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단군세기 거짓이 아니다.

설레임의 하루 2009. 4. 8. 05:22

*출처:카페-삼태극   글쓴이: 황진이

 

 

▶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는 청동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단계였다.

역사상에서 '고조선(古朝鮮)'이라 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단군조선시대는 신석기문화를 계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청동기문화로

돌입하여 초기철기문화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기간동안 역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단군조선을 왕조사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단군조선은 고대국가로서의 왕조사로 이해하기 보다는 연맹체로서의 문화권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한 해석일 것이다.

발해북안의 하가점하층문화(夏家占下層文化:B.C.2000~B.C.1300)란 내몽골 적봉(赤峰) 하가점촌에서 발굴된 두개의 퇴적층중

층에서 발견된 유적층이다.

이 문화단계는 홍산문화(紅山文化)를 계승하는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에 이어서 나타나는 청동기유적을 포함하는 문화이다.

소하연문화는 홍산문화의 지류로 보기도 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자오지한웅 즉 치우천황이 중심지를 산동지역으로 옮기고 나서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가점하층문화는 방어시설인 성(城)을 최초로 축조하고 금속기를 사용하는 등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이다가 하가점상층문화

(夏家占上層文化:B.C.1300~B.C.400)로 교체된다.

하가점상층문화란 이른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으로 대표되는 고조선(古朝鮮)의 청동기 문화단계에 속한다.

현재까지 연구된 중국동북지방 즉 만주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는 발해연안과 요동지역에 관한 체계만 설정해 놓았을 뿐,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일대는 아직 그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유적발굴 또한 1980년대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그 이전에는 간헐적으로 조사되었을 뿐이었으므로 정확한 문화의 면모를

살피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기원전 3천년대 후반경에 송화강 중류와 눈강하류 일대에 세석기전통에 접목하여 다양한 기하학

문을 시문한 토기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백금보문화(白金寶文化)'가 대표적이다.

백금보문화는 기원전 2천년대말기와 기원전 1천년대전기에 속하는 문화로 보아지는데 초기청동기 문화단계에 진입하였던 흔적이

있다.

이 지역에서는 특이하게도 홍산문화 계통과 하가점하층문화 계통의 토기가 나와서 문화적 지역전파의 양상을 보여주는데 단군조선의

건국과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할 수가 없다.

기원전 1천년대 전반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눈강 하류와 송화강 중류일대에 일단의 문화단계가 확인되었는데, '망해둔유형

(望海屯類型)'이라 명명하고 역시 초기청동기시대로 진입하였음이 입증되었다.

이 지역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에 속하는 백금보문화를 보면 동물을 추상화시켜 표현한 특이한 기하학문이 토기에 시문되어져 있다.

이러한 양상은 홍산문화나 하가점하층문화의 토기문양과 매우 다른 독특한 요소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홍산문화계통과 하가점하층

문화계통의 토기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이지역은 길림·장춘지역의 순수 비파형동검문화보다 확실히 이른 시기의 단계에 전개되었던 문화이고 길림장춘지역의 문화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한단고기]의 단군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 경자93년(B.C.2241) 제께서 柳闕에 계셨는데 흙계단이 절로 생기고 풀숲은 사라지지 않으니 檀木이 무성한 곳에서 熊虎族과

함께 노닐며 牛羊을 살피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는 물건을 나라살림에 보태었다. -

라고 하였는데, 한웅시대의 기록에 비해 달라진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도랑을 파고(浚溝血)'란 기사는 한웅시대에서도 나타나는데 실제로 청동기시대 주거지유적을 보면 마을주위로 관개와 방어용의

환호(還濠)시설이 발굴되고 있어 기록의 신빙성을 더해준다.

'밭을 개간하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는 농경문화를 지칭하는 기사인데 누에를 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놀랍다.

더구나 '백성들은 餘物을 備補國했다'는 기록은 고대국가의 기틀인 조세제도의 시행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기록의 의의는 B.C.2000년대 청동기시대로 진입할 무렵의 경제생활형태가 고고학적 연대기와 매우 닮아 있다는 점이다.

이 기사는 2세단군 부루(夫婁)조에도 등장하고 있어 기록의 시대적 일치성을 증가시켜 준다.

4세단군 오사구조에는, '무자5년(B.C.2133) 鑄圓孔貝錢'이라 하여, 둥근 구멍뚫린 조개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명도전이라

하는 것과 패전과의 관계도 주목해볼만한 내용으로 '패(貝)'자는 '조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붕(朋)'자와 관련이 있고 이는 '명(明)'

자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단군조선의 경제형태는 농경을 바탕으로 하고 목축을 시도한 반농반목 형태의 경제생활을 이룩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전에 이미 동물을 가축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생산경제활동으로서의 목축은 이시기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 같다.

이것 또한 고고학적 증거로 나타나는데 만주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중기가 되면 원시농경에 가축으로 소(牛), 양(羊), 개(狗), 돼지(猪)

등이 길러졌으며, 청동기시대로 진입하는 단계에 본격적인 목축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이 [단군세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10대단군 노을(魯乙) 조를 보면, - 신묘원년(B.C.1950) 처음으로 큰 동물

우리 만들어 가축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라고 하여 당시에 이미 목축의 시도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1대·2대 단군의 기록에서와 같이 벼농사(畓作)가 아닌 밭농사(田作) 위주의 농경이 전개된 것으로 8대단군 우서한(于西翰)

기사를 보면,

- 기유2년(B.C.1992) 이해에 풍년이 들어 한포기에 여덟 이삭이 맺혔다. -

라는 매우 타당성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당시의 밭농사로는 보리(麥)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오늘날 종자의 개량과 기술의

발달로 한 포기당 25개이상의 이삭이 맺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덟개의 이삭’은 당시의 수확으로서 대단히 현실감 있는 표현인 것이다. 25대단군 솔나(率那) 조에도

‘밭곡식이 풍년이 들어 한 포기당 5개이삭의 조(粟)가 맺혔다’는 기사도 있다.

[단군세기]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기록은 금속기의 사용에 관한 것이다.

[삼성기]나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는 치우천왕이 ‘동두철액(銅頭鐵額)’하고 ‘채광주철(採鑛鑄鐵)’하여 병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역년이 기원전

2천7백년에서 2천5백년 사이의 일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중국에서의 금속기 사용시기는 기원전 2천년경부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연대는 본격적으로 청동기가 용구로 사용되어진 시기가 아니고 청동기가 묻힌 유적의 연대를 의미한다.

청동기가 禮器化되어 무덤에 안장되기 시작한 연대와 발명되어 사용되어지기 시작한 연대와는 상당한 시기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홍산문화에서와 같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동물형상의 옥기(玉器)같은 것은 금속공구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의 산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중공학계에서는 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라 하여 이미 기원전 3천년이전에 극히 일부나마 동기(銅器)의 사용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의 [사기(史記)]에서도 치우천왕이 '동두철액(銅頭鐵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기록에서의 동(銅)과 철(鐵)은 금속에 대한

같은 표현일 것으로 보아진다. 이는 문헌기록이 철기(鐵器)의 본격적인 사용이후의 것이므로 기록상의 혼동이 야기될 수 있음을

감안하여, 기록상으로는 동양에서는 동이족(東夷族)의 수장 치우천왕이 최초로 금속기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신시본기’에는 치우천왕이 갈로산에서 쇠(金)을 캐내어 병기를 만들었고 옹고산(雍孤山)에서는 냇가나 하천에서 걸러서 채집하는

수금(水金)과 철광석을 녹여 채집하는 석금(石金)을 개발하였다고 되어있는데, 각 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불명확하지만 중국의

동부지역이나 동북지역 어는 한 곳인 것으로 생각된다.

치우천왕 이후에 나타나는 금속기에 관한 기사는 단군조선 전기에 등장하는데 [단군세기] 10대단군 노을(魯乙) 조에 보면,

- 병오16년(B.C.1935) 발해연안에서 金塊가 노출되었는데 수량이 13石이었다. -

라고 되어 있어, 여기서 노출된 금괴가 황금을 뜻하는 것인지 일반적인 금속덩어리를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발해연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한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발해연안은 하가점하층문화의 전개지이고 하가점하층문화 유적중 

하북성(河北省) 당산시(唐山市)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靑銅:Bronze)의 전단계에 나타나는 순동(純銅:

Copper)으로 만든 패식 2점이 발견되었다.

붉은 색을 띤 순동이 약해서 주석과 같은 광물질을 첨가하여 경도가 높은 청동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초기단계의 순동이 대성산유적

 발견된 것이다.

이외에도 내몽골 적봉현 하가점촌 하층유적에서 4개의 동련사(銅煉渣:제련덩어리)가 발견되었는데, 방사성탄소연대측정에 의해

기원전 1천9백년대의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성산은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일 것이므로 기원전 2천년대로 추정되고 있고 이것은 중국내륙의 청동기 유적인 하남성(河南省)

언사현(偃師縣) 이리두(二里頭)유적의 기원전 1천7백년경보다 훨씬 빠른 연대이다.

한편, 중국서북지역 감숙성의 제가문화(齊家文化)에서도 다양한 동기(銅器)가 출토되었는데 기원전 2천년대의 문화단계에 속해

지역에서도 이미 기원전 3천년대 후반기에 이미 동기가 출현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청동기의 개시에 대해서는 중원중심이 아닌 오히려 주변지역에서 먼저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함이 옳다.

다만, 중원의 큰 잠재력에 의해 청동기문화가 만개하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청동문화를 꽃피운 이들이 바로 이주해 간 동이(東夷) 계통의 은민족(殷民族인) 것이다.

초기 청동기유적에 속하는 당산시 대성산은 발해연안에 있으며 진시황이 세운 장성의 기점인 갈석산(葛石山)에 가깝다.

갈석산은 ‘갈산(葛山)’으로도 불리어졌는데, 치우천왕이 금속을 캐낸 갈로산(曷蘆山)이 아닐까?

치우천왕의 본거지가 이 일대를 포함하는 청구국이므로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단군세기]의 ‘발해연안’은 어느 곳인지 지칭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발해서북안 일대의 기원전 2천년전후의 청동유적이 시기적으로

기록과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단군세기] 15대단군 벌음(伐音) 조(條)에 보면,

- 기축10년(B.C.1652) 帝께서는 西쪽으로 弱水에 가시더니 神誌 우속에게 명하여 金鐵 및 膏油를 채취하도록 했다. -

라는 금속기 사용에 대한 세번째 기록이 전해진다. 약수(弱水)는 단군조선시대에만 하더라도 서요하(西遼河)와 연결된 내몽골

동부지대를 흐르는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을 지칭하였었다. 단군이 아사달이 있는 만주 송화강지역에 있었다고 본다면 약수는

북쪽에 있지 않고 이 당시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약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단고기]상에서도 두 곳을 혼용하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위의 기사는 시라무렌강 일대에서 금속기의 원료(金鐵이란 일반적인 명칭사용)를 채취하였다는 것인데, 바로 이 지역 임서(林西)

대정(大井)에서 노천채광지가 발견되었다. 구리(銅)를 채광하고 제련, 주조까지 행한 흔적이 남아 있는 하가점하층문화단계의

청동기시대 유적지이다.

이 유적지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기를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이후의 하가점상층문화단계까지 연결되고 있다.

B.C.1652년 벌음(伐音) 단군 때 행하여진 구리의 채광기사는 시기적으로나 위치상으로나 도저히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고고학적

발굴자료와 일치하고 있다.

위에서 본 단군시대의 두가지 사실이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입각하여 쓰여졌다고 주장할 사람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고고학과의 일치성은 [단군세기]에 대한 사료로서의 가치를 더욱 더 부여해 주고 있다.

[출처] 단군시대와 청동기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