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心濟 http://cafe.daum.net/dobulwonin/GBuW/92
동천왕이 위의 배반으로 패전하고 복구하며 이후 서기 248년 붕어하시고 서천왕이 대를이어 동천왕의 위업을 기리는 벽비를 세웁니다.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372)훨씬 이전 기원전에 들어온것으로 추정됩니다. (운영자주)
1.고구려만의 특이한 연호 기록법이 보인다. 魏 明帝 靑龍癸丑 五年 은 위나라 연호 계축년으로부터 5년 째다. 2. 고구려왕을 스스로 동주東主라고 하였다. 중국왕을 西主라고 했을 것이다. 3. 불교가 오래전에 고구려에 들어왔다. 동천왕은 즉위초에 불교를 구했는데 당시 <유마힐경>이 유행하였다. 4. 불경인<유마힐경>은 음양오행과 관련되는 수양법이 있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정확한 명칭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이며 줄여서 《유마힐경》 《유마경》이라 한다. 유마힐은 주인공인 거사로서 리차비족의 수도인 베살리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부호라고 하나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경은 3회 14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마거사가 병으로 앓아 눕자 부처는 지혜 제일인 사리불을 비롯하여 가섭·수보리 등을 병문안 가게 권하나 그들 모두 유마거사의 높은 법력이 두려워 문병가기를 꺼린다. 결국 문수보살이 가게 되는데 유마거사와의 대화에서 문수보살은 대승의 깊은 교리인 불이(不二)법문을 유마거사의 침묵을 통해 깨우치게 된다는 내용이다. 또한 유마가 본래 병이 없지만 중생들이 병을 앓기에 보살도 병을 앓는다고 설명하여 중생들과 동심일체가 된 보살의 경지를 나타내었으며, 유마거사 가족들의 소재를 묻자 지혜가 아버지이고 방편이 어머니라고 하여 유마거사가 이미 대승보살의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경전 성립 당시의 재가불자들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 경에 대한 한역은 7가지가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3가지로 지겸(支謙) 역의 《유마힐경》 2권, 구마라습 역의 《유마힐소설경》 3권, 현장(玄奘) 역의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이 있다.
토지박물관 전시중
해설로 보면 위명제 청룡계축 5년, 동주 고구려 동천왕 11년 237년 아도화상축봉문에는 진태원병자7년晉太元丙子七年이라고 했는데, 즉 진나라 병자년으로 시작하는 태원년(376)의 7년, 즉 382년의 기록이다. 예를 들면 408년 고구려 기록인 덕흥리 고분에서 십이월신유삭十二月辛酉朔 乙酉는 12월 1일이 신유일인 12월의 을유일, 즉 24일을 말한다. 방식이지만, 그간의 날자 간지 기록법으로 보면, 당연히 날자 간지 기록법보다 우선하여 존재했어야만 하는 방식이니 쉽게 이해된다. 이때 위나라는 1월을 인(寅)월에서 축(丑)월로 바꾼 것인데, 어느날 갑자기 12월을 1월로 하라니 혼란이 심할 수밖에 없어서, 2년후 경초 2년 12월에 이를 다시 환원하여서 정시원년 1월을 다시 인(寅)월로 바꾸었다. 요동국 경계) 현현궁에 들어갔다가 도성에 돌아와 (마힐도) 책을 바치며 광욕(삼태읍장)이 보고를 했다. 便有此山 捐冊; 기부자와 기부물품 명단 책 捐=獻, 玄都; 신선들이 사는 곳 ; 금나라 왕적은 의주懿州를 현도玄都라고 함. 반야바라밀다경”이 보관되어 있었음. 玄兎; 달, 달토끼, 신선들이 사는 곳 玄玄; 도교
3. 연기와 구름이 가득하여 오르기 어렵고, 산과 물이 깊은 곳, 방외方外에서 왕(석가)이 태어난 4월에 마힐도는 오늘도 굳세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련가로서 마힐도임.
隨著維摩詰經在中國的流行,經中維摩詰居士的神通機智,深為中國佛教徒所欣賞。 現存的漢譯本有三: 一、三國吳(222年)支謙所譯的維摩詰經, 二卷。二、後秦鳩滅什譯的維摩詰所說經, 三卷。三、唐玄奘譯的說無垢稱經, 六卷。本經是早期大乘經典之一。經中維摩詰示現生病,以引來佛弟子和菩薩的探望, 在病榻之前透過幽默、精采的辯論,批評當時流行的各種佛教思想。 再配合不可思議的神通,中觀思想得以深刻有趣的表達,是中國和印度最流行的佛教經典之一。 甚且編成戲劇。 本經除漢譯本外,尚有梵語本和藏譯本傳世。 벽비에 의하면 오나라 건국 130년 전에(AD 93) 고구려에 유마힐도가 이미 전래되었음
4. 우리 사졸들이 성곽을 약간 깨고 성 안에 들아가니 인연 있는 일곱 가문 안에서 여러 책이 전해옵니다. 我士 頗得城郭 根引七家因 相傳諸譜 더한 체필로서 상세합니다. 以啓傹 怢陵 芥王 幸安次 三塞 始獲 習元 기록이 있다. 以公世天地蹈事 師之風須萬 前郞衆 始異焉 멈추게 하여 짐승들의 죽음이 그치었다. 10. 비류에 도읍하였던 호영동백수사사 “유리명제 축다”를 이어서 예악으로 나라를 평화롭게 하고 하늘의 아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이어서 (동천왕은) 자살(살신 공양 치성)하여 불내성을 보전하려 하였다. 치적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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