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 소서노 http://cafe.daum.net/mookto/Gbc4/161
중국인들이 우리를 낮추어 부르는 동쪽 오랑캐인 東夷(동이)의 夷는 중국인들이 중간 시조로 받들고있는 하나라를 세운 시조, 즉 우임금의 이름이며,동이족의 우두머리인 神農(신농)이 삼황오제시대를 장식하는 첫 제왕이며, 창힐에게 명하여 한자를 만들었으며, 중국인 들이 시조로 추앙하는 黃帝(황제)는 신농의 사위였으며,실제 제왕의 자리에 앉지는 못했다. 세월이 지나며 자기 직계 조상위주로 역사를 뒤바꾸고 만 것이다. 이는 중국의 학자 낙빈기(본명은 장박군 1917~1994)가 평생을 연구한 "금문신고"라는 책을 통해 밝힌 것임. - 한자(漢字) 한문(漢文)은 유구한 “동이족“의 글 “도둑놈”의 부족이라 낮추어 부르고 있다. 가서 살고 싶다고 했으며 동이나라를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예의와 범절에 밝은 나라라고 동경해 마지않았다. 본거지 즉 고토(故土)였던 것이며 발자취가 산재되어 있다. - 엄밀하게 말하면 동이족들이 남동만주, 발해, 황하북쪽으로 이동(태양이 뜨는 쪽) 전선을 넓혔던 것이다. 어느 정도 가늠이 간다. 역사, 문화, 문자(文字)로 재편한 것이 한족(漢族)의 본 모습이다. 즉 알타이어족의 행방(行方)이다. 실토했다. 대천지 원수 이건만 치우천황을 중국은 지금 삼조당(三祖堂)에 모시고 자기들 조상이라고 위패를 들여 모시기 시작했다. - 얼이 나간 사람 - 들이 우리나라에 많다. 제 정신은 없고 온통 남의 정신, 남의 장단에 춤을 추는 꼴이 되어 가고 있다. 배우기의 열기(熱氣)를 알 수가 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상기하자. “샤먼”이라고 백안시 하는 문화인류학, 종교애비의 갈래도 그 사실 아득한 사이베리아(시베리아) 광야의 소나무 숲과 동토(凍土)의 풍습 즉 우리와 남이 아닌 풍습으로 수용할 수도 있다. 복안(腹案)을 가지고서 동방의 동이족 문화사를 거두절미 했던 역사 날조 작업시대 상황과 80%가 비슷하다고 지적하고 경고하는 바이다. 1mm 수준의 누비옷을 떠내는 섬세한 손 끝, 황토방 거주 풍습 이런 것이 우리들 유전자속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백두산 민족이 “갑골문자”를 개량하여 밥먹듯 사용한 “뜻글”이니 만큼 이질감을 탈피하고 친근감으로 우리 고유문화의 큰 보자기에 싸서 우리의 유산으로 삼아야 된다
- 19세기 말 동이족의 은허(殷墟)에서 거북 등딱지에 쓰인 서글이 대량 발견되니 이를 은허서글(殷墟書契)이라고 일컬케 되었으며 이 발굴로 인하여 중원대륙(中原大陸)이 동이의 서글문화권이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고토(故土)이었음이 입증 (立證)된 것입니다. 치우천황시대에 헌원,항힐,대요 등이 삼천궁에 와서 자부선인으로부터 칠회제신의 달력과 삼황내문경을 배워갔다는 점. 없다는점. 자(字)가약 30%가 된다는 점. 입니다. 급기야는 서기 1911년 손문(孫文)의 신해혁명 이후인 1918년 11월 23일에서야 한자 최초의 중어발음기호인 주음자모(注音字母)를 만들어 쓰다가 그나마 대륙에서는 다시 영문발음법으로 재(再) 제정(制定:1958년)하여 쓰게 된 점.
위의 도표에서 중국인들이 일개자(壹個字:한 글자)의 음(音)을 이음절(貳音節)이상으로도 발음하는 예를 보았으니 이제는 중국인들이 중국어를 표기할 문자가 없었으므로 부득이 우리 동이족이 창제한 ‘서글’을 가차(假借:빌려)하여 한어(漢語:중국어)를 표기하였다는 확신을 가지셨으리라 믿습니다.
|
'최초의 나라 한(환)국 > 풍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쇠를 최초로 다룬 국가는 배달국 (0) | 2009.04.14 |
---|---|
한자의 비밀(반절음 ) - 지나(차이나)는 없다! (0) | 2009.04.12 |
하느님이 내리신 한글로 간도를 찾고 세계 공용문자를 만들어 천조원... (0) | 2009.04.12 |
하늘의 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 (0) | 2009.03.29 |
경혈·경락 [經穴經絡] -그리고 고대의학 (0) | 2009.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