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산수유골에서 만난사람들 글쓴이: 부초 http://cafe.daum.net/baeksa./So8r/239
반도 고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려사 이야기 여러 번에 걸쳐 고려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견 개진이 있었습니다.고려는 반도에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고려는 대륙에 있었다는 등의 여러 의견 및 토론 때로는 격한 모습의 대화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분께서는 유물,유적에 관한 말씀도 했습니다. 고려 이전의 애기는 다른 곳에서 논하기로 하고 고려시대의 유물,유적 이야기를 해 보면, 몇 왕들의 무덤이 경기도 지역에 있다고 하면서 국도변에 안내 간판을 설치 해 놓고 있읍니다만, 그 무덤이 고려의 몇 대 왕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증거물이 나왔다는 것이 존재하는가. 기록하고 있는데 그 잔재는 반도내 어디에 있는가, 만약 고려사의 기록대로라면 반도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근대조선시절에 축조한 성곽 때문에 도시 계획 하나 제대로 설계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즉 없었다는 것이다. 있으나, 개성이란 그곳은 일제시대 때만 하더러도 왕궁은 커녕 황궁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자리 하나 제대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 엄청난 황성 및 외곽성, 그리고 황궁은 왜 터만 남았는가.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고들 있지만 왜 반도에서만 그 많은 유적,유물들이 통째로 없어지고 터만 남는 것일까. 수백명은 될것이며, 그 이하 왕비, 왕자, 공주, 가까운 왕손으로부터, 고관 대작등을 합하면 수십만은 능히 될것이로되, 이들의 무덤 한 곳 에서라도 속 시원한 답변을 준 적이 있는가 묻고 싶은것이다. 물론 연구 가치가 많은 분야라는 것을 몰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기록되어진 내용과 지명의 위치를 어떻게 번역 또는 해설, 비정 하느냐에 따라 반도의 역사 또는 대륙의 역사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 장성을 축조한 기록을 보면 “조양에서 양평까지” 라는 문구를 여러 학자님들, 또한 이 싸이트에서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건너 오원에서도 900 리를 북쪽으로 가야하는 곳에 있었다고 대륙사서는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다면 연나라에서 장성을 축조한 조양이 상곡군의 속현이라 했고, 이곳이 결국 연나라의 땅이 되는 것이며, 이곳은 바로 상곡군이었으며,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들을 몰아낸 곳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동쪽으로 4,000 리쯤 이동시켜 해설한다면 그 후대의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은 그 이동된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역사의 조작이요, 왜곡인 것입니다. 이렇게 동쪽으로 이동되어진 지명의 위치로 말미암아 요동,요서가 마치 요녕성의 요수 또는 요하 또는 난하를 기준한 것처럼 해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마도 당시의 동북삼성 지역에 있는 강이든 하천이든 그 당시에는 이름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륙사서 중 가까운 시기로 보면 “오대사”의 열전 기록 편에 분명하게 “음산의 남쪽 요서지방으로 옮겼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음산은 하투 서북방에 있는 본시의 “음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배들에 의해 우리의 고대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고, 뒤죽박죽으로 해설하다보니 역사의 “미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여러 의문점에 대한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이것은 개인이나 조그마한 단체등에서 해결할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대규모로 시작을 한다 해도 수십 년이 걸릴 대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급하게 군다고 해서 해결될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왕이 9월초에 경상,양광,전라등 각도에서 모집한 병력을 익위군이라 칭하고 동강 및 서강에 주둔시켰다. 여기서 “동강 및 서강은 반도내 어느 강을 말하는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1) 동강은 두만강 2) 서강은 압록강이라 할수 없는 것이 “高麗史44卷-世家44-恭愍王7”을 보면 “丙申倭舶集東西江寇陽川遂至漢陽府燒廬舍殺掠人民數百里騷然京城大震”.이라 했기 때문이다. 즉 왜적들이 배를 타고 집결하여 동서강으로 양천에 쳐들어와 한양부에 이르러 불사르고 죽이고 약탈을 해 수백리에 소동이 일어났으며(騷), 경성은 벌벌 떨었다. 따라서 동서강은 개성에서 한양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다고 볼수 있는데 과연 동서강은 어느 지역에 있는 어느 강을 지칭하는 것인가? 또한 같은 고려사 기록을 보면 동강,서강에 동강도지휘사 및 서강도지휘사등을 두어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면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하다면 그토록 주요한 지역이었던 동강 및 서강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 [廣州]江陰 東州. 그런데 그 목장이 있는 지명을 보라는 것입니다. 황주, 동주,은천(백주), 좌목(貞주), 상장원(見주), 동주등 이러한 지역은 어디에 있었을까. 고려사를 보면 말 사육법,락타사육법등에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보아 또 말이나 락타등은 습도가 높은 곳에서는 사육키 어렵다는 것으로 보면 거의 대부분이 반도의 북부지방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도에서 수천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조그만 땅 덩어리 내에 있는 지명조차도 몰라서 여기가 맞다, 저기가 맞다 삿대질을 해가며 언쟁을 해야만 할 까닭은 무엇입니까. 라성을 축조했다고 합니다. (여러 성을 축조 했다는 기록입니다만 설명하는 것은 본인이 임의로 선택한 것입니다) 조양이란 지명은 반도 내에 있을 수 없는 지명입니다. 조양을 1) 현으로 볼 때에는 대륙의 제남군에 있던 侯國이 있던 곳이며 2) 명나라 초의 영주위를 설치 한 곳으로 후에 태녕위로 바뀐 곳이기도 하며, 명사 열전을 보면 이곳은 섬서성 서북 또는 녕하성 지역 주위이며, 3) 조수(朝水)지역으로 하남성에 있으며, 4) 鎭으로 보면 봉천 해룡현 주위이며, 5) 營(영)으로 볼때는 열하 승덕현입니다. 따라서 지명이 이동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반도 또는 반도의 북부와는 관계없는 지명이라는 것입니다. 十四年命徐熙帥兵深入女眞城安義興化二鎭. 城靈州
十二年修東萊郡城. 十四年城耀德鎭六百三十四*閒門六. 二十一年城麟州一千三百四十九*閒門九水口二城頭二十三遮城六重城五十五* 閒城寧德八百五十二*閒門七水口一城頭十四遮城七. 증축했다. 城界鴨綠江入海處東跨威遠.興化.靜州.寧海.寧德.寧朔.雲州.安水.淸塞.平虜.寧遠.定戎.孟州.朔州.等十三城抵耀 德.靜邊. 和州等三城東傅于海延( )千餘里. 以石爲城高厚各二十五尺. 城安戎鎭*(??)城縣{杆城縣}又城靜州鎭 一千五百五十三*閒門十水口一城頭四十五遮城九重城二百六十*閒. 三年修溟州城. 이렇게 엄청난 성을 축조했다며 기록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유적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까. 之地請城之." 從之. 城肅州. 城安義鎭榛子農場爲寧朔鎭以扼蕃賊要衝六百六十八*閒門六水口三城頭十三遮城五. 二十一年城德州六百四十二*閒門四. 二十八年修元興鎭龍州渭州城共一千九百三十餘*閒. 금나라의 변경관리가 중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를 따르지 않고 옛 장성을 증축하면서 보수했다. 三十七年始築江都中城周回二千九百六十餘*閒大小門凡十七. 四 方周回長城與癸丑年所築東西江等城徒勞民費財而已. 其外方平地築城宜令停罷." 반도의 상황이 아니다. 현종15년에 도병마사의 상소로, 서경 기내(西京畿內)의 하음부곡민 백여호를 옮겨 가주의 남쪽에 둔전을 설치했다. 경을 중심으로 500 리라면 동서 1,000리, 남북 1.000리가 되는 것이다. 과연 고려가 만만세를 외쳤던 황상의 국가로 반도내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 아니면 “황상”의 국가로 “만만세”를 외쳤던 “고려국”은 대륙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본인의 주장은 당연히 후자다. 二十一年六月制: 漕運安瀾倉米二萬七千六百九十石于朔北以充軍資. 二十七年四月西北路兵馬使奏: ▶"長城外墾田一萬一千四百九十四頃請待秋收穫以資軍儲." 制可. (墾:따비할간. 開墾하, 漕:배로실어나를조) 즉 1경(頃)은 100무(畝)이다. 현대의 상식으로 보면 1보=1평이며, 100평=1무이고, 100무= 1경이다). 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황상께서는 O.K 했다는 말이다. 물론 북쪽에 고려의 천리장성이라 하여 그려 놓고 있지만 주위의 국가 즉 요, 금나라와의 경계가 반도 북부에 서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요나라 또는 금나라가 동북삼성 지역에서 출현했다는 식의 해설은 역사서의 기록에는 없다. 해설 하는 분들이 “있다”고 해설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예를 들어 청 태조 “애신각라”는 만주에서 일어났다 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주가 현 동북삼성 지역이라는 기록은 눈을 씻고, 또 씻고 보아도 없다. 해설자들은 20세기 초에 일인들에 의해 이름 붙여진 현재의 동북삼성 지역을 “만주”라고 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륙측은 어떤가. 현재로부터 제일 가까운 시점에서 보자. 20세기 초에 편찬되어진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보면 “만주칠기의 시원지는 악이다사 중심지역”이라고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나라의 시원지, 발생지인 만주는 동북삼성 지역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청사고 및 신청사등의 태조 본기를 보면 “청의 발생지”는 결코 백두산 동남쪽이 될 수 없다. 청사의 본기를 보면서 지명의 위치를 임의적으로 한반도 북부 또는 동북삼성 지역으로 비정, 해설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는 것이다. 지역에 몰아넣고 해설하다보니 나라도 세우기전에 수천리 서쪽지역의 종족들을 격파하는 웃어 넘기기엔 너무도 바보스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청사의 태조편도 똑 같다. 청사를 보면 현재의 해설대로 라면 백두산 동남쪽 한반도 내지에서 발흥한 애신각라가 청을 건국하기도 전에 서쪽으로 5,6천리 이상 떨어져 있던 녕하성 또는 감숙성 북변의 종족 또는 지역을 격파하는 기록을 볼수있다. 과연 이러한 기록을 믿을수 있는 것인가. “기록은 믿되 해설은 믿지말라”.고 충고 하고 싶다. 한반도 북부와 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제왕(諸王)”이란 “皇帝(황제)” 밑에 각지에 있었던 諸侯國(제후국)의 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는 황제국이었으며, 황제 밑에 여러 제후국이 있었다는 것이다.(差:어긋날차.充:채울충). “제후국왕 및 백관(여러 관리)들과 서민들이 각출한 쌀이 조금 모자라면 이를 채워 홍다구군의 군량미로 써라”고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역사로 만들어 놓았다. 비록 이해 할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이 없다. 왜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않는 것인가. “諸王”이란 명을 내린 충열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諸가 어조사로 쓰인것인가. “諸王”이란 고려내에 있었던 각지의 公,侯 즉 제후국의 왕을 말한다고 본인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란 국가에 대해 현재와 같은 역사 해설은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축소시키고, 초라하게 만들수는 없는 것이다. 十三年四月僉京圻左右道軍人爲騎 船軍以防東西江倭寇 ♦ 고려사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기록이다. 반도의 고려, 대륙측의 왕조에 아부나 하면서 일년에 몇 번씩 조공(?)이나 하는 변방국 또는 제후국에서 가당키나 한 관직인가. 아니면 뽐으로 자존심을 꽉(죄송!) 세우려고 대학자 정인지가 꾸며낸 얘기인가 ? 조선공은 무엇이고, 부여후는 무엇이며, 산서성에 있다고 하는 군명(郡名)인 “상당”후는 또 무엇인가. 또한 산서성의 성도(省都)인 “태원공”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무리 사대에 미쳐 죽을둥,살둥 한다 한들 남의 나라 지명에 관직명을 붙여 무엇에 쓸려 했을까. 이것은 위의 설명에 “제왕백관(諸王百官)”이란 말 중에서 “제왕(諸王)”에 해당하는 관직이라는 것이다. 고려라는 국가를 반도에 넣고는 “해설불가”, 또는 “반도의 미스테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고려”라는 국가의 강역은 “대륙”이라는 명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고려는 반도에 있을수 없는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 8년에 정서대장군이 백제의 연산(燕山)진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을 죽이고, 또 임존군을 공격하여 3000여명을 죽이고 손에 넣었다. 아마도 “연산”은 논산의 윗 “연산”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곳이 “연산”인가. “그냥 연산이라고 하니까 연산이다”. 타당성이 있는 것일까. “임존성”이라 하여 홍성에서 청양 가는 대흥면에 이정표는 있다지만 당시의 “郡”이라는 관제로 보면 상당히 큰 고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의 대흥은 한마디로 전형적인 농촌 마을 이었으며, 현재도 발전이 별로 없는 그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일천여 년전 이러한 지역에 “군(郡)”이 설치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코메디다. 아마도 백제 망시에는 몇 가구라도 살았다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이 상황은 삼국사기 및 대륙사서내의 백제 망시 당군과 백제군과의 전쟁지명에도 등장하는 것이 임존성이다. 조그마한 농촌 마을이었다. 다행이 “연산”이라는 기차역이 있어 그나마 이지 아마 그곳에 기차역이 없었다면 몇 가구나 살았을까. 이러한 연산에 1,000 여 년전에 매곡인이라고 할 정도의 지역이 있었을까 의문이다. 열전 내용을 보면 이름 바로 뒷에 00 인이라고 현,주,군등 태어난 곳을 기록하고 있다. 연산 매곡인이라는 말은 燕山(연산)이 최소한 군(郡) 또는 주(州)였다는 말이다. 한반도 연산이 과거에 “군”, 또는 “주”정도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까. 10)의 기록을 보면 “연산진”이라 했다.“진”이었다면 중요한 군사기지 였거나 상업적인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왜 연산은 과거로부터 멀어지는 이해할수 없는 지역이 되었을까. 이것은 충청도의 연산이 역사서에 기록되어진 “연산”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其道軍務威信素著遣以慰撫.▶帝平定雲南發遣梁王家屬安置濟州◀. 禑遣密直司使柳藩如 京師賀表曰: "大春秋 之一統運啓中邦整雷霆之六師威加南極捷音遠播喜氣旁騰. 竊以虞書載有苗之征漢史記交趾之擊盖其執迷而干紀 故乃聲罪而致討 爾雲南濱於海 妄謂險遠之足恃敢肆跳梁而不恭爰出睿謀偉矣萬全之擧克平 俗赫然一怒而安息馬投戈超今邁古玆盖陛下重華 德光武同符. 告厥成功混車書 宇之內屈此群醜置 虜海島之中是宜 之消益慰神人之望. 伏念臣幸逢昭代欣聞凱歌攝政釐東雖阻駿奔之列陳詩美上聊申燕賀之誠." 전해지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이 사건은 고려사에는 고려군이 운남지역을 정벌하고 그곳을 통치하던 ”양왕 및 그 가솔“ 들을 포로로 잡아 고려땅인 ”제주“ 에 안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明史(명사)에서는 홍무14년12월 壬 申 ,元 梁 王 把 匝 剌 瓦 爾 密 走 普 寧 自 殺 。이라 기록하여 원의 ”양왕“이 ”보녕“ 으로 도주했다가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느 기록이 진실인 것인가 ? 땅 그것도 바다 한가운데 있는 제주까지 보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으며, 또 명사본기를 보니까 양왕은 도주하다가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이해 할수 없는 어떤 “트릭”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현대의 우리 자신이 아둔하여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백악”이 임진현에 있었을까. 만약에 임진현에 있었다면 임진강의 강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임진현 자체가 그렇다. 왜적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배를 타고 와 휩쓸고 다니다 싶이 하는 때에 강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임진현에 황도를 옮기려 했단 말인가. 또한 장사성, 회남성 우승왕등 이러한 자들은 대륙의 동남부 강소성 및 절강성쯤에 있었던 제후였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들의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던 자들인데 이들이 무엇이 아쉬워 배를 타고 며칠씩 고생해가며 반도까지 와 토산품을 헌상했을까. 자신들의 안위와 관계있는 곳, 관계있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인간사이다. 함에 그들이 바다를 며칠씩 건너 반도의 고려까지 스스로 찿아와 토산물을 헌상 할 때에는 무언가 고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면 고려 라는 국가를 흠모해서 그 멀리서 까지 찿아 왔을까. 이건 아니다. 고려라는 국가와 그들은 중대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안위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 그렇다면 고려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본인의 주장은 고려는 이들의 “상국(上國)”이었으며, 이들은 고려의 제후국이었다는 것이다. 乙丑昧爽諸將四面進攻我太祖以麾下親兵二千人奮擊先登大破之斬賊魁沙劉關先生等賊徒自相蹈籍 尸滿城斬 首凡一十餘萬級, 獲元帝玉璽金寶金銀銅印兵仗等物餘黨破頭潘等一十餘萬遁走渡鴨綠江而去賊遂平. ♦ 고려를 반도에 놓고 이 기록을 말한다면 재미있는 이야기 책이 된다. 아무리 반도사관 또는 식민사관을 욕하지 않으려 해도 이런 것을 보면 쌍두문자가.... 홍적(紅敵)들, 그들 나름대로 꽤 짜임새 있게 전략,전술을 구사하며 대륙을 잠시나마 쓸고 다녔던 무리들이다. 이들이 아무려면 하북성을 지나 요동반도를 지나 현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황성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누군가 고의적으로 고려를 비하시키려는, 초라하게 축소하려는 음모라는 것이다. 위의 기록대로 “안우,이방실,황상,한방신,이여경,김득배,안우경,이구수,최영등이 이십만 대군을 동쪽 교외에 주둔시키고 총병관 정세운의 독려로 제장병들이 경성을 포위 진격했다는 것이다.(중략). 십여만의 홍적의 머리를 베고, 원나라 황제의 옥새(玉璽) 및 금은보화,인,병장등을 이들 홍적으로부터 획득했고, 홍적 잔당 무리 및 파두번 등 십여만의 홍적들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을 가고, 평온을 찿았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 홍적들이 왜 고려를 침공했을까,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놈들이 아닌바 에야 그들이 무엇을 얻고자 하북성을 지나 요동반도를 넘어 압록강을 도하하여 남쪽으로 진격 고려의 개경까지 갔을까. 너무 긴 설명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마무리 해야 겠습니다. 이 사건은 반도에 고려를 놓고는 23세기가 되어도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고려의 강역을 대륙에 넣지 않고는 해설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려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지명 이름도 모르는 곳으로 갔다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록은 “복주로 갔다”는 것이다. 행정 편제상으로 “주”라면 “道” 밑에 “州”였으니 꽤 번화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럴싸한 “복주”란 도시가 어느날 갑자기 반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건 아니다. 보안주 및 유주로 도망을 가 선주에 들어가 의거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림해군(臨海郡)이다. 림해군은 당나라때 해주(海州)다. 태주라는 지명은 이곳에 천태산이 있어 태주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절강성에 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을 좀 해봐야 겠다. 회남성(안휘성 회수 주위)에서, 강절성(절강성)에서, 림해군의 방국진 등이 무엇을 얻겠다고 대륙의 제후국 이었던 반도의 고려라는 국가를 찿아 뵙고 토산물을 한 아름 안고 와 선물을 하고 갔을까. 또한 오왕과 회왕이 파견사를 보내 토산품을 헌상했다는 것이다. “聘”은 제후가 천자를 방문하여 안부를 전하는 것이다. 반도의 고려에서 대륙의 남쪽지방에 제후국을 두었을까, 아니면 대륙의 고려에서 남쪽지방의 제후국을 거느렸을까. 당연히 후자라고 주장한다. 昇年十八,理年二十二. 주원장이 이를 토벌하고 이들을 고려로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明史(명사)”의 기록에도 있다. 과연 고려와 주원장의 관계는 무엇인가? 다음 기록에는 명승을 고려에서 중신의 딸과 혼인까지 시킨다는 것이다. (高麗史44卷-世家44-恭愍王7)에 “辛卯明昇娶摠郞尹熙宗女. 王賜米四十石布一千匹”, 즉 랑 윤희종의 여식에 명승이 장가를 들었다(娶)고 기록하고 있다. 이라 했고, 明玉珍(명옥진)편을 보면 (중략) “明年徙升於高麗(명년사”승“어고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四年(홍무). “秋七月辛亥 ,徐達練兵山西 。辛酉 ,傅友德下成都 ,四川平 。乙丑 ,明昇至京師 , 封歸義侯” 라 했고, “五年春正月 乙丑 ,徙陳理 、明昇於 高麗” 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홍무4년에 서달은 산서에서 병사들을 단련하고 있다. 신유, 부우덕이 성도에 가 사천을 평정했다. 을축, 명승이 경사에 이르렀다. 명승에게 귀의후를 봉했다. (중략). 오년 봄 정월에 진리 및 명승을 고려로 옮겼다. 했다는것이다. 이때 주가를 올리고 있던 주원장이 휘하 장군 “부우덕”을 보내 “대하”의 강역을 접수하고 황제를 참칭한 “명승”을 포로(?)로 하여 주원장이 있던 경사(?)로 보내지고 주원장은 “명승”에게 “귀의후”라는 관작을 수여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정복자와 정복당한자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후에 주원장은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이 수여한 “귀의후 명승”을 고려로 보낸다. 이때 진우량의 아들인 “진리” 및 양 가족들 오,륙십명이다. 주원장은 자신의 명령으로 자신의 휘하 장군 및 병사들에게 항복한 포로를 “귀의후”라는 관작까지 주면서 서울에서 잘 살게 하다가 이들을 고려로 보내야만 했을까. 또한 고려는 이들에게 중신 딸에게 장가까지 보내주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고려”와 “명승”의 관계는 敵(적)이 아닌 “上과 下”의 관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충지에 있었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반도에 고려를 놓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 김윤후등이 유구국에서 돌아왔다. “중산왕 찰도” 파견사인 “옥”등이 신하를 자칭하며 봉표를 올리고 사로잡힌 아국인 37인과 거듭 토산물을 헌상했다. 수천리 동남지역에 있었다던 고려에 무엇을 바라고 토산물을 싣고 고려까지 왔을까. 또한 글 내용 중에 경어가 빠진 곳도 있습니다. 설명을 위주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된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역사 연구가 우리의 앞날에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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