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반도 고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려사 이야기

설레임의 하루 2009. 4. 28. 02:28

*출처:다음카페-산수유골에서 만난사람들  글쓴이: 부초    http://cafe.daum.net/baeksa./So8r/239



 

 

 

 

반도 고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려사 이야기

여러 번에 걸쳐 고려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견 개진이 있었습니다.

고려는 반도에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고려는 대륙에 있었다는 등의 여러 의견 및 토론 때로는 격한 모습의 대화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께서는 유물,유적에 관한 말씀도 했습니다.

고려 이전의 애기는 다른 곳에서 논하기로 하고 고려시대의 유물,유적 이야기를 해 보면,

1) 고려왕들의 묘는 어디에 있는가,

몇 왕들의 무덤이 경기도 지역에 있다고 하면서 국도변에 안내 간판을 설치 해 놓고 있읍니다만, 그 무덤이 고려의 몇 대 왕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2) 그 많은 고려의 왕 및 왕비 및 왕자, 장군, 제후, 공등 수만명의 고관대작을 지낸 분들의 묘는 다 어디에 있으며, 그 묘에서 그 어떤

증거물이 나왔다는 것이 존재하는가.

3) 서경, 황도, 동경을 위시해 5 도호부 및 기타 목, 도, 주, 군, 현등에 수많은 성을 축조했다고 기록하고 그 규모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잔재는 반도내 어디에 있는가,

만약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근대조선시절에 축조한 성곽 때문에 도시 계획 하나 제대로

설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즉 없었다는 것이다.

4) 개성 즉 고려의 황도는 수십만 장정이 수십년에 걸쳐 엄청난 토목공사 및 건축공사를 벌여 완성 했다면서 그 규모를 설명하고

있으나, 개성이란 그곳은 일제시대 때만 하더러도 왕궁은 커녕 황궁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자리 하나 제대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 엄청난 황성 및 외곽성, 그리고 황궁은 왜 터만 남았는가.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고들 있지만 왜 반도에서만 그 많은 유적,유물들이 통째로 없어지고 터만 남는 것일까.

5) 수천년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단군시대로부터 위만 및 기자,삼한,삼국,발해,고려,근세조선에 이르기까지 통치자인 왕만을 세어도

수백명은 될것이며, 그 이하 왕비, 왕자, 공주, 가까운 왕손으로부터, 고관 대작등을 합하면 수십만은 능히 될것이로되, 이들의 무덤

한 곳 에서라도 속 시원한 답변을 준 적이 있는가 묻고 싶은것이다.

6) 또 어떤 분께서는 금석문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연구 가치가 많은 분야라는 것을 몰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기록되어진 내용과 지명의 위치를 어떻게 번역 또는 해설, 비정 하느냐에 따라 반도의 역사 또는 대륙의 역사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7) 예를 하나 들어보면, 우리는 통상 연나라가 하북성에 있었다고 하며 연나라의 장군 진개가 동호들을 쫓아내고 오군을 설치하고,

또 장성을 축조한 기록을 보면 “조양에서 양평까지” 라는 문구를 여러 학자님들, 또한 이 싸이트에서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양”이 현재의 하북성 북쪽이 아닌 현 하북성에서 서쪽으로 4천리쯤 떨어져 있던 섬서성 유림지방에서 서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오원에서도 900 리를 북쪽으로 가야하는 곳에 있었다고 대륙사서는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다면 연나라에서 장성을 축조한 조양이 상곡군의 속현이라 했고, 이곳이 결국 연나라의 땅이 되는 것이며, 이곳은 바로

상곡군이었으며,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들을 몰아낸 곳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동쪽으로 4,000 리쯤 이동시켜 해설한다면 그 후대의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은 그 이동된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역사의 조작이요, 왜곡인 것입니다.

이러한 변질된 역사적인 사건은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쪽으로 이동되어진 지명의 위치로 말미암아 요동,요서가 마치 요녕성의 요수 또는 요하 또는 난하를 기준한 것처럼

해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동북삼성 지역에 있는 강이든 하천이든 그 당시에는 이름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러나 대륙사서 중 가까운 시기로 보면 “오대사”의 열전 기록 편에 분명하게 “음산의 남쪽 요서지방으로 옮겼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음산은 하투 서북방에 있는 본시의 “음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고대사는 원전은 그렇지 않은데 대륙 또는 일제측의 국수주의 학자들에 의해 고착화가 되었고, 이에 동조한 우리의

선배들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고, 뒤죽박죽으로 해설하다보니 역사의 “미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여러 의문점에 대한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이것은 개인이나 조그마한 단체등에서 해결할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대규모로 시작을 한다 해도 수십 년이 걸릴 대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급하게 군다고 해서 해결될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 앞서 분위기를 띄우는 일 역시 대단히 중요한 일로 우리의 몫이라고 봅니다.

1) 高麗史82卷-志36-兵2

辛禑元年九月初慶尙楊廣全羅各道募軍號翊衛軍屯東西江 :

우왕이 9월초에 경상,양광,전라등 각도에서 모집한 병력을 익위군이라 칭하고 동강 및 서강에 주둔시켰다.

여기서 “동강 및 서강은 반도내 어느 강을 말하는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1) 동강은 두만강

2) 서강은 압록강이라 할수 없는 것이 “高麗史44卷-世家44-恭愍王7”을 보면

“丙申倭舶集東西江寇陽川遂至漢陽府燒廬舍殺掠人民數百里騷然京城大震”.이라 했기 때문이다.

즉 왜적들이 배를 타고 집결하여 동서강으로 양천에 쳐들어와 한양부에 이르러 불사르고 죽이고 약탈을 해 수백리에 소동이

일어났으며(騷), 경성은 벌벌 떨었다.

따라서 동서강은 개성에서 한양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다고 볼수 있는데 과연 동서강은 어느 지역에 있는 어느 강을 지칭하는 것인가? 

또한 같은 고려사 기록을 보면 동강,서강에 동강도지휘사 및 서강도지휘사등을 두어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면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하다면 그토록 주요한 지역이었던 동강 및 서강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

2) 高麗史82卷-志36-兵2-站驛( 병참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3) 高麗史82卷-志36-兵2-馬政

諸牧場龍 [黃州] 西[洞州]銀川[白州]羊欄[開城]左牧[貞州]懷仁[淸州]常慈院[見州] 葉戶峴

[廣州]江陰 東州.
♦ 고려에서 당연히 기마병이 있었으니 여러 가축 및 말등을 키우는 목장이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목장이 있는 지명을 보라는 것입니다.

황주, 동주,은천(백주), 좌목(貞주), 상장원(見주), 동주등 이러한 지역은 어디에 있었을까.

고려사를 보면 말 사육법,락타사육법등에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또 말이나 락타등은 습도가 높은 곳에서는 사육키 어렵다는

것으로 보면 거의 대부분이 반도의 북부지방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도에서 수천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조그만 땅 덩어리 내에 있는 지명조차도 몰라서 여기가

맞다, 저기가 맞다 삿대질을 해가며 언쟁을 해야만 할 까닭은 무엇입니까.

4)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城平壤. 五年始築西京在城, 城朝陽鎭. 築靑州羅城連州城. 十八年城伊勿及肅州. 築西京羅城.
♦ 평양성을 축조, 5년에 서경에 처음으로 성 축조, 조양진에 성축, 청주에 나성을 축조, 18년에 이물 및 숙주에 성 축조, 또 서경에

라성을 축조했다고 합니다.

(여러 성을 축조 했다는 기록입니다만 설명하는 것은 본인이 임의로 선택한 것입니다)

조양이란 지명은 반도 내에 있을 수 없는 지명입니다. 조양을

1) 현으로 볼 때에는 대륙의 제남군에 있던 侯國이 있던 곳이며

2) 명나라 초의 영주위를 설치 한 곳으로 후에 태녕위로 바뀐 곳이기도 하며, 명사 열전을 보면 이곳은 섬서성 서북 또는 녕하성 지역

   주위이며,

3) 조수(朝水)지역으로 하남성에 있으며,

4) 鎭으로 보면 봉천 해룡현 주위이며,

5) 營(영)으로 볼때는 열하 승덕현입니다.

따라서 지명이 이동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반도 또는 반도의 북부와는 관계없는 지명이라는 것입니다.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定宗二年城德昌鎭又築西京王城及(중략).
♦ 정종2년에도 덕창진 및 서경에 왕성을 축조했다고 합니다.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光宗元年城長靑鎭威化鎭. 濕忽及松城. 和州 城高州一千十六*閒門六.
♦ 광종 원년에 장청진 및 위화진에 성을 축조, 습홀성 및 송성을, 화주에 성을 쌓았다.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成宗二年城樹德鎭 三年城文州五百七十八*閒門六. 十三年命平章事徐熙率兵攻逐女眞城長興歸化二鎭及郭龜二 州.

十四年命徐熙帥兵深入女眞城安義興化二鎭. 城靈州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平虜二鎭. 六年修德州嘉州威化光化四城. 八年城鎭溟縣五百一十*閒門五. 城登州六百二*閒門十四水口二. 


♦ “평노이진”에 덕주,가주,위화,광화 4성을 수리했고, 등주의 성을 축조하였다.

高麗史82卷-志36-兵2
▶二年增修松岳城築西京皇城. 三年城慶州長州金壤又城弓兀山. 鐵州城七百八十九*閒門七水口一城頭十八遮城四. 十年城永平鎭.

十二年修東萊郡城. 十四年城耀德鎭六百三十四*閒門六. 二十一年城麟州一千三百四十九*閒門九水口二城頭二十三遮城六重城五十五*

閒城寧德八百五十二*閒門七水口一城頭十四遮城七.
♦ 2년에 송악의 성을 증축하고, 서경의 황성을 축조했다. 경주,장주,금양,철주,영평진,요덕진,린주등의 성을 축조 또는 수리 및

증축했다.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德宗元年城朔州八百六十五*閒門八水口二城頭十七遮城五. 二年命平章事柳韶創置北境關防起自西海濱古國內  

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等十三城抵耀 德.靜邊.

和州等三城東傅于海延( )千餘里. 以石爲城高厚各二十五尺. 城安戎鎭*(??)城縣{杆城縣}又城靜州鎭

一千五百五十三*閒門十水口一城頭四十五遮城九重城二百六十*閒. 三年修溟州城.

▶ 城(성)을 돌로 築城(축성)했는데 “高(높이)가 二十五尺이요, 厚(두께)가 二十五尺이라 했는데 과연 현대의 우리가 믿을수 있을까?

이렇게 엄청난 성을 축조했다며 기록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유적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까.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靖宗元年築長城於西北路松嶺 東以扼邊寇之衝又城梓田徙民實之. 五年都兵馬副使朴成傑奏: "東路靜邊鎭蕃賊窺 

之地請城之." 從之. 城肅州.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文宗卽位遣兵部郞中金瓊自東海至南海築沿邊城堡農場以扼海賊之衝. 四年修渭州城六百七十五*閒.

城安義鎭榛子農場爲寧朔鎭以扼蕃賊要衝六百六十八*閒門六水口三城頭十三遮城五.

二十一年城德州六百四十二*閒門四. 二十八年修元興鎭龍州渭州城共一千九百三十餘*閒.

▶ 渭州는 어디에 있으며, 그곳 지명이 왜 위주인가 ?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 十四年增築長城三尺金邊吏發兵止之不從且報曰修補舊城.
♦ 14년, 장성을 3척을 증축했다.

금나라의 변경관리가 중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를 따르지 않고 옛 장성을 증축하면서 보수했다.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高宗九年城宜州和州鐵關凡四旬而畢. 二十年築江華外城.

三十七年始築江都中城周回二千九百六十餘*閒大小門凡十七.
♦ 고종 9년에 의주,화주,철관의 성을 쌓았으며, 20년에는 강화의 외성을, 37년에는 강도의 중성을 처음으로 쌓았다.

高麗史82卷-志36-兵2-城堡
辛禑三年開城府狀曰: (중략) 其四牧府郡縣築城事則曰休兵息民有國之先務也. 比來倭患相仍民不聊生且曾築

四  方周回長城與癸丑年所築東西江等城徒勞民費財而已. 其外方平地築城宜令停罷."

5) 高麗史82卷-志36-兵2-屯田
顯宗十五年正月都兵馬使奏: ▶"發西京畿內河陰部曲民百餘戶徙嘉州南屯田."
▶ “西京畿內(서경기내)”라는 말을 변방국에서 사용 할 수 있었을까. 이 말은 결국 고려가 황제국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반도의 상황이 아니다. 현종15년에 도병마사의 상소로, 서경 기내(西京畿內)의 하음부곡민 백여호를 옮겨 가주의 남쪽에 둔전을

설치했다.
여기서 “기내(畿內)”란 “경(京)을 중심으로 500리 내의 땅 즉 황제가 직접 통치 관할하는 지역”을 칭한다.

경을 중심으로 500 리라면 동서 1,000리, 남북 1.000리가 되는 것이다.
반도의 고려, 그리고 고려의 황도 개경, 그리고 서경 !

과연 고려가 만만세를 외쳤던 황상의 국가로 반도내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

아니면 “황상”의 국가로 “만만세”를 외쳤던 “고려국”은 대륙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본인의 주장은 당연히 후자다.

6) 高麗史82卷-志36-兵2-屯田
文宗十八年二月命有司以禮成江船一百七 一年六次漕轉龍門倉米于麟龍鐵宣郭等州及威遠鎭以充軍粮.

二十一年六月制: 漕運安瀾倉米二萬七千六百九十石于朔北以充軍資. 二十七年四月西北路兵馬使奏:

▶"長城外墾田一萬一千四百九十四頃請待秋收穫以資軍儲." 制可. (墾:따비할간. 開墾하, 漕:배로실어나를조)
(頃 : 田百畝 : 백이랑경. 畝 : 이랑무 : 畝(무)-6척 사방을 “보” 라하고 “100보(步)”를 “1畝”라 한다.

즉 1경(頃)은 100무(畝)이다. 현대의 상식으로 보면 1보=1평이며, 100평=1무이고, 100무= 1경이다).
문종 27년에 서북로 병마사의 상소 즉 “장성(長城) 밖에 개간한 밭 11,494경에서 나오는 수확물을 가을에 거둬 군량미로 비축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황상께서는 O.K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도의 어디에 장성이 있어 증축하고, 보수하고, 법석을 떨었을까.

물론 북쪽에 고려의 천리장성이라 하여 그려 놓고 있지만 주위의 국가 즉 요, 금나라와의 경계가 반도 북부에 서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요나라 또는 금나라가 동북삼성 지역에서 출현했다는 식의 해설은 역사서의 기록에는 없다.

해설 하는 분들이 “있다”고 해설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예를 들어 청 태조 “애신각라”는 만주에서 일어났다

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주가 현 동북삼성 지역이라는 기록은 눈을 씻고, 또 씻고 보아도 없다.

해설자들은 20세기 초에 일인들에 의해 이름 붙여진 현재의 동북삼성 지역을 “만주”라고 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륙측은 어떤가. 현재로부터 제일 가까운 시점에서 보자.

20세기 초에 편찬되어진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보면 “만주칠기의 시원지는 악이다사 중심지역”이라고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나라의 시원지, 발생지인 만주는 동북삼성 지역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청사고 및 신청사등의 태조 본기를 보면 “청의 발생지”는 결코 백두산 동남쪽이 될 수 없다. 청사의 본기를 보면서 지명의 위치를

임의적으로 한반도 북부 또는 동북삼성 지역으로 비정, 해설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는 것이다.

요사 지리지 오경도편을 보면, 요나라의 시원지는 결코 현 동북삼성 지역이 될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음에도  지명의 위치를 동북삼성

지역에 몰아넣고 해설하다보니 나라도 세우기전에 수천리 서쪽지역의 종족들을 격파하는 웃어 넘기기엔 너무도 바보스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청사의 태조편도 똑 같다.

청사를 보면 현재의 해설대로 라면 백두산 동남쪽 한반도 내지에서 발흥한 애신각라가 청을 건국하기도 전에 서쪽으로 5,6천리 이상

떨어져 있던 녕하성 또는 감숙성 북변의 종족 또는 지역을 격파하는 기록을 볼수있다.

과연 이러한 기록을 믿을수 있는 것인가. “기록은 믿되 해설은 믿지말라”.고 충고 하고 싶다.

한반도 북부와 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7) 高麗史82卷-志36-兵2-屯田
忠烈王三年二月令▶諸王百官以至庶民出米有差以充洪茶丘軍粮.
⁂ “諸王百官以至庶民出米有差以充洪茶丘軍粮”.현대의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수 있을 것인가.

“제왕(諸王)”이란 “皇帝(황제)” 밑에 각지에 있었던 諸侯國(제후국)의 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황제국이었으며, 황제 밑에 여러 제후국이 있었다는 것이다.(差:어긋날차.充:채울충).

“제후국왕 및 백관(여러 관리)들과 서민들이 각출한 쌀이 조금 모자라면 이를 채워 홍다구군의 군량미로 써라”고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 해설은 반도에서 대륙에 있던 왕조들에게 아부나 하면서 왕조를 이어가는 불품없는 제후국 또는 변방국의

역사로 만들어 놓았다.

비록 이해 할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이 없다.

왜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않는 것인가. “諸王”이란 명을 내린 충열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諸가 어조사로 쓰인것인가. “諸王”이란 고려내에 있었던 각지의 公,侯 즉 제후국의 왕을 말한다고 본인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란 국가에 대해 현재와 같은 역사 해설은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축소시키고, 초라하게 만들수는 없는 것이다.

8) 高麗史83卷-志37-兵3-船軍
辛禑三年十月出市廛商賈以充海道之軍. 四年二月僉五部坊里軍令乘船捕倭.

十三年四月僉京圻左右道軍人爲騎 船軍以防東西江倭寇

9) 朝鮮公, 扶餘侯*辰韓侯, 漢山侯, 上黨侯, 帶方公, 太原公* 齊安公* 通義侯,*大寧侯, 漢陽侯, 桂陽侯. 樂浪 公.

♦ 고려사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기록이다.

반도의 고려, 대륙측의 왕조에 아부나 하면서 일년에 몇 번씩 조공(?)이나 하는 변방국 또는 제후국에서 가당키나 한 관직인가.

아니면 뽐으로 자존심을 꽉(죄송!) 세우려고 대학자 정인지가 꾸며낸 얘기인가 ?

조선공은 무엇이고, 부여후는 무엇이며, 산서성에 있다고 하는 군명(郡名)인 “상당”후는 또 무엇인가.

또한 산서성의 성도(省都)인 “태원공”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대에 미쳐 죽을둥,살둥 한다 한들 남의 나라 지명에 관직명을 붙여 무엇에 쓸려 했을까.

이것은 위의 설명에 “제왕백관(諸王百官)”이란 말 중에서 “제왕(諸王)”에 해당하는 관직이라는 것이다.
한반도 어디에 상당후가 있었을까, 또한 한반도 어디에 태원후가 있을수 있으며, 통의후,대녕후가 있을수 있겠는가.

고려라는 국가를 반도에 넣고는 “해설불가”, 또는 “반도의 미스테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고려”라는 국가의 강역은 “대륙”이라는 명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고려는 반도에 있을수 없는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0) 高麗史92卷-列傳5-庾黔弼
八年爲征西大將軍攻百濟燕山鎭殺將軍吉奐又攻任存郡殺獲三千餘人.

♦ 8년에 정서대장군이 백제의 연산(燕山)진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을 죽이고, 또 임존군을 공격하여 3000여명을 죽이고 손에

넣었다. 아마도 “연산”은 논산의 윗 “연산”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곳이 “연산”인가. “그냥 연산이라고 하니까 연산이다”.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임존성”이라 하여 홍성에서 청양 가는 대흥면에 이정표는 있다지만 당시의 “郡”이라는 관제로 보면 상당히

큰 고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대흥은 한마디로 전형적인 농촌 마을 이었으며, 현재도 발전이 별로 없는 그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일천여 년전 이러한 지역에 “군(郡)”이 설치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코메디다.

아마도 백제 망시에는 몇 가구라도 살았다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은 삼국사기 및 대륙사서내의  백제 망시 당군과 백제군과의

전쟁지명에도 등장하는 것이 임존성이다.

11) 高麗史92卷-列傳5- 直-001
 直燕山昧谷人. 연산의 어디를 매곡(昧谷)이라 했을까. 2005년도 현재에는 연산지역이 조금 나아졌겠지만 1970 년경 만해도

조그마한 농촌 마을이었다.

다행이 “연산”이라는 기차역이 있어 그나마 이지 아마 그곳에 기차역이 없었다면 몇 가구나 살았을까.

이러한 연산에 1,000 여 년전에 매곡인이라고 할 정도의 지역이 있었을까 의문이다.

열전 내용을 보면 이름 바로 뒷에 00 인이라고 현,주,군등 태어난 곳을 기록하고 있다.

연산 매곡인이라는 말은 燕山(연산)이 최소한 군(郡) 또는 주(州)였다는 말이다.

한반도 연산이 과거에 “군”, 또는 “주”정도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까.

10)의 기록을 보면 “연산진”이라 했다.“진”이었다면 중요한 군사기지 였거나 상업적인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왜 연산은 과거로부터 멀어지는 이해할수 없는 지역이 되었을까.

이것은 충청도의 연산이 역사서에 기록되어진 “연산”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12) 高麗史134卷-列傳47-辛禑2
七月以張夏爲各道山城巡審使我太祖以門下贊成事爲東北面都指揮使時胡拔都虜掠東北面人民而去以太祖世管 

其道軍務威信素著遣以慰撫.▶帝平定雲南發遣梁王家屬安置濟州◀. 禑遣密直司使柳藩如 京師賀表曰: "大春秋 

之一統運啓中邦整雷霆之六師威加南極捷音遠播喜氣旁騰. 竊以虞書載有苗之征漢史記交趾之擊盖其執迷而干紀 故乃聲罪而致討 

爾雲南濱於海 妄謂險遠之足恃敢肆跳梁而不恭爰出睿謀偉矣萬全之擧克平 

俗赫然一怒而安息馬投戈超今邁古玆盖陛下重華 德光武同符. 告厥成功混車書 宇之內屈此群醜置 

虜海島之中是宜 之消益慰神人之望. 伏念臣幸逢昭代欣聞凱歌攝政釐東雖阻駿奔之列陳詩美上聊申燕賀之誠."

▶ 상기의 “梁王(양왕)”은 원의 세조(쿠빌라이)의 五子(오자)로써 雲南王(운남왕)의 후손으로 "양왕“ 에 봉해졌던 인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이 사건은 고려사에는 고려군이 운남지역을 정벌하고 그곳을 통치하던 ”양왕 및 그 가솔“ 들을 포로로 잡아 고려땅인

”제주“ 에 안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明史(명사)에서는 홍무14년12월 壬 申 ,元 梁 王 把 匝 剌 瓦 爾 密 走 普 寧 自 殺 。이라 기록하여 원의 ”양왕“이 ”보녕“

으로 도주했다가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기록이 진실인 것인가 ?
만약에 명나라의 왕을 “제(帝)”로 해설한다면 명나라 왕이 자신들이 토벌하여 힘들게 포로로 잡은 양왕과 그 식솔들을 무엇하러 고려

땅 그것도 바다 한가운데 있는 제주까지 보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으며, 또 명사본기를 보니까 양왕은 도주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이해 할수 없는 어떤 “트릭”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대의 우리 자신이 아둔하여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일까!

13) 高麗史39卷-世家39-恭愍王2
秋七月乙卯朔幸白岳相視遷都之地白岳在臨津縣北五里. ♦
♦ 왕이 행차하여 상시 천도할수 있는 곳을 보았는데, 백악은 임진현 북 5리에 있다는 것이다.

과연 “백악”이 임진현에 있었을까. 만약에 임진현에 있었다면 임진강의 강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임진현 자체가 그렇다. 왜적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배를 타고 와 휩쓸고 다니다 싶이 하는 때에 강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임진현에

황도를 옮기려 했단 말인가.

14) 高麗史39卷-世家39-恭愍王2
丙子江浙省李右丞遣張國珍來獻沈香匹* {段}玉帶弓劒復遣少尹金伯環報聘.

高麗史39卷-世家39-恭愍王2
張士誠遣人來獻綵* {段}玉 沈香弓矢.

高麗史39卷-世家39-恭愍王2
淮南省右丞王晟遣使來獻綵帛沈香.

♦ 우리 냉정하게 생각을 좀 해 봅시다. “강절성”이라면 대륙의 동남부의 절강성을 말합니다.

또한 장사성, 회남성 우승왕등 이러한 자들은 대륙의 동남부 강소성 및 절강성쯤에 있었던 제후였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던 자들인데 이들이 무엇이 아쉬워 배를 타고 며칠씩 고생해가며 반도까지 와 토산품을

헌상했을까.

자신들의 안위와 관계있는 곳, 관계있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인간사이다.

함에 그들이 바다를 며칠씩 건너 반도의 고려까지 스스로 찿아와 토산물을 헌상 할 때에는 무언가 고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면 고려 라는 국가를 흠모해서 그 멀리서 까지 찿아 왔을까. 이건 아니다.

고려라는 국가와 그들은 중대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위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 그렇다면 고려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본인의 주장은 고려는 이들의 “상국(上國)”이었으며, 이들은 고려의 제후국이었다는 것이다.

15) 高麗史39卷-世家39-恭愍王2
壬寅紅賊寇泥城.

16) 高麗史40卷-世家40-恭愍王3
甲子安祐李芳實黃裳韓方信李餘慶金得培安遇慶李龜壽崔瑩等率兵二十萬屯東郊摠兵官鄭世雲督諸將進圍京城, 

乙丑昧爽諸將四面進攻我太祖以麾下親兵二千人奮擊先登大破之斬賊魁沙劉關先生等賊徒自相蹈籍 尸滿城斬  

首凡一十餘萬級, 獲元帝玉璽金寶金銀銅印兵仗等物餘黨破頭潘等一十餘萬遁走渡鴨綠江而去賊遂平.

♦ 고려를 반도에 놓고 이 기록을 말한다면 재미있는 이야기 책이 된다.

아무리 반도사관 또는 식민사관을 욕하지 않으려 해도 이런 것을 보면 쌍두문자가....

홍적(紅敵)들, 그들 나름대로 꽤 짜임새 있게 전략,전술을 구사하며 대륙을 잠시나마 쓸고 다녔던 무리들이다. 

이들이 아무려면 하북성을 지나 요동반도를 지나 현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황성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누군가 고의적으로 고려를

비하시키려는, 초라하게 축소하려는 음모라는 것이다.

위의 기록대로 “안우,이방실,황상,한방신,이여경,김득배,안우경,이구수,최영등이 이십만 대군을 동쪽 교외에 주둔시키고 총병관

정세운의 독려로 제장병들이 경성을 포위 진격했다는 것이다.(중략).

십여만의 홍적의 머리를 베고, 원나라 황제의 옥새(玉璽) 및 금은보화,인,병장등을 이들 홍적으로부터 획득했고, 홍적 잔당 무리 및

파두번 등 십여만의 홍적들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을 가고, 평온을 찿았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홍적들이 왜 고려를 침공했을까,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놈들이 아닌바 에야 그들이 무엇을 얻고자 하북성을 지나 요동반도를 넘어 압록강을 도하하여 남쪽으로 진격 고려의

개경까지 갔을까. 너무 긴 설명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마무리 해야 겠습니다.

이 사건은 반도에 고려를 놓고는 23세기가 되어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고려의 강역을 대륙에 넣지 않고는 해설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17) 高麗史40卷-世家40-恭愍王3
辛丑王發福州.
♦ “복주”는 한반도 어디에도 이런 지명은 없다. “왕이 복주로 갔다”.

그렇다면 고려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지명 이름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록은 “복주로 갔다”는 것이다.

행정 편제상으로 “주”라면 “道” 밑에 “州”였으니 꽤 번화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럴싸한 “복주”란 도시가 어느날 갑자기 반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건 아니다.

18) 高麗史40卷-世家40-恭愍王3
都指揮使安遇慶七戰却之復出與戰都兵馬使洪瑄被擒我軍敗績. 走保安州濡入據宣州.
♦ 도지휘사 안우경이 일곱 번이나 막아냈으나, 출전한 도병마사 홍선이 사로 잡히고 아군은 패했다.

보안주 및 유주로 도망을 가 선주에 들어가 의거했다.
保安州(보안주)라는 지명 자체가 반도에는 없다. 濡(유) 역시도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19) 高麗史41卷-世家41-恭愍王4
冬十月癸巳方國珍遣使來聘. ♦

高麗史42卷-世家42-恭愍王5
甲午吳王淮王遣使來獻方物
♦ 방국진이 있었던 곳은 台州(태주)로 알려져 있다. 태주라면 춘추시대의 월나라 땅이다.

림해군(臨海郡)이다. 림해군은 당나라때 해주(海州)다.

태주라는 지명은 이곳에 천태산이 있어 태주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절강성에 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을 좀 해봐야 겠다.

회남성(안휘성 회수 주위)에서, 강절성(절강성)에서, 림해군의 방국진 등이 무엇을 얻겠다고 대륙의 제후국 이었던 반도의 고려라는

국가를 찿아 뵙고 토산물을 한 아름 안고 와 선물을 하고 갔을까. 또한 오왕과 회왕이 파견사를 보내 토산품을 헌상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도에 있었다던 고려라는 국가에 무엇을 얻고자 하였을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래빙(來聘)”이라는  글자다.

“聘”은 제후가 천자를 방문하여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반도의 고려에서 대륙의 남쪽지방에 제후국을 두었을까,

아니면 대륙의 고려에서 남쪽지방의 제후국을 거느렸을까. 당연히 후자라고 주장한다.

20) 高麗史43卷-世家43-恭愍王6
乙丑陳理明昇等男婦共二十七人入京. 理昇詣闕. ?琵暢杳측즛?. 理昇拜于階上王坐受之. 禮訖坐於使臣之下.  

昇年十八,理年二十二.

▶ 이 기록의 “明昇(명승)”은 대륙 사천성에서 “大夏(대하)”의 황제 명옥진의 아들이다.

주원장이 이를 토벌하고 이들을 고려로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明史(명사)”의 기록에도 있다.

과연 고려와 주원장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음 기록에는 명승을 고려에서 중신의 딸과 혼인까지 시킨다는 것이다.

(高麗史44卷-世家44-恭愍王7)에 “辛卯明昇娶摠郞尹熙宗女. 王賜米四十石布一千匹”,

즉 랑 윤희종의 여식에 명승이 장가를 들었다(娶)고 기록하고 있다.

▶ 明史(명사),列傳(열전)第十一, 陳友諒 張士誠 方國珍 明玉珍편을 보면 :
“陳友諒(진우량)”편을 보면 “洪武五年(홍무오년),理及歸義侯明升並徙高麗(리급 귀의후 명승 병사고려)”  

이라 했고, 明玉珍(명옥진)편을 보면 (중략) “明年徙升於高麗(명년사”승“어고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 명사 본기를 보자.

四年(홍무). “秋七月辛亥 ,徐達練兵山西 。辛酉 ,傅友德下成都 ,四川平 。乙丑 ,明昇至京師 ,

封歸義侯” 라 했고, “五年春正月 乙丑 ,徙陳理 、明昇於 高麗” 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홍무4년에 서달은 산서에서 병사들을 단련하고 있다. 신유, 부우덕이 성도에 가 사천을 평정했다.

을축, 명승이 경사에 이르렀다. 명승에게 귀의후를 봉했다. (중략).

오년 봄 정월에 진리 및 명승을 고려로 옮겼다.
결과적으로 보면 주원장은 진우량의 아들 “리” 및 명옥진의 아들 “승”(황제를 칭)과 그 휘하 가족들을 모두 고려로 보내 살도록

했다는것이다.
사천에서 황제를 칭하고 건국한 “대하(大夏)”의 명옥진이 젊은 나이에 죽고 그의 아들 “명승”이 10살 나이로  황제가 된다.

이때 주가를 올리고 있던 주원장이 휘하 장군 “부우덕”을 보내 “대하”의 강역을 접수하고 황제를 참칭한 “명승”을 포로(?)로 하여

주원장이 있던 경사(?)로 보내지고 주원장은 “명승”에게 “귀의후”라는 관작을 수여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정복자와 정복당한자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후에 주원장은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이 수여한 “귀의후 명승”을 고려로 보낸다.

이때 진우량의 아들인 “진리” 및 양 가족들 오,륙십명이다.

주원장은 자신의 명령으로 자신의 휘하 장군 및 병사들에게 항복한 포로를 “귀의후”라는 관작까지 주면서 서울에서 잘 살게 하다가

이들을 고려로 보내야만 했을까.

또한 고려는 이들에게 중신 딸에게 장가까지 보내주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고려”와 “명승”의 관계는 敵(적)이 아닌

“上과 下”의 관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주원장의 명과 고려의 관계 역시 “敵(적)” 또는 대등한 동격의 국가가 아닌 “上과下의 관계” 였을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고려사의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볼때 (서역으로부터, 대륙의 남방으로부터, 대륙의 북방으로부터) “고려는 상국이었으며, 대륙의

요충지에 있었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반도에 고려를 놓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21) 高麗史45卷-世家45-恭讓王1
丁亥金允厚等還自琉球國. 中山王察度又遣其臣玉之等稱臣奉表歸我被擄人三十七仍獻土物.

♦ 김윤후등이 유구국에서 돌아왔다.

“중산왕 찰도” 파견사인 “옥”등이 신하를 자칭하며 봉표를 올리고 사로잡힌 아국인 37인과 거듭 토산물을 헌상했다.
“중산국”이 섬서성 북부지대에 있었든, 하북성 중부지방에 있었든 간에 대륙의 요충지중 요충지에 있었던 “중산국”의 “중산왕”이

수천리 동남지역에 있었다던 고려에 무엇을 바라고 토산물을 싣고 고려까지 왔을까.

상기의 글은 개인 또는 특정 단체등을 비방, 비난등의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글 내용 중에 경어가 빠진 곳도 있습니다. 설명을 위주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된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역사 연구가 우리의 앞날에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