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블로그-할 말하는 대한민국 글쓴이-용화산인 http://blog.daum.net/kone1/10053635
「환단고기」<태백일사>를 보기로 하자.
「환단고기」<태백일사>의 기록을 보면 극소수 넋빠진 강단 사학자의 위서논쟁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의 기록이 얼마나 정밀하고 심오한 도가 기록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번한세가(番韓世家) 상(上)에
“치우천왕이 서쪽으로 탁(涿)과 예(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를 평정하여 산을 개척하고 길을 내니 땅의 넓이가 일만 리였다. 단군왕검은 당요 와 같은 시대였는데, 요의 덕이 더욱 쇠해져서 서로 땅을 다투어 쉴 틈이 없었다. 천왕이 곧 우순에게 명하여(天王乃命虞舜) 토지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分土而治) 군사를 보내어 주둔하여(遣兵而屯) 함께 당요를 정벌하기로 약속하자(約以共伐唐堯) 요의 세력이 곧 꺾여 순에게 의지해서 목숨은 보전하고 나라를 물려주었다.(堯乃力屈 依舜而保命以國讓)”
「서전」에 보면 순이 순의 부친 고수 및 동생과의 갈등이 극에 달해 순을 우물에 빠뜨려 죽이려다 미수하고 지붕 위에 올려놓고 죽이려다 미수하는 등의 사건이 보인다. 그러나 「환단고기」<태백일사> 번한세가(番韓世家) 상(上)을 계속 보면 다음과 같은 업그레이드 된 기록이 보인다.
“이에 순의 부자와 형제가 다시 한 집안에 돌아왔으니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효제를 우선으로 삼는 것이다.(於是 舜之父子兄弟 復歸同家 盖爲國之道 孝悌爲先)” 또 「서전」에 요, 순이 마치 하늘의 상제에게 한 것 같은 정체불명의 글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9년 동안의 홍수로 인해 많은 백성들에게 피해가 미쳤으므로 단군왕검이 태자 부루를 보내어 순과 더불어 약속해서 도산(塗山)으로 초청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순이 사공(司空) 우(禹)를 보내어 우리의 오행치수의 법을 전수받아 공을 이루었다.
이에 감우소(監虞所:우를 감시하는 곳)를 낭야(琅耶)성에 설치하여 구려(九黎)를 나누어 다스리는 회의(九黎分政之議)를 결정했는데 곧 서경에서 이른바 ‘동쪽으로 순행하여 섶을 태우며 멀리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드디어 동후를 뵈었다는 함은 이를 말한 것이다.(卽書所云 東巡望秩 肆覲東后者 此也)
진(辰) 국은 천제가 다스리는 곳이므로 낭야 순행은 5년에 한 번이요 순은 제후이므로 진한에 조근함이 네 번이었다.(舜諸侯 故朝覲辰韓者四也)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蚩頭男)를 골라 번한이라 하고 부(府)를 험독(險瀆)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단군조선과 순, 우에 얽힌 이야기를 좀 더 보면 다음과 같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夫婁)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와 대(淮泗) 지방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에게 가로대, ‘나는 북극 수정의 아들이니라.(수정자는 1태극수로 곧 태극제인 치화주 천제를 말함이니 부루태자의 부왕 단군성조다. 이는 천제지자의 정통맥을 이은 단군조선의 통치자를 1태극수인 수정자로 표현한 것으로, 자신이 파견된 것은 수정자 1태극수 단군성조로부터 명을 받은 것이지만 다음 글귀에서 보듯이 조화주(무극제) 삼신상제가 돕는 것을 좋아하여 오게 되었다는 영적 메시지까지 담고 있어 신교신앙의 연원을 보여주고 있다. 자세한 것은 환단고기 삼신오제본기를 참고하기 바란다:안원전) 그대의 왕(汝后)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차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구종(皇矩倧:곡척 자)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사공(虞司空)은 삼륙구배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자(天帝子)의 칙명을 힘써 행하고 우리 우순(虞舜)이 태평을 여는 정사를 도와 삼신께서 지극히 기뻐하도록 보답하리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 부터 금간옥첩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를 도산에 모으고 우순 (虞舜)에게 명하여 곧 우공(禹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환단고기 번한세가 상)
필자가 샤오싱 회계산 대우릉에서 찍어온 자료인데 제대로 찍히지 못했다. 우는 죽어 강소성 월나라 수도 샤오싱(소흥) 회계산에 묻혔다.(이 곳은 태호복희 염제 신농의 태양신 문화를 간직한 유명한 동이족 하모도 유적지가 있는 양자강 하류의 전통적 동이족 웅거지이다) 그 아들 계(하의 실질적 개창자)가 회계산대우릉에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그 후 그 자손들이 회계산 대우릉에 묻힌 우를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 쓰촨(사천) 석류촌 출신인 동이족 우의 후예가 바로 흉노인데(주(周)대의 이적, 험윤(獫狁),훈죽(葷粥),진한(秦漢)대의 호맥, 흉노, 위서의 오환, 선비- 읍루-말갈-만주족 등의 동이 한겨레 조상이 원씨족이다) 월나라 구천은 우의 직계 혈통으로 대우릉에서 봄가을에 치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현지에서 직접 확인 한바 있다. 부차에게 설욕하기 위해 쓸개를 걸어놓고 와신상담한 곳도 바로 대우릉이 있는 회계산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진 설명을 보면 동이족인 소강때 제사가 끊길것을 우려해 사당을 세우고 그 자손을 월나라 땅 이곳에 봉해 쭈욱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이곳 샤오싱 회계산 대우릉 아래에 30여 후예 사씨 가문들이 맥을 전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작자미상의 「동국사강(東國史綱)」이 “단군이 팽오(彭吳)를 명하여 국내산천을 다스리다”한 바 있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 “팽오는 단군때에 홍수를 다스리던 사람이니 지금까지 민간에서 그 유덕(遺德)을 생각하여 그를 숭사(崇祀)한다”했는데
유득공이 “팽오는 한(漢)의 사신이므로 조선에 통한 자이어늘 후세사가들이 그릇 이용하여 단군때의 팽오가 있는 줄로 알았다”라 한 말에 대해, 마치 활 잘 쏘는 자 듀물을 주몽(朱蒙)이라 하고 병마원수 말치를 막리지(莫離支)라 쓰듯 팽오는 우리나라 서북 등지에서 제사지내는 홍수신인 ‘마울(또는 조상마울)’의 이두자라 말한다.
그는 또한 우리고사에 다만 단군이 태자 부루를 지나의 도산(塗山)에 보낸 일 만 있으나 <오월춘추>에는 이보다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있다고 소개한다.
그들은 문팽(文膨)으로 싸며, 반석으로 덮고, 금으로 대쪽을 삼고, 청옥으로 자(字)를 삼고, 백은으로 옷을 삼고, 문자는 다 쪼아서 조각해 넣은 책이라 하였거늘, 우(禹)가 형악(衡嶽:순도 이 형산과 恒산, 華산을 오른 뒤 통치한다)에 가서 백마의 피로 제사하고 치성하나 얻지 못하고,
산에 올라 하늘에 슬피 울부짖었더니 홀연히 꿈속에 붉은 수를 놓은 옷을 입은 남자가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 자칭하며(부여이래 사신은 붉은 옷을 입고 보내는 풍습이 우리 동이 조선족에 있었다)
“이곳에서 문명(文命:우의 자호)을 기다린지 오래노니 희음(戱吟:실없이 들음)치 말라. 복부산(覆釜山) 의지하여 동으로 돌아보며, 우(禹)더러 일러 가로대 우리 산의 신서(神書)를 얻으려거든 적제(赤帝) 바위아래에서 목욕제계하라” 하더라.
우가 그 말대로 3 개월을 제계하고 경자일에 산에 올라 암석을 열어보니 금간(金簡:죽간대신 쇠에 글자를 새겨넣은 책)의 글이 있거늘, 우가 다시 3개월을 목욕제계하고 경자에 완위산(宛委山)에 올라 금간(金簡)을 내고 옥자(玉子)를 발견하여 5행치수의 도를 얻고....우가 이에,
안으로는 부산(釜山)에서 받은 주신(州愼:稷愼,息愼,肅愼은 조선이다)의 공덕을 생각하고, 밖으로는 그 성덕을 연술(演述:널리 펴 설명)하여 천심을 응답하고 모산(茅山)의 이름을 고쳐 회계산이라 하고...우 가로대
“그 열매를 먹으면 그 나뭇가지를 상치 아니할지며, 그 물을 마시면 그 말류(末流)를 흐리지 않을지라 , 내가 복부산(覆釜山)의 신서를 얻어 천하의 대 재앙을 구하였으니 어찌 그 덕을 잊으리오”
이에 간관(諫官)을 두어 궁실을 다스리며, 나무를 베어 읍거(邑居)를 만들며, 인신(印信)이며 문궐(대궐문)을 짓고, 권형(權衡:저울)이며 두곡(斗斛:한 말은 두, 10말은 1곡)을 고르게 정하고 정전(井田)을 지어 만세의 법도를 삼게 하고, 및 연로하매 한탄하여 말하기를(재위8년) “수(壽) 장차 다 하리니 5개월 후에 나를 회계에 장례지내라”-
항주에서 발굴된 문화가 5000년 좌우의 양저(良渚)문화라면, 대우묘(大禹廟)의 회계산이 있는 샤오싱(紹興)문화는 동이족 특유의 옥기가 특색인 하모도(河姆渡) 문화다. 그런데 소흥이란 곳은 동쪽엔 조아강(曹娥江)이 흐르고, 서쪽엔 포음강(浦陰江)이 맞닥뜨리고 있고, 남쪽엔 회계산이 가로놓여있으며, 북쪽으로는 항주만이 있어, “일평(一平), 이강(二江), 삼분(三盆), 사산(四山)”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 고래로 “강남수향명주(江南水鄕明珠)”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필자가 답사를 다녀와 잘 아는 곳이지만 산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하며, 물산이 풍요로운 곳으로, 우리 동이족인 춘추시대의 월족(越族)과 묘족(苗族)의 고향처였던 곳이다.
동이족 하모도 유적지 가옥&하모도(河姆渡)문화의 상아비상기(象牙匕狀器):고대 동방민족은 새(鳥)로써 민족의 도등(圖騰:부족국가 부대깃발 로고)을 삼거나 혹 숭배대상으로 삼은 예가 많았는데, 이 상아 비상기는 전체 모양이 봉조(鳳鳥)의 형태를 띄고 있어, 당연히 봉(鳳) 도등(圖騰) 숭배의 반영으로 보인다.하모도 유적지에서 상아비상기의 출토는 그 주인의 정체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한민족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반도 고고학에 매몰된 한국고고학계는 이러한 중국측의 연구결과에 대해 입한번 벙긋한 사실이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다.
항주 부근 하모도(河姆渡) 유적지의 골사(骨 :뼈보습)Click here 하모도 문화의 상아 비상기Click here 동이족 하모도 유적지 가옥Click here 하모도 유적지 건축 순묘Click here 동이족 하모도 유적지의 봉황Click here 하모도 탄화벼알Click here
자고이래로 이 곳은 “어미지향(魚米之鄕)”, 황주지도(黃酒之都)“,”방직지성(紡織之城:실크)“,”문화지방(文化之邦)“이라는 명성을 얻은 곳으로 동이족의 고추장이 ”라장(辣醬)“이라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고, ”엄채동순탕(腌菜冬筍湯)“같은 우리의 김치가 그대로 전해오는 곳이다. Click here!
그런데, 대우릉이 있는 이곳에 순임금의 사당과 순우물(舜井), 순강(舜江) 등의 이름이 있는 이유는 이곳 향토전설에 ”백관(百官)이 순을 맞이했다(百官迎舜)“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사실 이 사실이 대단히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면, 순(舜)의 정치적 기반이 우(禹)와 마찬가지로 이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샤오싱의 향토사료를 보았더니, 회계산의 내력에 대해 말하기를, 원 이름은 모산(茅山)이었다 한다.
대우(大禹)가 치평수토(治平水土)한 이후, 모산(茅山)에 당도해 각지 제후를 회집하여 치수 공로가 많은 인원에 대해 봉작을 내려 경축하는 행사를 거행했다. 대회 후, 우(禹)는 성대하게 경축 행사를 가진 것을 기념해 모산(茅山)이라는 원 이름을 모임을 갖고 머물렀다는 뜻의 회계산(會稽山)으로 개명했다.
”백관(百官)이 순을 맞이했다(百官迎舜)“는 이곳의 향토전설 이야기는 대우릉의 향토사료 장제(張濟) 편찬의 소책자 <대우릉(大禹陵)>을 보면 순(舜)이 제위에 오르는데는 우(禹)로부터 힘입은 바가 크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대우(大禹)는 우리나라 수리사업의 개척자다. 4천 수 년 전의 전설에, 대우(大禹)가 어린 시절 요(堯)를 받들 무렵, 순(舜)의 명으로 홍수를 다스렸는데, 그는 부친 곤(鯤)의 교훈을 받고, 제방을 개축해 수로를 내고(改堵爲導), 강을 터 하천을 소통시키고, 규율을 준수하고, 백성에게 이로움을 주고, 간고(艱苦)분투하여, 끝내 흉완(凶頑)을 눌러 제거해, 생산을 발전시키고, 인민으로 하여금 평지에서 살수 있게 했다.
중년에 들어서서 그는 순(舜)이 집정하는데 보좌해 도왔으며, 후에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랐다. 기십 년 중, 마음이 편치않고 피를 걸르는 마음으로 진심을 다했고(嘔心瀝血), 현인을 선택해 일을 맡겼으며, 힘써 정성을 다해 다스림을 도모했으며, 천하를 9주로 나누고, 도읍지를 건설하고, 백관을 설치하고, 공법(貢法)을 제정하고, 형전(刑典)을 제정하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하고, 밭 갈고 농사짓는 것을 고무격려하고, 협화만방(協和萬邦)했으며, 다원적인 중국을 한 개의 다민족 통일 국가로 이루어 건설했다.“
순의 전성기 그림. 호남성 동정호 군산 상비사에서 촬영
출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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