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운영자 http://cafe.daum.net/dobulwonin/GBuW/37
일본인 학자들에게 속아배운 학문을 고수하던 한국사학계가 서서히 그 거짓의 본말을 드러냅니다. 당이 그당시 한반도에 있었다던 고구려황제와 백제국왕을 어떻게 중원으로 끌고 갔는지? 현대의 거리로 2,500Km이상되는 거리를 배타고? 말이끄는 수레로?그것도 당시 최강국통치자를... 재야사학계에서는 이미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대중적으로 들어내놓고 이런사실이 오간다는것. 거짓이 망가지는 좋은 징조입니다. 洛陽市 동쪽 회맹진 뇌하촌 일대가 고구려·백제 遺民들의 집단 墓域인 듯. 지난해 여름 필자는 趙富英(조부영·백제문화개발연구원 원장)·尹亨燮(윤형섭·前 교육부 장관)·金起燮(김기섭·역사박물관장)·徐程? (서정석·공주大 교수)·朴大在(박대재·국사편찬위원회)씨 등과 함께 洛陽市 회맹진 뇌하촌 일대를 찾았다. 10년 전 충남大 박물관 조사팀이 의자왕의 묘지로 생각했던 청선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농지로 바뀐 들판에는 무성한 잡초가 우거졌고, 여기저기 세워진 전자·식품공장은 변화된 중국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있는 곳이 千年古都(천년고도) 洛陽임을 상기시켜 줄 뿐이었다. 우리는 백제 의자왕의 묘소를 찾지 못한 채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여름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한 「東北史地(동북사지)」에 『연개소문과 그 직계 후손들의 무덤이 洛陽에서 발견됐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을 때 「북망산 간다」고 하는 표현에서 보듯, 우리에게는 상당히 귀에 익은 이름이다. 西安(서안·시안) 다음으로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중국문명의 요람지였다. 년간 正都(정도) 혹은 副都(부도)로 중국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다. 여기서 「살아서는 蘇州(소주)·杭州(항주)요, 죽어서는 北邙(북망)」이라는 속담이 나왔다. 현재까지 이곳에 묻혀 있었음이 墓誌銘(묘지명)을 통해 확인된 인물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隆(융), 고구려 연개소문의 장남인 泉男生 (천남생: 중국 史書에서는 唐高祖 李淵의 이름자를 피해 「泉」으로 표기), 남생의 아들 獻誠(헌성), 헌성의 손자 泉毖(천비), 남생의 동생 男産(남산), 黑齒常之(흑치상지)- 黑齒俊(흑치준) 父子 등을 비롯해 보장왕의 손자 高震(고진), 고구려 귀족 高慈(고자) 등이다. 이때 唐으로 끌려간 백제인들은 고위층 인사 88명 등 1만2000명이었다. 이후 그는 唐의 벼슬을 받고 귀국해 백제부흥운동軍을 이끌던 동생 豊(풍)과 대결했다. 665년에 唐의 웅진도독·백제국왕으로 다시 입국해 文武王과 會盟(회맹)을 가졌다. 신라가 백제 古土에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해 백제 古土의 지배권이 신라에게 돌아가자 唐으로 돌아가 명목상의 백제도독으로 生을 마감했다.
「천남생 墓誌」와 나란히 양지바른 복도에 남아 있다. 가로·세로 58cm의 검은색 돌에 새긴 669字(26行×27字)의 내용은 그의 家系(가계)와 관직, 성품·생애·업적, 그리고 그의 일생을 칭송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름을 날려 밝게 빛이 났다. 신중함으로 몸을 닦았고, 선한 것을 택해서 행했으며, 의로운 것이 있으면 능히 이를 본받았다」 고 찬양하고 있다. 그는 665년(보장왕 24)에 연개소문 死後 大莫離支(대막리지)가 되었다가 동생들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자 唐나라에 붙어 고구려 정벌에 협력했다. 묘지석은 90cm(가로·세로)로 2162字(46行×47字)의 내용은 관작·생애·가문의 성격·그의 官曆(관력)·투항동기(고구려 내분)·고구려의 멸망 과정 및 장례 등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묘지석은 그가 唐軍의 고구려 침략에 협력한 부분에 대해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같이 내쳐 평양성을 공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천비의 묘지석은 그의 아버지 泉隱(천은)이 지은 것이다. 625字(25行×25字)의 정서체로 쓰인 이 묘지석에는 자식을 잃은 아비의 비통함이 잘 나타나 있다. /움직이는 생명체여 태어나면 늙는 법이고,/병들면 죽는다는 것은 운명의 장난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요./이제 끝이 났구나. 육체는 허공으로 돌아가니/타고난 운명 누가 알리요>
현재 남경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묘지는 가로 71cm, 세로 72cm의 크기로 1604字(41行×41字)의 楷書(해서·구양순체)로 되어 있다.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배움이었다」고 적고 있다. 연안으로부터 종국의 廣西 서남방 지역(해남도 포함)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蘇鎭轍(소진철) 원광大 교수는 중국 廣西壯族自治區(광서장족자치구)의 百濟鄕(백제향)을 흑치국이라고 보면서, 이를 백제의 侯國(후국) 또는 附庸國(부용국)으로 해석한다. 학계에서는 흑치국의 존재를 거점지역에 왕족을 파견해 통치하게 하는 擔魯制(담로제)와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것이 禮(예)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唐으로 들어간 고구려나 백제의 왕족·귀족들이 특정한 묘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묘역일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백제人에게는 적절한 지역이 될 것이다. 의자왕이 묻힌 곳도 이 일대라고 추정된다. -월간조선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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