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풍습

세종때 중국이 있었나요?

설레임의 하루 2011. 9. 3. 02:25

*다음 지식창 글쓴이-미래영웅 | .2011-06-17 00:30 | 출처 : 뉴스 & 블로그

 

 

 

 

다른 분들이 훈민정음에서 말하는 중국이란 용어에 대해 궁금해 하기에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훈민정음에서 "나라의 말 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못 한다"라는 중국은 쥐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 가운데 즉 국내를 뜻하는 國中을 뜻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세종대왕 당시에 중국이라는 국호를 쓰는 나라가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이 1446년이고 중국(쥐나민국)이라는 국호는 1911년 짱골라 손문이 신해혁명을 일으켜  

고구려발해 또다른 후예 청나라를 무너뜨린 후에 생겨난 공식적인 국호로 세종대왕때보다 무려 465년 후의 일입니다.

 

<오제본기> 제1에 기록된 '제왕소도위중帝王所都爲中 고왈중국故曰中國과 <목천자전>의 수우중국樹于中國, <맹자>의

진양북학우중국陳良北學于中國 등에 기록된 중국中國이라는 글자는 그 나라 내에서 임금이 있는 가운데 장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민족국가개념에 있어서도 쥐나와 미국은 전혀 다릅니다.

미국은 건국초부터 이민을 받아들여 세워진 다민족국을 처음부터 표방한 나라이고, 쥐나는 그 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이민족왕조들이 약해진 틈을 노려 세워진 그것도 짱골라 한족만을 위하는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짱골라왕조는 한, 송, 명  3왕조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왕조들은 모두 동이계와 흉노계 그리고 융족계가 건국한 것입니다.

수,당마저도 흉노계 선비족국가들이죠.

 

과거 짱골라의 한나라는 북쪽 흉노와 동쪽 북부여의 속국이었습니다.

송나라는 흉노계 거란의 요나라와 고구려발해 후예 여진의 금나라의 속국이었으며 끝내는 흉노계 몽골의 원나라에 멸망당합니다.

 명나라는 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여진(만주)족의 청(후금)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입니다.

짱골라들이 실제 조공을 받을 수 있었던 적은 명나라때 뿐입니다.

 청나라 때의 자금성은 원래 고구려 성곽 축조 방식이었는데, 짱골라들이 허물고 쥐나식으로 개축했죠.

 

고등학생때 국어선생이 하던말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훈민정음 서문을 배우던 그때

"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使於日用矣”

해석을 이렇게 하더이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더불어 서로 통하지 않으매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종래는 그 뜻을 얻지 못하는자가

많으므로 내 이를 민망히(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히어 일용케 함이라.
이렇게 해석해놓고 보면 꼭 쥐나의 변방 제후국정도로 밖에 안보이더이다 이때 부터 저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엄청난 오류를 가지고 있음을 밝힙니다

현 中國측의 사전을 보면
"中國이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중원 즉 나라의 한 가운데,천하(天下)의 중심지(中心地)이며, 中國이란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서

나라이름으로 사용치 못하도록 1911 년 이후에 나라이름으로 처음 사용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 당시 쑨원이 쥐나인민공화국으로 이름을 만든것을 줄여서 중국이라 부르는것입니다
그럼 그 이전에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나요?
물론 없습니다 그럼 그 이전 역사서에 나오는 중국이라는 지명을 왜 한족의 나라들로 해석을 하는 걸까요????
분명 중원대륙의 나라들은 당, 원, 명, 청 이라는 국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짱골라 한족인 쥐나의 나라를 중국으로 불렀다고 한다면 또 하나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한족은 자신의 왕조가 나라를 세운게 몇 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짱골라 한족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뿐입니다.

복희, 신농, 공손헌원, 요임금, 순임금 등 삼황오제 모두 동이족입니다.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국가죠.


(+고구려,발해의 백성이었던 말갈족이 이후에 여진족으로 불리고 다시 만주족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같은 민족입니다. 시대에 따라 달리 부른 것입니다)

 

청나라의 경우 여진족인데 그것은 우리와 뿌리가 아주 비슷한 형제와 같은 만주족들입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백두산을 영산으로 생각하고 더러운 한족은 절대 만주를 비롯 백두산 근처의 지역으로는 출입을 통제하고

어길시 참형에 처하는 봉금정책을 써왔던 민족입니다
그러한 청나라가 자신의 국호 청을 버리고 중국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볼수없으며 1900년이전에는 중국이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가 없었으므로 한족의 나라로 해석하는것은 무리가 많다는것입니다

그렇다면 中國이라는 단어는 1911년부터 나라 이름으로 쓰인 말인데 훈민정음에 나온 단어는 뭐란말인가???
그 당시 쥐나의 나라는 명(明)나라 였으며 그럼 훈민정음에 나오는 중국을 명나라로 보고 해석을 다시 해봅시다.

대륙이 명이며 한족의 중국이고 한반도가 조선이라면 조선의 말이 대륙의 중국 즉 명나라의 말과 다르므로 백성들이 의사소통에 큰 불편함이 있음으로 이로 인해 한글을 만들었다?????
논 갈고 밭 갈던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 명나라와 소통되지 않음이 뭐가 그리 불편해서 문자까지 창조햇을까요.
상식적으로나 실제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조선의 말과 중국 즉 명나라의 말이 다른것하고 조선 백성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 하고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것일가요?

일반 백성이 명나라놈과 소통할일도 전혀 없을 거고 조선내에서는 백성은 한자를 몰라도 말은 분명히 있으므로 이를 나타내기

위해 소리글자를 사용것 뿐입니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을 칭송하며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는 입장에 서서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민정음 서문에 나오는 듕국(中國)이라는 지문은
"나라의 말들이 中國(중앙지방,나라의중심)과 달라 문자가 달라 서로 통하지 않으매....."라고 해석하는것이 옳은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즉 일반백성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명나라 운운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중국은 황제 계신곳 바로 세종이 있는곳을 말하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정권을 잡은 후조선왕조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백성들 말이 서로 달리 쓰였으므로 이런 취지로 훈민정음을 보다 널리 사용할 이유가 된 겁니다.

그때 당시 이런 기록까지 있었습니다

당시 전남 순천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패륜적 사건이 보고된다.
그래서 삼강행실도를 간행한다.
그런데 일반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공주에게 부탁한다.
○○공주는 옛날의 어떤 글자를 참고하여 정리한다.

또하나 우리가 배우는 한자랑 그때 당시의 한자는 음과 뜻이 약간씩 틀렸기에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 입니다.
왜 중국을 중앙지방이라고 해석을 하냐하면 바로 國이라는 단어때문입니다.
지금은 저 단어가 나라를 가르키지만 예전의 역사는 성(城)정도 크기나 땅(地)의 의미로 봤기 때문입니다.
근세조선 초기까지도 사병을 가지고 있는 성읍국가였기때문입니다.
그러한 성들이 모여서 한개의 커다란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보시면 됩니다. 수십개의 성이 있고 그성을 빼앗아서 제후국으로 삼고 자신의 나라안에

편입시키는 개념이죠.

근세조선이라는 나라를 이해할수있게끔 지문하나를 참고로 올리겠습니다

( 문종실록.원년)
중추원사(中樞院使) 안숭선(安崇善)이 상서(上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러 도의 군(郡)·현(縣)의 땅이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하여 강역(疆域)이 바르지 아니하고 견아상입(犬牙相入)하여서

이 때문에 백성들이 그 폐단을 받은지 대개 여러 해입니다.
우리 나라 군(郡)·현(縣)의 땅은 본래 정한 제도가 없어서 처음에 세울 때 향리 품관(鄕吏品官)이 서로 다투어 빼앗았으므로,

힘이 있는 자는 많이 점령하고 세력이 없는 자는 적게 얻었습니다.

그 토산(土産)이 있는 비옥한 땅을 다투어 먼저 점령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한 현(縣)의 땅이 혹은 몇 군(郡)의 경계(境界)에

섞여 들어가고, 혹은 몇 군(郡)의 밖으로 끊겨 들어가서, 백성들의 공부(貢賦)·요역(?役)·사송(詞訟)이나 짐바리를 싣고 왕래할

때에 동일한 관부(官府)인데도 몇 군(郡)을 지나고 3, 4식(息) 밖까지 말을 달려가서 반드시 청단(聽斷)하게 됩니다.
부서(簿書)·기회(期會)할 즈음이나 차임(差任)·추징(追徵)할 때에 백성들을 많이 편달(鞭撻)하고 아전[吏]이 침탈을 행하므로,

동일한 적자(赤子)인데도 수고하고 평안한 것과 고생하고 쉬는 것이 이처럼 현격하게 다르니,
하나의 봉강(封疆)과 하나의 지역(地域)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병폐되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위의 내용으로 중앙에서 행정구역을 나눈 것이 아니라 지방세력이 서로 전쟁을 하여 강역 크기를 결정한 것이기에 지방 세력의

다툼이 힘의 세기에 따라 지역의 강역 크기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힘이 있는 자는 많이 점령하고, 토산(土産)이 있는 비옥한 땅을 다투어 먼저 점령하다보니 지역의 경계가 개 이빨처럼 들숙

날숙하여 일반 백성들은 고생이 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정부에서 이러한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지역경계를 바로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자는 의견인 것입니다

근세조선 초기 지방정부에 중앙조정의 힘이 아직 미치지 않았을 때 지방정부는 나름대로 그들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지방에서도 서로 다툼을 하여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그들의 강역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 나중에 지방정부는 중앙정부(中國)에 그 강역을 봉토받으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지역도 있었겠지만... 근세조선은 완전한 중앙집권이 되지않은 나라이며 지방마다 그

세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개의 나라임에도 경계가 다르고 전쟁까지 하는 연방국가라는것을 알수있습니다.
그 연방마다의 언어가 중앙정부와 잘 맞지않고 백성들이 잘못된 언문으로 인해 율법을 잘못 이해해서 큰 고초를 겪고 언문이

약간씩 다른것이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아 지방마다 또는 중앙정부와의 교류시 어려움이 많아서 사용하게 된 것이 한글입니다.

우리의 삼국시대(원래는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나 열국시대라 부르는게 옳음)부터 중국이라는 말을 우리 사서에 써왔으며

쥐나도 당나라 이전부터 써왔었습니다.
그렇다면 온갖 사서에 나오는 수없이 나오는 중국이라는 단어를 쥐나의 한족국가로 해석을 한다면 역사가 뒤죽박죽이되고

온갖 역사가 쥐나의 것이되는 헤프닝이 될것입니다

탐원공정, 동북공정은 단지 고구려의 역사만을 노리는것이 아님을 아시고 그들의 국호 또한 제대로 이해하고 불러야겠습니다
앞으로는 그들의 국호이면서 세계인이 부르는 china(쥐나)라는 단어를 써주시고 우리 스스로를 동쪽의 오랑캐라 칭하는

중국이라는 국호는 앞으로 안 써주셨으면합니다.

원래 지나支那란 진시황의 진나라 진(秦)’의 음 [chi’n]이 전와(轉訛)하여 서방 제국에 치나(Cina) ·틴(Thin)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지나支那란 용어에는 배달 한겨레의 갈래민족 지류란 뜻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울란바토르 남쪽 50㎞ 지점에 있는 제2 돌궐제국 시대의 톤육쿡비의 남비.

 

돌궐은 북방 유라시아 유목민족 가운데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다. 남아 있는 몇 기의 돌궐 비문에 의해 확인되는데, 그 형태가 고대 게르 민족이 사용했던 룬 문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룬체문자’라고도 하지만, 양자간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셈계 아람문자나 고대 소그드 문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일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문자를 가지고 있으리만큼 발달한 사회문화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한 돌궐은 제1 제국 때부터 벌써 멀리 비잔틴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비잔틴 역사가 메난토로스가 전하는 비잔틴 사절단의 돌궐 방문기를 보면, 칸이 기거하는 천막은 한마디로 황금과 비단으로 차고 넘친다. 천막 내부는 화려한 비단으로 장식되고 침상이나 의자, 식기류는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 파스파문자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아 티베트 출신 승려 파스파(1235~1280)가 만든 몽골어 문자. 몽골어뿐

아니라 중국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 등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자음 30자, 모음 8자, 기호 9개로 이뤄진 표음문자다.

 

위: 파스파 문자의 /k, t, p, s, l/과 한글의 /k, t, p, ts, l/의 비교
아래: 파스파 문자의 /h/(왼쪽)에서 비롯된 /w, v, f/와 한글의 /w, v, f/

 

훈민정음의 기원으로 몽골의 파스파문자와 신라시대에 들어온 인도의 산스키리트어가 거론되고 있지만 큰 연관성이 없으며,

중국의 전서체도 획의 굵기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다.

 

한글 연구자인 고려대 정광 명예교수는 “훈민정음의 자형(字形)은 발음기관과 천지인 삼재를 본딴 상형문자”라면서 티베트

문자(서장문자)를 변개해 만든 파스파문자와 차별했다.

자모의 외관상 한글의 초성자와 파스파문자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 ‘ㄱ’, ‘ㄲ’, ‘ㄷ’, ‘ㄹ’ 등 자모와 닮은꼴 글자가 파스파문자

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태생적으로 다른 두 글자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위대한 한글의 우수성


전세계 언어학자치고 이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한글은 과연 다른 문자와 비교하여 얼마나 우수한 문자일까, 위대한 문자일까?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는 문자는 로마자와 한자인데, 이것들은 각기 3천년 이상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한자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어쩌면 한자가 쓰이는 동안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불완전한 문자라는 말이다.
 
 로마자가 불완전한 것도 두말할 필요 없다.

로마자 표기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 유독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거의 완벽한 한글에

비해 로마자는 표현할 수 없는 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수를 써도 한글로 쓴 것을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한글이 로마자보다 시원찮은 문자라면 오히려 한 번 정해진 로마자 표기에 모두들 감탄하기 바빠서 딴죽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자가 지닌 결정적인 약점은 모음이다. A, E, I, O, U 다섯 글자밖에 없다.

이를 보완하는 게 반자음인 W, Y이다.
그러니 한글로는 간단히 표시되는 'ㅓ, ㅕ, ㅡ, ㅢ' 등은 원천적으로 표기 불가능하다.

 'ㅐ, ㅒ, ㅚ' 등도 불가능하다.
반면에 한글에는 모음이 무려 10개나 되는데다가 이를 응용하면 얼마든지 이중 모음을 더 만들어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모음을 발견하기까지 무려 3천년이 걸렸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이를 불과 30년도 안 되어 완벽하게 옛글을 재창제하셨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재창제 완료하고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반포함.)
 
 로마자는 멀리 이집트로 그 기원이 올라간다. 아직도 이집트 글자를 상형문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아니다.

그것은 표음 문자이다.
이를 밝혀낸 사람이 바로 로제타 돌을 해독한 저 유명한 언어 천재, 16살에 대학 교수가 된 샹폴리옹(Champollion)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가져온 로제타 지역의 괴상한 돌을 그 이전 사람은 모두 그림을 보고 추호도 의심없이 상형

문자로 알고 그 뜻을 읽어내려고 머리가 빠지고 벗겨지고 희어지도록 아둥바둥 애만 태웠다.
 
 샹폴리옹은 그러나 그 아래 쓰인 그리스 문자에 힌트를 얻어 그것이 상형 문자가 아닌 표음 문자라는 과감한 가정을 하고

연구한 결과, 마침내 이를 다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동그라미가 왕을 뜻한다든지 하여 약간의 표의 문자적 요소도

있긴 있었다.
 
 문제는 이 이집트 문자가 너무 복잡했다는 데 있었다.

그 그림을 일일이 외워서 그린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를 아주 간단히 바꾼 인종이 나왔다.
그가 바로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나와 지중해를 휘어잡아 곳곳에 식민 도시를 건설한 페니키아인이다.
그들이 건설한 도시로 제일 유명한 게 바로 한니발의 카르타고이다.
 
 이들 페니키아인들은 상업과 군사 중심의 인종이라서 복잡한 문자는 영 생리에 안 맞았다.

그래서 이를 대폭 간소화한 것이다.
거의 그림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추상화한 문자를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것이 구약 성경을 기록한 셈족의 문자이다.
 이것도 이집트 문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다가 현재는 야훼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 이름을 입으로 감히 발음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발음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호와나 야훼나 문자 상으로는 똑같다. 로마자로 표기하면 둘 다 'YHWH'이다.
사실 음운 현상에서 모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하지만 자음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대로 사람들은 이런 문자를 큰 불편함 없이 쓸 수 있었다.

대신에 그 발음을 정확히 하려면 굉장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보통 머리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모음을 발명하고 또 글자 모양도 더욱 간단하고 아름답게 만든 인종이 바로 저 유명한 그리스인이다.
이들 때문에 비로소 문자가 소리나는 대로 기록할 수 있었고 보통 사람도 누구나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건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다.
말은 어차피 누구나 아는 일이고 이제 이를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 익히는 데 허비하는 시간 대신 생각하는 시간에 투자함으로써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폭발적으로

늘어 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남한 정도 되는 그리스가 그 후 얼마나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는지는 삼척 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 원동력은 바로 자음에 이은 모음의 발명이었다.
 
 이것은 후에 아라비아 문자가 발명됨으로써 수학적 지식에 날개를 달아 주었던 것과 유사한 엄청난 일이었다.
여담이지만, 그리스에서 나온 영어 단어 rational(합리적인)은 원래 구구단을 욀 수 있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만큼 문자로 기록한 구구단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 숫자로 기록해 버리면 천치 아닌 한 누구나 몇 대 회초리만 맞으면 초등학교 2학년이라도 외울 수 있다.
 
 그리스인은 이 모음을 발명한 게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알파벳의 제일 첫 자와 끝 자를 모음으로 장식했다.
그게 바로 알파(A)와 오메가(Ω)이다. 각각 'ㅏ', 'ㅗ' 발음이다.

알파벳이란 말도 첫 두 자, 곧 모음 하나와 자음 하나를 일컫는다.
로마자로 말하면 에이비(AB)나 마찬가지이다.

알파베타(Alphabeta)라고 하던 것을 나중에 영어에서 알파벳(Alphabet)이라고 한 것이다.
 
 표음 문자는 크게 셋으로 구분되는데,
페니키아문자 같은 자음만으로 된 것, 일본의 가나와 같은 자음과 모음을 함께 발음하는 음절 문자, 로마자나 한글 같이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어 있는 알파벳(음소 문자)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음소 문자가 가장 발달한 것임을 두말할 필요 없다.
만약 음절 문자로 표현하게 되면 우리 나라같이 음이 다양한 말은 최소한 3천 자가 필요하다.
이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소리를 자음과 모음으로 구별하여 적는 데, 인류는 무려 3천년이 걸렸던 것이다.


 한글의 위대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몇 개만 더 들자.
  소리와 발음 기관의 완벽한 연관성이다. 로마자는 소리와 문자는 전혀 별개이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이집트에서 예를 들면 '소'할 때 'ㅅ' 소리가 나니까 '소'를 그려 놓고 이를 'ㅅ'이라고 하자라는 식이었다.
이것이 말이 다른 페니키아, 그리스로, 로마로 가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그런데 1940년 영주의 희방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은 발음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졌다.
이것은 세계 언어학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서양에서 음성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겨우 [d, t], [b, p], [s, z], [v, f], [g, k] 등을 짝지어 유성음 무성음을 구별해 놓고

득의만면하고 있었는데, 15세기초에 벌써 이런 것을 완벽하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g, k]를 혀가 입천장에 닿는 모양을

본떠서 아예 글자 모양과 비슷하게 [ㄱ, ㅋ] 더 나아가 된소리까지 표현하여 [ㄱ, ㅋ, ㄲ]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ㅋ, ㅌ, ㅍ, ㅎ]에서 보듯이 기본자 [ㄱ, ㄷ, ㅁ, ㅇ]에서 격음일 경우에 힘이 더 드는 걸 감안하여 줄을 한 두 개 더 그었던

것이다.
 
 이 원리를 응용하여 한글을 가르치면(이런 교재가 빨리 나오기 바란다.

마음만 먹으면 아주 간단히 만들 수 있다.
일주일 이내에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한글은 정말 배우기 쉽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머리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어떤 외국인에게도 금방 가르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다가 새로운 것을 연관시키면 아주 쉽게 배우고 잊어 버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음은 더욱 경이롭다. 천지인과 발음 기관을 같이 본떴다.
하늘은 둥그니까 간단히 아래 아 [·], 땅은 평평하니까 [ㅡ], 사람은 서 있으니까, [ㅣ],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할 수가 없다.
실지로 발음을 해 보면 전세계의 모든 발음이 [·]할 때는 입이 둥글게 크게 벌어진다.
[ㅡ]는 입이 옆으로 벌어지면서 혀가 평평해진다. [ㅣ]는 혀가 앞으로 내밀어지면서 세워진다.
 
 여기서 각각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등이 나오는데, 물론 처음에는 [ㅣ, ㅡ]에 앞 뒤 또는 위 아래에 '아래 아'자를

덧보탠 것이었다.
이것도 경이로운 것이 세계 모든 발음이 [ㅏ] 발음을 할 때는 반드시 숨을 내쉬게 되어 있고,[ㅓ]할 때는 숨을 들이쉬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 밖과 안에 '점'을 찍은 것이다. [ㅗ, 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ㅗ]는 반드시 아래로 내리쉬고, [ㅜ]는

아래에서 위로 치받치게 되어 있다.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다. 한글은 누가 보아도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 있다.
왜? 모음은 반드시 가운데, 또는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자는 풀어쓰기 때문에 척 보고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가 없다.
 한글은 소리나는 단위가 음절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그대로 활용하여 한 자 한 자에 자모를 붙여 놓아 소리 단위를 금방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로마자는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음절 구분을 못한다. 한글은 바보라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한글을 아는 사람은 바보라도 로마자 아는 천재와 같은 급이 된다는 말이다.
음소 문자이면서 음절 문자의 장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가 나오면서 다시 위력을 떨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직 한글에서 뒤지는 이유는 바로 한글의 24자가 하나의 디지털로서 무한한 조합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완성형을 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찬진의 한글은 조합형을 택했던 것이다.

역시 똑똑한 조상 덕에 간단히 미국의 천재를 바보로 만든 것이다.
 
 한국 정부가 완성형을 표준으로 삼은 일은 정말 개탄스런 일이다.
디지털이란 것도 기껏해야 [0]과 [1]이라는 두 문자를 이용한 이진법을 무한히 연결하는 것인데, 한글은 그 자체가 무한히

응용할 수 있는 24개의 디지털 기호이다.
지금은 겨우 워드프로세서에 응용하는 정도이지만, 이를 잘 응용하면 엄청나게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이 이렇게 자음과 모음을 확실히 구별하면서도 음절 단위로 쓰게 됨으로써 정보화 시대에 또 하나의 경이적인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병우식 자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바로 과학적인 한글의 장점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현재 널리 보급된 것과는 달리 왼손은 초성을 치고 오른손은 중성과 종성을 동시에 치는 원리이다.
한 글자를 한 번에 치는 방식이다. 그러면 아무리 손가락이 굳은 사람도 1분에 쉽게 3백 타 이상을 친다. 
 
무려 1분에 1300타, 1400타까지 가능하다.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쓸 수 있다.

속기사는 전부 공병우식을 쓰고 있다.
속도가 생명인 정보화 시대에 이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리석은 위정자 때문에 공병우씨가 그렇게 평생을 애썼는데도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았다.
2년 전인가 삼성에서 공병우식 자판을 만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현재 방식으로는 아무리 빨라야 7백 타, 8백 타가 한계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대왕은 한국의 바보도 외국의 천재와 비슷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서양 바보들에게 배워서 도리어 바보가 된

위정자가 서양 흉내내느라고 우리 좋은 것을 다 버렸으니 말이다.
 
 한글의 위대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표음 문자이면서 표의 문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 전용을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한글의 이 장점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글은 음절 단위로 쓰기 때문에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음절 문자의 장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어원을 밝혀 적을 수

있어서 표의 문자 구실도 제법 훌륭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말로 구별해서 설명하기로 하자.
 
 우리말 -- 훈민정음 해례에서 종성부용초성법을 택해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조선 중기의 8종성법에서 한글학회에서 이를 다시 살린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뭇잎'-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나문닙'이라고 적는다고 해 보자.

그러면 도대체 말로 할 때와는 달리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어원을 밝혀 '나무'에다가 관형격 조사 '의'에 해당하는 사이시옷 'ㅅ' 거기다가 주둥아리 입이 아니라

받침에 'ㅍ'을 써서 '잎'이라고 함으로써 척 보면 이것이 나무에 달린 잎이구나, 라고 알게 된다.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한글을 배우면 웬만한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안다.
 
 '이것을'-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이거슬'로 적는다고 해 보자.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것을'은 '이것'과 '을'을 합한 것임을 아주 간단히 나타낸다. 뜻이 금방 머리가 들어오게 되어 있다.
 
 '있다'-이것을 '이따'라고 적는다고 해 보자. 이것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한글의 이런 장점은 뜻글자인 한자도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음성을 나타내되, 시각적인 효과로 뜻글자 구실도 훌륭히 해 내는 것이다.
 
 한자말--이것도 아주 잘 나타낸다.
 
 '천리만리'-이것을 '철리말리'라고 쓴다고 해 보자.
그러면 말할 때와는 달리 도대체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가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 외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천리만리'라고 쓰면 초등학생도 '천 명, 만 명', '천 개 만 개' '천 원 만 원'의 '천, 만'이란 걸 알 수 있다.
선생님은 이런 걸 좀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한자까지 가르쳐 주면 더 좋지만, 그에 앞서 바보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런 걸 가르쳐 주면 설령 한자를 모른다고 해도

말뜻을 아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고 바보 학생도 천재가 되어 새로운 말을 척척 만들어낼 수 있다.
 
 대신 천재, 천사, 천국, 천치, 천성 등의 '천'은 '하늘, 타고난'의 뜻이 있다는 것도 꼭 알려 주어야 한다.
물론 한자를 곁들이면 더욱 좋고. 그러나 이를 꼭 한자를 병기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정도만 가르쳐 주면 아주 정확한 언어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가 어느 정도 되는 학생들은 한자를, 한문을 꼭 가르쳐서 조상들이 한문으로 남긴 엄청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한글은 바보를 보통 사람으로 보통 사람을 천재로 만드는 경이의 문자이다.
 
 한글의 장점은 연구하면 할수록 계속 쏟아져 나올 게 틀림없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 글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한글을 재창제한 세종대왕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첫째, 세종대왕은 두 가지만 스스로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훈민정음 창제와 작곡이다.
나머지는 누가 했는지, 그 본인의 이름이 거의 다 밝혀져 있다.
만약 세종대왕이 왕의 신분을 이용해서 자기 공으로 만들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것도 대부분 '어제(御製)'란 말을 붙였을 것이다.
 
 세종실록에 보면 매우 겸손했던 세종대왕이 음운학에 대해서만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말도 아주 직설적이었다.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에 자모가 몇 개 있느냐?

만약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너희가 (이두를 정리한) 설총만 옳게 여기고 임금의 일은 그르게 여기니 어찌된 일이냐?"
 
  둘째, 당시 학자들은 오로지 유학이었다. 집현전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이런 따위의 음성학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연구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설령 연구에 일부 참여했다고 해도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문 숭배가 종교의 수준까지 이르렀던 때이다.
실지로 신숙주, 성삼문이 만주로 음운학자 황찬을 만나러 가는 것은 한글 창제 이후의 일이다.
 
 이들은 완벽을 기하려는 세종대왕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황찬에게는 무슨 훈민정음에 대해 자문을 구하려는 게 아니었고 동국정운을 정확히 만들기 위해 쥐나 음운에 대해

물어봤던 것이다.
 
 설령 직접 창제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관계없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훈민정음은, 한글은 결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뺀 것도 못난 위정자들 탓이라고 본다.
모든 공휴일을 다 폐지해도 한글날은 공휴일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바보를 보통 사람으로 만들고 보통 사람을 천재로 만들어 주는 한글을 기리는 날을 공휴일로 안하고 도대체 무엇을 공휴일로

한단 말인가.
열심히만 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한글 재창제하는 것처럼 창의적으로 머리를 쓰면 열흘 놀고 하루 일해도 능히 선진국을 앞설 수 있는 법이다

 

한글은 쉽습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어렵죠. 그러나 외국어는 한국어만큼이나 어렵습니다.


모든 것은 투자한 만큼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외국 것이라 맹신하지 말고 우리 것이라 무조건 배격해서도 안 됩니다.


언제나 균형되고 공정하게 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글과 한국어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혹시 알파벳과 영어가 동의어라고 착각하는 사람은 없겠죠.


이 혼란스러운 현실을 이겨나가는 데에는 무엇보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야겠습니다!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대륙에선 통일이 오래되면 갈라지고, 분열이 오래되면 통합됐다.

진시황 통일 이후 2200년간 치세와 난세가 교차했다.

역대 왕조들의 영토는 확장과 수축을 시계추처럼 반복했다.

한송명 3개 한족 왕조의 ‘소(小)중국’이 분열 시대를 겪다가 이민족과 혼혈 왕조가 세운 ‘대(大)중국’으로 바뀌곤 했다.

 

진(秦)·한 나라는 현대 중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넓이였다.

북방한계선은 만리장성, 서쪽은 실크로드를 겨우 개척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선비족 왕조인 당(唐)은 북방과 서방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송(宋)은 다시 한나라와 비슷한 ‘소중국’으로 돌아갔다. 요(遼), 금(金), 서하(西夏) 이후 등장한 몽골 제국은 ‘대중국’으로

부활했다.

주원장이 세운 명은 ‘소중국’에 머문 반면 만주족의 청은 ‘대중국’을 복원했다.

청나라 멸망 이후 외세 침략과 혁명, 내전 등 수십 년간의 혼란 끝에 어부지리로 한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다 .

‘대중국’ 중에서도 최대 판도를 자랑한 몽골인의 대원(大元)과 만주족의 대청(大淸).대원과 대청은 내륙아시아에서 탄생한

정치세력이 중국을 정복한 다음, 대륙 고유의 정치·경제·문화 역량을 흡수·포용하면서 세계 제국으로 우뚝 섰다.

 

몽골과 만주족은 또 중국을 둘러싸고 있던 이민족들에 대해 정복·응징·포섭을 통해 거대한 연대를 이뤄냈다.

티베트, 위구르, 남만(南蠻) 등을 묶는 이른바 ‘이민족 연방’을 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대원·대청 제국을 한족의 다른 왕조들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이를 ‘중국 왕조’ 중 하나로 당연시하는 것은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성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이적(夷狄)의 제국’이 구축한 외경(外境)을 중화제국의 외경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역사의 실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시에는 중국이 비(非)중국에 편입된 것이지 중국이 비중국을 흡수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서하·대리국·티베트, 다른 길 걸어

티베트와 윈난 등 중국의 서부 지역도 몽골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지금의 간쑤(甘肅)성 일대는 탕구트 족이 세운 독립왕조 서하(西夏·1038~1227)가 지배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중국 정벌 루트를 확보하기 위해 서하에 침입했다.

서하의 군주는 항복하고 군대를 지원했지만 훗날 칭기즈칸이 서아시아 원정에 나설 때에는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서하는 몽골과 동맹을 파기하고 여진족과 연대했다.

서하의 배신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1225년 서하를 철저하고 잔혹하게 말살했다.

윈난을 지배하던 대리국(大理國·938 ~1253)은 쿠빌라이의 침공에 힘없이 무너진 이후 아예 대륙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반면 티베트는 몽골 제국과 ‘스님-시주(施主)’라는 독특한 관계를 맺었다.

정복이나 복속과는 다른 차원의 동맹관계였다.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지시로 모든 종교에 관용적이었다.

특히 쿠빌라이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팍빠를 종교적인 스승으로 모셨다.

둘이 만나면 팍빠를 윗자리에 앉힐 정도였다.

칸에 즉위한 쿠빌라이는 팍빠를 나라와 황제의 스승으로 선언하고, 대보법왕(大寶法王)에 책봉했다.

즉 세속 정치는 몽골 칸이, 영적인 종교 문제는 티베트 라마교가 맡는 일종의 분업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이런 관계는 명나라 시기에 명목적인 조공관계로 이어지다 청 제국이 들어서면서 다시 부활됐다.

 

 淸제국 영토, 현대 중국의 1.5배

 

 청이 파견한 칙사들은 한인 관료가 아닌 팔기(八旗) 출신 고관들이었다.

같은 조공국이었던 유구·안남에 직급이 낮은 한족 문관을 파견했던 것과 격이 달랐다.

청은 조공 사절에게 베푼 공식 연회 요리에서도 조선 사절, 몽골 부마,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에게는 5등급의 요리를 하사했다.

다른 나라의 사절들보다 한 단계 높은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서로 다른 유전자가 하나의 생명체 안에 공존하는 키메라는 청 제국의 성격과 ‘멋지게’

들어맞는다”고 말한다.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출간 예정) 조선과 유구가 다른 범주에 속한 이유도 청나라의 서로 다른 DNA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음은 청 제국의 수립 과정이다.

누르하치가 24살(1583년) 때 30명을 이끌고 시작한 제국 건설의 꿈은 180년 후 6대 손 건륭제가 현대 중국의 1.5배에 달하는

영토를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267년간 지속된 청 제국은 몽골 제국의 대원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초원으로 쫓겨간 것과 달랐다.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만주문자와 팔기제도를 만든 것은 청 제국 건설의 첫 단계였다.

2대 홍타이지는 우선 몽골 제국의 후계자인 내몽골의 차하르 세력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여진(女眞)을 만주(滿洲)로 바꾼 홍타이지는 1636년 후금을 대청(大淸)으로 바꾸면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황제 추대식에 조선의 동참을 요구했다.

인조는 정묘호란 패배 뒤 후금의 한(汗) 홍타이지는 인정했지만, 대청의 황제 홍타이지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홍타이지는 압록강을 건너 조선 ‘획득’에 나서 성공했다.

그는 만주팔기·팔기몽고·팔기한군(漢軍)으로 이뤄진 만·몽·한의 제국을 세우고 명나라와의 결전을 시작했다.

키메라의 근간이자 머리에 해당하는 만주·몽골 유전자가 완성된 것이다. 조선도 여기에 속했다.

명나라에 앞서 대청의 우익인 몽골과 함께 제국의 좌익에 편입된 것이다.

명의 농민반란은 청 제국의 완성을 촉진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황제(숭정제)가 자살한 것이다.

도르곤이 지휘하는 팔기군은 주저 없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을 장악했다.

그해 10월 순치제는 자금성에서 이미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로 즉위한다.

 이제 키메라의 몸통, 즉 한족 유전자를 결합한 것이다.

강희·옹정·건륭제는 외몽골, 티베트, 신장(위구르 자치구) 등을 차례로 제국의 판도에 편입시켰다.

그 결과 키메라의 팔 다리에 해당하는 번부(藩部)가 완성됐다.

이들 지역은 이민족을 관리하는 이번원(理藩院)이라는 별도 행정조직을 통해 다스렸다.

만(滿)-한(漢)-번(藩), 머리-몸통-사지의 DNA가 각각 다른 키메라라는 대청 세계제국, 즉 ‘팍스 만주리카’는 이렇게 완성됐다.

청나라 황제는 ‘소중국’ 한족의 세상에서는 수명천자, 몽골 유목민에게는 대칸, 티베트 세계에서는 문수보살(불법의 수호자)

황제, 위구르의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 만주 기인(旗人)들에게는 누르하치의 계승자로 비춰졌다.

몽골 제국과 명 제국, 즉 이민족과 한족을 아우르는 ‘듀얼 엠파이어’가 대청제국의 본질이었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쑨원(孫文, 1866~1925)이 제창한 쥐나 근대 혁명과 건국의 기본

정치 이념입니다.

그것이 공표된 것은 1905년 일본에서 쥐나혁명동맹회(中國革沒盟會)를 결성했을 때입니다.

동맹회는 창립 선언에서 ‘만주족 축출(?虜驅除), 중화의 회복(中華恢復), 공화국 건립(民國建立), 토지 소유의 균등(地權平均)’의

4대 강령을 발표하였고 동맹회가 발간한 <민보(民報)>의 발간사에서 이 4대 강령을 3대 주의로 통합해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으

며, 1906년부터 3대 주의를 삼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멸만흥한(滅滿興漢), 곧 만주족의 청(淸) 왕조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민권주의는 유럽식의 공화정의 확립,

민생주의는 지주의 불로 소득을 억제하는 것을 과제로 했습니다.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어떨까...

쥐나공산국이 탄생할때 모택동이 약속한게 바로 소수민족독립이었습니다.
국민당과 전쟁중에는 쥐나가 한개성 단위로 쪼개져도 좋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입니다.

그래서 쥐나공의 성립후 자치구가 등장하죠.
쥐나에 55개 이상의 민족들이 있습니다. 쥐나정부가 크게 나눈 민족이 55개이고, 자잘한 민족은 훨씬 많습니다.
쥐나인민공화국 탄생시 짱골라 한족 비율은 50% 미만이었습니다.

50년만에 나머지 소수민족들 4~50%가 우주로 이민갔습니까? 아니죠. 무늬만 한족입니다.
짱골라 한족은 어떨까? 후진타오가 공식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죠.
" 현재 삼민주의가 대세니 뭐니하고, 자치권을 요구하는 무리가 많다. 이런 분열주의를 조심해야 한다. "
삼민주의, 자치권을 소수민족만이 부르짖을까? 아니죠.

저기 상해, 절강성같은 잘 사는 연해 동네에서도 부르짖는 겁니다.
자신들을 상해인이니 홍콩인이니 하면서 타지역과 다르다고 주장하죠~
순수 짱골라들도 이러는 판국입니다.

쥐나가 제일 처음 분열하는 곳은 소수민족자치구가 아니라 홍콩, 상해, 심천, 광주 같은 잘사는 지역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하죠.

짱골라들이 원나라, 청나라 때부터 티벳을 차지했다고 새빨간 저짓말을 하는데 정말 어이 없습니다.
원나라는 흉노계 몽골족의 역사이고,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은 고구려발해 후예 예맥-부여계 말갈(=여진=만주)족의 역사입니다.

하나로 통제된 쥐나의 신화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쥐나가 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의 저류에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심각한 민족 갈등이 내재하고 있죠.
최근 신장 위구르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소요 사태가 쥐나의 위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류를 형성하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쥐나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죠.
현재 명목적으로, 한족으로 분류되는 남부의 광둥(廣東)과 푸젠(福建)성, 하카(客家)족을 위시에 쥐나는 최근 들어 소수계들의

인종과 문화가 부각되고 있으며 정치적 환경과 경기침체로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2009년 6월 광둥의 장난감 공장에서 두 명의 위구르 노동자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조성된 신장 위구르의 불안은 7월 5일

156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하는 최악의 소요 사태로 확대됐죠.
쥐나 당국은 무슬림계를 비롯, 소수 민족이 외부의 지원을 받아 분리되는 소위 ‘코소보 효과’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쥐나의 민족갈등은 ‘공식적인’ 소수민족들만이 아닌 문제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죠.

쓰촨(四川)성과 광둥성, 상하이, 후난(湖南)성 사람들이 문화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중앙정부의 통제에 반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요즘 쥐나의 분열 양상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2009년 7월 뉴욕타임스는 1면에 신장 위구르 소요 사태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한족 부부의 사진을 싣고 쥐나 정부가

정책적으로 이 지역에 이주시킨 한족의 비율이 지난 수십 년간 40%대가 됐다며 토박이 위구르인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쥐나의 인종 분열’이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를 실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구소련이 인종적 민족적 차이로 인해 분리됐듯이 쥐나도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G8정상회의 도중 급거 귀국한데서 드러났듯 이번 충돌로 인해 쥐나 공산당은 오는 2009년 10월

야심차게 준비한 60년의 ‘조화로운 리더십’ 행사가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향후 민족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죠.
2000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쥐나의 55개 소수민족은 총 1억400만 명으로 전체의 9%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92%의 점유율을 보이는 한(漢)족은 베이징 북쪽 일대부터 남쪽의 광둥성에 이르는 지역에 대부분 거주합니다.

사실 92% 한족이란 것도 실제로는 허구라는 것이 유전분석으로 밝혀졌죠.
쥐나는 그동안 중앙정부 차원에서 겉으로는 소수계의 문화와 경제 개발을 지원해 왔습니다.

청나라 말기인 1911년 국민당 지도자 쑨원(孫文)은 쥐나가 국가적 민족으로 통합되지 않아 강성대국이 되지 않았다면서

‘삼민주의’를 주창했죠.

그는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 티베트족, 그리고 위구르와 카자흐가 포함된 후이족 등 이른바‘중국의 다섯 사람들’을

내세웠습니다.
쥐나는 역사적으로 남북으로 나뉘어 통치됐고 5개의 왕국으로 분리됐습니다.

 

몽골과 돌궐, 티베트는 쥐나 한족의 마지막 왕조인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만 해도 지금보다 영토가 3배나 넓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소수계들의 언어적, 경제적, 정치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같은 민족인 허구의 한족만 해도

만다린과 우, 웨, 시앙, 하카, 간, 남부 민, 북부 민 등 8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가령 웨(越)족 사람들의 대화를 광둥 사람들은 극히 일부만 이해할 수 있고 광저우와 창저우, 샤먼 방언끼리는 대화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쥐나 언어학자인 Y.R. 차오 씨는 “광둥어와 만다린어는 영어와 화란어 혹은 불어와 이탈리아어만큼 다르다”고

비유했습니다.

만다린어는 20세기 초에 쥐나의 표준어 지위를 획득했고 국제어 대접을 받지만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처럼 쥐나 내 학교에서

만다린어 교육을 시켜야 하고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다른 언어들이 쓰이고 있죠.
쥐나의 소수계는 인구 비율은 낮지만 영토 비율은 근 60%에 이르며 소수계 인구의 90% 이상이 신장과 티베트, 내몽고, 윈난

(雲南) 성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신장은 쥐나의 6분의 1에 달하고 티베트는 다음으로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한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에 따라 이들 지역의 한족 비율은 1982년 10%(6700만 명)에서 불과 8년 만에 35%

(9100만 명)로 높아졌습니다.

3개의 자치구를 갖고 있지만 한족의 소수계로 편입시킨 만주족은 같은 기간 430만 명에서 128% 증가한 980만 명이 됐습니다.
구이저우(貴州)성의 거라오족은 8년 만에 714%라는 믿기 힘든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높은 출산율 외에도 출신 민족을 한족에서 바꾼 결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다른 종족 간 결혼을 할 경우 이들 자녀의 등록민족 신고는 만 18세에 결정할 수 있죠.
이 같은 증가는 형식상일 지라도 소수계에 대한 상대적인 특혜 덕분이라 할 수도 있겠죠(?).

 쥐나 당국이 인구 억제를 위해 강력 추진한 한 자녀 정책을 소수계는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적용받지 않고 세제 혜택과

이중언어 사용을 통한 공직 기회의 확대, 토착 종교, 문화 활동 보장 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형식적이라 할 지라도...
이런 이유로 쥐나에서 몽골족의 양고기 스프와 무슬림의 국수, 조선족의 바비큐가 쥐나 어느 도시에서나 맛볼 수 있을 만큼

퍼져 있죠.

또한 소수계의 의복과 문화 예술이 쥐나 일반 가정에까지 확산되고 있?니다.

현재 베이징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 중의 하나는 티베트식 체인점 ‘마케-아미’죠.

이곳에 가면 부유층이 티베트의 전통 음악과 공연을 감상하면서 미모의 여종업원의 시중을 받으며 양고기 바비큐인

‘야크 카봅’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이룬 남부 사람들은 문화적 정치적 차별성을 내세우고 있죠.

코미디언들은 상하이 말투와 스타일로 교양과 사업 안목이 부족한 북부 사람들을 조롱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베이징 사람이 상하이에서 물건을 살 때 만다린어로 말하면 값을 깎기도 어려울 뿐더러 바가지를 쓰기 일쑤입니다.

날로 높아지는 광둥성 사람들의 자각은 하카족과 남부 푸젠민, 산터우 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지역의 경제 발전과 북쪽 사람들로부터 당한 오랜 구속에 대한 반감은 공통적인 현상이죠.

이들 남부 사람들은 자신들을 전통적으로 한족이 아니라 남부를 기반으로 한 당나라(A.D. 618~907)의 후예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미와 유럽, 동남아시아의 차이나타운 대부분은 바로 이들 남부 출신 이민자들이 세운 것들이죠.


전문가들은 향후 10년 내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남부의 ‘당 민족주의’가 북부의 ‘허구의 한족 민족주의’에 대항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영 미디어들이 신장 자치구의 소요를 일방적인 시각으로 전달하고 티베트의 뉴스들을 은폐하는 것이 ‘허구의 짱골라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의도로 파악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쥐나의 경제적 역동성은 소수민족의 인종적 언어적 분화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부와 항구 등 중부와 북서부보다 경제발전이 앞선 지역들에서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확대되고 있죠.
지속적으로 탈중심화하는 쥐나는 내부 갈등과 인플레이션, 경제 발전의 불평등이 문화적 언어적 분화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그 위협은 과거 중원 왕조를 종식시킨 적도 있는 남부 지방 사람들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우월하고

외국에서 교육받았으며 화교의 지원을 받는 그들이....

현재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힙니다.

현재 쥐나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이죠. 민족차별에 의한 압력이 사회에 암묵적으로 만연되어 있죠.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쥐나 소장파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쥐나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허구의

한족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