른 나라의 사절들보다 한 단계 높은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서로 다른 유전자가 하나의 생명체 안에 공존하는 키메라는 청 제국의 성격과 ‘멋지게’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 설명한다. 다음은 청 제국의 수립 과정이다. 영토를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267년간 지속된 청 제국은 몽골 제국의 대원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초원으로 쫓겨간 것과 달랐다.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만주문자와 팔기제도를 만든 것은 청 제국 건설의 첫 단계였다. 2대 홍타이지는 우선 몽골 제국의 후계자인 내몽골의 차하르 세력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여진(女眞)을 만주(滿洲)로 바꾼 홍타이지는 1636년 후금을 대청(大淸)으로 바꾸면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황제 추대식에 조선의 동참을 요구했다. 인조는 정묘호란 패배 뒤 후금의 한(汗) 홍타이지는 인정했지만, 대청의 황제 홍타이지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획득’에 나서 성공했다. 그는 만주팔기·팔기몽고·팔기한군(漢軍)으로 이뤄진 만·몽·한의 제국을 세우고 명나라와의 결전을 시작했다. 키메라의 근간이자 머리에 해당하는 만주·몽골 유전자가 완성된 것이다. 조선도 여기에 속했다. 명나라에 앞서 대청의 우익인 몽골과 함께 제국의 좌익에 편입된 것이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황제(숭정제)가 자살한 것이다. 도르곤이 지휘하는 팔기군은 주저 없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장악했다. 그해 10월 순치제는 자금성에서 이미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로 즉위한다. 이제 키메라의 몸통, 즉 한족 유전자를 결합한 것이다. 그 결과 키메라의 팔 다리에 해당하는 번부(藩部)가 완성됐다. 이들 지역은 이민족을 관리하는 이번원(理藩院)이라는 별도 행정조직을 통해 다스렸다. 청나라 황제는 ‘소중국’ 한족의 세상에서는 수명천자, 몽골 유목민에게는 대칸, 티베트 세계에서는 문수보살(불법의 수호자) 황제, 위구르의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 만주 기인(旗人)들에게는 누르하치의 계승자로 비춰졌다. 몽골 제국과 명 제국, 즉 이민족과 한족을 아우르는 ‘듀얼 엠파이어’가 대청제국의 본질이었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쥐나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입니다. 그것이 공표된 것은 1905년 일본에서 쥐나혁명동맹회(中國革沒盟會)를 결성했을 때입니다. 동맹회는 창립 선언에서 ‘만주족 축출(?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으 며,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습니다. 쥐나공산국이 탄생할때 모택동이 약속한게 바로 소수민족독립이었습니다. 그래서 쥐나공의 성립후 자치구가 등장하죠. 50년만에 나머지 소수민족들 4~50%가 우주로 이민갔습니까? 아니죠. 무늬만 한족입니다. 저기 상해, 절강성같은 잘 사는 연해 동네에서도 부르짖는 겁니다. 쥐나가 제일 처음 분열하는 곳은 소수민족자치구가 아니라 홍콩, 상해, 심천, 광주 같은 잘사는 지역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하죠. 심각한 민족 갈등이 내재하고 있죠. 주류를 형성하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쥐나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인종과 문화가 부각되고 있으며 정치적 환경과 경기침체로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2009년 6월 광둥의 장난감 공장에서 두 명의 위구르 노동자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조성된 신장 위구르의 불안은 7월 5일 15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소요 사태로 확대됐죠. 그러나 현재 쥐나의 민족갈등은 ‘공식적인’ 소수민족들만이 아닌 문제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죠. 쓰촨(四川)성과 광둥성, 상하이, 후난(湖南)성 사람들이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 7월 뉴욕타임스는 1면에 신장 위구르 소요 사태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한족 부부의 사진을 싣고 쥐나 정부가 정책적으로 이 지역에 이주시킨 한족의 비율이 지난 수십 년간 40%대가 됐다며 토박이 위구르인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구소련이 인종적 민족적 차이로 인해 분리됐듯이 쥐나도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심차게 준비한 60년의 ‘조화로운 리더십’ 행사가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향후 민족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죠. 92%의 점유율을 보이는 한(漢)족은 베이징 북쪽 일대부터 남쪽의 광둥성에 이르는 지역에 대부분 거주합니다. 사실 92% 한족이란 것도 실제로는 허구라는 것이 유전분석으로 밝혀졌죠. 청나라 말기인 1911년 국민당 지도자 쑨원(孫文)은 쥐나가 국가적 민족으로 통합되지 않아 강성대국이 되지 않았다면서 ‘삼민주의’를 주창했죠. 그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그리고 위구르와 카자흐가 포함된 후이족 등 이른바‘중국의 다섯 사람들’을 내세웠습니다.
몽골과 돌궐, 티베트는 쥐나 한족의 마지막 왕조인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만 해도 지금보다 영토가 3배나 넓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소수계들의 언어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같은 민족인 허구의 한족만 해도 만다린과 우, 웨, 시앙, 하카, 간, 남부 민, 북부 민 등 8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정도입니다. 쥐나 언어학자인 Y.R. 차오 씨는 “광둥어와 만다린어는 영어와 화란어 혹은 불어와 이탈리아어만큼 다르다”고 비유했습니다. 만다린어 교육을 시켜야 하고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다른 언어들이 쓰이고 있죠. (雲南) 성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신장은 쥐나의 6분의 1에 달하고 티베트는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9100만 명)로 높아졌습니다. 3개의 자치구를 갖고 있지만 한족의 소수계로 편입시킨 만주족은 같은 기간 430만 명에서 128% 증가한 980만 명이 됐습니다. 이는 높은 출산율 외에도 출신 민족을 한족에서 바꾼 결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른 종족 간 결혼을 할 경우 이들 자녀의 등록민족 신고는 만 18세에 결정할 수 있죠. 쥐나 당국이 인구 억제를 위해 강력 추진한 한 자녀 정책을 소수계는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적용받지 않고 세제 혜택과 이중언어 사용을 통한 공직 기회의 확대, 토착 종교, 문화 활동 보장 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식적이라 할 지라도... 퍼져 있죠. 또한 소수계의 의복과 문화 예술이 쥐나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고 있?니다. 현재 베이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 중의 하나는 티베트식 체인점 ‘마케-아미’죠. 이곳에 가면 부유층이 티베트의 전통 음악과 공연을 감상하면서 미모의 여종업원의 시중을 받으며 양고기 바비큐인 ‘야크 카봅’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코미디언들은 상하이 말투와 스타일로 교양과 사업 안목이 부족한 북부 사람들을 조롱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날로 높아지는 광둥성 사람들의 자각은 하카족과 남부 푸젠민, 산터우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지역의 경제 발전과 북쪽 사람들로부터 당한 오랜 구속에 대한 반감은 공통적인 현상이죠. 있습니다. 오늘날 북미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차이나타운 대부분은 바로 이들 남부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것들이죠.
보고 있습니다. 국영 미디어들이 신장 자치구의 소요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전달하고 티베트의 뉴스들을 은폐하는 것이 ‘허구의 짱골라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의도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특히 남부와 항구 등 중부와 북서부보다 경제발전이 앞선 지역들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확대되고 있죠. 그 위협은 과거 중원 왕조를 종식시킨 적도 있는 남부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월하고 외국에서 교육받았으며 화교의 지원을 받는 그들이....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힙니다. 현재 쥐나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이죠. 민족차별에 의한 압력이 사회에 암묵적으로 만연되어 있죠. 한족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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