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간도(백두산) 이야기

간도의 영토권 부정론에 대한 견혜

설레임의 하루 2009. 4. 24. 14:41

 출처:다음카페-역사의 천존고      http://kr.blog.yahoo.com/shim4ro/1847 

 

 

간도의 영토권 부정론에 대한 견혜
최근 몇몇 인터넷 기사에서 간도의 영토권에 대해 부정적인 견혜를 올린 글이 보였다.

물론 간도영토권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가 적극적으로 주장하기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선 간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우리영토임을 적극주장할 경우, 간도지역에 근거를 두고 살고있는
연변자치족 내 우리민족들이

중국으로부터 심각한 압박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달라이 라마가 주도하는 티벳 독립운동의 경우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현재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북한정부측은 중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어서,  영토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어느 편을

들어 줄 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국제법적으로도 상당히 애매하다.

물론 중국정부는 일본이 제국주이 시절 청국이나 만주괴뢰국과 맺었던 모든 조약이나 협정은 무효라고 선언한 바가 있다.

그에 따르면 간도에 대한 협정도 자연 무효인데, 문제는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국제법에 의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위와 같이 연변자치구 내의 우리민족 인권및 생활 문제나 혹은 만약에 패배하였을 경우 발생 할 수 있는 문제점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국제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솔직히 이스라엘이 팔렌스타인 땅에 독립정부를 세운것을
봐서도 알 수 있듯 그것은

파워게임이다.

과연 국제무대에서 파워게임은 누구의 승리로 돌아갈 것인가?

냉정한 현실을 직시할 때 조금 억울하기는 하지만 차라리 현재 상태로 남겨놓는 것이 낳을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간도에 대한 부정론 내지는 회의론의 견혜를 살펴 보면 그 접근 방법부터가 잘못되어
있을 뿐더러, 기초자료조차 제대로

살펴 보지 않았다.

부정적인 견혜를 제시하는 것이야 자유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기초자료 조사라던가 아니면 인터넷 자료라도 찾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 부정론의 주요 근거를 살펴보자. 

조선방역지도, 조선팔도지도, 대동여지도, 대동여지전도, 팔도총도,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해좌전도, 조선도, 아국총도, 동국대지도,

조선전도로 모두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조선인에 의해 조선에서 만들어진 지도들이다.
그러나 보는 바와 같이 조선 후기, 16세기 이후 국가에 의해, 혹은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들을 
보면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혹시 모르겠다.

이 지도들 말고 다른 지도 가운데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한 것이 있는지. 

 우선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한 지도는 대단히 많다. 너무 많아서 일일히 열거할 수 조차없다.

인터넷 이미지 검색창에 '간도지도'를 쳐 보기 바란다.

조선은 물론, 대한제국시절 또 외국인이 그린 지도에서부터  구 소련이 그린지도까지 너무나 많고 다양하다.

 또 육락현(陸洛現) 백산학회 총무이사가  공개한 1885년 을유감계담판(乙酉勘界談判) 당시 지도
(사본)는 백두산 정계비 부근에서

토문강까지 쌓았다고 적힌 토퇴(土堆)와 석퇴(石堆)가 송화강 지류 오도백하(五道白河)까지 이어진 것으로 표기돼 있다.


 17~19세기 무렵 우리나라와 서양에서 그린 고지도 대부분에서도 간도는 우리

영토로 나타난다.

18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지도인 `도성팔도지도(都城八道之圖)'

(사진왼쪽) 함경북도편에는 간도지역이 우리 영토로 분명히 기록돼 있다.
  특히 이 지도에는 토문강(土門江)과 두만강(豆滿江)을 분리해서 명기했다.

보곤디(1750년) 지도에서도 옛 만주족 땅이자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 간도지역이

18∼19세기까지 우리 영토였음을 입증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역사적 사실은 세종 이후 조선이 한 번도 대외적인 영토확장에 나선 적이 없으며, 심지어 청의 황제 앞에 조선의 국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 무슨 힘이 넘쳐서 간도씩이나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다음과 같이 반론 한다.
  우선 세종의 6진 개척으로 함경북도를 포함한 간도 일대는 우리영토로 편입되었다.

물론 조선이 청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당한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간도귀속 문제와는 무관하다.

 즉 간도귀속 문제는 18세기를 전후하여 청국과 조선간에 공식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양국은 백두산 정계비를 통해 영토 문제에 대해

합의에 이르렀다.
 즉 힘으로 새로운 영토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외교로 기존의 불확실했던 국경선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간도 귀속 문제를 힘의 논리로만 해석하는 것은 합리적이라 볼 수 없으며 당시 청국과 조선간의 협의 내용을 좀 더 긴밀하게

살펴 봐야 한다.

 이후 청국은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에 걸쳐  백두산정계비 설립당시 국경성 책정문제가 불공정하게 이루어 졌다고 주장한바가 있다.

물론 이것은 청국의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청국의 요점은 자신들의 관리는 그 방면에 무지하였던 반면, 우리측 관리는 그 방면에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우리측에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간도지역마저 청국이 자국이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억지 주장이었다. 
  청국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하여도, 영토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무능한 관리를 파견하였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청국이 간도를

자국의 영토로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증거이다.
 더구나 국경선 문제는 단 한명의 관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청국 관리들의 충분한 검토를 한 후 의해 최종적으로 황제의

제가로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청국정부의 의의 제기는 조선측으로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1885년과 1887년 국경선 문제 발생시 간도가

우리영토임을 조선은 제차 확인하였다.

  더구나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질 당시인 1712년은 청국이 조선에 비해 외교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시대이다.

따라서 간도영토가 원래보다 상당부분이 축소되면 축소되었지 확대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청은 17세기 중반부터 간도지역에 봉금령(封禁令)을 내려 자국민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물론 이것은 조선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청국역시 이곳을 영토로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반증이다. 
 반면 조선의 경우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시찰사로 임명했을 때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무려 2만7400여호에

10만여명이나 되었는데, 대다수가 조선인이었고 중국인도 다수 거주한 반면 만주족은 소수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따랗서 같은 통제정책을 썼다고는 하지만 누가 과연 그 땅을 개척하고, 누가 그땅을 자신들의 땅으로 인식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즉 청국은 간도를 아예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가, 뒤늦게야 전략적 가치를 알고 같은 억지주장을 부린 것이다.
 
 하나 실효지배에 대해서는 조선에서 간도에 지방관을 파견하고자 시도한 것은 고종 이후다.

그 전까지는 조선의 농민들이 월경해 거주한 일은 있지만 조선의 행정력이 실제 미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 공도정책을 쓰고, 일본 어민이 와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독도를 일본이 실효지배한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실효지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고종 이후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결국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과연 고종 이전에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던가? 그게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좀 어의없다. 그렇다면 역사를 살펴보자, 청제국은 중국민족이 세운 나라인가?

물론 간도 지방까지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간도를 최초로 지배하였던 것은 고조선 이다.

이후 한사군이 성립하였지만 간도지역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고조선 이후에는 고구려 땅이었고 그 이후에는 발해땅이었다.
 서희역시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 거란과 담판을 지은 일이 있다. 

즉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로 발해땅에 대한 영토권은 고려에 있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논리였고,  거란 역시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강동 6주를 내어주고 물러난 봐 있다.

 또 고려시대에는 윤관이 동북 9성을 쌓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 공험진이 간도에 있다고 세종실록
지리지는 쓰고 있다.

그렇다면 백두산 정계비 이전에도 이미 조선은 간도를 실효지배하였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 논리는 백두산 정계비 설치에 중요한 근거가 되어 주었다.

 그럼 중국민족이 간도지역을 실효지배한 때는 언제인가?
내가 보기에 위의 논리대로라면 없다. 중국이 세운 진나라나 한나라때에는 영토 범위가 간도까지
미치지도 못하였다. 

수나라, 당나라역시 고구려와 발해에 막혀 간도는 물론 요서지역에서도 제대로 영토를 확보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송나라역시 거란이 세운 요나라, 여진이 세운 금나라 등에 의해 아예 황하강 북쪽은 전혀 영토회복
조차 못할 정도였다. 

명나라 역시 이 지역을 행정구역안에 편입시키긴 하였지만,  현재의 만리장성을 방어하기에도 급급하였을 정도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여진족은 자유자재로 활동하였고, 김종서 장군이 그것을 평정하여 6진을 개척한
것이다.
아무튼 중국은 간도지역의 실효지배는 둘째치고라도 영토로 인식이나 하고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반면 우리는 2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간도를 영토에 편입시켜 왔을 뿐 아니라, 19세기 이후에는
분명하게 실효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효지배의 시점이 19세기라는 것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럼 예를 들어 러시아가  흑룡강 이남 현재 연해주지역을 실효지배한 시점은 언제부터인가?

역시 청국과 러시아가 국경선 문제에 합의한 1858년 아이훈 조약이후이다.

즉 영토권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간의 합의고, 조선은 거듭되는 간도처리 문제에 대해 간도가 우리영토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위의 주장대로 중국의 실효지배 운운한다면 그것은 일제시대가 막을 내리는 1945년 이후일까? 

아니 그때만해도 간도문제는 조금 어중간 했다.

당시 중국은 민주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구 소련은 공산세력 확장의 목적으로 간도를 북한으로 귀속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중국역시 공산화되면서 간도문제는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기간동안 우리나라가 소유하고 있었고, 또 본격적인 주권개념이 도입되는 근대사회 이후  실효지배

한 일이 있고, 적극적으로 영토권 주장을 하여 양국간의 합의를 이끌어낸 우리가 영토권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사실 개인적으로도 우리나라가 재작한 대부분의 지도에 대마도는 분명하게 우리영토로 그려져 있으면서도, 오히려 간도부분이

빠진것이 아쉬었다.

특히 대동여지도가 가장 그렇하다. 

물론 대동여지도가 조선시대 제작한 지도 중 가장 정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지도인데, 이 지도에 간도가

빠져 있다는 것은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위의 주장처럼 단 한장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몇몇장의 지도에서 분명하게 발견되었으며, 앞으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역사를 다루는데 있어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뿐 아니라, 불리한 자료도 함께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간도와 같은 민감한 문제를 다루는데는 더욱 그렇하다.
 간도 영토권 소유 문제에 대해 현재 우리나가 많이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곳역시

우리주권이 분명하게 발휘해야 할 우리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