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 高麗는 明白히 大陸의 金과 南宋의 중간에 위치

설레임의 하루 2009. 4. 25. 11:51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心濟      http://cafe.daum.net/dobulwonin/Gjtl/20

 

 

 

 

 

 

 

高麗는 明白히 大陸의 金과 南宋의 중간에 위치 

고려사 인종. 무신 6년(1128)기록

宋,遣刑部尙書楊應誠,齊州防禦使韓衍等來,初應誠,至碧瀾亭,移牒接伴所云,貴國,禮意勤腆, 

若不預行開陳,必至虛有

煩勞,緣爲二聖在遠,臣子,不忍聽樂,除迎詔拜表日外,毋得用樂,幷免送衣帶花酒,王,迎詔于壽昌宮. 

詔曰數遇中微,變生外圉,肆朕纘紹,方圖敉寧,惟三韓之舊邦,實累世之與國,嚮煩信使,來效充庭,

乃緣艱虞,久緩報聘,想亦量其多故,當不替於索懷,玆奉大金之尺書,特馳一介之行李,航海越境,

良有溷煩,救災恤民,必加軫助,聊將薄物,不逮彝儀,至,可領也,應嗽,又進箚字云,昔,周室多難或,

言於晉文曰,求諸侯,莫如勤王,諸侯信之,且大義也,晉文,旣定王室,因成霸業,載之書典,

光耀無窮,竊惟貴國,在海東,最號爲大,世著忠順,自通使以來,本朝,待遇貴國,恩禮加厚,未始小衰, 

者,時遇艱難,國家多事,不料狄人用詐,遂勤二聖遠征,上下憂勞,莫遑寧處,重念貴國,秉禮重義,

而又本朝恩遇,積有歲年,非他國之比,方玆緩急,義當責望,正仗大義勤王時也,今皇帝,初登寶位,

遣使,撫問國王,就煩津發,迎請二帝,於拜詔曰,已嘗面陳,繼以公牒,再煩申覆,誠懇備至,諒蒙體悉,  

貴國以謂,去金,道路險阻,不可前行,在祖宗時,金人,嘗附貴國之使,入貢當時道路自通,

未聞不可行也,貴國,又恐金人,亦由此遣使,然金人,自破契丹後,皆由河東山北通使必不

由此而來,若貴國,慮金人,因此生事,應嗽,今此奉使,只是素隊百十人,持國書禮幣,前去講和,

卽非爭鬪,貴國,第津發使人,一行,至界上,先報知金人,以聽可否,或裁減人數,一切從之,

自是無由生事,若使由貴國之路,迎請二帝,則不虧二百年忠順之義,亦以報列聖眷遇之恩,國家報功,

倍於疇昔,而四方諸國,益仰令名,信服高義,實有無窮之休,而貴國重臣,

皆有協贊奉戴之忠,國家賞典,傳於不朽,非一時使人私己之利也,敢盡布腹心,惟冀國王,謀及重臣,

協濟玆事,無以暴起之狄人,遂失久要於華夏,早希與決,無至稽留,王,以書答曰,本國,自祖宗以來.

事大以誠,故自神考,至於太上道君皇帝,視同一家,其異恩厚禮,豈易名言,惟天地,不責其報,

而區區感激之意。庶幾萬一,伏聞二帝遠征,擧國憂憤,雖不能應時,奔問官守,而臣子之心,豈遑寧處, 

且皇帝孝悌,群公忠義,必也動天地感鬼神,天地鬼神,共相協贊,豈使二聖,久勞沙漠,每祝早還京闕,

以副天下之望,皇帝,初登寶位,首遣侍臣,就傳詔命,欲令小國,津發,前去迎請二聖,使副,

又於傳詔曰,一一面諭,繼以公牒,懇意備至,敢不拜命,然,女眞之始也,分居部落,未有定主故,

嘗臣屬我國,或隨我使人,入貢上國,此後,漸致强盛,常爲邊患,近者陷沒大遼,侵犯上國,

自此兵威益大,抑令小國稱臣,仍約定禮數,一依事遼舊例,小國,不得已而從之,然,其俗好戰,常疾我,

樂率上國,近於疆界,修葺城壘,屯集兵士,意欲侵陵小國,如聞使節,假道入境,必猜疑生事,非特如此,

必以報聘爲名,假道小邦,遣使入朝,則我將何辭以拒,苟知海道之便,則小國之保全,難矣,而淮南兩浙,

緣海之地,得不慮其窺覦耶,苟爲不然,小國,豈敢恬不從命,玆事實大,非敢飾言,惟使副,曲察情衷, 

少回雅意,歸奏闕下。

 

송나라에서 형부 상서 양응성(楊應誠)과 제주 방어사 한 연(韓 衍) 등을 보내왔다.

이전에, 응성이 벽란정(碧瀾亭)에 이르러 접반소(接伴所)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 공문에, "귀국의 예의가 성실하고 두터워, 만일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반드시 쓸데없이 번거로운 수고가 있을까 합니다.

이성(二聖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을 말하고 있다)이 먼 곳에 계시니 신하로서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조서를 받들고 표문을 드리는 날 이외에는 음악을 쓰지 마시고, 아울러 의대와 화주(花酒)를 보내는 일도 폐지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송나라는 당시에 장강 하구에 도읍해 있었고, 제주는 현 한반도의 제주도라고 역사 해설을 하고 있는 실정에서 당시의 송나라 사신

양응성과 제주도 방어사 한 연이 함께 조정(고려)에 왔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우리로써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양자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를 경유하여, 방어사 한연과 합류하여 다시 임진강 하구로 들어왔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기록 자체에 배를 타고 제주도에 들려 합류하여 고려 조정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없으며, 그저 함께 고려 조정에 들어 왔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원문 내용으로 보면 ; 송나라와 제주는 같은 지역에 있었다는 결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전회에 올린 탐라와 제주에 관한 글 내용과 중복되는 내용이지만, 제주(탐라)와 송과 왜는 비슷한 지역에서  어울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같은 시대에 왕조를 영위하고 있었다는 원의 역사서 <원사>를 보면 아래와 같이 “탐라”전을 두고 기록하고 있음으로

함께 비교해 보면 고려 및 탐라는 결코 한반도 그 부속도서지역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 원사 열전 “탐라” 을 보면 ; 탐라耽羅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음을 봅니다.

  耽 羅 , 高 麗 與 國 也 。 世 祖 既 臣 服 高 麗 , [以 耽 羅 為 南 宋 、 日 本 衝 要 , 亦 注 意 焉 ]。 

 

 탐라(耽羅)는 고려와 같은 나라이다. 세조때 이미 고려를 복속시켜 신하로 하였다.

이 탐라는 남송과 일본이 충돌하는 요지이며, 또 주의해야한다 .(새겨서 조심해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엄청난 강역의 파괴를 일으키는 내용이다.

 

즉 남송과 일본이 가깝게 근접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며, 이때 탐라가 이들의 주위에 있어 항상 남송과 일본의 이해 관계가

상충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현재의 열도에 당시의 <일본>이 있었다면 <남송>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탐라니 뭐니  요충지니 뭐니 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고려의 탐라와 남송과 일본이 서로 근접해 있으면서 탐라가 일종의 완충지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주의해야 한다, 또는 남송과 일본의 요충지라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고려는 한반도 개경에 왕도를 두고 탐라 즉 제주는 대륙의 장강 이북지역이라는 역사 해설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고려는 대륙의 중원에 있었던 왕조라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원이 탐라를 지배했다가 고려 조정에서 돌려 달라는 청을 하여 다시 돌려받은 땅이다.

따라서 원사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남송과 일본과 고려가 함께 주위에 있었던 탐라는 현 한반도의 제주도가 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송과 왜와 탐라(제주)가 상대방 국가와 맞물리는 지역에 있었으므로 제주(탐라)방어사가 송의 사신을 데리고 당시의 고려

조정에 올수 있는 것이다.  

 

왕이 조서를 수창궁(壽昌宮)에서 맞으니, 그 조서에,

①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미약하여 변경에 변란이 생겼다.

짐(朕)이 위업을 계승하여 바야흐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노라. 생각건대, 삼한(三韓)의 옛 땅은 실로 여러 대에 걸쳐온 우방이다.

지난번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정에 와서 하례를 하였으나 마침내 어려운 상황을 당하여 답례로 보내는 사절이 늦었다.

아마 우리의 사정이 많았음을 생각하여 평소의 마음에 변함이 없을 줄 아노라.

이번에 금나라에 보내는 서한을 받들고 특히 사절 일행을 보내는데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기에 진실로 곤란한 난관이 있을 것이니

재난을 구제하고 백성을 진휼하는 데에 반드시 도와주어라.

약소한 물건을 보내니 평소의 전례에 미치지 못하나 도착되는 대로 받으라." 하였다.

 

응성 등이 또 차자(箚子)를 드렸는데 그 차자에,

"옛날 주 나라 왕실이 난을 당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진문공(晉文公)에게 말하기를, '제후의 마음을 얻으려면 왕실에 헌신하는 것 만

한 일이 없으니 제후들이 그것을 믿을 것이며, 또 크게 의로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진문공은 왕실을 안정시킨 뒤 이어 패업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역사에 실려 영원한 세대까지 빛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귀국은 해동(海東)에서 가장 큰 나라로 알려졌고, 대대로 충순(忠順)함을 나타내어 사절이 왕래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귀국을 대우하는 데 은혜와 예절이 특별히 두터워 처음부터 조금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난국을 당하여 국가에 일이 많더니 뜻밖에 오랑캐가 농간을 부리어 마침내 이성(二聖 흠종과 휘종)이 먼 곳으로 가 계시니,

상하가 근심과 걱정으로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거듭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지키며 의를 중히 여겼고, 또 우리나라에서 은혜로 대우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으니, 다른 나라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 이런 위급한 일을 당하여 의리상 마땅히 소망하는 바이며, 바로 대의를 바로 세워 왕실에 헌신할 시기입니다.

지금의 황제께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어 국왕을 위문하시고 나아가서 뱃길로 두 분의 황제를   모셔 오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지난 조서를 받들던 날에도 이미 대강 말씀을 드렸고 계속하여 공문으로 거듭 번거롭게 하여 정성과 간절함이 모두 극진하니 이 뜻을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귀국은 해동에서 가장 큰 나라로 알려져 있다>라는 기록을 보자.

“해동”이 한반도를 지칭한다는 것은 1900년대의 해설이다.  사해중의 동쪽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사해는 천하를 말하는 것이며, 옛 천자가 다스리던 천하를 칭하는 것으로 볼 때 그 동쪽지방 즉 해동이 왜  꼭 한반도여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동이라는 곳이 한반도를 말한다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그저 역사학자님 네들이 근거 없이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또 다른 각도로 보면, 한반도 주위에는 당시에 금나라와 고려가 있었다.

현재의 역사 해설을 보면 금나라의 아래 국가가 고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위의 내용으로 볼 때는 해동에 여러 나라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고려가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였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당시에 해동지역이라는 한반도 및 그 북부지방에 어떤 여러 왕조들이 있어 가장 큰 국가라는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귀국에서 말하기를, '금 나라로 가는 도로가 험난하여 갈 수 없다.

' 하나 조종 조 때 금나라의 사람이 귀국의 사자를 따라 입공한 적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길이 개통되어 있었으며 다닐 수 없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귀국은 또한 금나라의 사람들도 이 길을 통행할까 염려할듯하나 금나라의 사람이 거란을 파한 뒤부터는 모두 

 

ⓐ하동(河東)과 산북(山北)을 경유하여 사절이 왕래하니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귀국이 금나라의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하겠지만 응성(應誠) 등이 이번에 사절로 오는데 비무장 인원 1백 10명으로 다만 국서와 예물을

가지고 가서 강화를 하려는 것이며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귀국에서는 다만 길을 인도하여 사절의 일행이 국경에 이르러 먼저

나라 사람에게 보고하여 그 가부를 듣고 혹 인원수를 줄이라 하면 모든 것을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니, 이것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귀국의 길을 통하여 두 분의 황제를 맞아들인다면 2백 년 동안 충성으로 따르던 의리가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러 왕이

대우하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나라에서 은공을 갚는 것이 과거보다 갑절 더할 것이며, 사방의 모든 나라가 더욱 훌륭한 명성을 우러러 보며 높은 의리에 믿고

복종할 것이니, 실로 무궁한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요,

귀국의 중신(重臣)들도 모두 돕고 받드는 충성을 가질 것입니다.

국가에서 포상하는 은전이 영원한 세대에 전할 것이요. 일시적으로 한 사신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닙니다.

감히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피력하였으니, 국왕께서는 중신들과 상의하여 이 일을 협조하여 이루게 하시고, 별안간에 일어난 오랑캐로

인하여 오랫동안 친근하게 지내던 중국의 우호를 잃지 않도록하십시오.

빨리 결정을 하여 지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왕이 글로 답하기를,

②"본국이 조종 조 이래로 대국을 정성으로 섬긴 까닭으로 신종황제로부터 태 상도군황제에 이르기까지 한집안처럼 생각하여 그

특이한 은혜와 두터운 예절을 이루 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천지 같은 은덕이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의 감격한 뜻은 행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삼가 듣건대, 두 황제께서 멀리 가시어 온 나라가 걱정과 울분으로 지내는데, 비록 직무상 제때에 달려가서 위문하지는 못할지언정 

신하된 마음에 어찌 편안히 있을 겨를이 있겠습니까.

또 황제의 효성스러움과 공경하심과 여러분들의 충의는 반드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것이니, 천지와 귀신이 함께 서로 도와서

협조할 것이니 어찌 두 황제께서 오래 사막에서 고생하게 되겠습니까.

 

빨리 서울 궁궐로 돌아오시어 천하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기를 항상 축원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처음 즉위하시어 먼저 시신(侍臣)을 보내어 조서를 전하고 우리나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여 가서 두 황제를 맞아오게 하고,

또 사신과 부사(副使)가 조서를 전하던 날에 낱낱이 직접 말씀하였고, 계속 공한을 보내어 간절한 뜻이 상세하고 극진하니 감히 명을

받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여진은 처음에 부락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군주가 없었기에 일찍이 우리나라에 예속되어, 간혹 우리

사절을 따라 상국에 들어가 조공하더니, 이 뒤로 점점 강성하여 항상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근자에는 대요(大遼)를 함몰하고 상국을 침범하여 이로부터 무력이 더욱 커져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칭신(稱臣)하게 하고, 의례를

약정하는 데 일체 옛날에 요나라를 섬기던 예절대로 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풍속이 싸움을 좋아하고 항상 우리가 상국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여 왔는데 근자에는 국경에다 성과 보루를 수축하며 병사를 모아

주둔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하고 있으니, 만약 사절이 길을 빌려 저들의 국경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여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답례의 사절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사절을 보내어 입조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겠습니까. 만일 참으로 바닷길이 편리한 줄 안다면 우리나라의 전이 어려울 것이요.

 

회남(淮南)과 양절(兩浙)의 연해의 지역도 그들이 넘겨다보는 우려를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태연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사실상 중대하여 감히 말을 꾸며 대는 것이 아니니, 사절과 부사(副使)는 충심을 곡진히 살펴 당초의 생각을

조금 돌이켜 돌아가 궐하에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위의 기록은

①송에서 고려왕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과

②고려왕이 송에게 보낸 답서의 내용이다. 이곳에는 고려 한반도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이때의 상황은 금에 의해 북송의 두 황제가 끌려갔다.

이에 송은 장강 하류로 천도하고 새로운 남송시대를 열은 바로 그 때의 정황이다.

송에서는 뱃길로 금에 있는 두 왕을 데려 올수 있도록 고려에게 요청하는 글이며, 전에 송에서 고려에게 길을 빌려 달라는 요청에

고려가 하락치 않자, 또 요청하는 글이다.

 

<'금나라로 가는 도로가 험난하여 갈 수 없다.' 하나 조종 조 때 금나라의 사람이 귀국의 사자를 따라 입공한 적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길이 개통되어 있었으며 다닐 수 없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귀국은 또한 금나라의 사람들도 이 길을 통행할까 염려할듯하나 금 나라의 사람이 거란을 파한 뒤부터는 모두 하동(河東)과 산북

(山北)을 경유하여 사절이 왕래하니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귀국이 금나라의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하겠지만 응성(應誠) 등이 이번에 사절로 오는데 비무장 인원 1백 10명으로 다만 국서와 예물을 가지고 가서 강화를

하려는 것이며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귀국에서는 다만 길을 인도하여 사절의 일행이 국경에 이르러 먼저 금나라 사람에게

보고하여 그 가부를 듣고 혹 인원수를 줄이라 하면 모든 것을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니, 이것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 이 글을 보면 금과 고려가 왕래하는 길은 <하동과 산북을 경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 하동(河東)은 전국시 양나라에 하동지방이 있었으며, “맹자의 양 혜왕 상”을 보면 ; 황하가 경유하는 산서 서경(山西 西境)

지대라고 못 박고 있으며, 옛 산서경내(山西 境內)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하동”은 황하가 내몽고에서 남쪽으로 꺽여 섬서와 산서의 성계를 흐르는 지역의 동쪽 즉 산서 황하 유역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산북(山北)은 종남산의 북쪽을 칭한다.

산남은 종남 및 태화산의 남쪽지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기록을 보지 않아도 산북지방은 그 북쪽지방을 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가 어디에 있었으며, 금나라가 어느 곳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려는 대륙의 중원지방에, 금나라는 이 고려의 서북내지 북쪽지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 또한 고려왕이 남송의 왕에게 보낸 답서 내용 중에 “송에게 길을 빌려 주어 금나라로 들어가게 한다면 그들(금나라) 역시 우리

(고려)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할 것인바. 한번 길을 열어주면 그들의 부탁 역시 거절할 수 없는 것인바, 이것은 고려에게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설명을 하고 있다.

또 바닷길이 편할 줄 알아 길을 열어주면 우리나라(고려) 역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고, 회남(淮南)지역과 양절(兩浙)지방의 연해

(緣海)지역도 그들(금)이 넘보게 되는 우려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으로 답장을 썼다는 것이다.

 

1) 회남(淮南)지역은 회수의 남쪽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서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 장강, 북쪽으로는 회수까지를 말한다.

 

2) 양절(兩浙)지방은 절동 및 절서지역을 말한다. 즉 전당강(錢塘江)의 남쪽이 절동이요,

전당강의 북쪽이 절서지역이다.

오대사 “오월세가”를 보면 <전씨겸유양절錢氏兼有兩浙>이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송에게 고려가 금으로 가는 길을 한번 터주면, 금에서도 길을 터 달라는 요청을 할 것이며, 이는 고려가 위험에 빠질 염려도

되고, 또한 대륙 동남부의 강소 남부 및 절강성 등지와 그 해안가를 금나라가 넘볼 수도 있으니 길을 터 줄 수 없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고려라는 국가가 현 역사 해설대로 한반도에 있었을 때 송나라가 고려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애걸복걸 할 이유도 없거니와

하동과 산북을 통해 금나라로 갈 아무런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고려의 북쪽에 금나라가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를 한반도에 놓고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등 고려 역사서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의 금나라는 섬서 장안의 서북쪽지역 및 북쪽지역에 있었다.

이래야만 하동 및 산북지역에서 금으로 갈수 있다.(끝) 

 

고려가 대륙의 요충지 중원지방(황하의 서쪽 및 중원 및 동쪽지방)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송이 고려의 북쪽에 있던 금나라로 갈려면

고려의 영토를 통과해야 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엉터리 역사 해설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 ( 심제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