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중국 문명의 진실

설레임의 하루 2009. 4. 8. 05:14
*출처:다음카페-삼태극   글쓴이:김운회(동양대,2006.05.14)

 

 

황하문명이라...?
중국을 흠모해온 사람들은 모든 문명의 근원이 중국인듯 이야기한다.

한족(漢族)들은 세상의 모든 문명이 한족으로부터 나왔다고 떠들어댄다.

 

황하문명(黃河文明)은 황하(黃河) 중·하류와 그 지류에서 발생하였다.

중국은 황하문명이 마치 모든 문명의 근원인 듯이 세상에 알리려고 안달한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소중화주의자들도 가세하여 중국문화야말로 가장 위대한 듯 떠들어댄다.

  
새끼 중국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黃河文明)을 연 민족은 바로 쥬신이라는 것이다.

즉.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인 위대한 황하문명도 쥬신의 주도로 한족(漢族)이 함께 만든 작품이라는 말이다.

 

유목지대와 농경지대에서 발생한 문명

 

[그림 ①] 유목문화권과 농경문화권과 문명의 발생. ⓒ김운회

 

[그림 ①]에서 특이한 점이 나타난다. 즉 문명의 발상지는 유목민과 농경민의 충돌지점이라는 것이다.  
또,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즉 풍부하고 다양한 신석기문화가 나타난 중국의 화중(華中,산동,안휘,강소,하남,호북)지방이나 양자강(洋子江)에서는 왜 고도의

문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황하(黃河)는 양자강에 비해 조건이 열악하다. 황하는 진흙과 모래가 많은 데다 자주 범람하여, 1950년대 이전까지 기록만 보아도

하류제방이 터지고 범람한 횟수가 5백여 차례나 된다.

하도(河道), 즉 강의 물길이 바뀐 회수만도 20여 차례나 된다. [류제헌,『중국역사지리』(문학과 지성사:2004) 68쪽]
  
상상이 가능한가? 하룻밤 자고나면 강이 십리나 도망가 없어지는 상황...

오죽하면 황하를 ‘다스릴 수 없는 강’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을까?
  
이와같이 황하는 양자강에 비해 토지도 비옥하지 못하고 기후도 좋지 못하기 때문에 문명이 발생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하고, 사람

살기에도 좋은 장소는 더구나 아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황하는 대홍수가 나서 자주 범람하고 기후조건도 나빠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혹한 추위가 닥친다.

하지만 장강(長江), 즉 양자강은 자주 범람하지도 않으며 토질도 좋고 기후도 곡식이 자라기에 적합하다.

그래서 한족과 중화사상이 극성하게 된 송나라 이후로는 양자강은 중국 최대의 곡창으로 한족을 먹여살린 것이다,
  
그러면 마땅히 양자강유역이나 산둥반도 등 화중지방[중국의 원류(原流)]에서 고도의 문명이 발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자강이 신석기시대에는 현재보다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아 저습지에 크고 작은 호소(湖沼)가 여기저기

있는데다 삼림이 무성한 상태여서 개발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비하여 황하유역은 대륙성기후로 건조한 데다가 비옥한 황토가 퇴적하여 황토지대를 형성하였고, 이것을 문명발생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글쎄.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중국의 양자강문화[長江文化]는 북부 황하문화(黃河文化)와 함께 중국 고대문화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정부는 양자강문화가 1만 2천년까지도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라고 열을 올리고 있다.

어쨌든 황하문명보다 훨씬 오래된 것은 사실이겠다.

그렇다면 중국문명의 원류는 양자강 문화이겠다. 그런데도 신석기문화로 정체되었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양자강이 살기 나빠서 고도의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그동안의 분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B.C.3000년경, 양자강에는 이미 벼농사를 바탕으로 신석기문화를 꽃피웠는데, 대계문화(大溪文化:B.C.4000년), 굴가산문화

(屈家山文化:B.C.3000년), 청룡천문화(靑龍泉文化:B.C.2000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문화는 벼농사 중심의 농경문화로 2~3모작이 가능했으며 후에 춘추전국시대의 오(吳)나라,월(越)나라,초(楚)나라의 문화적

기초가 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밀에 비해 쌀은 같은 양으로 인구를 부양하는 능력이 크다고 한다.

즉 벼농사지대는 밭농사지대보다 인구를 많이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문명을 만드는 조건으로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강문화는 전성기가 B.C.3000년경으로 가장 오래된 문명일 수도 있는데 B.C.2000년경에 까닭도 없이 쇠퇴해버렸고 이

시기에 황하문명이 발흥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후변화(한랭화)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면 양자강 문화의 쇠퇴는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랭화되면 양자강지역은 황하보다 더욱 유리한 게 아닌가?

황하는 더욱 살기도 어려워지겠고. 그런데 양자강문화는 쇠퇴하고 황하문명이 더 크게 발전한다?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렵다.
  
양자강 유역과 이를 기반으로 한 화중지방(華中地方)에서 왜 고도의 청동기문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은 그동안 관련 학자 대부분이 가진 의문이었다.
  
그래서 최근 일본학자와 중국학자들이 연합하여 양자강 중류지역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다.

(『월간중앙』2002.5) 구체적으로 이 지역은 동정호(洞庭湖) 주변 후난성(湖南省) 청터우산(城頭山)이었는데, 여기에는 양국 학자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인들 목적은 야요이(彌生) 문화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겠고, 중국인들은 ① 세계 벼문화의

출발점이 중국이라는 것과, ②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입증(청동기유적)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이들은 서로 눈이 맞아 발굴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발굴해보니 양자강유역에는 이미 B.C.5000년에 고도의 벼농사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월간중앙』2002.5

(日本『文藝春秋』4月號 長江文明發掘記座談)].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본은 이 결과에 크게 고무된 것 같은데 중국측 반응은 별로였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양자강유역은 황하문명 훨씬 전에 신석기문화가 고도로 발달해 있었지만 그것이 더 높은 단계의

청동기문화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는 엉뚱하게도 중국이 자신의 원류지역인 양자강과 화중지방에서는 독자적으로 청동기문화를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만

입증하고 만 셈이 되었다.
  
중국인이야 으례 그렇다하더라도 같은 쥬신으로서 열도쥬신(일본) 학자들의 이같은 행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사학이나 고고학을 한다는 이들이 이토록 쥬신을 거부하고 ‘새끼 중국인’ 근성을 가지고 있는지 슬픈

일이다. 또 이것이 오늘날 쥬신 지식인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머리 굴려서 한다는 일이 항상 그저 중국인들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한·일 양국 학자들이 마치 중국에 잘 보여서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것 같다.

장강(양쯔강) 벼농사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이 열도쥬신(일본)의 자존심을 높여주는가?

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벼농사 문화를 가지고 갔다고 해서 그것으로 쓸데없이 우쭐거리면서 동족(同族)을 오랑캐로 부르는

반도쥬신의 태도도 심각한 문제다.

그러고서 무슨 한·일 두 나라의 화합(和合)이 이루어지겠으며 동족의식(同族意識)이 생기겠는가?
  
그리고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학문을 왜곡시켜야 되겠는가?

열도쥬신이나 반도쥬신의 ‘새끼 중국인’들도 이젠 사실을 제대로 보고 연구하는 풍토를 가져야 한다.

왜 자기 전공도 아닌 많은 사람들이 역사학에 대하여 간섭을 할까? 다른 분야에 이런 경우가 있는가?

뭔가 알면 알아갈수록 학교나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너무 다르니까 그러는 것이다.

이 점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매너리즘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황하문명의 주역, 쥬신
중국 양자강유역에 고도의 신석기문화가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이상의 문화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전혀 해결이 안되고 있다.  

[그림②]를 보자. 『고교 역사부도』(금성출판사, 천재교육) 자료를 한곳에 모은 것이다.

  

[그림 ②] 신석기,청동기 유적지 분포도(후난성 청터우산 추가) ⓒ김운회

대체로 보면, 중원 땅은 주로 석기(신석기) 문화 유적지가 많고 북부에 갈수록 청동기유적이 많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발달된 청동기문화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쥬신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자랑하는 황하문명도 무엇인가.

‘쥬신의 냄새’를 풍기고 쥬신의 코드(ethnic code)가 느껴진다.
  
이제 다시 양쯔강유역에서 왜 고도의 문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으로 돌아가자.
  
중국문명을 분석하는 연구자들이 쥬신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쥬신을 염두에 두면 쉽게 보이는 것을 이들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도 보지 못한다.

아니면 쥬신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원래 그렇다 치고 일본학자들 행위는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잠시 신석기문화를 보더라도 쥬신과 한족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먼저 알아두자.

이 분야 전문가인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쥬신의 대표적인 신석기 토기인 즐문토기(櫛文土器:빗살무늬토기-comb marked pottery)는

시베리아에서 몽골을 거쳐 한편으로는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을 지나 두만강 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한반도

서북부로 유입되었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 2001) 95쪽].

 

신석기시대 문화권

 

[그림 ③] 즐문토기 문화권(정수일. 앞의 책, 70쪽에서 발췌). ⓒ김운회

[그림③]을 보면 석기문화조차도 쥬신과 한족(漢族)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족(漢族)의 경우 하남성(河南省) 앙소(仰韶)에서 최초로 채도(彩陶:design pottery)가 발굴되었는데, 채도는 주로 그리스·이라크·

이란·인디아의 하라빠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이들의 문화가 남방에서 인디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중국은 펄쩍 뛰면서 이를 반박하고 핏대를 올리며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아직도 논쟁 중이다.
  
채도가 이라크·이란·인디아에서 중국으로 왔든 아니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 신석기문화와 한족(漢族)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왜 쥬신과 한족이 궁극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제 생각을 좀 바꾸어보자.
  
중국 고유의 벼농사 중심지에서 보다 발달된 문명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역으로 문명이 발생한 지역을 보면서 추론하는 것이 더욱

수월하겠다.
  
문명이 발생한 곳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지점이라는 것이고, 청동기를 비롯한 금속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최초 왕조 은(殷)나라는 청동기 국가로 일반적으로 상(商)나라라고 불리는데 대체로 B.C.1600년~B.C.1000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 이름을 따라 통상 은나라로 부른다. 하(夏),상(商),주(周) 등 3대 왕조가 잇달아 중국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지만 하왕조는 고전

(古典)에 기록만 있을 뿐 전설적인 왕조다.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에서 나타나는 청동기유물들은 초기의 원형에서부터 시기별로 발전과정을 보이는 유물들이 출토되어야 할

것이다. 

청동기문화도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중국이 우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가 이미 발달된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이 분야의 전문가 정수일교수에 따르면 중국의 안양(安陽) 은허(殷墟) 등지에서 나타나는 청동기는 그 성형법이나 소재·문양 등을

보면, 이미 상당히 발달된 청동기로 여러 측면에서 유라시아 청동기나 서아시아 청동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정수일. 앞의 책, 123~130쪽]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 은나라 청동기문화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은나라 쪽으로 전파되었다는 말이다. 

은나라에서 청동기문화가 발생했다면 초기 청동기 흔적은 물론, 중간 과정의 형태나 가공품들이 다수 출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은허 유물들을 보면 중국인들이 주장해왔듯이 청동기 가공기술이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

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중국에서 발생했다’는 식으로 이리저리 늘어놓은 거짓말이 많다보니 나중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청동기 야금술은 코카스서·아르메니아·이란 고원 등지의 유목민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한다.

[정수일. 앞의 책 130쪽]. 결국 은나라가 없었더라면 중국은 『삼국지(三國志)』시대까지도 마제 석기(磨製石器:간석기)로 농사를

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변한이나 요동ㆍ만주에서 수입했어야 할 테니까.

청동기문화의 중심지

[그림 ④]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정수일,『고대문명교류사』122쪽) ⓒ김운회

[그림④]에서 보면 청동기문화는 중국의 원류(화중지방)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은허(殷墟)를 중심으로만 분포되어 있을 뿐이다.
  
은나라 청동기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는 없고, 안드로노프·오르도스·카라스크·요동, 또는 한반도 등지에서 이동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오르도스 청동기문화의 전기(前期)는 은나라, 주나라와 같은 시대로 추정되며 시베리아 카라스크 문화와 동류에 속하고,

은나라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정수일. 앞의 책 145쪽).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는 B.C.8세기경부터 철 야금술이 도입되어 초원지대의 민족들이 유목기마민족화(遊牧騎馬民族化)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부 러시아지역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Scythian)의 철기문화는 강철 제조기술에 기반을 두고 발달하여 소아시아·

앗시리아·중국 북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기마민족 문화를 형성시켰다고도 한다.

 

중국에는 전국시대 B.C.4세기 초에 무기가 철로 제작되기 시작했다.[전송림,『중국 산업지리』(백산출판사 : 2001)].

중국에 철기문화가 발전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스키타이족은 B.C.6세기~B.C.3세기경 남부 러시아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기마유목민족)
  
여러 기록을 보더라도 중국 땅에서는 은나라 때부터 청동기,철기 금속이 사용되었다.

이남규(한신대)에 따르면 은나라 때부터 철로 만든 도끼[鐵刃銅鉞]나 철과 구리를 섞은 창[鐵援銅戈]이 제작되기 시작하지만, 이같은

극소수의 무기형(武器形) 의기(儀器)에 이용된 철은 자연철(自然鐵)인 운철(隕鐵)이라고 한다.

자연상태의 철을 대충 사용했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인공적(人工的)인 철기가 생산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철제무기가 등장하는 것은 전국시대 중 후기부터지만 그것도 중국이 자랑하는 낙양을 비롯한 중원지역이 아니라 쥬신의 영역인

요동에 있던 연(燕)나라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당시 중국영역이 되지 못하는 초(楚)나라 방면에서 철로 만든 긴 칼[鐵製長劍]이 소수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李南珪,『한국 고대사학회 제12회 학술토론회 발표요지』,「韓半島 古代國家 形成期 鐵製武器의 形成과 普及].

그나마도 그 시기도 춘추 말기나 전국시대 초기니까 황하문명이 발생하고 난 한참 뒤에 일이다.
 
결국 아무리 살펴보아도 청동기문화는 쥬신 문화권에서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며 아름답게 꽃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유목민들이 청동기를 발달시켰을까?”

“왜 농경민 사회에서는 제대로 된 금속문화가 발달할 수 없다는 걸까?”
  
호미 만드는 기술과 전투용 대검 만드는 기술이 같겠는가? 유목민들이 귀금속 가공 및 제련기술이 탁월했던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금 가공이나 전쟁무기 야금술과 저급한 철 농기구의 가공 수준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농기구(선철 : 탄소함량은 2% 이상)는 섭씨 1200도에서 만들고, 칼(강철)은 최소 섭씨 1500도 이상 고열에서 탄소(탄소함량 0.01~

2%)를 제거하는 공정이 필요하다.
  
결국 유목민들에 의해 철기가 보급되자 농업생산력은 급성장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농경사회는 광대한 국가적 역량을 갖추게 된다.

농경민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유목민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염제(炎帝)의 신하로 있다가 도전하는 황제(黃帝)처럼 말이다.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염제의 계승자다.
  
이후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는 야철(冶鐵)기술이 발전하고 철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된다.

이로써 농기구가 크게 발전하였고 여기에 우경(牛耕)이 시작되어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증대하였다.

이와 함께 농경지도 크게 늘어나고 사전(私田)이 대대적으로 나타나 전통 토지제도인 정전제(井田制)를 붕괴시켰다,

참고로『국어(國語)』에는 관중(管中)이 제(齊) 환공(桓公)에게 “청동은 칼이나 창으로 만들어 개나 말을 자르는 데 사용하고, 철은

호미로 만들어 땅을 파는 데 사용한다(美金以鑄劍戟試諸狗馬 惡金以鑄鋤夷斤.試諸壤土 :『國語』「齊語」)”는 말이 있다.

이로 보면 이미 춘추시대 이전에 농기구의 보급이 상당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청동기 등 금속문화의 흔적을 추적해 볼 수 있다.

 

[그림 ⑤] 철과 금ㆍ구리 주요 생산지. ⓒ김운회

[그림 ⑤]는 현대를 기점으로, 주요 철과 금ㆍ구리 산지를 나타낸다. 그런데 이상하다.  
과거 청동기문화 유적지와 쥬신이 다녔던 길목에 철이나 금, 또는 구리의 대규모 생산지가 지금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의 철산지와 과거의 철산지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과거 쥬신의 흔적이나 청동기 유적지와 철이나 구리

등의 대규모 산지가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타의 비철 금속(아연·주석·텡스텐 등) 산지까지 포함하면 이 점은 더욱 확연해진다.
  
따라서 문명의 여명기에 왜 은(殷)나라가 중국 청동기문화를 이끌어 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은나라는 바로 쥬신 계열의 국가다. 

사마천 『사기(史記)』에 “은나라는 오랑캐(夷)의 나라고, 주나라는 화하족(華夏族)의 나라(殷曰夷周曰華)”라고 한다.

여기서 사용된 오랑캐라는 용어, ‘이(夷)’가 바로 쥬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은나라 당시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나라 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주나라는 중국민족의 기원인 화하족(華夏族)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쥬신계열 유목민이 우수한 금속문화를 바탕으로 농경민을 지배하는 구조가 바로 최초의 중국왕조라는 것이다.
  
은나라는 동물 뼈를 태워서 점치는 문화가 발달했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적인 특징이다.

한족(漢族)으로 대변되는 남방의 농경민적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은나라 왕은 점복(占卜)으로 하늘의 뜻(神意)을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우두머리였다.

마치 단군(檀君)처럼 말이다.
  
더구나 이 은(殷)나라가 부여(夫餘)와 습속이 거의 같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은나라는 동이족의 나라(殷曰夷)라는 『사기(史記)』의 말처럼  은나라는 쥬신의 나라였다는 얘기다. 

은나라는 부여와 같이 흰색을 숭상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군대를 일으킬 때 점을 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여는 은나라 역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이형구,『한국고대문화의 비밀』(김영사 : 2005)].
  
그렇다면 중국 황하문명은 그동안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금속문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던 쥬신의 주도하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 놈들이 번다.”는 속담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쉽게 말해서 유목민(쥬신)들이 농경민(한족)들을 정복하면서 금속문화를 전파한 과정이 바로 황화문명의 발생과정이었다는 말이다.

이후 중국의 대규모 농경문화는 쥬신의 금속문화의 도움없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쥬신의 이동과 청동기의 유적분포 및 현재의 철을 포함한 금속 산지가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황하문명이 발생했음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금속문화를 수용한 농경문화가 광범하게 형성되면서 화하족(華夏族:중국 한족)이 쥬신과 대등하게 겨루기

시작하였다. 

농경민들이 유목민과 끝없는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동안 농경민들은 유목민의 오랜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치우천황(蚩尤天皇)과 황제(黃帝 : 중국인의 조상)의 싸움은 그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화하족[한족(漢族)의 원류]의 민족적 각성도 한몫 했다. 그 주역이 바로 공자(孔子), 맹자(孟子), 동중서(董仲舒:B.C.

179~104), 가의(賈誼:B.C.200~168), 유방(劉邦)과 그 후손들이다.

결국 존경해 마지않던 성인(聖人)이라는 분들도 실상은 ‘한족의 성인(漢族的聖人)’이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황하문명을 연 쥬신은 하북(河北) → 북경(北京) → 요동(遼東) → 만주(滿洲)ㆍ몽골 → 한반도일본 등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은(殷)나라는 쥬신세력을, 주(周)나라는 중국민족을 대표하는데,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폭군으로 몰아

천하를 빼앗은 것은 황하유역에서 원시적인 형태나마 중화주의(中華主義)가 태동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 중간 쥬신은 강력한 군대를 몰아 중국정벌을 단행하여 중원 천하는 쥬신과 한족의 공격과 반격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에 대해서도 중국인들은 엄청난 인신공격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쥬신은 금속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아침 해[태양]나 쇠[鐵], 또는 금속은 대표적인 쥬신의 토템이다.

이 금속토템은 쥬신의 ‘상징과 표식(標式)이자 신(神)’이다. ]

토템은 구성원들을 단단히 결속시키고 부족의 역량이 흩어지지 않도록 한다.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골(蒙兀)

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박시인,『알타이 신화』232쪽).
  
오늘날 반도쥬신(한국)이나 열도쥬신(일본)이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를 가진 것이나 최첨단 산업 정보통신기술(IT)의 선두주자라는

것도 이것과 분명히 관련이 있다.
  
황하문명의 주역이 바로 쥬신(Jüsin),

즉 코리안(Korean: 고리족, 코리족, 까오리족)이라는 것을 이제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