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예苗裔에 대하여
우리민족을 나타낸 모든 사서(史書)에서는 구리(九黎)의 후예(後裔)를 묘예(苗裔)로 기록하고 있다) ☞ 苗는 뿌리내림을, 黎는 동이 튼다는 뜻, 민족 의식이 시작됨을 의미할 것임.
<조선(朝鮮) 이전 국호 구리(九黎)의 후예를 묘예(苗裔)라고 기록했다> 자전에서 '裔'를 '후손예'로 표기하고 있으면서 또 '苗裔'도 '후예'로 풀이하고 있어 역사성이나 통일성이 없다.
사서보다 현 자전이 먼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 자전 이전의 어휘를 살펴야 한다. - 『구당서』 동이전에서 "신라변한지묘예야(新羅弁韓之苗裔也)"와 - 『당서』동이전에서 "신라변한묘예야(新羅弁韓苗裔也)"의 기록이 있고, - 『삼국유사』에서는 『신,구당서』를 인용하여 "변한묘예(弁韓苗裔)"라고 하였으며 - 『삼국사기』에서는 "삼국조선기고성인지묘예야(三國祖先豈古聖人之苗裔耶)"의
기록이 있으니 우리민족의 역사속에 숨쉬고 있는 단어가 "묘예"인데 이를 후예라고 풀이한다면 『삼국사기』
의 "묘예"는 누구의 후예(後裔)란 말인가 ? 더욱이 『25史』 또는 중화국 다른 기록에서 묘(苗)를 무엇이라 하였는가 ?
『사기』에서 "삼묘재강회형주(三苗在江淮荊州)"의 기록이 있는데 강회(江淮)지역이란 - 기자가 살던 서화(하남성)와 묘가 있는 몽성(안휘성)이 있고, - 소호김천씨의 청양(靑陽 : 안휘성)이 있는 지역인 - 양자강과 회수가 있는 두 강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삼묘(三苗)가 있다는 것은 세 부족이 세 곳에 있음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또 묘예(苗裔)의 기록과 동이국 九黎의 기록이 동이역사에 있는데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예기(禮記)55』에서 - "묘구리지후(苗九黎之後)" - "구리위묘민선조(九黎爲苗民先祖)" 라는 기록이 있으니
구리(九黎)의 백성들의 후예를 "묘(苗)" 또는 "묘예(苗裔)"로 기록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 묘(苗)를 쓴 것은 비로소 민족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기(史記)』에서 - "리동이국명야(黎東夷國名也)", - "구리군호치우시야(九黎君號蚩尤是也)" - "치우고천자(蚩尤古天子)"의 기록이 있고 - "치우총재동평군수장현(蚩尤塚吊平郡壽張縣)"과 - "치우견비총재산양군거야현(蚩尤肩비塚在山陽郡鉅野縣)"
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치우천자는 쇠붙이로 가면과 투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리(九黎)의 치우천자 부부 능이 산동성 동평과 거야에 있으며 그 남쪽이 강회(江淮)지역이고 이 지역에 서화, 몽성, 청양이 있다.
신, 구당서』에서 묘예이며 변한의 후예가 "신라"라고 하였다.
한(韓)은『삼국지』『후한서』동이전에서 "한유삼종일왈마한이왈진한삼왈변한“이라고 하였고(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
국출철한예왜개종취지제시매개용철여중국용전“의 기록과(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買皆用鐵與中國用錢) 기자의 기록이 있는 예
(濊)의 남쪽 한(韓) 항목에 있다.
예, 한(濊, 韓)은 동이 조선 말기 동이의 여러 갈래의 부분이었다.
구리의 백성(民)인 묘(苗)가 있던 강회(江淮)지역에는 김유신 조상 소호금천씨가 거(居)하던 청양(靑陽)이 있다.
(玄 是爲靑陽, 玄 靑陽卽少昊也, 靑陽降居江水 - 史記) (현효시위청양, 현효청양즉소호야, 청양강거강수)
그런데 금천씨(金天氏)의 후예 김유신 시대의 지명이 청양, 몽성(이상 안휘성)과 동평(산동성)의 주위에 있으니, 석문, 석성, 평원,
황산, 대산, 박산, 제성, 백마, 동명, 항성, 주류성, 서성, 동성, 잠산, 독산, 덕안 등이 있으며,
김유신 시대까지 생산된 특산물 - 금(錦)의 생산지인 저(雎, 양읍), - 자석(磁石)과 침(針)의 나침반이 생산된 자(磁), - 나전칠기 생산지 섭라인 흡(涉羅인 흡), - 그리고 면(綿:목화)와 노(弩:쇠뇌)의 생산 지역도 그 지역에 있다
(현재 지도와 송본 우적도가 많이 일치하므로 지명 인용이 가능하다 )
김유신이 패망시킨 백제 고구려 관련 기록과 기자의 기록은 『25사』동이전,『삼국유사』,『삼국사기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어떤 사서(史書)도 부정 할 수가 없고 취사 선택 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구리(九黎) - 조선(朝鮮) - 변한(弁韓) - 사로신라(新羅)로 이어지는 인명(蚩尤-箕子-김유신)과 지명(東平-蒙城-桐.岑城)과 특산물
(錦, 綿, 금)이 동일 지역이니, 묘구리지후(苗九黎之後)와 신라변한지묘예야(新羅弁韓之苗裔也) 관계에서 묘예(苗裔)는 '묘(苗)의
후예(後裔)'로 해석함이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전에서 묘예를 '이을묘'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夷(이)에서 "동표우이(東表우夷)"를 "동쪽 오랑케 이"로 해석함과 같이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우리민족의 기준은 고조선이 아니고 구리(九黎)로 하였다) 지금까지는 우리민족의 최초의 국가를 조선으로 보고 국조를 왕검단군으로 하여 왔다. 그러나 정사(삼국사기, 사기)에 기록된 최초의 국가는 조선이 아니고 속칭 환웅으로 불리우는 시대의 국호가 구리(九黎)로, 최고
통치자의 호칭도 천자(天子)라 하였다. 조선이 기준이 아니라 그 이전 구리(九黎)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민족사를 쓰고자 하였다.
『삼국사기』에서도 '묘예(苗裔)' 즉 苗의 후예로 기록하고 인명으로 고신씨, 소호금천씨의 후예라 하였고, 『사기』도 동이국에 구리
(九黎)가 있고 치우가 천자(天子)라고 하였으며 그 능이 중화국 산동성 동평에 있으며, 고신 소호금천씨도 동이라 하였고, 또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도 동이국이라고 하였으니, 조선 이전 구리(九黎)를 기준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세조선 및 대한민국 강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조선국민을 민족으로 규정하지 않고 어디에 살던 정사에
기록된 조선 이전 국가 九黎(환웅시대)백성(苗)의 후예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후 기) 몇년 전엔가 대학로에서 중국 "경극"(묘족자치구) 공연을 한적이 있었다. 인솔교수에게 당신들 시조가 누구인가를 물어보니대답은 "치우" 가 우리시조입니다 ! 였다고 한다. 묘족 자치구라고 여러분들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민족의 시조가 "치우천자"라 하니 놀랐다고 한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중국 절강성에 "천태산"이라고 있다. 이산의 옛 이름이 "묘산"이다
신라가 묘의 후예라 하였다.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이고 우리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양화 시킬 필요가 있다. (완)
(묘족 분포도) 아래 지도는 중국에서 1990년 12월에 출판된 "중국교사지도집"에 나오는 중국 민족분포도입니다.
- 제일위 녹색 네모는 "인구백만이상 민족" 표시로 여섯 번째 인구가 많은 것이 묘족이며 인구는 5,030,897명입니다 - 두 번째 원표시는 묘족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표시입니다 - 세 번째 왼쪽아래 네모는 묘족 표시(녹색빗금 "종"으로 표시)입니다
(묘족시조치우상락성(苗族始祖蚩尤像落成)) ☞ 자료있는 곳 : http://www.huaxia.com/ShenZhouLiaoWang/TuPian/GBK/42368.html
☞ 해설 : 안원전 매년 입추전후, 호남성 서부에서 생활하는 묘족(苗族) 군중들은 모두 기도와 풍년수확을 경축하는 행사를 찾아 나서 전통적 "간추
(走+干 秋:뒤?i을 간, 追逐)"행사를 거행한다. (동이족의 10월상달 소도의식과 밀접한 관련있는듯)
이 행사는 화원현(花垣縣) 정부가 1993년부터 "간추절(走+干 秋節)" 행사로 개시한 이래 묘족의 독특한 문화 전통을 보여줌과
동시에, 경제발전의 중요한 창구가 되고, 상서(湘西) 묘족(苗族)지구의 경제·문화 발전의 좋은 수단이 되었다.
사진은 화원현 신낙(新落))이 조성한 묘족시조 치우상 개막식 사진이다.
전설에 의하면 치우는 아주 오래 전에 일찍이 현재의 상귀변계 (湘貴邊界) 일대의 삼묘 지구 일대에서 활동했는데 그 이후 이 일대
지구의 경제와 문화가 창조, 발전되는 조건이 되었다.
상서(湘西)의 묘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당연히 조상 제사풍습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 결론은 묘족만이 아니라 신농씨 묘(다릉)가 있는 호남성도 동이족의 근거지란 얘기
※ 최근 중국학자 왕대유는 치우와 관련한 문화의 흔적이 미국 오대호지방과 남아메리카, 유럽 및 북구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화원(花垣)은 상、검、악사성(湘、黔、鄂四省)(市)호남성(湖南省) 서북접경지역으로 상서토가족묘족자치주(湘西土家族苗族自治州)
에 예속되어있다.
지리위치(地理位置)는 십분중요(十分重要)하여 산수풍광이 수려하며 자연자원이 풍부하여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묘족인구를
포함하고 있으며 밀도 역시 최대의 취거지역이다.
26.8만인(万人) 가운데 묘족(苗族)이 76.8%를 점(占)하고 있다. ☞ 자료있는 곳 : http://imagebingo.naver.com/album/image_view.htm?user_id=kimdoc2&board_no=10855&nid=1579&page=1
<화원현(花垣縣) 신낙(新落) 위치 지도>
(치우, 황제 전쟁도)
(중국내 동이계 민족 및 인구 현황) ▒ 길림성 (고)송호상 교수는 조선족, 만족, 묘, 여, 악온극, 악륜춘족(朝鮮, 滿, 苗, 黎, 鄂溫克, 鄂倫春)은 동이족 후예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아래글을 참고하시길 바라며 지금 중국내 동이족의 후예는 얼마나 남아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 출처 : 중국지도책(2001년 1월 발행 : 중국지도출판사)
(1990년 7월 1일 현재 중국내 동이계 인구) - 조선족(朝鮮族) : 1,920,597 명 - 만족(滿族) : 9,821,180 명 - 묘족(苗族) : 7,398,035 명 - 리족(黎族) : 1,110,900 명 이중 묘족은 해외교포만 100만이 넘는다 합니다. 총 22백만이 넘는 동이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조상 찾기가 한참 진행중입니다.
<길림성 (고)송호상 교수의 치우학술대회 글중 일부 인용 > 동이민족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므로 중화인민공화국 문화부의 비준으로 동이고국 전문(전업:專業)위원회'가
산동성 제령시(濟寧市)에 설치되었으며, 1998년 4월 28일∼31일간에 이 제령시에서 전국의 동이역사학자 30여명이 참가하여
창립경축대회와 동이고국사연토회(東夷古國史硏討會)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동이민족은 9000년 전부터 중국 땅의 토착인으로서, 옛날에는 구환족(九桓族)(또는 구려족 : 九黎族)이라 하였고,
4700년 전 환웅시대 14대 왕 치우(蚩尤)의 전성시대 해양문화시기부터는 치우(蚩尤)족, 삼묘(三苗)족이라 불렀으며, 2700년 전
춘추시대(春秋時代)부터는 구이, 팔만, 칠융, 육적(九夷, 八蠻, 七戎, 六狄)의 민족으로 부르는 등 또다시 동서남북 이만융적
(夷蠻戎狄)으로 갈라 수십 종의 민족명칭이 존재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구환족을 분해하여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종족명칭이었습니다.
동이민족을 말할 때 세계적으로 북극의 에스키모, 남미주의 인디안족이 다 동이족의 후칭이며, 중국의 조, 만, 묘, 려, 악륜춘,
악온극족(鄂倫春, 鄂溫克族) 역시 동이족의 후칭(後稱)입니다. 또한 중국의 삼황 - 천황·지황·인황 - (三皇 - 天皇·地皇·人皇) 이 동이족의 상고 시조이며, 환웅, 복희, 신농, 치우, 헌원, 고신,
환검과 요, 순, 우의 전체가 동이족의 선조였음을 고대문헌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이족의 습속(習俗) 특성을 말하자면, 옛날 어린아이의 베개를 돌, 모래로 베웠기에 뒷골이 납작하며, 소위 문신, 몸단장으로서 앞
이빨을 뚜 대씩 뽑아버리기도 했고, 머리는 짧게 후에는 남녀 막론하고 외가닥으로 땋았습니다.
고고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수천 년 후에 남은 두골(頭骨)이 톱으로 베어버린 모양이라 거치형 두골(鋸齒形 頭骨)이라 하며, 이러한
두골(頭骨)은 요령성(遼寧省)과 산동성(山東省)에서 제일 많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상고 문헌에 동이민족은 쌍각지(쌍脚趾)라 하여 새끼발톱이 두 조각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근세에 남경(南京) 남쪽 남향 우수산
(南鄕 牛首山)과 구용시, 광동(句容市, 廣東) 사람들의 대다수, 강소성 일대 등의 한족들이 쌍각지(쌍脚趾)인 사람이 많다고 하기에
각별히 조사한 결과 사실 흔히 볼 수 있었으니, 이들은 동이족이 동화된 한족으로 보여지며, 현재에도 역시 민족으로 말하면
100%라고는 못하나 조선족, 만족, 묘, 여, 악온극, 악륜춘족(朝鮮족, 滿족, 苗, 黎, 鄂溫克, 鄂倫春족)등에 쌍각지(쌍脚趾)가 많았는데 역사의 기록대로 동이족 후예임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종족의 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같이 서기전 근 8000년 동안 중국 땅을 휘몰아치던 동이민족은 제1차 치우(蚩尤)와 헌원(軒轅)의 영토 분쟁, 제2차 후국(候國)인 서주(西周)의 상(商) 침략, 3차로 이상(夷商)의 전쟁 등 민족의 내부 분열과 동족 상전(相戰)으로 중화족에게 멸망을 면치 못하였고 차츰 한족화
(漢族化)되었으나,'조상이 누구냐?' 물으면 고려(高麗)라 하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땅에는 없애버릴 수 없는 수천 년 전의 역사 유물과 유적이 중국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지금 땅속 4∼5m의 깊이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이민족 역사의 발생지가 동방의 중국이며, 역사의 상고문헌이 중국에 있는 이상 올바른 역사를 찾으려면 그 발원지인 중국
땅에서 찾아야 설득력이 있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의 학자들은 국내에 있는 기존 사책(史冊)의 문헌만을 반복 연구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올바른 역사가 나올 수 없고,
심지어는 동이족이 조선족이 아니라는 일부학자들도 있으니 이런 성급한 결론은 삼가함이 좋을 듯 합니다. 중국의 허다한 고대 문헌에서 동이족은 조선족이라는 논설과 문장을 어렵잖게 볼 수 있으며, 내가 쓰고 있는 동이민족사」에는 왜
동이족을 조선족이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불철주야로 쓰고 있는 동이사, 민족사, 고고사, 문화사 등은 내가 알든 모르든, 남이냐 무었이라 하건 말건 내 나름대로 쓰고
있으며, 우리 제2세가 없어지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니 여생의 숙원이라면 올바른 역사를 완성하여 후손에게
남기려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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