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우리1. http://cafe.daum.net/mookto/GUJC/2180
제1편. 원시한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밝혀지는 깜작놀랄 명마산 글씨 바위 ( 명마산 글씨 바위 한조각)
1. 들어 가는글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 인근 촌노들에 의하면 명마산에는 예로부터 글씨 바위가 있다 하는데 역시 인근에 사시는 재야 사학자인 예대원씨는 이 바위에는 ㅅ ㅈ ㄴ ㅠ 등 한글 자모가 뚜렷이 각인돼 있으므로 '훈민정음 창제의 모태이자 기반이 된 것으로 알려진 가림토 문자가 확실하다'고 단언했고 이 기사가 부산 일보 등에도 기재 됐다. 그 이후로 이 바위는 인터넷 상에서 가림토 바위라고도 불리워 지기도 하는데 그뒤 많은 학자들이 찾아가 확인해 보았다 하나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글쓴이의 인근에 사시는 독자님들 역시 그곳에 찾아가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으나 글자 몇개가 한글 자모와 비슷 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가림토라고 단정할 수도 없어 더이상 관심을 포기 했다는 말을 듣고 글쓴이도 호기심에 한번 찾아가기는 했으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찾아 가 보니 상상외로 놀랄만한 것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그 바위에 새겨진 암각들은 최소한 3 ~천년전것 들이고 따라서 우리 하는님이 내리신 진본천부경 시지녹도전자 다수와 당시 한자의 모태가 되는 우리 조상들이 썼던 그림글자 금문과 그림, 그리고 지금 한글의 모태가 되는 가림토 뿐만 아니라 기림토의 어머니 신지 신획등 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을 찍어 가지고 와서 컴퓨터로 분석을 해 보자 더욱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 사진은 마치 홀로그램을 보는것 같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글자 다른 그림이 되는가 하면 몇번을 보고도 다시 보면 다른 글자,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따라서 19 인치 컴퓨터 모니터 상으로 다 확인 하고도 다시 46 인치 TV에 연결 확대해 보니 또 다른 글씨 다른 그림이 나타나며 그래서 이번엔 빔푸로잭터로 투사해 보니 정말 놀랄만한 그림들이 나타 났다. 글쓴이가 찾아본 글자, 그림은 다음과 같다.
2. 가림토로 추정되는 글자들
1) △자도 몇개 보이는데 이는 하느님이 환웅께, 아니 우리 민족에게 내리신 천부인 원방각(ㅇ ㅁ△)중 하나 이며 사내와 사내의 남근을 뜻하고 인본주의를 말하는 가장 중요한 글자이며 지금 ㅅ 의 원형이다.
2) ㅅ 의 글자는 획등이 入 자 처럼 꺼꾸로된 글자등이 너무 많으나 이는 지금 한글의 발음기호ㅅ 이 아니라 사람의 가리쟁이인 그림으로 ㅅ 의 뜻인 남근, 서다, 솟다, 사람 의 그림이 ㅅ 으로 변하는 글자이다.
3) ㅈ 글자도 몇개 발견되나 이역시 현재 한글의 발음기호 ㅈ 이 아니라 ㅈ 의 뜻인 자다, 죽다 가 ㅈ으로 변하는 글자이다.
4) ㄱ, ㄴ 여기에 ㄱ 자가 나타날 이유가 없음으로 ㄴ 자의 각도를 꺼꾸로 쓴것이다.
5) ㄷ 도 나오는데 이도 현재 자음이 아니라 ㄷ의 뜻인 땅이라는 뜻이다.
6) ㅂ 자도 나오는데 가림토 ㅂ은 ㄷ을 세워 놓았음으로 ㄷ 과 혼동이 된다.
7) ㅁ 자도 나오는데 이도 물보다 높다는 뜻이며 현재 ㅁ 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8) ㅇ 자도 다수 발견되는데 이는 하늘을 뜻하며 현재 ㅇ 의 원형이다.
9) ㅇ 안에 점 찍은 글자 즉 日 자도 발견되는데 이는 현재 한자 日 자가 아니라 日자의 원형인 하늘을 뜻하는 ㅇ 안에 점을 찍거나 ㅡ 를 그은 해라는 뜻의 글자로 바로 한민족을 표상하는 글자다.
10) X 도 더러 나오는데 이는 알파벳이 아니라 누리위에 내리는 환웅의 빛 이며 신지녹도전자와 가림토 글자이다.
11) ㅗ ㅜ ㅏ ㅓ 같이 보는 방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모음도 다수 발견되나 가림토에서 모음은 아래아점 하나 밖에 없다고 보며 있다. 또 있다해도 체계가 없으니 현재 한글의 발음기호로 보기 보다 올리다, 내리다, 저쪽이다, 이쪽이다 하는 방향표시로 본다.
12) ㅠ 자도 다수 발견되나 이 역시 현재 모음이 아니고 젯상, 올리다의 금문 그림으로 본다.
13) ㅡ 자도 많이 발견되는데 이도 현재 한글 모음 ㅡ 가 아니라 땅이라는 뜻으로 본다.
이상 가림토로 추정되는 글자는 △ ㅅ ㅈ ㄴ (ㄱ)ㄷ ㅂ ㅇ, 과 ㅗ ㅜ ㅏ ㅓ ㅠ ㅡ 의 글자가 나타난다.
3. 한자 같은 글자
14). 한자 二 자 같은것은 수도 셀수 이 너무 많으나 二는 한자가 아니고 우리 선조들이 쓰던 金文상 上 자로 올린다는 뜻이다.
15) 八 자역시 수도 샐수 없이 너무 많은나 이것도 여음, 다산을 뜻하고 이는 진본 천부경 여덟의 금문이다.
16) 三 자 같은 글자도 나타나지만 이도 한자 三이 아니라 신지녹도전자에 나오는 빗금 세개인 환웅의 빛 이라는 뜻이다.
17)工 자도 나오지만 이도 한자가 아니라 하늘 아래 땅위에 서있는 사내로 사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의 갑골문이다.
18) 점 세개가 나타나는데 이는 화랭이(男巫)였던 환웅의 악공 풍백, 운사 운사를 의미하는 금문 글자이다.
19) 九자의 신지녹도전자 글자가 나오는데 이는 신지녹도전자 로 아홉. 즉 남근, 씨족을 뜻하는 업 구렁이 이다.
4. 그림
20) 업구렁이 그림이 있는데 이는 남근의 상징물이다.
21) 여음에서 아기가 나오는 그림
22) 난산인지 여음에서 아기를 빼내는 그림
(23) 다수의 한국인 얼굴
24)서양인 모습
25) 보물 항아리
26) 벌거벗은 여인과 남자
27) 새 뱃속의 새끼새로 뤤트겐 기법그림
28) 쇠 머리
29) 승냥이와 올빼미
30) 올라간다는 뜻의 사다리 금문
31) 그외 미해독 다수
* 물론 이상 글자나 그림은 너무 작은것이 많고 그간 너무 마모되어 컴퓨터상이나 육안으로 선뜻 알아 보기 힘든것들이 많으므로 글쓴이가 이 작은 글자를 설명하며 올릴때는 돋보기나 큰 TV로 연결해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같은 글자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일수도 있는데 심지어 빔프로잭터로 쏘고 봐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림이 달라 진다. 또 어떤 그림속의 부속그림이 글자로 보일 수도 있으나 글자, 그림을 새긴이들의 뜻과 동기를 짐작해 본다면 전연 관과할 것이 아니므로 여러 각도로 관찰해 봐야 한다.
5. 명마산 글씨 바위의 특징 1) 이 바위의 원 명칭은 기림토 바위도 아니고 글씨바위도 아니며 글쓰는 바위 였을 것이다.
2) 새긴 시기는 최소한 3~ 4 천년 전이다.
3) 신지녹도전자와 가림토의 어머니 신지신획과 금문을 혼용 하던 4~5 천년 시대, 한자나 가림토 조차 없던 시기의 글자를 한반도에 흘러 들어온 상민들이 그대로 썼다
4) 이 암각은 누게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긴것이 아니다. 즉 광개토대왕 비나 어떤 충신 열사의 전적비 등과 같이 후세에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5) 새긴 장소가 마치 젯상 같이 북쪽에 병풍 같은 벽 바위가 있고 그 아래 젯상 같은 암반이 있는데 그 젯상 암반에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그 젯상위에 글자 한자를 새겨 놓고 그 위에 술이나 음식물을 올려놓고 복을 빈 자리로 본다.
6) 그 위에 장군석 이라는 남근석이 있음으로 환웅과 연관된 문자가 많다.
7) 암각전문가가 새긴것이 아니라 당시 천민들 아무나 새겼으므로 매우 조잡하다.
8) 글자의 배열이 상하 좌우가 있는것이 아니라 새기는 사람들이 아무렣게나 앉아 새겼다.
9) 일시에 새긴것이 아니라 수백년에 걸쳐 남이 쓴 글씨위에 덧대기로 새긴것도 많으니 꼭 대학가 술집의 낙서판 같다.
10) 새긴 연장도 별똥별 쪼가리나 흑요석, 그리고 그후 무쇠 징으로 새겨젔다.
11) 좁은 바위 위에 여러 사람이 글자를 새기다 보니 아주 작을 글자가 많다.
12) 글자 그림들이 빽빽히 새겨 젔으나 너무 마모된 글자, 그림이 많아 해독하기힘든다. 그러나 글쓴이는 본론에 들어가 이 글자 하나 하나를 별도로 떼어 분석해 볼것이다.
6. 이 바위가 중요한 이유
이상 이 명마산 글쓴바위(글쓴이 추정. 이후 글쓴바위)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 어떻게 만들어 젔나 하는 의문을 푸는 열thl인 동시 우리 민족의 역사까지 다시 써야할 귀중한 유산으로 우리의 국보는 물론 유네스코에 보고하여 인류문화유산으로 보전해야할 귀중한 유산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유물은 우리 한반도에는 아직까지 없었고 외국에만 있었다.
7. 외국에서만 나타난 원시한글 의 흔적
지금 일부 학계, 특히 한글학회 일부 회원중에는 세종전 원시 한글은 있을 수 없다 하며 만약 세종전 언문이 있었다면 그 흔적이 하나 라도 남아 있어야 할텐데 그 흔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가끔씩 있었으니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 지하 6m 깊이에서 발굴된 4000년전 녹각에 새겨진 ㅅ ㅈ × ㅜ 등의 문자가 바로 원시 가림토문자이며
중국 섬서성 西安 앙소문화 반파유적지. 5천년전 깨진 질그릇 조각에서 발견된 원시 가림토
ㅅㅅㅅ
ㅈ
누리라는 ㄴ 의 원형에 햇빛이 내리는 / 으로 한웅(환웅) 한 민족의 한
T 자가 아니로 羊족을 표시하는 양머리
아홉의 울타리 같기도 하고
세워놓고 보면 숫자 같기도 한데 금문 갑골문 등으로 보았을 때는 아직 숫자가 생길 때가 아니지만 만약 숫자라면 6 이라 10.
일본 신사에 보관된 신대문자( 神代文字)는 후기 가림토이고
현재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 통용되는 부라미 문자 역시 현재 인도에 가보면 그대로 인데 이는 가림토가 수메르 지방을 겉쳐 인도쪽까지 흘러 들어 간것이로 보인다.
이상 외국에서는 원시 한글의 흔적이 있고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 민족의 원 개국지인 중국 대륙에서 발견된 것이니 우리 한글dml 원형이고, 신대문자는 이것이 일본으로 전해져 그 전해준 이들이 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므로 神代文字 이며 인도 구자라트 글자는 우리와 언어 등으로 볼때 동족으로 추정되는 수메르 인을 통해 인도로 전해 졌을 것으로 본다. 하여간 공룡 발톱 하나만 발견되도 공룡이 살았아는 증거에는 충분 하므로 원시 한글의 한 글자 흔적만 있어도 원시 한글은 있었던 것이니 구지 한반도에서 유물이 나타 나지 않으니 원시한글이 없다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특히 한반도는 지리 풍토 여건상 상민들이 나무나 종이 등에 써 놓았을 유물은 보전 될수도 없었을 것인에 이 명마산 글쓴바위 만큼은 유일한 석각본으로 한반도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니 더욱 중요하다.
8. 명마산 글씨쓰는 바위가 그간 무시된 이유.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귀중한 유산이 왜 숨겨져 있었으며 얼마전 재야 사학자 예대원 선생과 부산일보등 발표가 있었는데도 지금껏 별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간 이 바위를 연구 했다는 학자들의 말이다. 1). 민정음은 予爲此憫然親製二十八字라 했음으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 한것이고 세종 전에 한글이 있었다는 말은 언어 도단이다. 2).가림토 란 말은 환단고기에 실려 있는 말인데 환단고기 조차 위서라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3) 명마산 가림토 바위는 문자 또는 암각화라고 보기에는 형태의 연결 또는 단위의 구분이 어렵다. 4) 패여진 모양(단면),이나 글자 형태가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서 새겼을 때는 시간에 의한 풍화현상으로 테두리가 부드러워지는 데 비해 테두리가 날카롭게 선명하여 사람의 손에 의한 새김 보다는 암석의 형성 또는 풍화 과정에서 자연발생된 듯한 느낌이든다. 팔공산의 흔한 화강암이 아니라 그 산(명마산)의 주된 구성 암석인 퇴적암으로 바위가 놓여진 위치에서는 암반이 흔하게 노출되지 않은 지점이라서 유독 이 바위에 가득 글귀 또는 암각화를 새겼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6)추정 : 고대 문대 또는 암각화로 사람의 의한 창작물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럴 경우 문자 또는 그림으로 고고학적 가치를 가지므로 간혹 신문지면에 오르내리게 된 것 같다. 좀더 세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 볼 필요가 있음
7).그러나 한편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72·역사학) 명예교수는 '바위에 암각된 문자가 가림토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가림토 여부를 판명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8).국사편찬위원회 김광(54·국문학) 박사는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돼 언어 역사 민속학 인문지리학 등 여러 분야 학자들이 공동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경산=정철수기자 csjung
그러나 그 가림토를 인정 하는 분들 조차도 아직껏 연구하여 발표한 실적은 없는것으로 안다. 따라서 글쓴이는 위 학자들의 이론을 뒤업고 아래와 같은 순서로 원시 한글의 존재와 그 만들어진 동기까지 밝힌다. 우선 지금도 훈민정음전 원시 한글이 있을 수 없다는 분들을 위해 다음 글 부터 제시 한다.
1)훈민정음은 予爲此憫然親製二十八字라 했음으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 한것이고 세종 전에 한글이 있었다는 말은 언어 도단이다.
먼저 글쓴이 카페 '가림토 해독'에서도 말했지만 훈민정음은 분명 세종이 새로 28 자를 창제한것이지만 그것은 전연 무에서 창조한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글자를 가지고 새로 창제한 것이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면 지금 전투기나 보잉 747 여객기는 분명 라이트 형제가 프로펠러로 만든 비행기가 아니라 제트엔진이니 그 추진 방법서 부터 다른 현대인이 창작한 비행기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원리, 즉 공기를 앞에서 빨아 뒤로 밀고 날개로 나는 원리는 라이트 형제의 비행원리를 모방한것이다. 또 자동차 페차장에서 각 차의 부속을 빼어 헌 차 보다 더 좋은 차를 만들었다 해도 이는 먼저 헌차의 부속을 쓴것이지 전연 無에서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 세종전에 이미 원시 한글이 었다는 말을 증명 하기 위한 몆가지 증거를 제시 한다.
(가) 字倣古篆 1) 훈민정음은 非新字也 (훈민정음은 새 글자가 아니다.) 字倣古篆(옛 글자를 모방한 것이다) 이는 세종말씀이다. 2)象形而字倣告篆 ( 그 형태는 옛 글자를 모방했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이다.
이에 대해 한글학회 회원중에는 옛글자를 모방했다는字倣古篆 은 원시 한글이 아니고 한자나 다른 나라 글자라 한다. 즉 세종이 우리 조상이 쓰던 글자를 모방해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말에는 세종을 모독 한다며 쌍지팽이를 집고 일어 서면서 세종이 다른 나라 사람의 조상이 만든 글자를 모방했다고 우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외국인 조상이 만든 글자를 모했다는 말의 반론이다.
1)古人 이란 말은 자기 조상이 아니면 쓰질 않고 2) 한자나 일본 글자에는 ㅇㄴㅂ 없다. 3)알파벳에는 ㄱ ㄴ ㄷ ㄹ ㅂ ㅅ ㅈ ㅊ ㅎ 등이 없다. 4) 이외 당시 몽골, 여진 어느 나라 글자도 한글과 닮지 않았다.
(나) 최만리등 상소문중
1)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언문은 다 옛자를 근본으로 했으므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하시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을 모방했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것과 달라서 실로 근거한 바가 없사옵니다.
2)...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전 조정(고려?) 때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지금 같은 문명의 치세에는 오히려 글자를 분별하여 도에 이르게 하는데 뜻을 두어야 하는데,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3)...上覽䟽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대왕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등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말하기를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 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
4)今此諺文合諸字而並書變其音釋而非字形也 (...지금 언문은 모든 (옛) 글자를 합하여 아울러 쓰고 그 소리의 해석만 변경하였으니, (한문) 글자의 형태가 아닙니다.)
5) 借使諺文自前朝有 (...전 조정 때부터 있었던 언문을 빌려 썼다고 하나...)
6)...况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 ...하물며 언문은 문자(한자)와는 맹세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 것들이 전용하는 말일 뿐이옵니다.)
이상 글을 제시 했는데도 세종전 원시 한글이 없다고 우기는 분은 세종이나 정인지는 순 거짓말 쟁이 이고 또 세종실록을 위서로 보는가?
2).가림토 란 말은 환단고기에 실려 있는 말인데 환단고기 조차 위서라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환단고기가 필사 과정에서 가필도 많지만 진필도 많다는 증거를 글쓴이는 30여 가지를 밝힌바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에 가림토가 허위냐 아니냐를 따 지기 전에 그 가림다와 가림토 라는 말이 두가지로 전해 온다는 사실로 부터 가림토가 실재 했다는 증거를 든다.
(1) 가림다(加臨多) 가림다란 말은 이조 연산군때 사람 이맥이 전해지는 사서를 보고 쓴 환단고기 소도경전에 있는 말이고 이는 필자의 졸저 등에서 밝힌바 있지만 한자의 뜻으로는 말이 않된다. 즉 加 는 더할가 이고 臨은 임할 림 이며 多는 많을 다 이다. 이게 말이 되는 단어 인가?
그러나 ㄱㄴㄷ..ㅎ 속의 뜻과 우리 뿌리 말을 알면 쉽게 이해가 간다. 즉 아기들이 낮가림을 한다는 말은 분별 한다는 말이고, " 이것으로 인사말을 가름 하겠습니다" 에서 가름은 인사를 대신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검둥이, 감둥이가 같은 말이고 파릇파릇, 퍼릇퍼릇, 푸릇푸릇, 포릇포릇등 ㅏ ㅓ ㅗ ㅜ ㅣ ㅡ 등 아래아 점을 발음으로 모음이 혼동되던 시기의 아기들 낮가림이나 인사말 가름은 같은 말이고 이는 분별하여 대신 한다는 말이니 모든 사건의 표현인 말을 분별 대신 한다고 할때 말의 대신이 가림다가 된다. 여기서 '다' 는 4 백년전 훈몽자회만 보더라도 地는 따地가 아니라 다地 이다. 즉 소주가 쏘주가 되고 번데기가 뻔데기가 되듯 지금은 격음이 되어 따지 이지 원래 땅은 다였다. 이는 文字라는 한자가 생기전 우리말이 바로 가림다였다. 따라서 이 원문을 필사한 이맥도 그 加臨多 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는채 그대로 필사 했을 것이다.
(2) 가림토(加臨土) 가림토라는 단어는 고려때 사람 행촌 이암이라는 분이 전해오는 사서를 보고 쓴 단군세기에 있다. 이 加臨土는 위 加臨多의 多 와 土자가 다를 뿐이고 이 加臨土의 한자 뜻으로도 역시 말이 되지 않으니 그 글을 필사한 이암도 加臨土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대로 필사 했을 것이다.
그러나 加臨土는 위 加림多의 땅 이라는 우리말 '다'를 土로 바꿨을 뿐이니 같은 말이다. 따라서 가림다, 가림토는 같은 말이고 이렇게 먼저 글을 필사 하는 이들 조차도 무슨 뜻인지 몰랐던 단어를 그대로 필사했다는것 은 가림다, 가림토가 필사가 들의 위작이 아니었다는 말이며 또 그들이 보던, 전해 오는 사서가 달랐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환단고기 조차 이런 부분은 위서가 아니란 말이 된다. 즉 위서나 가필가들은 구태어 자기가 모르는 단어로 위서를 만들지는 않는다.
참고로 하나더 말한다면 위 가림다를 쓴 이맥은 가림토를 쓴 행촌 이암의 12 대 종손이다. 그는 너무나 강직하여 연산군에게 비위를 맞추지 못하고 충언을 했다가 귀양살이 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기 12 대 조상 이암이 쓴 가림토 라는 말이 있음에도 구지 가림다라 한 이유는 자기에게 전해지는 사서는 가림다였기 때문에 강직한 그로써는 조상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자기 소신껏 필사 한것으로 본다다. . 3) 명마산 가림토 바위는 문자 또는 암각화라고 보기에는 형태의 연결 또는 단위의 구분이 어렵다. 명마산 석각본이 광개토대왕 비나 그외 충신 열사비 처럼 후세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것 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의 착각이다. 이 석각본은 대략 3~천년 당시 왕이나 소의 지식층인 선비는 지리 여건상 경주나 대구 등에 살았겠지만 천민이었던 무당, 풍각쟁이, 남사당 패들은 당시 앞산과 뒤 명마산 사이에 개울물 밖에 없는 좁은 골에 여러 세대에 걸처 몰려 살면서 각자 당시 쓰던 그림글자 금문(金文), 그리고 그림이 글자로 변하는 신지녹도전자(神誌鹿圖篆字), 신지신획(神誌神劃), 그리고 금문이 한자로 변하는 갑골문과 그림을 한두 점씩 젯상 바위에 새겨놓 그 위에 제물을 바치며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 새겨진 것이니 체계가 서 있을 수 없고 그것이 오히려 더 진실된 기록이다. 즉 어떤 체계가 있는 비문이면 조작된 사연도 있을 수 있으나 이 젯상바위 위의 석각본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으니 진실일 것이고 이 석각본을 종합 분석해 보면 당시 사람들의 환경과 사고를 그대로 짐작 할 수 있다.
4) 패여진 모양(단면),이나 글자 형태가 사람이 도구를 사용해서 새겼을 때는 시간에 의한 풍화현상으로 테두리가 부드러워지는 데 비해 테두리가 날카롭게 선명하여 사람의 손에 의한 새김 보다는 암석의 형성 또는 풍화 과정에서 자연발생된 듯한 느낌이 들었든다. 글자가 자연 발생적이라? 이는 시각장애자가 위 사진만 더듬어 봐도 사람이 새긴 글자임을 알수 있는 터무니 없는 말이다. ㅎㅎ 오히려 이 암각은 그간 풍화작용에 의해 글자. 그림들이 마모되어 해독하기 힘든것이 더 많다. 그렇다면 그 당시 쇠 징도 없거나 시원치 않았을 당시 강한돌로 새기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이는 절대 애들 작난이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5) 바위가 놓여진 위치의 산은 약간(경사면 30도 정도) 가파른 산으로 바위의 재질이 인근한(8키로 정도) 팔공산의 흔한 화강암이 아니라 그 산(명마산)의 주된 구성 암석인 퇴적암으로 바위가 놓여진 위치에서는 암반이 흔하게 노출되지 않은 지점이라서 유독 이 바위에 가득 글귀 또는 암각화를 새겼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글바위 위쪽 남근바위(장군바위) 나 더 올라가 갓바위( 당시는 불교가 들어 오기 전이니 갓바위 부처는 없었을 것임) 암석같은 화강암이 아닌것은 사실이나 그 부근에서 그런 글자를 새겨 놓을 장소는 그곳 밖에 없다. 즉 그 글 바위는 후세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새겨 놓은 것으로 그들은 암석 재질이 단단한 화강암이냐 아니냐는 따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글씨를 쓴 바위가 젯상 노릇을 했으며 우리가 제사 지낼때 북쪽을 향해 병풍을 치듯이 북벽에도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재질이 비슷해 보이는 다음 석각본을 제시 한다.
이 그림은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로 국보 285 호 이다.
6)추정 : 고대 문대 또는 암각화로 사람의 의한 창작물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럴 경우 문자 또는 그림으로 고고학적 가치를 가지므로 간혹 신문지면에 오르내리게 된 것 같다. 좀더 세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 볼 필요가 있음
그저 고대 암각화라면 사람들의 호기심이 있을것 같아 부산일보등에서 기사화 했다는 말인데 어떻게 고대 유물을 연구 해 보지도 않고 이렇게 안이한 생각을 하는가?
7).그러나 한편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72·역사학) 명예교수는 '바위에 암각된 문자가 가림토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가림토 여부를 판명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8).국사편찬위원회 김광(54·국문학) 박사는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돼 언어 역사 민속학 인문지리학 등 여러 분야 학자들이 공동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경산=정철수기자 csjung
지당한 말씀들이다. 따라서 글 쓴이 이 분석 말고도 더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제2편. 원시한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밝혀지는 깜작놀랄 명마산 글씨 바위
1. 명마산 글쓴바위 해독에 앞서서
옛 석각본 해독에 있어서 너무들 안이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간 우리나라에도 널려있던 귀중한 석각본들이 방치 되어 신비로만 남아 있었다. 옛 석각본을 해독하려면 우선 그 부근의 지리적 요건과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우리 상식이 아닌 그들 생각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명마산 글쓴 바위 글자 해독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글쓴이가 그간 해독했던 남해 낭하리 석각본 예 부터 든다. 낭하리 석각본의 설명은 이번 명마산 예와 상관없는것 같지만 그 글자 새김이 거의 같고 또 해독 방법도 같은 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혹 앞으로 많은 분들이 이 명마산 석각본을 찾아 연구 하고 또 다른 석각본도 찾아 연구 할때 도움이 될까해서 낭하리 석각본 이야기 부터 한다.
2. 남해 양아리 석각본 해독 낭하리 석각본은 이조때 부터 학자들이 탁본을 해 연구 했으나 아무 성과도 없었고 심지어 임승국 박사의 한단고기 에도 그 그림이 올라 있으나 아무런 해독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글쓴이는 현지 답사를 하지 않고서도 그 석각본을 간단히 짐작 했고 현지 답사후에는 보강 증거 까지 얻어 이제는 반논을 걸 사람이 없다. 따라서 이 역사적으로 신비에 싸였던 낭하리 석각본는 예전과 달리 지금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모두 글쓴이 글이니 이제 신비에 싸였던 낭하리 석각본의 신비는 풀렸다고 자부 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 세상 무슨 사물이건 판단 하려면 단순히 그 물건만 보지말고 전후 좌우 의 상황을 살펴 봐야 실 체를 파악 할 수 있다. 즉 이 낭하리 석각본을 고고학 전문가도 아니고 어떤 학위도 없는 글쓴이는 어떻게 해독 했는가? 이는 단순히 사물을 판단하려면 고정된 과념으로 보지 말고 상하좌우등 전체적 모습으로 판단하면 된다.
이 석각본은 그간 서불과차(徐市過此)라 해서 진시황의 신하 서불이 동남 동녀 5 백씩을 데리고 지나간 흔적, 또는 환웅이 사냥 나왔던 기록이라는등 역사적으로 의견이 분분했었다. 그러나 글쓴이가 이를 해독해 본 결과 이것은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 했으며 이는 밝달임금 (단군)의 도를 바뜨는 삼시랑(三侍郞), 아니면 당시 그 지방의 당골레 들이 천제를 지낸 흔적으로 보는데 이 석각이 중요한것은 그림이 신지녹도문, 금문, 가림토가 혼용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는 그림이 문자로 발달하는 과정이 되므로 우리 국보뿐 아니라 세계 인류문화 유산으로 등록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승국번역 주해 한단고기 48 쪽. 남해도 낭하리 고각)
( 임승국 말. 남해군 이동명 낭하리에 있는 '서불제명'각자. 이를 한글 이전의 고자라고 추즉하는데 확실지 확실는 않다. P235 참조)
그래서 아직 고정된 관념으로는 해독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나 위 사진을 한번 꺼꾸로 뒤집어 놓고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 글쓴이가 바로잡아본 그림 (그림, 글자의 제세한 해독은 글쓴이 카페에...)
이렇게 보면 우선 수레를 탄 사람이 있고 그 뒤에는 天 자 같은 사람이 그 수레를 밀고 있으며 그 주변은 잡다한 그림이있다. 이는 잡다한 그림이 어떤 글자로 만들어 진다는 사실만 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림이다. 그렇다면 왜 오래전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어렵게 바위에 새겼을까? 이는 현지 탐방을 해보고 그 지형과 부근 지형지물을 살펴 봐야한다.
아니나 다를까 현지 답사 해 보니 이 석각본 바로 앞에는 다음 사진과 같은 바위가 있고 그 바위는 그 위 지금 단군성전 쪽을 향해 올라간다.
그런데 신기 한것은 보리암 뒤에도 같은 형태의 바위가 단군성전 쪽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위들이 만날 꼭지점엔 옛날서 부터 이 수례탄 바위의 인물들이 반듯이 찾아 가야할 어떤 상징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위에 올라가 단군 성전 뒤에가 보니 다음과 같은 돌이 있는데 이 돌은 옛 부터 곰네(웅녀) 바위 라는 것이고 이 곰네는 우리 민족의 성모 이기 때문에 이 금산(錦山) 조차도 이성계가 이 산에서 기도 할때 왕이 되면 이 산을 모두 비단으로 덮는 다고 산신령께 서원 했으나 막상 왕이 되자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을 수 없으니 그 대신 산 이름이나 錦山 이라고 사기 치기 전에는 성모산 이라 했단다.
그렇다면 위 바위들 즉 수례를 타고 가는 바위상 인물은 분명 환숫(환웅)일것이다.
곰네 할머니(웅녀)는 원래 삶신할미다. 따라서 당시 인근 아들이 없는 집에서 아들을 기원하려면 곰네 상 바위로 가야 하는데 그 아래 길목에서 곰네를 찾아 가는 바위가 있으니 이는 분명 환숫 바위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려면 곰네 할머니 한테만 빌 것이 아니라 당연히 환숫상 한테도 빌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숫상 바로 앞에 가기는 험한 낭떠러지 골짜기라 지형상 불가능 하고 그 앞 어디에서 빌어야 하는데 마침 그 앞에는 마치 병풍을 쳐 놓은것 같은 바위가 있었을 것이니 그 앞에서 제물을 차려 놓고 병풍에 써 붙일 지방대신 그 병풍 머리 위에 그 환숫 상과 그 부근 풍경을 그리고 당시 그들이 쓰던 원시 가림토와 금문등을 혼용해서 글자를 새겨 놓았을 것인데 그 잡다한 그림이나 글씨를 해독해 보면 이는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이기도 하다. ( 자세한 설명은 글쓴이 카페 한겨레 산하에)
그러나 그 병풍바위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각 변동으로 뒤로 넘어 졌고. 따라서 병풍 바위의 석각본은 뒤로 보이게 됬으며 그 석각본을 탁본 하려는 학자들은 이런 계산도 않고 쉬운대로 입구에서 탁본했으니 꺼꾸로 나올 수 밖에 없고 이 꺼꾸로 된 탁본으로는 무슨 글자인지 해독이 불가능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판단은 이렇게 단순한 사고로는 되지 않는다.
여기 나오는 두 아가씨는 당시 글쓴이가 하도 석각본을 찾지 못해 금산을 헤매다가 곰네님 한테 핸드폰ㅎㅎ을 쳐서 보내준 등산객 들이다. 즉 자기 운을 창조하는 단전호흡 법의 일종인 해오름 관법으로 곰네 할머니가 보내준 천사 들이다.ㅎㅎ. (재미난 이야기는 필자 카페에 있으니 생략)
이 낭하리 석각본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분은 글쓴이 카페 한겨레 산하 957~960 번을 보시면 무척 재미 있을 것이다.
3.명마산 글쓰는 바위 지형지물 글쓴이 카페 독자님 이신 좋아님 안내로 명마산에 갔다. 앞으로 가실 분들을 위해 찾아 가는 길 까지 말한다면 동대구 에서 갓 바위 가는 길로 쭉 18 k를 더 가면 대경 LPG 충전소가 나오고 조금 가면 U 턴 할 수가 있다.
이 사진에서 대경충전소 뒤 산세가 바로 명마산 앞 산세 이다.
아래가 명마산인데 인터넷에서 취한 것이다.
대경충전소 에서 좀 조금 더 가 U 턴 을 하면 다시 대경 LPG 충전소 반대편 길. 여기서 보면 무슨 연수원인지 들어 가는 길 이 있는데 진입 금지가 되 있고 그 옆 아래 사진과 같은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한 3 백 메터 콩크리트 길로 올라 가면 어느 묘가 있는데 그 묘 때문에 콩크리트 길이 되어 있고 그곳은 세갈래 길인데 좌측 비 포장 좀 험한 길을 좀더 올라 가면 바로 산 계곡에 마당 바위가 있으나 이는 글쓴 바위가 아니고 조금만 더 아래 첨부하는 사진을 보며 조금만 더 올라 가면 바로 그 바위가 보이는데 나뭇가지등 덤불이 발길을 막는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거지 삼시랭이 같은 사람은 글쓴이 이고 그 뒤에 쓰레기가 보이는 석벽위에 글쓴 바위가 있다.
제상 같이 누어 있는 바위가 글쓴 바위 이고 그 뒤 서 잇는 바위는 북향이니 제사 지낼때 병풍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병풍바위 위에서 내려 찍은 사진
희미하게 글자들이 보인다.
글쓴바위 밑 부분. 아래 그림 큰 새와 그 뱃속에서 새끼 새를 찾지 못하면 더이상 명마산 글자 그림 해독을 기대 하지 말고 그만 읽을것
이 암반에 새겨진 글자, 그림들은 먼저 말했듯이 시각장애인이 사진을 더듬어 봐도 자연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글씨를 새긴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글쓴이의 어설픈 추리 보다는 좀더 근거를 찾아 올라가 보자.
인근 등산가 들의 말에 의하면 이 글쓴 바위 뒤로 더 올라가면 다음 사진과 같은 장군바위가 있다 하는데 장군바위란 근대 우리 생식기를 천시 하는 불교 유교에 의해 생긴 말일것이고 그 모형으로 봐서 환숫 바위 즉 솟대(남근) 바위였을 것이다.
( 역시 야후에서 취한 사진인데 남근상 밑에는 해를 상징하는 ㅇ 의 돌이 있고 그 아래도 역시 ㅇ 과 알을 상징하는 돌이 있으며 각도에 따라 달리 본다면 남근상 뒤 바위는 고환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바위 아래에도 사진과 같이 천제를 지낼 장소는 있을것 같으나 이는 자연석이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 놓은 인공 콘크리트 일것이고 천연석 이라 해도 감히 이 신성한 바위 아래는 낙서장 같은 글자는 새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그 위로 더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갓바위가 나온다 하는데 이 갓 바위 부처님상은 삼국초기 불교가 들어 왔으니 당시 갓 바위 부처상은 없었을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무시 한다.
( 역시 야후에서 취한 사진)
이런 전후 좌우 관찰법으로 명마산 글쓰는 바위 암각을 검토한 결과는 이 암각은 가림토뿐 아니라 금문과 심지어 금문이전의 그림 까지 그려져 있는데 이 석각을 새긴 분들은 앗선( 첫조선) 이 망하고 진한 이었던 밝달임금의 후예들이 마한( 나중 고구려) 에서 남쪽땅 한쪽을 얻어 신라 를 세운 이들이 새긴것 일것이다. 이렇게 추리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4.옛 기록으로 본 증거 <삼국유사>
<후한서>에 이런 말이 있다. ' 진한의 원로들은 스스로 말하길 진(秦)에서 망명한 이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의 땅을 베어주어 그들에게 주고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 하며 진나라 말에 가까운 까닭으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했다고 한다.' (後漢書云秦韓耆老自言秦之亡人內適韓國而馬韓割東界地以與地 相呼爲徒有似秦語故或名之爲秦韓(삼국유사 秦韓)
여기서 밝달임금(檀君)의 첫 도읍지는 아사달(阿斯達)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잘 안다. 그러나 이것이 한자로 써 있다하여 한자의 뜻으로는 말이 않되고 우리말 처음 이라는 아시 김매기,아시 빨래 하는 아시 > 앗 과 같은 뜻인 앗 > 아사 (朝日신문 아사히 신문) 의 아사 > 앗 에 음달 양달 하는 달이 붙었으니 아사달은 처음땅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 땅에 처음 세운 나라는 당연히 '아사선 > 앗선이 되고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는 삼국초에나 정착되니 밝달임금은 檀君이 어떤놈인지, 朝鮮이 어떤놈이 세운 나라인지 모른다. 즉 우리 말을 한자로는 적을 수 없으니 삼국 이후에나 밝달임금, 앗선을 이두로 쓴것이 바로 檀君이고 朝鮮이다.
밝달임금은 이 앗선을 혼자 다스리지 않고 서쪽에 붉=밝한(卞韓)과 동쪽에 땅을 뜻하는 마한= 말한(馬韓)을 제후국으로 두고 자신은 사람을 뜻하는 선한(辰漢) = 진한(辰韓)의 천제가 되는데 이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진본 천부경의 핵심 인본주의로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것이 바로 사람이고 그래서 天一 地一 太一(人中 생식기가 붙은 男)중 太一이 最上貴 라는 것이며 이 증표가 바로 우리 말과 글자의 모태가 되는 천부인 天地人 원방각(ㅇ ㅁ △) 중에 사람을 상징하는 ㅅ 의 모태 △ 이다.
그렇다면 위 후한서" 진한의 원로들은 스스로 말하길 진(秦)에서 망명한 이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의 땅을 베어주어..." 라는 말은 무엇인가?
여기서 한자로 진한(秦韓)이라 했다 해서 진시황(秦始皇)의 秦나라가 아니다. 우리나라 아래아점 발음 일어 선다는 선= 신 이고 辰(설신)과 辰(지지 진)은 같은 글자이며 이는 秦 과 같은 음이다. 또 진(秦)과 주(奏) 는 아래에 禾 가 붙느냐? 天 이 붙느냐만 다르니 사실상 혼동이 쉬워 어떤 학자들은 원 우리 삼한중의 천제국 이었던 선한 =신한(辰韓)을 진한( 秦韓), 또는 주한(奏韓) 이라고 하다가 혼동되니 아예 주신한(奏辰韓),>주신(奏辰) 이라 하여 우리 민족의 원 이름은 '주신'이고 이는 하느님이 주신나라 라고 웃지도 못할 학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마한이 떼 주었다는 한자표기 진한(秦韓)은 바로 밝달임금의 천제국 이었던 선한 이고 그들은 앗선(첫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하자 버틸때로 버텨 보가가 결국 보따리를 싸 들고 육로나 해로로 한반도로 내려와 당시 마한 땅이었던 한반도에서 같은 종족이었기 때문에 서로 부르기를 도(徒)라 한것이지 중국 후한서 내용대로 그들 쓰는 말이 " 진나라 말에 가까운 까닭으로 혹은 진한(秦韓)이라고 했다" 는 말은 잘못이다.
이 글을 근거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성립을 보면 다음과 같다. 1)고구려(高句麗) - 원래 마한 이었으나 우리 원 종족 이름이 사람이란 굴 구멍(여음)에서 태어나 굴속에서 살다가 굴구멍에 길게 잠들었을 것이니 굴이 > 구리, 골이 > 고리, 였을 것이고 그래서 고구려, 고려 일것이며 그 고구려는 마한 자리이니 중국대륙 동쪽과 한반도 전체 이었을 것이다.
2)백제(百濟) - 百의 우리말은 온 누리 하는'온' 이고 온은 바로 해 이기 때문에 숫자 百이 물을 건너온것(濟)이 아니라 중국 서남부, 즉 산동반도에 있던 해= 붉= 밝= 卞韓 의 유민들이 마한 땅으로 건거온 것이 白濟이다. 따라서 백제의 원 이름은 白濟이다. 이 白濟 유민들이 아직 나라도 없이 살던 땅에 주몽의 후처 솟은네(召西奴)의 아들 온조는 전처 소생인 유리 태자가 다음 왕자리가 되니 솟은네는 목숨의 위험성과 또 나라를 세우려는 욕심으로 白濟 유민 땅으로 남하 하여 그 땅에 이름을 붙인것이 현재 百濟다. 하여간 솟은네는 나라를 셋 씩이나 세운 여걸이니 솟는네 인데 이를 한자로 쓸 수 없으니 서쪽에서 온 계집종 이라는 뜻의 召西奴라 쓰니 말이 않된다
3)신라(新羅) - 밝달 천제국인 선한= 신한이 지나족 한나라에게 망하자 그 유민들이 마한으로 부터 한반도 남동쪽 땅을 얻어 나라를 세웠고 그 나라 이름을 역시 선한의 우리말 섯벌 > 서라벌 > 한자로 新羅라 했지 선한= 진한(辰韓), 진한(辰韓, > 진한 (秦韓)이 아니다. 따라서 앗선의 삼한이 망하기 전 까지 한반도 전체는 마한 땅으로 본다.
여기서 명마산 글쓴 바위 해독을 위해서는 이 글자를 새긴이들은 앗선(첫조선)유민중 선한(秦韓) 유민으로 보기 때문 신라의 역대 시조 부터 제세히 알아 본다.
1) 박혁거(朴赫居世)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우리의 첫 조선인 앗선이 한나라에게 망하고 그 유민들은 마한에게서 동남쪽 땅 한조각을 얻어 살았다. 여기서 삼국유사, 삼국 사기에도 기록되 있는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를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인터넷 그대로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村)이 있었다. 1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암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部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 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2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라고 읽고 혹 탁탁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道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설치한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3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俱; 구仇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4는 취산(자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빙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타;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미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部)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년(32)에 야 비로소 여섯 부(部)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前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하 뻥을 더 알려면 인터넷에서 삼국유 박혁거세를 읽어 보면 될것이므로 차라리 글쓸이가 유모어로 각색 추리하여 현대 상식 으로 소개 한다면 다음과 같다.
그 마한으로 부터 동남땅 한쪼가리를 얻어 살던 진한 유민 무리는 6 개 부족으로 살았고 그중 우두머리인 알평(閼平)은 나머지 5 촌장을 데리고 구라를 쳤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제멋대로 까부니 덕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 부터 세우자. 우리 저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보자." " 아니 어진이를 찾는디 왜 높은곳으로 올라 간대유?" " 시꺼 시키면시키는대로 혀"
그래서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이 보였다. " 저 양산이 보이지? 그 밑을 봐 그게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인디 그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지?" " 나는 않보이는디유?" " 너는 너무 늙어 안보이는기여. 그리고 거기에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지? 우리 거기 찾아가 보자" " 나는 그런 말 같은것은 보이지도 않고 거기 가려먼 뭐하러 올라 왔시유? 여기서 내려가 거가 갈려면 너무 먼디유" " 시꺼 내가 있다면 있는 것이고 가자면 가는기여"
그들이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말은 없었고 한 여인이 아기를 낳아 태줄도 못 끊고 있어 그 태 가 알같이 보이기도 했다. " 말 이라더니 아기를 낳은 여인이네요. 알평님 애인 인감유?" " 얏마 말은 사람을 보자 여인으로 변했어. 원래 말은 사내가 타는 짐승이고 여자도 사내가 타는짐승, 아니 사람여" " 그건 말 되는 말이네유"
우선 산모를 수습하고 찢어진 태 옆에 아기를 씻기고 보니 붉고 아름답게 빛났다. 이 아이가 불그그스럼 하니 왕을 삼아 불구내왕(弗矩內王) 이라고 하고 또 이 세상을 밝힐 밝혁거세왕(赫居世王)라고도 하자 누구 이의 있나? " 차라리 박 같은 알 속에서 나왔다구 박씨라 하지유?" " 시꺼 그렇게 하면 밝달임금의 후예인 우리가 밝 소리를 하는데 의미가 없어져" " 좋아유. 그런디 의문이 하나 있시유. 알평님은 이 알 속에서 나온 아이를 미리 부터 알고 있었던것 같은디 혹 저애 엄마가 알평님의 애인이고 서로 짜고 우리에게 뻥을 친건 아닌감유?" " 인마 그런것 따지지 마. 그랬다가는 저 애가 왕이 됐을때 모든 백성이 저 애를 따라 주지 않아" " 좋아유. 그럼 왕이 정해 졌으니 왕비는유?" " 따라와봐 " " 또유? 이젠 다리 아픈디.."
그들은 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 또는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 함) 가에 갔더니 또 갓 나은 계집애가 있었다. " 이 아기는 계룡(鷄龍)이 나타나서 왼쪽 갈비에서 나은 아이지만 알영정 에서 나왔으닌 알영이라 한다" " 왼쪽 갈비대서 나은건 부처님 뿐인디..." " 인마 부처는 2 천년 후에나 나오는 사람야" " 그런가? 하여간 먼저 박혁거세도 알 속에서 나왔고 이 아기도 알영정에서 나왔으며 알평님도 알씨 이니 알평님의 또 다른 애인 자식인가유? 그리고 둘을 결혼 시키면 남매 결혼이 되는디 근친 상간이 아닐까유? " " 인마 어미가 다른 남매 결혼은 우리 신라는 그만두고 고려때 까지 이어저, 너 테레비 연속극 천태후도 보지 못했냐? " " 그래서 신라 왕들도 무지랭이구 고려도 무지랭이 왕들만 하다가 망하는 구나. 근디 알씨라고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는유? " 너 알이 뭔지 아니? " "새알 이지유" " 사람도 알에서 태어나. 너 아까 알에서 태어난 밝혁거세 보지 못했냐?" " 그런디 글쓴이가 말하기는 감둥이와 검둥이가 아래아 점 발음으로 같다는디 그렇담 알과 얼은 같은디 얼싸 좋다 하는 얼은 뭐고 민족의 얼을 찾아야 한다는 얼은 뭐래유?" " 인마 그것을 설명 하려면 너무 기니 글쓴이 카페에 들어 가봐" " 그럼 그러지유 그런디 저 애들은 알평님이 기를 건가유? " " 아니. 우리 집에서 세 여자가 기거 하면 세 여자가 서로 싸우니 밝혁거세는 소벌도리 공에게 키운다. 너 소벌도리가 뭔지 아니? 소벌도리의 소벌은 나중 우리 신라이름인 섯벌과 같은 뜻이고 한편 선한 이라는 밝달임금 천제국 이름 과도 같은 것이다. 알간?
2) 석탈해(昔脫解) 이 섯벌의 왕들은 반드시 자기 아들에게만 왕위를 계승시키지 않고 자기 친인척 중에 현자를 골라 세웠으니, 섯벌의 4 대 이사금(임금)은 昔씨인 昔脫解이다 이를 역시 삼국유 뻥 이야기를 그대로 인터넷에서 인용하면
남해왕 때에 아진포에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고 하였다. 그런 뒤에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다.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하였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석탈해 설화에 따르면 본래는 왜의 동북쪽 1천 리에 위치한 다파나국(多婆那國)[4] 출신으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임신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는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알을 버릴 것을 명했고, 왕비는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떠내보냈다. 금관가야의 바닷가에 닿았으나 가야인들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고,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이르니 이 때가 박혁거세 거서간의 즉위 39년, 곧 기원전 19년이라 하는데[5],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탈해가 왕위에 오른 57년에 그가 62세였다는 같은 책의 기록과 모순된다. 한편, 석탈해는 인도 타밀인으로서 촐라 왕국 출신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6]
여기서 글쓴이의 생각은 석탈해는 인도인이나 다파나국(多婆那國) 사람도 아니고 가락국 허왕후가 왔다는 인도 야유타국 사람도 아닐 것이다. 즉 외국에서 온 사람을 왕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유타 국은 지금 김수로 왕능 바로 앞에있는 파사석탑의 분석결과 이는 전 아유타 국이있었던 지금 인도의 아요디아 산이며 그 아래 쌍어문(雙魚紋) 무늬도 당시 아유타 국에만 있었던 것으로 볼때 인도 아유타는 수밀이 국 한 갈래로 본다. 따라서 석탈해가 인도에서 왔다는것도 진한이 망하자 그 유민은 환국 12 지국의 하나였던 수밀이 국과 그 의 일부인 아유타 국을 거쳐 왔을 것이며 알에서 나왔다는것도 환숫과 밝달임금의 후예임을 뜻한다
3) 김알지 자세히 쓴다 김알지의 족보를 거론하자면 우선 문무대왕 수중릉 부터 소개 해야 한다.
문무대왕이 재위 21년 만인 681년에 붕어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 구에 장사를 지냈다. 그러나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문무대왕의 수중 릉을 설명할 수 있는 비문은 1796년 정조 20년에 경주에서 밭을 갈던농부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당시 경주 부윤을 지내던 홍양호(洪良浩)에게 보고 되었으며, 그는 이를 탁본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이 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비문은 당시에도 심하게 마모되어 완전하게 읽을 수는 없었으나 전체적 내용은 대략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바다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사적 제 158호이며 대왕암으로도 불리고 있다.)
문무왕 수중릉 내부
681년 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그 유골을 동해구에 장사지냈으니 바로 대왕암이다. 바닷물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와 서쪽으로 흘러 나가도록 되어 있다. 물길은 인공을 가해서 만들었으며 중심부에 돌이 덮여 있는데 대왕암의 석질과는 다르다. 무게는 50톤이나 된다고 한다.
문무 대왕은 신라 제 30대 왕으로 태종무열왕의 맏아들이다. 김유신과 같이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무열왕이 돌아가자 즉위하여 당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당군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당이 백제와 고구려의 땅을 통치하려함에 다시 당군을 북으로 쫓고 한반도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죽은 후에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감은사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대왕암에 매장하였다. 이 수중릉인 대왕암은 육지로 부터 약 100m 떨어진 바다 속에 있으며, 암석 한 가운데 못처럼 된 물속에 괴석이 놓여 있다. 대왕이 동해 입구를 그의 장지로 택한 이유는 죽은 뒤 동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일설에는 여기를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린 곳(산골처)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문무대왕 비문은 당시는 별로 주목한 사람은 없었으나 문무왕의 후손이면서 옛 글자, 특히 옛 전자 등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추사 김정희가 탁본을 연경(지금 북경)으로 가져가 해독하려 하였다. 그러나 별 성과가 없었는지 그의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이 문무대왕비문에 글쓴이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이 비문에 당대의 학자들이나 지금도 알 수도 없고 풀 수도 없는 암호문 같은 것들이 쓰여있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화관지후(火官之后), 진백(秦伯), 파경 진씨(波鯨津氏) ,영원(靈源), 투후제천지윤(秺侯祭天之胤), 가주몽 (駕朱蒙), 성한왕 (星漢王) 등인데 그중 글쓴이는 화관지후(火官之后), 성한왕 (星漢王) 등이다 그렇다면 화관지후의 화관(火官) 은 바로 붉 = 밝의 벼슬이고 성환왕의 인터넷 검색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앗선(첫조선)을 무너뜨린 지나족 한나라 의 최대 고민은 북서쪽의 흉노였다. 여기서 흉노(凶奴)는 한민족의 한 갈래인 헝거리 인을 흉족이라고 볼때 밝달임금의 한민족 발음을 비하하여 韓을 凶이라 하고 그 민족을 흉족이라 한것으로 본다.
애래 글은 지나족 한나라 기록이다. 기마민족인 흉노는 농경민족인 한족의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치 세금이라도 걷듯이 쳐들어 와서 애써 농사지은 곡 물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기원전 14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한무제는 흉노 정벌을 결심하는 데, 무제의 외조카이기도 했던 곽거병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이 전쟁에 나 섰던 인물이다. 곽거병은 무릉박물관에 말을 타고 흉노를 짓밟는 석상이 있 을 정도로 흉노 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흉노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준 최초의 인물이기에 무릉박물관을 그의 묘자리에 세운 것이다. 우리에게 곽거병은 ‘한서’ ‘곽거병전’에 나오는대로 “휴도왕이 하늘 에 제사 지내는 금인(金人)을 몰수(收休屠祭天金人)”하고 휴도왕의 태자 김 일제를 한나라로 끌고온 인물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한나라와 결사항전을 주 장하던 휴도왕은 항복을 꿈꾸던 혼사왕에게 살해당하고, 김일제는 어머니 알 씨(閼氏), 동생 윤(倫)과 함께 한나라로 끌려왔다. 따라서 김일제는 흉노의 태자에 서 한나라 왕실의 말을 키우는 마부로 전락하게 되었다.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다. 키가 8척 2촌, 용모는 위엄이 있었다. 한무제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음에도 신중하여 과실이 없었고, 망하라(莽何羅)의 한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거기장군 (車騎將軍)에 이어 투후(秺侯)에 봉해졌다. 그 뒤 한무제가 죽으면서 어린 아들 유불릉의 후견인으로 지목하여 소제를 보필하기도 했다. 사후 한 무제의 묘 옆에 곽거병과 함께 배장되었다.
후한과 맞서 싸우던 김씨들은 불리해지자 장안을 떠나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일부가 한반도 남단까지 이동해 경주 김씨와 가락 김씨를 세운다는 것이 일부 학자들의 견해이다. 왕망 때 사용했던 오수전(五銖錢)과 화천 (貨泉)이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그리고 평양 등 한반도의 서북부와 한반도 남단 김해 및 제주도, 그리고 일본 규슈 일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하게 출토되는 것은 이런 이주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 남부까지 흘러들어온 것은 서기 8년 왕망(王 莽:C 45∼AD 23)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나라 를 세운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한서’ ‘김일제전’은 “김당의 어머니는 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다(當母南 卽莽母)”라고 적고 있는데, 김당은 김일제의 차남건의 손자로서 투후의 지위를 이은 인물이다. ‘한서’의 이 기록에 따르면 김당과 왕망 은 동복형제가 된다. 이 때문에 사학자 문정창(文定昌)은 왕망의 성이 왕씨 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가 왕망이 흉노 후예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출자(出自)와 계보를 달리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문무왕 비문에 나오는 성한왕(星漢王)은 누구인지도 알게 된다. 즉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바로 성한왕의 태자 즉 김일제의 5 세손인 김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서(漢書)’에 “금인(金人)으로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구절이 등장할 만큼 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흉노의 관습과 유독 금을 좋아했던 신 라 왕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유일했던 투후라는 봉호와 문무왕비문의 투후 지윤( 侯之胤)이라는 구절, 그리고 ‘한 서’의 김성(金星)과 문무왕비문의 성 한왕(星漢王)은 이 무릉에 배장되어 있는 김일제가 한반도의 김씨들과 떼려 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경주에서 발굴된 천마총 등 이 흉노족의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분으로,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중요한 고고학 유물이다.
이상 김일제( 혹 알제?) 또 그의 어머니가 알씨 인 점과 김알지등을 연결해 보면 신라 김씨도 밝달임금의 후예임이 확실하고 그들도 한나라와 싸우다가 할 수 없이 한반도로 흘러 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5.명마산에 글씨 바위가 있는 이유. 이상을 보면 신라의 터 였던 지금 경남, 북은 밝달임금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유민들 중에 역시 지식층은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에서 벼슬을 하며 살았을 것이나 무식한 천민들은 농사나 지을 시골에 몰렸을 것이다.
이는 명마산 위치를 보면 앞 산과 뒤 명마산 사이에 큰 물도 없고 지금 대구와도 입지 조건상 사람이 몰려 살기는 적당치 못했을 것이니 지금도 발달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그 유민과 같이 왔던 무당, 풍각쟁이 남사당패 각설이패 백정등은 이 시골인 명마산 골짜기로 몰려 살았을 것이니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전부터 쓰던 그림, 금문, 신지녹도전자, 기림토의 어머니 신지신획 등의 글자를 써 놓고 복을 빌었을 것이고 그들이 새긴 글씨도 체계가 있을 수 없을 터이며 이 글자 새기는 도구도 한 가지 연장이 아니라 흑요석등 별똥별 쪼가리 로 부터 초기 무쇠징 으로 새겼으고 그 새긴 기간도 한사람이 한번에 새긴 것이 아니라 한 3 백년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새겨 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상 명마산 글쓴 바위 글자들을 보면 그간 우리 원시 한글 가림토가 왜 발달하지 못하고 한자에 눌리었는지도 짐작이 간다.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記)>에 보면 ' 경자2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달라서 형상으로 뜻을 표현하는 참글이 있었으나, 열 집이 있는 읍에 말에 통하지 않는 수가 많았고 백 리 되는 나라 안에서도 이것이 서로 이해되기가 어려웠다. 이에 천제는 삼랑(三郞) 을보륵 (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라 하니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 (庚子二年時俗尙不一方言相殊雖有象形表意之眞書十家之邑語多不通百里之國字難相解於是命三郎乙普勒讚正音三十八字是爲加 臨土其文曰...) 여기서 삼랑, 즉 삼시랑 전에 있었다는 참글이란 물론 신지 신획이다. 그럼 신지 신획이 있었다는 근거도 한번본다.
신지(神誌) 신획(神劃) 창제 <소도경전(蘇塗經典)> '...<유기(留記)>에 이르되 신획(神劃)이 일찌기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는데 그 모양이 ‘ㄱ’ 과 같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지 선인이 전한 바라 하며 혹자는 ‘이것이 글자 만듦의 시초가 된다’ 라고 하는데, 그 획은 직일(直一)과 곡이(曲二)의 형상이며 그 뜻은 관리, 통제 하에 형상대로 지었고, 그 형상 그 소리 또한 자연의 뜻이 계산된 데서 나온 것이다.' (...留記云神劃曾在太白山靑岩之壁其形如 ㄱ世稱神誌仙人所傳也或者以是爲造字之始則其劃直一曲二之形其義有管制之象其形其 聲又似出於計意然者也)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 획은 직일(直一)과 곡이(曲二)의 형상이며 그 뜻은 관리, 통제 하에 형상대로 지었고 그 형상 그 소리 또한 자연의 뜻 이 계산된데 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는 부분이다.
즉, 直一과 曲二란 바로 ㄱ ㄴ ㄷ...이고, 이는 그 형상대로 지었다는 말이며, 其義有管制之象은 '그 뜻은 관리, 통제 하에 형상대 로 지었음'을 말하며, 其形其聲은 '그 모양이나 그 소리'란 말이고, 又似出於計意然者也란 '또는 자연의 뜻이 계산된 데서 나온것 과 같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위 <유기>에서 其形其聲이라 했으니 이 글자는 자연의 의 형상과 소리를 을 본떠 만들었다는 말이니 상형 문자인 뜻글인 동시 소리글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래에 나오는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과도 같은 말이다.
이상을 보면 삼시랑 을보륵이 가림토를 만들었다 하나 이 글자역시 당시 쓰기에는 지나인들이 우리 그림글자 금문을 가져다가 발달시킨 갑골문과 그뒤 진시황때 대전 소전 등 한자보다 유식하다는 선비들 조차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또한 배워야만 아는 글자이니 무식한 백성들은 쉬운 금문 , 신지녹도전자 등을 그대로 혼용해서 썻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 가림토가 발달하는데 큰 지장이 있엇을 것이고 그래서 선비들 조차 더이상 가림토를 발달 시키지 못하고 묻어 두었을 것이고 그래서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신 창제가 되는것되는데 그 증거가 바로 명마산 글씨 바위 이다.
6.명마산(鳴馬山)이란 이름이 주는 증거 1)전해 지는 말로는 명마산은 힌 말이 울었다 해서 鳴馬山이라 한다는데 이는 박혁거세가 태어날때 말이 울었다는 설화와 같다.
2)그 글쓰는 바위 위에는 소위 장군바위 라는 바위가 있지만 이는 남근 아래에 해 ,알을 뜻하는 둥근 방위 위에 있고 그 아래 역시 알로 상징되는 돌이 있다.
이 알들은 박혁거세 뿐 아니라 석탈해, 김일제등 모두 알속에서 태어났다
3)밝달임금 후예인 선한(秦韓) 유민들은 항상 자기네 고향을 메카로 삼아 제사를 올렸을 것이니 한민족이 제사를 지래려면 반듯이 병풍은 북향 이어야 한다.
지금 한자 이름과 달리 옛 사람 한자 이름에는 반듯이 우리말 뜻이 있다 즉 신라장군 거칠부((居柒夫) 는 성이 거 씨이고 이름이 칠부가 아니다. 지금 우리말로 거칠은 아비, 즉 터프가이다. 따라서 옛 사람의 한자 표현 이름을 지금 우리 말로 보면 다음과 같다. 4 )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우리말 뜻은 밝(붉)이 세상을 밝힌다는 뜻으로 보고 5) 석탈해(昔脫解)의 우리말 표현은 섯달애 > 섯다래 이고 섯은 숫, 솟과 같은 환웅의 뜻이 있고 달은 땅이며 애는 접미사로 본다. 6) 김일제 (金日磾-검은 물들이는 돌 제?) 金은 쇠 이고 日은 해 이며磾는 의미가 없는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명마산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첫조선 앗선의 선한(辰=秦韓) 후예 들중 김일제와 같이 한나라에 항거 하던 무리중 하층민인 무당, 풍각쟁이, 남사당패 등 풍물패 들 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이 글쓰는 바위 적당한곳에 자기 고향 메카를 향하여 자기가 아는 글자를 새겨 놓고 복을 빌고 그들이 하던 식대로 밝달 춤을 춰 가며 놀았으리라 보니 이는 어느 정리된 비문 기록보다 더 진실성이 있으나 이 석각본이 낙서장 같이 체계가 서 있지 않다 하여 지금껏 무시 당한것 이라 본다.
다음 3 편은 여기에 새겨진 글자 하나 하나를 분석해 보는데 바위는 작고 글 쓰는 사람은 많아서 그런지 작은 글자가 너무 많고 또 몇백년 세월이 흐르자 남이 썼던 글자에 덧대어 쓴것도 많아 혼동되는 것이 많으며 더구나 그간 오랜 세월 풍우에 마모되어 알아 보기가 힘든 글자가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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