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간도(백두산) 이야기

[한, 중 고대사 전쟁]-간도 영토 문제

설레임의 하루 2009. 4. 30. 03:24

*출처:다음카페-한배달  글쓴이: 일월선인    http://cafe.daum.net/hanbaedal/F45t/172

 

 

 

 

[한, 중 고대사 전쟁]-간도 영토 문제

[《중국이 고구려사의 중국사 귀속을 위해 추진 중인 ‘동북공정(東北工程)’의 2003년 중점 연구과제 가운데 ‘간도(間島) 문제 연구’가

있다.

동북공정의 연구과제 중 현재 남북한-중국간 분쟁지역을 다루는 유일한 주제이다.

역사학자 박선영 박사(38·동아시아 현대사)는 “중국이 간도를 자국 영토로 만들기 위해 고구려사의 자국사 귀속 등 동북지역 역사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 박사는 한국중국학회가 이달 중순 발간하는 반년간지 ‘중국학보’ 48집에 실릴 논문 ‘혈맹과 선린우호의 함수관계 사이에 남겨진

국경문제:간도 문제를 중심으로’에서 한국과 중국간 간도 영토 분쟁의 의미를 짚었다.》

 

 

▽간도 분쟁 왜 일어났나

 

간도의 구체적 영역에 대해서는 한중간, 그리고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차가 크다.

1909년 중국과 일본이 맺은 간도협약에서의 간도는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와 대강 일치하는 북간도(또는 동간도)를 말한다.

 

 


 

 

간도는 영토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시절 청나라와 조선의 변경지대로 조선인들이 15세기 이전부터 이주해 개간하고 살던 곳이다.

그러나 청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을 봉금(封禁)지역으로

지정해 조선인과 한(漢)족의 출입을 막았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안봉선 철도(안동∼봉천) 개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지방을 청에 넘겨주었으며, 1952년 옌볜조선족자치구(1955년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어 현재에 이른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북한은 식민지시대 중국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 협력한 대가로 간도 할양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1962년 중국이 6·25전쟁의 참전 대가로 북한에 백두산 지역 양도를 요구했으나 북한의 요구대로 백두산 천지를 분할해, 간도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더 이상 요구하기 어렵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박사에 따르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간도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던 이유는 간도가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세력이 접촉하는 완충지대이자 동서를 장악하고 남북을 제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구비한 요지이기 때문이다.

간도는 또 토지가 비옥하고 금 은 석탄 구리 철광 등 광석이 풍부하며 장백산 북쪽 산기슭을 경유해 선양(瀋陽)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이다.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중국 학계는 조선인의 간도 이주를 청나라가 봉금정책을 시행한 이후인 1860, 70년대의 근대

이민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박 박사는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한 시점은 15세기 이전이며 봉금정책으로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조선인의 이주나 개간은 멈추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간도협약 이전 간도는 명확한 국경선 없이 양국 주민들이 혼재한 상태였고, 양국의 행정력이 동시에 존재했던 ‘복수 주권(multiple sovereignty)’의 지역으로 봐야 한다는 것.

또 동북지역은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에 이르기까지 한(韓)민족이 3000년 동안 지배해온 땅이다. 발해가 망한 뒤 1000년 동안에도 거란과 여진이 지배한 일은 있었지만 한(漢)족이 동북을 완전히 지배한 일은 없었다는 점도 우리측이 간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주요 근거다.

박 박사는 “간도협약은 일본이 외교권을 불법 사용한 것이므로 간도 문제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작업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간도문제에 천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 국제법규과 관계자는 “간도가 역사적으로 우리의 영토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 자체가 무효이므로 간도협약도

무효라고 주장하기 위해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법 논리도 보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ecolee@donga.com

 

 


간도 용정의 장터 모습. 용정은 한국의 망명 동포들이 개척한 도시로 간도지방 독립운동의 본거지이며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용정에 통감부 출장소를 설치해 간도를 사실

 

상 조선 땅으로 인정했으나 1909년 간도협약을 통해 청나라에 내줬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동아일보-www.donga.com> 03,12.09

 

 

東夷문명 발상지… 日帝도 "한국 땅" 인정
[韓中 고대史 전쟁]  간도와 동북공정  간도의 역사와 귀속문제

이일걸 성균관대 강사ㆍ정치학 박사



淸, 영토 야심에 18세기 백두산정계비 건립
토문강 위치 "송화강 상류" "두만강" 분쟁 日帝 가 만주침략 정책위해 淸에 불법 할양

간도의 역사는 고조선의 건국에서 시작된다.

고조선은 홍익인간의 건국이념과 중국의 황화문화에 결코 손색 없는 동이문명을 형성했고, 이 문화를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 받았다.

발해 멸망 후에는 동이계인 거란ㆍ여진ㆍ몽골족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반만년 역사 중 우리 민족이 이 지역을 통치한 시기가 3,300년을 넘는다.

하지만 다른 동이계 민족(요, 금, 원, 일본)은 683년, 한족(漢族)은 고작 500년을 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는 별개의 지역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백두산정계비는 중국의 간도 점령 야심
고구려의 적통을 계승했다고 표방한 고려는 예종(1107년) 때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으며, 두만강 700리 북쪽에 있는

공험진의 선춘령에 비를 세워 국경으로 삼았다.

공민왕은 원ㆍ명 교체기에 명이 아직 고구려의 영토였던 랴오닝(遼寧)ㆍ선양(瀋陽) 일대를 점유하지 않은 허점을 이용, 북방영토

회복을 추진해 1370년 이성계로 하여금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랴오닝ㆍ선양 지역)를정벌토록 하여 우라산성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를 장악했다.

그 해 지용수와 이성계는 랴오닝성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고려는 동녕부에 랴오닝ㆍ선양 지역이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통고했다.

그리고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이후 4대가 원나라에 입사하여 두만강북 일대를 통치했다.

조선 세종 때는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으며, 강북의 여진족들은 조선에 거의 복종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후 여진족이 강성하여 조선을 침입했다.

이때 간도분쟁의 시발인 1627년 강도회맹이 체결됐고, 간도지역을 봉금하여 무인지대로 두었다.

이 무인지대에 청이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은 러시아의 흑룡강 연안 진출이다.

그 결과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이 체결됐으며, 강희제가 선교사를 특파하여 백두산 일대를 지도로 그려가는등 만주 일대의 영토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야욕의 하나가 강희제의 백두산정계비 건립이다.

정계비의 오류와 두 차례 국경회담
숙종 36년에 이만건 월경사건으로 청 사람 5명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자, 청은 조선과 국경을 분명히 정할  계획으로 목극등

(穆克登)을파견해 1712년 5월 15일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서위압록(西爲鴨錄) 동위토문(東爲土門)’이다.

그러나 목극등은 토문강의 수원이 동에서 발원하여 동북 방향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유입되는 것을 몰랐다.

두만강 상류인 홍토수ㆍ석을수 양수가 합류하는 것을 토문강의 원류가 양수와 합류하는 것으로 잘못 안 것이다.

목극등의 오류를 박권이 지적했지만, 목극등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설표(設標)공사를 시찰한 북평사 홍치중도 오류를 확인했다.

후일 조선은 토문강의 위치를 송화강 상류로 보았으나, 청은 토문강이 두만강과 같은 강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간도분쟁의 원인이다.

1860년대 북관지방의 수해와 흉년으로 인하여 간도와 연해주로 도강하는 이주민이 늘어났고 이후 러시아와 청은 수차례 조선인의

귀환을 요청했다.

청은 1878년에 압록강 이북의 봉금지역을 개방했다.

1882년 길림장군 명안(銘安)이 토문강 이북ㆍ이서에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조선에 이들을 데리고 가도록 요청했다.

이때부터 국경논쟁이 벌어진다.

청은 곧 도강한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낸다고 고시했고, 조선인들은 이 고시가 부당하다고 이정래 종성부사에게 호소했다.

이에 어윤중 서북경략사는 김우식을 시켜 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를 답사토록 한 후, 이에 근거해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이며,

간도지역은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또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 발원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청에 제기했다.

1885년 을유국경회담이 열렸지만 토문강을 국경으로 보는 우리 측의 주장과 두만강 상류인 도문강을 국경이라고 주장하는 청의

억지로 회담은 결렬됐다.

2차 정해국경회담은 1887년에 열렸으나 역시 합의하지 못했다.

토문강의 실체와 변계관리사 임명
1887년 조선은 관찰사 조존우에게 국경분쟁문제를 철저히 조사 보고토록 했다.

그는 공법회통을 인용해 국제공법상 토문강이 한ㆍ청간의 경계라고 밝혔다.

1898년에는 간도문제와 관련한 상소가 있자 내부대신 이건하의 지시로 경원군수 등이 또 국경답사보고서를 제출했다.

내용은 肩릿? ?阿???오륙백 리를 흘러서 송화강과 합하여 흑룡강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과 발원지로부터 바다에

들어가는 흑룡강 하류 동쪽은 우리의 땅이다.

우리나라는 변경의 분쟁을 염려하여 유민을 엄금하고 땅을 비웠다.

그런데 청이 이를 선점하여 자기 땅이라 하고 러시아에게 천 여 리의 땅을 할양했으니, 토문강으로 정계한 것으로 보면 이것을 용인할

수 없다.

민생이 이로써 곤란을 받고 변경문제가 늘어가니 한국, 청, 러시아 3국이 함께 답사하여 각국 통행의 국제법규에 따라 공평히 타결해야

한다.’

토문강이라는 명칭은 ‘전요지’와 ‘요동지’에 ‘토문하(土門河)’로 나온다.

‘장백산 북의 송산에서 원류가 시작되어 동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는 기록도 있다.

조정에서는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했고, 1900년께 평북관찰사 이도재는 압록강 대안지역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했다.

그리고 1902년 5월 이범윤이 간도시찰사로 임명 받아 간도 조선인을 위무했다.

당시 간도 일대의 인구는 2만7,400여 호, 10여 만 명에 이르렀다.

간도 한인의 보호를 위해 이범윤은 진위대병의 간도 파병 등을 조정에 요청했지만 조정에선 불허했다.

이에 따라 이범윤은 스스로 사포대를 조직하고 간도 한인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그 비용에 충당했다.

이후 청병과의 충돌이 늘면서 교전이 일어나고 주민살해와 가옥방화도 계속되면서 간도분쟁이 끊일 사이가없었다.

간도분쟁은 결국 조정 내의 권세쟁탈을 야기했다.

이범윤이 건의한 간도 파병문제는 당시 내부대신, 경무대신, 원수부 장관 등의 알력으로 결정되지 못했다.

그 사이 지위를 지키기에 급급했던 변계관들도 간도 한인보호보다 이범윤을 물러나게 하는 쪽이 낫다고 보고 청의 지방 관리들과

1904년 한ㆍ청 변계선후장정까지 임의 약정했다.

이에 따라 이범윤과 사포대의 활동이 억제 당했고, 간도의 실제 관할권은 청으로 넘어가게 됐다.

일제의 간도 개입 조작과 간도협약 체결
일본은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간도분쟁에 개입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간도문제 개입의 법적 근거를 만든 다음, 박제순으로 하여금 1906년 11월 8일

통감부에 외교교섭을 내도록 조작했다.

또한 러일전쟁 중에는 한ㆍ청 간의 간도문제 조기 타결을 우려하여 청에 국경문제의 논의를 늦추도록 요청했다.

결국 일본은 러일강화조약으로 한국에서의 우월권과 만주의 특수 이익을 인정 받았다. 러시아와 1차 협약을 체결한 후인 1907년,

이토는 간도에 사이토(齊藤季次郞) 중좌 일행을 파견하여 파출소를 개설했다.

이때부터 청ㆍ일간에 간도문제에 관한 외교교섭이 전개됐다.

원래 이토는 “간도는 한국영토임을 전제”했지만, 교섭 당시에는 청에 ‘간도는 소속 미정의 영토’라고 통보했다.

1908년 4월 일본은 간도에 한인과 일본인의 잡거를 인정하고, 일본영사관을 설치해 한인 재판권을 담당하고, 두만강을 한ㆍ청

국경으로인정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청은 종전의 방침을 바꾸지 않았다.

양국 교섭은 1909년 2월 일본이 간도 할양을 포함한 동삼성 6안을 청에 제시하면서 진척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 해 9월 4일 간도를 청에 양보하는 간도협약이 체결됐다.

일제는 간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당초의 주장을 번복해 만주침략정책의 일환으로 간도를 청에 불법 할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발상지인 간도는 현재 중국이 불법 점유하게 됐다.

간도 분쟁은 백두산정계비에 근거해 국경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따지는 법률분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분쟁은 실상 간도에 대한 영유권(領有權ㆍ점령하여 소유하는 권리) 분쟁이며, 동시에 정치적 분쟁이다.

 

지금까지 간도 분쟁의 논쟁점은 크게 다섯 가지다.

첫째 백두산정계비의 가치,

둘째 비문 내용, 즉 토문강의 실체,

셋째 을유ㆍ정해 국경회담의 효력,

넷째 1885년 이후의 교섭사 및 선후장정에 대한 견해,

다섯째 역사적인 사실의 진위여부.

일찍이 한국과 일본은 정계비를 인정하고 토문강을 송화강의 원류로 보았으나 청은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았다.

한ㆍ일은 두 차례 국경회담을 모두 무효로 간주한 반면, 청은 두만강 상류 200여리만 미정일 뿐 나머지는 두만강으로 국경이

획정되었다고 보아 일찌감치 견해가 엇갈리고 있었다.

 

백두산정계비는 국제법상 효력 없어

간도문제가 백두산정계비를 조약으로 하는 국경분쟁으로 간주되기 어려운 것은 정계비 건립과정에 나타난 국제법상의 문제 때문이다. 두 나라는 문서로 국경을 합의한 적이 없다.

설사 정계비가 어느 정도 효력을 지닌다고 할지라도 건립 당시 조선의 대표인 박 권은 백두산 동행을 거부당 했고, 그래서 비문에는

조약체결의 조선 대표인 박 권의 성명과 서명, 낙인이 없다.

당시의 실질적인 조ㆍ청 국경선이 반영되지 않는 착오까지 생겼다.

정계비를 국제법상의 국경조약으로 보기 힘든 이유다.

중국에서도 을유ㆍ정해 감계회담 때부터 백두산정계비를 심시비(審視碑ㆍ특정한 자리를 확인하고 기념으로 세우는 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정계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오록정(吳祿貞), 왕숭시(王崇時), 서덕원(徐德源) 등이다.

왕숭시는 목극등(穆克登)이 백두산 등을 살핀 것은 청의 일방적인 변경시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고, 서덕원은 백두산정계비는 조ㆍ중

양국이 공동으로 설립한 것이 아니라 목극등이 압록강ㆍ두만강의 수원을 확인한 표지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정계비 건립 때의 공식적인 회담기록이 없으며, 비석에 대청(大淸) 이란 청의 국명만 있고 조선 국명은 없다는 점을 들었다.

 

실질적인 국경 압록강ㆍ두만강 아니다

정계비 건립을 전후한 실질적인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여러 지도에서 드러난다.

두 알데(Du Halde)의 지도 중 레지의 비망록에는 “봉황성의 동쪽에 조선국의 국경이 있다”고 하였다.

‘달단중화전도(達旦中華全圖)’ 중 ‘조선왕국지도(Kaoli Koue ou Royaume de Coree)’에는 평안(PING- NGAN)의 영문자가 압록강

대안의 변책선까지 표시되어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간도문제 연구자인 나이토 코지로(內藤虎次郞)는 일본 통감부가 간도파출소에 의뢰해 제작한 ‘포이합도하연안고적

도’에 붙인 해제에서 현재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시를 거쳐 흐르는 부르하통하 주변의 석벽과 흙무더기를 ‘동국여지승람’

(조선 성종 때 제작)에 등장하는 조선의 봉수대로 보았다.

그는 나아가 “간도지방의 한인(韓人) 거주는 매우 오래된 것이며 월간에 생긴 것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볼 때 청이 베이징(北京)으로 중심무대를 옮겨간 후, 한족들이 만주에 들어와 토지를 개발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조선과

청이 약정한 ‘봉금지대’의 경계는 압록강ㆍ두만강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봉황성 남쪽에서 압록강 수계를 안은 산맥을 포함하여 두만강 북쪽의 흑산령산맥을 포괄하고, 또 노야령산맥 이남의 포이합도하를

봉금지대의 경계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 간도문제를 직접 다루었던 일본 국제법학자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는 “간도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무인의 중립지대였

다”고 말했다.

이 무인지대를 조선과 청이 함께 개간함으로써 중립의 성질은 상실되고, 단순히 무주지가 되었던 것이다.

 

조약체결권 없는 일제의 간도협약은 무효

국제법의 법리로 볼 때 간도협약은 효력이 없다.

일본과 청의 간도협약은 법적 근거가 을사늑약인데, 이는 국제법상 원천적으로 조작된 조약임과 동시에 강박에 의한 조약이기 때문에

무효이다. 따라서 간도협약 역시 효력이 없다.

제2차 대전후 처리과정에서 나타난 일련의 조치인 1943년 카이로선언, 1945년 포츠담선언, 미일강화조약, 중일강화조약 등에 의거해

보아도 무효임이 분명하다.

일본은 간도문제 해결을 위한 조약체결 능력이 없으며, 간도는 일ㆍ청간에 논의될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은 간도에 대한 주권을 포기한 일이 없고, 간도협약의 무효를 선언할 수 있다.

 

간도분쟁 쟁점을 알고 문제제기 나서야

한국과 중국이 간도지역에 완전한 국경선을 정하지 못한 것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봉금지역은 시노다 지사쿠가 언급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무인무주의 중립지대였지만, 19세기 후반에 봉금이 해제되면서

무주지의 성격이 변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 영유권은 양국 중 누가 더 실효적인 지배를 행사하고 역사적인 권원을 갖는가에 따라 결정되 어야 한다.

간도분쟁의 해결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첫째, 국제법상 영토취득방법의 하나인 선점(occupation)의 원칙에 의거할 때, 간도지역은 한국 영토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선점의 원칙이란 무주지를 취득할 의사를 명백히 한 국가가 그 곳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그 지배사실을 이해관계국에 통고하면

선점지는 취득국의 영역이 된다는 논리다.

따라서 간도지역에 누가 먼저 이주하여 행정기관을 설치했는가가 중요하다.

 

둘째, 간도지역에 이주한 한ㆍ중 양국의 주민 비율을 고려해야 한다.

1900년대 한인 이주자는 간도지역 총인구 13만명 중 10만 명을 차지하였으며, 두만강 대안은 한인이 독점하는 등 한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셋째, 이 지역에서 어느 나라가 역사적으로 평화적 주권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는가 하는 점이다.

팔마스 (Palmas)섬 영토분쟁사건에 따르면 “영역 취득의 권원과 관련해 발견의 권원은 성숙되지 못한 것이며, 주권은 실효적 선점에

의해서만 확립된다.

성숙되지 못한 발견적 권원은 계속적이고 평화적인 주권 발현에 기인하는 실효적인 선점의 권원에 우선할 수 없다.”

 

넷째, 간도분쟁의 결정적인 시점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봉금정책을 양국 간에 약정한 1627년, 백두산정계비 건립 해인 1712년, 을유국경회담이 시작된 1885년, 간도협약이 체결된 1909년,

장래 한ㆍ중간에 간도분쟁의 해결절차를 회부하기로 한 시점 등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중 어느 시점이 가장 유리할 것인가를 분석해야 한다.

다섯째, 국경 획정 때 자연적 국경, 순환 등 비법률적 요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04년 영국령 가이아나_ 브라질 국경분쟁의

중재판결에서 실효적 지배에 의한 국경 획정이 불가능한 경우 ‘자연 선(line traced by nature)’에 따라 국경을 정한다고 하였다.

더불어 농경지대인 간도에선 한인에 의한 대규모 개간행위도 분쟁해결을 위해 법률적으로 고려할 요소이다.

 

현재로는 간도영유권 주장에서 한국이 우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간도분쟁을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의 사항을 철저히 분석해서 관련자료들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간도분쟁의 해결을 위해 우선 정부가 중국에 간도협약의 무효를

통보하고, 미해결된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