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려

(금)우적도와 고려도경에서 開城의 위치추정

설레임의 하루 2009. 3. 17. 03:44

*출처: 다음카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心濟

 

 

 

 

 

 

 

(금)우적도와 고려도경에서 開城의 위치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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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우적도의 석판본인데 요와 요수가 멀리 떨어져있다 - 지리학상 장난으로 보인다.

(모든 지명과 같은 강은 지척이다)

 

봉 경 封境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글안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 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 부터 육로(陸路) 가다가 요수(遼水)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 7 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는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 내주()빈주(濱州)체주()와 서로 바라다 보인다.

원풍(元豊) 이후부터 매양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려면, 언제나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출항(出航)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북으로 간다.

배 운행은 모두 하지(夏至)뒤에 남풍(南風)의 바람 편을 이용하는데, 5일이 못되어 곧 해안(海岸)에 닿는다.

 

옛적에는 봉경(封境)이 동서는 2천여 리, 남북은 1 5백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글안(契丹)과 연속되었다.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4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거란에 소속되었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케 민중이 이미 멸망되었고, () 나라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

(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황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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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수는 현재의 汾河 (산서 平遙 포함) 로 비정된다.(2009.1월 수정)

 

() 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이 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간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로써 전고(前古)에는 일찌기 이 강을 믿어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이래서 고려가 물러들어가 압록강의 동쪽을 확보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구려시대 이세민이 요택(요녕성)을 넘어왔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

당시 그 지역은 황하변 하남성 營澤 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