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고려가 대륙 中東部에 위치하였던 여러 史料들.

설레임의 하루 2009. 3. 21. 02:52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心濟

 

 

 

 

 

 

 

고려가 대륙 中東部에 위치하였던 여러 史料들.


사료부족의 어려움을 문제로 하여 구이넷에서는 고려 및 발해 소위 남북조의 역사적 존재사실을 자주 취급하지 않는다.

실제 고려사와 관련된것은 대표적으로 북송의 使臣인 서긍의 <고려도경> 이외에 구이넷에서 고려의 위치를 검증한 고려의

북부국경 <先春嶺>이외에는 김용무 선생의 고려사에서 보여주는 선양이 고려의 마지막 수도라 추정하는 정도에서 고려사는

그야말대로 조선조 정종 및 세종에 이르는 두차레에 걸친 <焚書坑史>로 인하여 고대 구전의 秘史는 없어지고 이후에는 고려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모두 위서 취급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본인은 소위 말하는 대륙조선론을 말하렴이 아니다. 고려인이 기술한 고려사및 지나왕조에서 기술한 객관적 사실을 보고

고려가 한반도 의주 함흥을 이르는 천리장성 및에 존재했던 힝없는 나라가 아니였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자연사적으로 ,서지학적으로 현재 자주 전남 강진 앞바다에서 발굴되고 있는 청자자기를 가득
실은 난파선의 유물을

보면서 한국사학계에서는 고려자기를 제작하여 개성의 왕도에 운반하려던 유물들이다라고 간단하게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강진이나 목포에서 흐르는 해수의 흐름을 모르고 경솔하게 말하는무식의 소치라 말하고 싶다.

전남 강진에서 돛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 浮游 하여 해류에 의지하면 강소성 염성이나,절강성 영파에 도달한다는 해류의

흐름을 해변가 사람들은 고래로 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

두 번째로 왜 산동성 蓬萊에서 고려의 평저선이 발굴되었나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리적 두 번째 의문이다.
서지학적으로 말한다면 고려사 인종조에 나오는 당시 북송이 망하고 楊子江 以南으로 쫒겨가 南宋의 金
나라 공격을 위한

고려의 침공로 협조를 고려가 반대하는 이야기부터 약 5가지의 증거자료가 나오는데五代時에 고려는 使臣이 뻔질나게 하남성

개봉이나 ,고려왕이 元의 上都에 드나든 기록이 나온다.

특히 원에는 거의 한달에 한번정도 사신이나 고려왕이 드나든다.

이를 한반도 개성에서 있었다는 기존의 주장으로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이제 그 사서적 증거를 보기로하자.


1.자료 <高麗史> 인종.무신6년(1128)기록

상략 ,本國,自祖宗以來,事大以誠,故自神考,至於太上道君皇帝,視同一家,其異恩厚禮,
豈易名言,惟天地,

不責其報,而區區感激之意。庶幾萬一,伏聞二帝遠征,擧國憂憤,雖不能應時,奔問官守,而臣子之心,豈遑寧處,

且皇帝孝悌,群公忠義,必也動天地感鬼神,天地鬼神,共相協贊,豈使二聖,久勞沙漠,每祝早還京闕,以副天下之望,

皇帝,初登寶位,首遣侍臣,就傳詔命,欲令小國,津發,前去迎請二聖,使副,又於傳詔曰,一一面諭,繼以公牒,

懇意備至,敢不拜命,然,女眞之始也,分居部落,未有定主故,嘗臣屬我國,或隨我使人,入貢上國,此後,漸致强盛,

常爲邊患,近者陷沒大遼,侵犯上國,自此兵威益大,抑令小國稱臣,仍約定禮數,一依事遼舊例,小國,不得已而從之,

然后,其俗好戰,常疾我,樂率上國,近於疆界,修葺城壘,屯集兵士,意欲侵陵小國,如聞使節,假道入境,

必猜疑生事,非特如此,必以報聘爲名,假道小邦,遣使入朝則我將何辭以拒,苟知海道之便,則小國之保全,難矣,

而淮南兩浙,緣海之地,得不慮其窺覦耶,苟爲不然,小國,豈敢恬不從命,玆事實大,非敢飾言,惟使副,曲察情衷,

少回雅意,歸奏闕下。하략

  
본국이 조종 조 이래로 대국을 정성으로 섬긴 까닭으로 신종황제로부터 태 상도군황제에 이르기까지
한집안처럼 생각하여

특이한 은혜와 두터운 예절을 이루 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천지 같은 은덕이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의 감격한 뜻은 행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삼가 듣건대, 두 황제께서 멀리 가시어 온 나라가 걱정과 울분으로 지내는데, 비록 직무상 제때에 달려가서 위문하지는

못할지언정 신하된 마음에 어찌 편안히 있을 겨를이 있겠습니까.


또 황제의 효성스러움과 공경하심과 여러분들의 충의는 반드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것이니, 천지와 귀신이 함께 서로

도와서 협조할 것이니 어찌 두 황제께서 오래 사막에서 고생하게 되겠습니까.
빨리 서울 궁궐로 돌아오시어 천하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기를 항상 축원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처음 즉위하시어 먼저 시신(侍臣)을 보내어 조서를 전하고 우리나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여 가서 두 황제를 맞아오게

하고, 또 사신과 부사(副使)가 조서를 전하던 날에 낱낱이 직접 말씀하였고, 계속 공한을 보내어 간절한 뜻이 상세하고

극진하니 감히 명을 받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여진은 처음에 부락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군주가 없었기에 일찍이

우리나라에 예속되어, 간혹 우리 사절을 따라 상국에 들어가 조공하더니, 이 뒤로 점점 강성하여 항상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근자에는 대요(大遼)를 함몰하고 상국을 침범하여 이로부터 무력이 더욱 커져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칭신(稱臣)하게 하고,

 의례를 약정하는 데 일체 옛날에 요나라를 섬기던 예절대로 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풍속이 싸움을 좋아하고 항상 우리가 상국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여 왔는데 근자에는 국경에다 성과 보루를 수축하며

병사를 모아 주둔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하고 있으니, 만약 사절이 길을 빌려 저들의 국경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여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답례의 사절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사절을 보내어

입조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겠습니까. 만일 참으로 바닷길이 편리한 줄 안다면 우리나라의 보전이

어려울 것이요.


ⓑ회남(淮南)과 양절(兩浙)의 연해의 지역도 그들이 넘겨다보는 우려를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태연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사실상 중대하여 감히 말을 꾸며 대는 것이 아니니, 사절과 부사(副使)는 충심을 곡진히 살펴 당초의 생각을 조금

돌이켜 돌아가 궐하에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2.증거자료 <五代史> 기록

중국 역사상 907년 당(唐)이 망한 뒤부터 960년 송(宋)이 건국되기까지의 다섯 왕조 또는 그 과도기.이 시기에 중국 북부에서는 중앙 왕조를 자칭하는 5개 나라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이 시기는 또한 대륙남부에서 10국, 즉 전촉(前蜀)·후촉(後蜀)·형남(荊南)·초(楚)·오(吳)·남당(南唐)·오월(吳越)·민(岷)·남한

(南漢)·북한(北漢)이 분할 통치를 하고 있었으므로 10국시대라고도 한다.

5개 왕조 가운데 최초의 왕조는 후량(後梁)이었는데, 이는 반란군 지도자 주온(朱溫 : 朱晃 또는
朱全忠)이 907년에 당을

무너뜨리고 세운 것이었다. 주온은 912년 자기 아들에게 살해되었고, 후량은 923년에 후당(後唐)을 세운 이존욱(李存勖 :

蔣宗)에게 멸망당했다.

장종은 13년간 비교적 성공적으로 통치했으나,부하 장군 석경당(石敬 : 高祖)이 반기를 들면서 후당은 멸망했다.

고조는 내륙 아시아의 반(半)유목민족인 거란족의 도움을 받아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晉)을 세웠다.

고조의 아들이 946년에 거란족에 대한 공납을 중지하려 하자 거란족이 중국 북부를 거듭 침입하여 그를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후진은 멸망했다.

다음해 후진의 장군이었던 고조 유지원(劉知遠)이 후한(後漢)을 세우고 거란족을 내륙 아시아쪽으로 몰아냈다.

후한은 또다른 장군 곽위(郭威)가 왕조를 찬탈하고 951년 후주(後周)를 건국함으로써 4년 만에 망했다.

후주에 들어와서 좀더 안정된 정부를 만들려고 했지만 황제가 죽는 바람에 어린 아들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결과 조광윤

(趙匡胤 : 太祖)이 황제자리를 차지하고 송을 창건했다.

송의 건국과 더불어 오대시대는 끝났다.

예나 지금이나 원문을 보면 개봉지역에 할거하던 10년도 못버틴 조그마한 藩主가 고려왕에게 작위를
제수했다..

조공을 받았다라고 기술하고 있군요.. 허장성세입니다. 矜華夏陋以狄 기술방식  

後梁 (907-922)
硃温,(주온, 주전충)  
末帝(말제 913-922)

夏四月,癸亥,以延州忠义军节度使、太原西面招讨应接使、检校太师、兼中书令、渤海王高万兴兼鄜、

延两道都制置使,余如故。
여름사월계해일 연주충의군절도사로서 태원서면소토응접사,검교태랑 겸 중서령 발해왕 고만흥겸
녹연양도제직사 여여고.


贞明五年 丁亥,以延州节度使、鄜延两道都制置、太原西面招讨应接等使、

渤海郡王高万兴为检校太师、兼中书令,充保大忠义等军节度、鄜延管内观察等使
919년 정해일 연주절도사 인연양도제직,태원서면초토응접등사 발해군왕고만흥을 검교태사,
관찰사에 제수하다.


贞明六年夏四月,癸丑,鄜延节度使兼西面招讨接应等使、检校太保、兼中书令、

渤海郡王高万兴进封延安王,赐号匡时定节功臣
920년여름4월계축일,발해군왕고만흥에게 연안왕에 봉하고 굉시정절공신의 시호를 사하다.



九月庚寅,以供奉官郎公远充契丹欢好使。晋王遣都将李嗣昭、李存审、王建及率师来援同州,

战于城下。我师败绩,诸将以余众退保华州罗文寨。
동년9월 진왕이 도장 이사소,이존심을 파견하고 왕건 또한 장수를 이끌고 동주에 지원하러와
성아래에서 싸우다.

우리의 장수가 패하여 모든 장수와 남은무리들이 화주로 퇴각하였다.



贞明7年二月丙寅,以荆南节度使、检校太师、兼中书令、渤海郡王高季昌 为守中书令,

依前荆南节度使。
921년 2월 형남절도사,검교태사,겸 중서령 발해군왕 고계창을 중서령으로 하였다.



後唐(923-935)
太祖,讳-克用,本姓-硃耶氏(李存勖 )


天祐四年正月甲申 是岁,四川王建遣使至,劝武皇各王一方,俟破贼之后,访唐朝宗室以嗣帝位, 然后各归籓守。
907년 정월갑신일 사천왕건의 사신이 도착했다. 적을 파한 후 황제위를 잇고 당조종실을 방문하였고
자기자리로 돌아가

번국을 지켰다.



天祐十五年十二月“贼将先已奔亡,王之骑军一无所损,贼众晡晚,大半思归,击之必破。王但登山纵观,责臣以破贼之效。

”于是李嗣昭领骑军自土山北以逼梁军,王建及呼土众曰:

“今日所失辎重,并在山下。”乃大呼以奋击,诸军继之,梁军大败。
적장이 이미 분망하여 왕의군사는 하나도 손실이 없고, 적의 무리는 늦게 먹고 반 이상이 돌아갈
생각을 있으니 공격하면

필히 처부술수 있습니다.

왕이 산에 올라 보며 신하들이 책임지고 적을 파하면 효험이있을것이다 하였다.

이사소가 기병을 토산의 북에서부터 양나라군을 급히 다그쳤다.

왕건이 토산을 향해 외치길 “오늘은 수레를 많이 잃었다 산에서 내려오라”

그리고 땅에서 싸우며 크게소리치며 모든 군사가 싸움을 그쳤고 양나라군은 싸움에서 크게 졌다.
逼;쫒을핍,辎:수레바퀴치

同光元年冬十月 戊午,新罗王朴昇英遣使贡方物。
923년 겨울10월 무오일 신라왕 박승영(경명왕)이 사신을 보내어 물건을 보내다.

同光元年冬十月 己未,以洛京留守、判六军诸卫事、守太尉、兼中书令、河南尹、

魏王张全义为检校师、守中书令,余如故;以荆南节度使、检校太师、守中书令、

渤海王高季兴依前检校太师、守中书令,余如故 同光二年三月丙午,以荆南节度使、守中书令、

渤海王高季兴依前检校太师、兼尚书令,封南平王;

州节度行军司马李存贤依前检校太保,为幽州节度使。


925년 3월병오일형남절도사로하여 중서성의 명령을 받게했는데 발해왕 고계흥에게 검교태사겸
상서령에 붙였는데 남평왕에

봉하였다.유주절도행군사마 이존현을 검교태보에 붙여 유주절도사로 삼았다.



同光二年五月丙辰,渤海国王大撰遣使贡方物。以澶州刺史李审益 为幽州行军司马、蕃汉内外都知兵马使
925년5월병진일,발해국왕 대찬이사신을 보내어 물건을 보내다.

단주자사 이심익으로하여 번한내외도지명마사. 유주행군사마로하다.  

同光三年十一月 丁未,高丽国遣使贡方物
925년 11월 정미일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다.

天成元年十一月戊午,以沧州留后王景戡为邢州节度使。青州奏,得登州状申,契丹先攻逼渤海国,

安巴坚身死,虽已抽退,尚留兵马在渤海扶余城,今渤海王弟领兵马攻围扶余城内契丹次


926년11월 무오일 청주유후왕경심을 형주절도사로 삼았다. 청주진,등주의 상황을 보고받았는데, 거란이 발해국의 국경을

공격하였다.안파견이 죽자 퇴각하였다.

天成二年 二月壬午朔,新罗遣使朝贡
927년 2월 임신삭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다.

天成四年 八月己未,高丽王 王建遣使贡方物。
928년 8월 기미일 고려왕 왕건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다.

長興二年 三月辛酉,诏渤海国人皇王托云宜赐姓东丹,名慕华,仍授检校太保、安东都护,

充怀华军节度、瑞镇等州观察等使
931년 3월신유일 발해국사람 황왕탁을 불러 전하여 사성하길 동단으로하고 이름을 모화로 하였다.

수검교태보,안동도호 충화화굼절도,서진등주관찰사로하였다.  

長興三年 三月甲申,高丽国遣使朝贡。
932년 3월갑신일 고려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六月壬子朔,甲寅,以权知 高丽国事王建为检校太保,封高丽国王。
유월임자삭 갑인일 고려국사왕건을 검교태보로하여 고려국왕에 봉하다.  

秋七月辛巳朔,戊子,正衙命使册高丽国王王建
가을7월 신사삭 무자일에 정오에명하여 고려국왕에 왕건을 책봉하다.
  

後晋 (936-946)
高祖記五-石敬瑭
天福5年(AD940)

二月 丁酉朔,丁巳,青州节度使、东平王王建立来朝。
2월정유삭 정사일 청주절도사 동평왕 왕건이 래조하다.

三月 丁卯朔,癸酉,以青州节度使王建立为昭义军节度使,进封韩王,仍割辽、沁二州为昭义属郡,

建立本辽州人,用成其衣锦之美也。
3월 정묘삭,계유일,청주절도사 왕건을 소의군 절도사로 삼다. 나아가 한왕에 봉하다.요를 나누고
심주2개주를 소의군에

속하게 하다.요주인으로 세우게끔 하여 잘 다스리도록 하다.  

六月 丙午,高丽国王王建加开府 仪同三司、检校太师,食邑一万户。
6월병오일 고려국왕 왕건을 개봉부에 가입시키고 동3사로 하여금 검교태사로 삼고 식읍일만호를
내리다.

少帝纪一
開運2年 (AD 945)
冬十月丁丑,高丽遣使贡方物。庚辰,以前延州节度使王令温为灵州节度使
겨울10월 정축일 교려가 사신으로 하여금 물건을 보내다.전 연주절도사 왕령온으로 하여금
영주절도사로 삼다.


十一月戊戌,以权知高丽国事王武为检校太保、使持节、玄菟州都督,充大义军使,封高丽国王。

11월 무술일 고려국사왕무를 겸교태보로하고 절도사로하며 현토주도독 충대의군사 고려국왕으로
봉하다.


十二月庚辰,命使册高丽国王王武。
12월 경진일 고려국왕에 왕무(정종)를 명하다
.



3.증거자료 <金史> 기록

금사의 주된 내용을 보면 건국초기 부터 같은 조상이라고 거란족일부와 발해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며 세를 규합하여  

大遼(거란)을 공격합니다.

발해를 망가트렸던 요(거란)는 금나라에게 망하게됩니다.
이후에 같은 조상을 가진 고려와는 거의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지 않고 한차례 전투만 합니다.
즉 나중에 이른바 <낙타餓死사건>으로 촉발된 元나라 사신을 죽인 저고여 사건...

고려가 대륙에 있지 않았다면 낙타사건이 발생할 수 없고 元과의 즉각적 전투를 할수 없었을거라는 필자의 견해입니다.


金은 元에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고조선의 일족끼리 물고물리는 동북아 정세 볼만합니다.
아래 元나라 승상 脫脫이 기록한 < 金 史 >의 기록을 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金나라는 宋의 싹을 없애기위해 西安을 정벌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그리고 성공햇습니다.

1041년 南宋의 흠종과 휘종이 金에 잡혀가 있으매 宋이 金에 복수하기위해 고려에 길을 비켜달라고 하는데 金史에 보면 金의

南쪽 邊境이 淮河(화이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증거자료 <元史> 기록

元史 卷 208 外夷傳 第 95편에 보면 고려에 대한 위치가 나타납니다.

그 원문을 보기로 합니다.
원문

高麗本箕子所封之地. 扶餘別種嘗居之其地,
東至新羅南至百濟皆誇大海西北渡遼水接營州 而靺鞨在共北.
其國都曰平讓城卽漢樂浪郡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綠江...


고려는 본래 기자가 봉토를 받은땅이다.부여와 다른 종족으로 그 땅에 살고 있었다.
동쪽에 신라,남쪽에 백제가 있으며 큰 바다(황하)서북을 건너 遼水에 접한 瀛州에 말갈과 북쪽에 같이 있다.그 나라의 수도는

평양성 즉 漢의 낙랑군이 있는데 말갈의 백산(천산)으로 흐르는 물이 있어 압록강이라 하는데...    
益廣倂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而爲一,
其主姓高氏自初入國至唐乾封初以國 ? 垂拱以來
子孫復封其地後稱能自立至五代時代主.
其國遷都松岳者姓王氏名建自建至燾凡二十七王,歷四百餘年.


옛고구려 백제 신라를 하나로 통일한 후 땅이 넓어졌다.
그나라의 주성은 고씨인데 당나라 건봉 초(AD666) 나라를 세워 같이 손을 맞잡은 이래 자손들은
그 땅에서 다시 봉토를 받은

후 五代時代에 主人으로 일어섰다.
그 나라는 왕건으로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고 모두 27왕을 세웠으며 사백년이 넘었다.  

원사에서 고려의 위치를 표시한 글귀를 보면 ,고려의 동쪽에 신라가 있다 했으며 남으로는 백제가 있고 큰바다 (여기서 큰

바다라 함은 황하를 일컫는 것) 서북을 건너 요수에 접한 營州 에 말갈과 같이 있다 하므로 지금 식민역사서에 기록된 바 라면

경상도와 백제의 윗 부분인 충청,경기도 부근에 고려가 있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게된다.  

즉 신라, 백제는 적어도 말기 고려를 중심으로 할때 하북성 영주를 중심으로 남과 동에 위치한 것이되는것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북에 위치 하였으므로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는 지역을포함하는 고려는 고려사에 나타나 있는

만리지국이라는 문구가 틀림이 없을것이다.  

위의 송나라 추리도를 보면 영주는 바로 황하이북 하북성의 갈석산과 같은 지역위치로서 고려는 한반도 고려가 될수가 없는

것 이다. 또한 고려를 오대시대에 흥기하여 주인으로 일어섰다라는 글귀로 보아 대륙의 상당한 지역을 점거하였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5.증거자료 <明史>기록

明史 - 列傳第十一 陳友諒/ 張士誠 /方國珍 / 明玉珍 (홍건적의 난 기록들 )

아래글중 명사원본에 보면
원말 <<<명옥진>>>의 무리가 고려로 도망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

지금같은 한반도의 고려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內陸 사천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그와 그의 아들<명승사>가 배를

타고 반도고려로 간다?  넌센스이지요.  분명히 徒라고 돼있군요. 

진우량 [陳友諒, 1316~1363]
후베이성[湖北省]의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현의 하급관리가 되었다.

서수휘(徐壽輝)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 휘하에 들어갔고, 곧 부장(部將) 예문준(倪文俊)의 서기가 되어 점차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길러나갔다. 1

357년 예문준을 죽이고 그 병력을 모은 다음, 이듬해 양쯔강[揚子江]을 따라 내려가 안후이성[安徽省] 남부에 기반을 굳혔다.
이어 1359년에는 황제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라 부르며 국호를 '대한(大漢)'이라고 하였다.

장저우[江州:江西省 九江]에 도읍하고 한때 장시[江西]·후난[湖南]·후베이[湖北]를 세력 아래 두고 주원장(朱元璋: 明의

태조)과 빈번히 싸웠으나, 1363년 포양호[鄱陽湖]의 결전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장사성 [張士誠, 1321~1367]
본래 태주(泰州:江蘇省 泰縣)의 염전인 백구장(白駒場)에 적을 둔 소금 중개인이었다. 1353년 염장
(鹽場) 관리와 염정(鹽丁)

사이의 분쟁이 일어난 것을 틈타 염정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태주와 고우(高郵)를 점령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성왕(誠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로 정하였다.
한때 원나라 군사에게 패한 적도 있었으나, 1356년 양쯔강[揚子江] 하류 삼각주지대의 중심지인
장쑤성[江蘇省] 쑤저우

[蘇州]를 함락시키고 '오국(吳國)'이라 칭하였다.

한때 세력이 장쑤성에서 저장성[浙江省] 일대에 미쳤으나, 난징[南京]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주원장(朱元璋)과의 오랜 항쟁

끝에 1367년 서달(徐達) 등이 이끄는 명(明)나라 군의 총공격에 대패, 포로가 되자 자살하였다.  

방국진 [方國珍, 1319~1374]
황옌[黃巖: 浙江省黃岩縣] 출생. 원래 소금 행상이었으나, 1348년 해적(海賊)의 난(亂)에 편승, 형제와
더불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켜 운조선(運漕船)을 약탈하였다.

어떤 때는 원나라에 반항하고 어떤 때는 귀순(歸順)하는 등 변덕을 부렸으나, 식량의 해상수송에 종사한 일도 있어 원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얻어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뒤 명나라의 태조에게도 반항과 귀순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1367년 명나라 원정군에게 쫓겨
해상으로 피하였으나, 곧

항복하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도 벼슬을 얻고, 그의 아들도 벼슬에 올랐다.  

명옥진 [明玉珍, 1331~1366]
후베이성 쑤이저우[隨州] 출생. 처음에 서수휘(徐壽輝)의 무장(武將)이 되어 원군(元軍)과 싸웠으며,
충칭[重慶]을 함락시켜

그 곳을 근거로 쓰촨[四川] 지방을 평정하였다.

1360년 서수휘가 부하에게 살해되자, 1362년에 자립하여 ‘촉왕(蜀王)’이라 칭하고 대하(大夏)를 세웠다.

나라를 8도(道)로 나누고, 주제(周制)를 본받아 관제(官制)를 두었으며, 세금을 경감하고 과거를 시행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려고 애썼으나, 재위 5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아들 명승(明昇)이 그 뒤를 이었으나, 부장(部將)들 사이에 분쟁이 그치지 않아 국력이 기울어지다가, 명나라 태조(太祖)가 된

주원장(朱元璋)에게 항복하였다.  

서수휘 [徐壽輝, ?~1360]
별명 정일(貞一). 호 홍건(紅巾). 원래는 면포판매를 업으로 하였으나, 원말에 요승(妖僧)인 팽형옥
(彭瑩玉)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紅巾)을 호(號)로 삼고, 1351년에 후베이성[湖北省]을 함락시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천완(天完), 치평(治平)이라 건원

(建元)하였다.

후난[湖南]·후베이·장시[江西]의각지를 함락시켜 한때는 그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후에 부장(部將)인 진우량(陳友諒)에게

피살되었다.  

<<<玉珍>>>遣萬勝御之。勝,黃陂人,有智勇,玉珍寵愛之,使從己姓,眾呼為明二,後乃複姓

名。勝攻嘉定,半年不下。玉珍帥眾圍之,遣勝以輕兵襲陷成都,虜朗革歹及資妻子。
朗革歹妻自沉於江。以資妻子徇嘉定,

招資降。資引弓射殺妻。俄城破,執資及完者都、朗革歹歸於重慶,館諸治平寺,欲使為己用。三人者執不可,乃斬於市,

以禮葬之,蜀人謂之三忠」。於是諸郡縣相次來附。

- 중략-


豈不賢智矣哉?若必欲崛強一隅,假息頃刻,魚游沸鼎,燕巢危幕,禍害將至,恬不自知。璟恐天兵一臨,凡今為足下謀者,

他日或各自為身計,以取富貴。當此之時,老母弱子,將安所歸?禍福利害,□□然可睹,在足下審之而已。升終不聽。

又明年,興元守將以城降。吳友仁數往攻之,不克。是歲,太祖遣使假道征雲南,升不奉詔。

四年正月命征西將軍湯和帥副將軍廖永忠等以舟師由瞿塘趨重慶,前將軍傅友德帥副將軍顧時等以步騎由秦、

隴趨成都,伐蜀。初,壽言於升曰:「以王保保、李思齊之強,猶莫能與明抗,況吾蜀乎!一旦有警,計安出?」友仁曰:

「不然,吾蜀襟山帶江,非中原比,莫若外交好而內修備。」升以為然,遣莫仁壽以鐵索橫斷瞿塘峽口。

至是又遣壽、友仁、鄒興等益兵為助。北倚羊角山,南倚南城砦,鑿兩岸石壁,引鐵索為飛橋,
用木板置駮以拒敵。和軍至,

不能進。傅友德覘階、文無備,進破之,又破綿州。壽乃留興等守瞿塘,而自與友仁還,會向大亨之師以援漢州。數戰皆大敗,壽、大亨走成都,友仁走保寧。時永忠亦破瞿塘關。飛橋鐵索皆燒斷,興中矢死,夏兵皆潰。

遂下夔州,師次銅羅峽。升大懼,右丞劉仁勸奔成都。升母彭泣曰:「成都可到,亦僅延旦夕命。

大軍所過,勢如破竹,不如早降以活民命。」於是遣使□表乞降。升面縛銜璧輿櫬,

與母彭及官屬降於軍門。和受璧,永忠解縛,承旨撫慰,下令諸將不得有所侵擾。而壽、

大亨亦以成都降於友德。升等悉送京師,禮臣奏言:「皇帝御奉天殿,明升等俯伏待罪午門外,

有司宣制赦,如孟昶降宋故事。」帝曰:「升幼弱,事由臣下,與孟昶異,

宜免其伏地上表待罪之儀。」是日授升爵歸義侯,賜第京師。

冬十月,和等悉定川、蜀諸郡縣,執友仁於保寧,遂班師。壽、大亨、仁壽皆鑿舟自沉死。

丁世貞者,文州守將也,友德攻文州,據險力戰,汪興祖死焉。文州破,遁去。
已復以兵破文州,殺硃顯忠,友德擊走之。夏亡,復集余眾圍秦州五十日。兵敗,夜宿梓潼廟,

為其下所殺。友仁至京師,帝以其寇漢中,首造兵端,令明氏失國,僇於市。戍他將校於徐州。

明年 徙 升 於高麗。(주)

贊曰:友諒、士誠起刀筆負販,因亂僭竊,恃其富強,而卒皆敗於其所恃。跡其始
終成敗之故,太祖料之審矣。國珍首亂,反覆無信,然竟獲良死,玉珍乘勢,割據一隅,
僭號二世,皆不可謂非幸也。國珍又名谷珍,蓋降後避明諱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