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 665-697)의 묘지명

설레임의 하루 2009. 4. 12. 01:04

*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  글쓴이: 心濟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 665-697)의 묘지명

 

고자(高慈)는 당 측천무후 성력(聖曆) 3년(700) 납월(臘月) 17일에 당시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낙향(平樂鄕)에 묻혔는데,

묘지는 1923년 하남 낙양의 북쪽 근교에서 출토되었으니 발굴지점이 그 묘였음을 알 수 있다.

처음 이 묘지의 탁편(拓片)은 나진옥(羅振玉)이 수장(收藏)하였는데 묘지의 탁편은 가로 세로 모두 72cm로, 37행 해당 36자, 정서

(正書)로 쓰여져 있다.

 
고자의 아버지인 고문(고질:高質)의 묘지명도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신안현(新安縣)
철문진(鐵門鎭)에 소재한 고대 묘지

컬렉션인 천당지재(千唐誌齋)에 소장되어 있는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판독문 전문

大周故壯武將軍行左豹韜衛郎將贈左玉鈐衛將軍高公墓誌銘(幷序)」
夫摠旅行軍陷陣降城者号良將有一無二糜軀殞首者謂臣忠詳諸結刻已還弦剡之後實」
不雙濟名罕兩兼緬尋東觀之書遐披南史之筆文才接踵武士磨肩其於資父事君輕身重」
義植操於忠貞之表定志於吉凶之分雷霆震而不變風雨晦而未已在於將軍矣」
公諱慈字智捷朝鮮人也先祖隨朱蒙王平海東諸夷建高麗國已後代爲公侯宰相至後漢」
末高麗與燕慕容戰大敗國幾將滅廿代祖密當提戈獨入斬首尤多因破燕軍重存本國賜」
封爲王三讓不受因賜姓高食邑三千戶仍賜金文鐵券曰宜令高密子孫代代封侯自非烏」
頭白鴨綠竭承襲不絶自高麗初立至國破已來七百八年卅餘代代爲公侯將相不絶忠爲」
令德勇乃義基建社分茅回生祚土無隔遐裔有道斯行況乎地蘊三韓人承八敎見危授命」
轉敗爲功國賴其存享七百之綿祚家嗣其業纂卅之遙基源流契郭樸之占封崇符畢萬之」
筮禦侮傳諸冀子帶礪施於謀孫此謂立功斯爲不朽曾祖式本蕃任二品莫離支獨知國政」
位極樞要軄典機權邦國是均尊顯莫二祖量本蕃任三品栅城都督位頭大兄兼大相少稟」
弓冶長承基構爲方鎭之領袖實屬城之准的父文本蕃任三品位頭大兄兼將軍預見高麗」
之必亡遂率兄弟歸款   聖朝奉總章二年四月六日   制授明威將軍行右威衛」
翊府左郎將其年十一月四日奉   制授雲麾將軍行左威衛翊府中郎將永隆二年」
四月廿九日除左威衛將軍舟僑遂去知虢公之祿殃宮奇族行見虞邦之不臘庇身可封之」
域鶡弁司階革面解慍之朝虎賁陪輦禁戎五校威衛八長劒陸離琱孤宛轉奉光宅元年」
十一月廿九日   制封柳城縣開國子食邑四百戶累奉   恩制加授柳城郡開國
公食邑二千戶桓子之狄臣千室比此爲輕武安之拔郢三都方玆豈重公少以父勲㢠授上」
桂國又授右武衛長上尋授遊擊將軍依舊長上又汎加寧遠將軍依舊長上又奉」
恩制汎加定遠將軍長上如故萬歲通天元年五月奉月 勅差父充濾河道討擊大使公奉」
勅從行緣破契丹功授壯武將軍行左豹韜衛翊府郎將忝跡中權立功外域旣等耿恭之寄」
旋霑來歙之榮尋以寇賊憑陵晝夜攻逼埊孤楥闊糧盡矢殫視死猶生志氣弥勵父子俱陷」
不屈賊庭以萬歲通天二年五月廿三日終於磨米城南春秋卅有三   聖上哀悼傷慟」
于懷   制曰故左金吾衛大將軍幽州都督高性父智捷隨父臨戎殞身赴難忠孝兼」
極至性高於二連義勇俱申遺烈存於九死永言喪沒震悼良深宜加褒贈式慰泉壞可左玉」
玉鈐衛將軍又奉   勅曰高性父子忠鯁身亡令編入史又奉   勅令准式例葬粤」
以聖曆三年臘月十七日窆於洛州合宮縣平樂鄕之原禮也公忠孝成性仁智立身克嗣家」
風夙標國望雖次房之見獲苟宇宜僚之被脅楚勝形則可銷志不可奪精誠貫日哀響聞」
天爰加死事之榮載編良史之冊有子崇德奉   制襲父左豹韜衛翊府郎將年登小學」
才類大成孝自因心哀便毀貌始擇牛亭之埊爰開之封將營白鶴之墳先訪靑烏之兆」
將恐舟壑潛連陵谷貿遷雖歸東岱之魂終紀南山之石其銘曰」
蓬丘趾峻遼海源種落五族襟帶一方氣苞渟粹人号貞良戎昭致果胤嗣承芳(其一)

卓矣顯」
祖猗哉若人橫戈靖難拔劒淸塵見義能勇有讓必仁丹靑信誓礪帶書紳(其二)蠢爾犬羊扇玆」
凶慝         王子出師旣成我服楊颿滄溟撝戈蟊蠈子孝臣忠自家形國(其三)積善無祿輔德」
有違芻狗一致美惡同依白狼援絶黃龍戍稀李陵長往溫序思歸諒日月之更謝寄琬琰於泉扇(其四)」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고자묘지명(高慈墓誌銘)해석문 전문

 

대주(大周), 고(故) (장무)장군행좌표도위낭장(壯武將軍行左豹韜衛郎將) 증좌옥검위장군(贈左玉鈐衛將軍) 고공(高公)의 묘지명

(墓誌銘) 및 서(序).


무릇 군을 지휘하여 적진과 성을 함락, 항복시키는 자를 양장(良將)이라 하고, 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분골쇄신 다하는 자를 충신

(忠臣)이라 한다.

줄을 치고 나무를 깎아서 기록을 시작한 이후의(結繩과 刻字 이후) 기록들을 살펴보아도 실로 두 가지를 고루 갖추거나 겸한 자가

드물다. 동관지서(東觀之書)와 남사지필(南史之筆)을 두루 살펴보면 문재(文才)가 끊이지 않고 무사(武士)도 어깨가 닿을 정도로

많으나 부(父)에 효도하고 군주를 섬기는 데에 자신의 몸을 가벼이하고 의(義)를 중시하며 충성과 정절의 표징과 길흉의 분별에

뜻을 세우고 번개와 천동이 진동해도 변하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굽히지 않은 사람은 장군(將軍)일 따름이다.


공은 이름은 자(慈)이고 자(字)는 지첩(智捷)으로 조선인이다.

선조가 주몽왕을 따라 해동의 여러 오랑캐를 평정하여 고구려국을 건설한 이후 대대로 공후재상(公侯宰相)이 되었다.

후한말에 이르러 고구려는 연의 모용씨와 싸워 크게 패하여 나라가 장차 멸망하려 하였다.

이 때 20대조 밀(密)은 분연히 창을 잡고 홀로 (적진에) 들어가 목을 벤 자가 무척 많았다.

(이로) 인하여 연군(燕軍)을 파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봉(封)을 내려 왕(王)으로 하려 했으나 세 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고성(高姓)과 식읍 3천호를 내리고 또한 금문(金文), 철권(鐵券)을 내려 “마땅히 고밀 자손은 대대로 후(侯)를 봉하고 까마귀의

머리가 희게 되고 압록강이마르지 않으면 승계를 끊지 않는다”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처음 세워진 후부터 나라가 망하기까지 708년, 30대동안 대대로 공후장상(公侯將相)이 끊어지지 않았다.

충성을 덕목으로 삼고 용맹과 의리를 기반으로 하여 사직을 세우고 분봉을 받아 조토(祚土)를 회생시키니 변경의 막힘도 없이 도가

행해졌다.

하물며 땅이 삼한(三韓)을 덮고 사람은 8교를 받들고, 위기를 보고 목숨을 버림으로 패배를 바꿔 공(功)으로 하였다.

나라는 칠백년의 수명을 누리고, 집안은 30세대동안 그 업을 이었으니 원류는 곽박(郭樸)의 점에 합치하고, 봉하여 숭배됨은 필만

(畢萬)의 점에 부합되어, 무신(武臣)의 지위가 자손에게 이어지고 ‘黃河如帶 泰山如礪’의 일이 자손에게 베풀어졌으니 앞의 것은 입공

(立功)이고 뒤의 것을 불후(不朽)라고 한다.


증조부 무는 본번에서 2품 막리지에 등용되어 홀로 국정을 맡아 지위는 극히 막중하고 임무는 기모(機謀)있는 일을 관장하여 방국

(邦國)이 공평무사하였으니 그 높음은 비길 바가 없었다.

조부 양은 3품 책성도독(柵城都督) 위두대형(位頭大兄)에 등용되었고 대상(大相)을 겸했다.

어려서는 부조(父祖) 전래의 가업을 계승했으며 장성하여서는 국가경영에 참여하여 방진(方鎭)의 영수가 되었고 속성(屬城)의

모범이 되었다. 부 문은 본번에서 3품 위두대형이 되었고 장군을 겸했다.

고구려의 멸망을 미리 예견하고 형제를 이끌고 귀속했다.


성조(聖朝) 총장 2년(669) 4월 6일 명위장군(明威將軍), 행우위위익부좌낭장(行右威衛翊府左郎將)을 제수받고 그 해 11월 4일

운휘장군(雲麾將軍) 행좌위위익부중랑장(行左威衛翊府中郎將)에 제수되었다.

영륭(永隆) 2년(681) 4월 29일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에 임명되었다. 주교(舟僑:舟之僑)가 괵공(?公)이 녹을 받으면 재앙이 될

것을 알고 마침내는 (진으로) 가버렸고, 궁지기(宮之奇)가 우공(虞公)이 간함을 듣지 않음을 보고 친족을 이끌고 떠났듯이 가봉지역

(可封之域)에 몸을 의지하여 무관(武官)으로 직책을 맡아 면모를 새롭게 하고, 옛 조정에 대한 노여움을 풀었다.

호분(虎賁)으로 천자의 수레를 따르고, 오교위위(五校威衛)로서 궁궐을 지키면서 8척의 장검을 차니 아름다움이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았다.

광택(光宅) 원년(684) 11월 29일 유성현개국자(柳城縣開國子), 식읍 4백호에 봉해지고 누차 은혜가 더하여 유성현개국공, 식읍

2천호에 봉해졌다. 환자(桓子)의 하급관리가 천실(千室)인데 비하여 이것은 가볍고, 무안(武安)의 발영군(拔?軍)은 삼도(三都)인데

이에 비교하면 어찌 무겁겠는가?

공은 어려서 부(父)의 공훈으로 인해 상주국을 회수(回授)하고 우무위장상(右武衛長上)에 우수(又授)하고 유격장군의구장상

(遊擊將軍依舊長上)을 심수(尋授)하고, 또 영원장군의구장상(寧遠將軍依舊長上)을 더했다.

또 은혜를 입어 정원장군(庭遠將軍)을 더하여 제수하고, 장상은 예전과 같이

하였다. 만세통천(萬世通天) 원년(696) 5월 월칙차(月勅差)를 받들어 부(父)는 여하도토격대사(濾河道討擊大使)에임명되었다.

공은 칙령을 받들어 행하고 거란을 파한 공으로 인하여 장무장군(壯武將軍) 행좌표도위익부랑장(行左豹韜衛翊府郎將)에 제수되었다.

이에 중군(中軍)을 통솔하여 외역(外域)에서 공을 세웠다.

이미 경공(耿恭)의 기선(寄旋)에 등(等)하고 내흡(來?)의 영(榮)에 점(霑)하여 이윽고 도적이 세를 떨쳐 압박하고 주야로 공격할 때

외로이 싸우는데 구원(救援)은 멀고 양식이 다하고 화살은 떨어져 죽음을 보기를 삶과 같이 했으니 그 기개가 높았다.

부자가 모두 전사하고 적정(賊庭)에 항복하지 않았다.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697) 5월 23일 마미성(磨米城) 남쪽에서 죽으니 춘추 33세였다.

성상(聖上)이 애도 상심하여 제(制)를 내려 이르기를 “고좌금오위대장군(故左金吾衛大將軍) 유주도독(幽州都督) 고성(高性) 부남

(父男) 지첩(智捷)은 부(父)를 따라 싸움에 임하여 몸을 버려 국난을 구했으니 충과 효가 모두 지극하다. 지성(至性)이 이련(二連)보다

높으니 의(義)와 용(勇)이 다 펼쳤다. 공적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남았으나 영원히 세상을 떠났으니 비통하고 슬픔이 지극하도다.

마땅히 공적을 기려 좌옥옥검위장군(左玉玉鈐衛將軍)을 추증하여 황천의 길을 위로하노라”고 하였다.

또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고성(高性) 부자(父子)는 충성이 지극하여 목숨을 다하니 사(史)에 편입토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칙을 받들어 무(武)와 예(禮)에 따라 장사지내게 하였다.

성력(聖曆) 3년(702) 납월(臘月) 17일 낙주(洛州) 합궁현(合宮縣) 평락향(平樂鄕)의 동산에 관을 내리니 (이것이) 예(禮)에 맞았다.


공(公)은 충효로 인성(人性)을 이루고 인지(仁智)로 몸을 세우니 가풍(家風)을 잇고 일찌기 국망(國望)을 받았다.

비록 차방(次房)이 구우(苟宇)에게 사로잡힌 바 되고, 의료(宜僚)가 초승(楚勝)의 협박받은 바 되었어도 목숨은 가히 사라지게 할 수

있었어도 그 뜻은 빼앗을 수 없었으니 정성이 해를 꿰뚫고 애도의

소리가 하늘에 들리니 국가를 위해 죽었다는 영예를 더하고 양사(良史)의 책(冊)에 싣도록 한다.

자(子) 숭덕(崇德)은 칙을 받들어 부(父)를 이어 좌표도위익부랑장(左豹韜衛翊府郞將)에 제수(制授)되었다.

 당시 소학(小學)에 다니면서 재주가 뛰어났는데 효성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슬픔으로 용모가 수척해질 정도였다.

비로소 우정(牛亭)의 땅을 택하고 말갈기 봉지(封地)를 열어 백학(白鶴)의 분묘를 조영하며 청조(靑鳥)의 무덤을 찾았지만 장차

완전히 잊혀지고 남이 모르게 되며 능곡(陵谷)이 바뀔 것을 두려워하여 비록 혼백은 돌려보낸다 해도 마침내 남산지석(南山之石)을

세웠다.

그 명(銘)에 (다음과 같이) 새긴다.


봉래산이 높고 요하(遼河)가 길게 펼쳐져 5족(五族)의 부락을 이룬 산천(山川)의 한 귀퉁이에 영기(靈氣)가 머물렀도다.

사람은 정결하고 어질고 싸움에서는 결실을 드러냈으니 후손들이 그 향기를 기리도다. 첫번째.


뛰어나구나 조상이여, 아름답구나 후손이여, 창을 비켜잡고 국난을 평정하고 검을 뽑아들고 먼지를 깨끗하게 했도다.

의(義)를 보면 용기를 내고 겸양에는 인(仁)이 있으니 그 선명한 맹서 큰 띠에 적어 영원하도다. 두번째.


어리석고 간사한 무리가 일어날 때 왕자(王子)로 출사(出師)하여 우리에게 복속시키고 버드나무돛에 망망창해에서 창을

휘둘고악인을 처치했도다. 자(子)로는 효도하고 신(臣)으로는 충성하여 집안으로부터 나라를 드러내었도다. 세번째.


선함을 쌓았으나 녹은 없고, 덕으로 도왔으나 어그러짐만 생기는구나.

짚으로 만든 개가 한번 이르자 아름다움과 추함이 함께 의지하고, 백랑성(白狼城)의 구원이 끊어지자 황룡수(黃龍戍)에 사람이

드물구나.

이릉(李陵)은 머물렀으나 온서(溫序)는 돌아갈 것을 생각했구나.

바라건대 일월에 기원하고 황천에 완염(琬琰)을 보내노라. 네번째.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한서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초기 강역인 幽州는 아래와 같다.

(上谷郡) 秦置。莽曰朔调。属幽州。户三万六千八,口十一万七千七百六十二。县十五:沮阳,莽曰沮阴。

泉上,莽曰塞泉。

潘,莽曰树武。军都,温馀水东至路,南入沽。居庸,有关。雊瞀,夷舆,莽曰朔调亭。宁,西部都尉治。

莽曰博康。昌平,莽曰长昌。广宁,莽曰广康。涿鹿(탁록)莽曰抪陆。且居,阳乐水出东,南入沽。

莽曰久居。茹,莽曰穀武。女祁,东部都尉治。莽曰祁。下落。莽曰下忠。

(渔阳郡) 秦置。莽曰通路。属幽州。户六万八千八百二,口二十六万四千一百一十六。县十二:渔阳,

沽水出塞外。东南至泉州入海,行七百五十里。有铁官。莽曰得渔。狐奴,莽曰举符。路,莽曰通路亭。

雍奴,泉州,有盐官。莽曰泉调。平谷,安乐,

BA3C奚,莽曰敦德。犷平,莽曰平犷。要阳,都尉治。莽曰要术。白檀,洫水出北蛮夷。滑盐。莽曰匡德。

(右北平郡) 秦置。莽曰北顺。属幽州。户六万六千六百八十九,口三十二万七百八十。县十六:平刚,无终,故无终子国。浭水

西至雍奴入海,过郡二,行六百五十里。石成,延陵,莽曰铺武。俊靡,氵垒水南至无终东入庚。莽曰俊麻。薋,都尉治。莽曰

裒睦。徐无,莽曰北顺亭。字,榆水出东。土根,白狼,莽曰伏狄。夕阳,有铁官。莽曰夕阴。昌城,莽曰淑武。骊成,大揭石山

在县西南。莽曰揭石。广成,莽曰平虏。聚阳,莽曰笃睦。平明。莽曰平阳。

(辽西郡)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

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

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

(고죽성)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

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

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

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辽东郡) 秦置。属幽州。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有牧师官。

莽曰昌平。新昌,

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

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

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

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玄菟郡) 武帝元封四年开。高句骊,莽曰下句骊。属幽州。户四万五千六。口二十二万一千八百四十五。

县三:高句骊,辽山,辽水所出,西南至辽队入大辽水。又有南苏水,西北经塞外。上殷台,莽曰下殷。

西盖马。马訾水西北入盐难水,西南至西安平入海,过郡二,行二千一百里。莽曰玄菟亭。

(乐浪郡)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讑邯,

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

增地,莽曰增土。带方,驷望,海冥,莽曰

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

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위 한서지리지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과 인터넷 자료로 하나하나 검색해 들어가면 고죽성이 있던 요서군 등 모든 지명은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즉 유주(幽州)는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 일대에 걸쳐있었다.“

따라서 유주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지명인


(상곡군) 거용, 창평, 탁록
(우북평군) 갈석산
(요서군) 고죽성, 유성, 비여
(요동군) 안시, 요양, 서안평
(낙랑군) 패수, 수성, 대방 등의 지명도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 일대지명.

 

고려가 망하기전 그의 부친의 고질의 손에 끌려 당에 귀속한 고자는 거란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여 하남성 낙주(현 낙양)에 

장사지내졌는데 그가 생전에 활동한 지역의 이름은 幽州 柳城이며  묘지명에 서술된 蓬丘趾峻遼海源

이란 문구는 은유적 용법이 아닌 바로 역시 산서성 남서부 지명으로 비정된다.  

 

운영자 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