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말기인 약6천년 전 환국의 대이동 때, 평소 동방에서 원시생활을 하던 인간을 구제하고 싶은 꿈을
간직해오던 환웅(桓雄) 천황(天皇)께서는 환인(桓因)의 명을 받고 제세핵랑군이라 불리는 동방문명
개척단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삼신산)으로 오셨다.
배달환웅이 동방 백두산일대에 문명을 개척할 당시 그 지역에는 토착민이었던 웅족(熊族)과 호족(虎族)
이 살고 있었다. 즉, 배달국은 환웅께서 이 웅족과 호족의 협력으로 결합(부족연맹)하여 건국한 것이다.
이 두 족속은 환웅께 하늘의 계율을 따르는 밝은 백성(桓族)의 일원이 되기를 간절히 구하고 3·7(21)일간의
수도생활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때 웅씨족은 마침내 순종하여 광명의 백성(桓民)으로 교화되었고, 사납고
약탈에 능한 호족은 교화에 실패하여 사방으로 유리되었다.
도읍은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밑의 신시(神市)에 정하시고 나라이름은 ‘배달(倍達)’이라 하셨다.
배달건국의 창세이념은 환인으로부터 내려받은 ‘홍익인간(弘益人間) · 재세이화(在世理化) · 광명개천
(光明開天)’의 3대정신으로 정하시고, 토착족인 웅족, 호족을 융합하여 교화하였다.
이 배달국은 제1대 배달 환웅으로부터 제18대 거불단 환웅까지 1565년간(기원전 3898~2333년) 지속되었다.
배달국은 인류 시원문명국가인 환국의 환인천제(桓因天帝)의 정통정신을 유일하게 계승한 장자국이다.
그 이유는 환국의 마지막 환인이자 7대 지위리 환인으로부터 정통의 표시인 천부(天符)와 인(印) 3개을
받았고, 명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을 반만년 배달민족 또는 배달의 후예라고 하는 것은 바로 환웅천황의 신시배달 건국의 역사적인
(실제 있는) 사실에서 유래된 것이다.
<주요 단어>
배달(倍達) 밝달에서 유래됨, 한민족을 배달겨레라고 하는 이유.
환웅(桓雄): 제정(祭政)일치 사회의 정치지도자겸 종교 지도자의 직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큰 스승
(桓雄稱大雄天,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을 말하며,부처를 모신 법당을 대웅전(大雄殿)이라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원래:환웅전) 되었음. |
배달국(倍達國,B.C3,898~2,333년)은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지는데, 신시(神市)배달은 제1대 배달(倍達) 환웅(桓雄)께서 B.C 3,898년에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건국이념을 가지고서 백두산 신시(神市)에 개국한 것을 말한다.
18대 환웅 |
재위기간 |
수명 |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 1대 거발한 환웅(居發桓, B.C 3897) (일명 배달 환웅, 온밝누리 한) 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B.C.3803) 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B.C.3717) 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B.C.3618) 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B.C.3511) 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B.C.3419) 7대 거련 환웅 (居連, B.C.3320) 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B.C.3239) 9대 양운 환웅 (養雲, B.C.3166) 10대 갈고 환웅(葛古, B.C.3070) 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B.C.2970) 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B.C.2878) 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B.C.2773)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대 치액특 환웅(蚩額特, B.C.2597) 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B.C.2453) 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B.C.2452) 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B.C.2380) (일명 단웅(檀雄) 천황) |
94년 f 86년 99년 107년 93년 98년 81년 73년 96년 100년 92년 105년 67년
ㅊ 109년 f 89년 56년 72년 48년 |
120세 f 102세 135세 129세 115세 110세 140세 94세 139세 125세 149세 123세 100세
ㅊ 151세 f 118세 99세 97세 82세 |
그리고, 청구(靑丘)배달은 제14대 치우(蚩尤) 천황께서 B.C.2,707년에 재위에 오른 후, 청구(靑丘)
즉 지금의 만주산동반도 태산(泰山)아래로 도읍을 옮긴 것을 말한다.
신시(神市)는 서불로도 불리다가 서라벌(서불의 사투리)로 바뀌다가 오늘날의 서울이란 말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이 우리나라를 예로부터 청구(靑丘)라고 불렀는데,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의 영향 때문이다.
원동중의『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국(桓國)의 말기에 환인(桓仁)이 환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종을 주어, 환웅(桓雄)은 3000명을
이끌고,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니,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신불역대기(神市歷代記)』에는 더욱 상세하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倍達國)은 환웅(桓雄)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神市)이다.
뒤에 배달국(倍達國) 14세 치우(蚩尤)환웅이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겼다.” 라고 적혀 있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신시배달문화의 생생한 증거들>
1. 홍산문화(紅山文化, BC4,000~BC2,300)신시(神市) 환족(桓族)의 일원이 되어 중원지역에
신시문화를 전파시킨 웅씨국(熊氏國)의 유적으로 추정됨
2. 홍산유적:1930년대 내몽고 적봉(赤峰) 동북쪽 홍산에서 발굴, 중국학계에서 양상: 채도(彩陶)문화나
삼황오제에 연결시키려 했으나 1979년 본격적인 발굴결과 전혀 다른 문화임이 확인.
돌무지무덤(적석총: 고대 한민족 전형적인 능묘구조), 성터, 옥기(玉器) 발굴: 바이칼호의 것과 일치,
바이칼호 주민들은 연옥가공기술이 뛰어남.
우하량(牛河梁)유적(BC3630) : 능원(凌源縣)과 건평현(建平縣) 경계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고 있음. |
환웅 천황께서는 상기 3대 이념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신교의 경전이었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
(三一神誥)를 설하고 하늘의 진리로 교화하였다.
배달국 시대는 교화의 시대로서 초대 배달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
(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신지(神誌=사관)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鹿圖)문자’를 만들게
했다(BC 3898년,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 배달의 동방 9족(九夷) 가운데 풍이(風夷)족 출신. - 제5대 태우의 천황의 12대 막내아들(「태백일사」의「신시본기」에 기록) - ‘태호’는 복희의 호이며 ‘크게 밝다(대광명)’는 뜻임 - 하도(河圖)를 계시받아 한민족의 국기인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은 동양 역철학(태극·음양·오행·
팔괘의 우주관)의 창시자이며, 우주의 변화원리를 음양논리로 처음 밝힘. 따라서 주역은 중국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절시켜 나간 성인들(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
도 모두 동이족 혈통출신. 주역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졌기 때문.
- 제8대 안부련 환웅의 신하로서 웅씨족의 후손이었던 소전(少典)의 아들. - 중국 섬서성 강수(姜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姜)씨로 정함(풍씨 성의 단절로 강씨가
인류최초의 성씨가 됨). - 쟁기와 보습을 처음 만들어 경농을 시작, 백가지의 약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
- 도읍을 청구(산동반도에 소재)로 옮김. -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함. - 중국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황제 헌원(기원전 2692~2593년)과 그 유명한 탁록(鹿, 하북성 소재)에서
10년간 73회의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음. -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됨.
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낸 후 군사를 일으키며,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더욱 공경함(이 사당은 지금도 존재함). - 당시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헌원에게「삼황내문」을, 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침. - 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은 황제 헌원은 ‘황노학(黃老學)’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됨.
<치우천황의 탁록대전>
1. 신농국의 쇠퇴: 8대 염제(炎帝)인 유망대의 정치 혼란, 제후들간의 쟁탈전 시작.
2. 전쟁의 경과: 14세 자오지 환웅천황이 금속무기로 중무장한 구려군(九黎軍)을 거느리고 진군→
중국인들이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라며 두려워함.
① 유망의 도읍지 공상(空桑: 산동일대) 점령, 소호(少昊)를 사로잡음. ② 서방 분리주의자 헌원이 스스로 천자를 참칭하며 군대를 일으킴. ③ 탁록(鹿: 현 북경시 서북쪽 탁록현 범산(石凡山))의 벌판에서 10년간 73회 결전 치우천황의 안개전법 vs 헌원의 지남차.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급공을 하려다 전사. 비석박격기(포차)를 제작하여 헌원을 사로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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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 對 軒元의 탁록대전 중국의 벽화이기에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앞세웠으나, 실질적인
것에서는 우리 민족의 앞선 기술과 힘을 느낄수가 있다... |
3. 전쟁의 결과: ① 청구배달의 구려군의 승리 ② 헌원이 제후가 되어 청구국의 문화를 수용 → 신선사상, 동방문자 수용. ③ 이전시대와 달리 서방족과 동방족이 뚜렷이 구분되기 시작. → 사마천이 실질적인 중국사의 시조로 헌원을 부각시킴.
4. 이후의 한중관계: 탁록 대전 약 300년 동안(고조선 개국 전까지) 큰 전쟁은 없었으나 다만 배달국은 전욱(頊:
頊高陽, BC2513-2436)씨와 한 차례 싸워 이긴 바 있고 훗날 전욱의 아들 요(帝堯放勳)가 군사를
일으켜 소호 지를 선위형식으로 물러나게 하고 동방족을 이간시키며 배달국과 대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요는 청구(靑邱)를 공격하여 웅씨왕이 전사하고 웅씨국 비왕으로 섭정하던 단군왕검이 구환
(九桓)의 혼란을 수습, 아사달 단허에서 배달국의 신시의 옛 법도를 회복하고 조선을 개국하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