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공정'과 영유권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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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창 용 (칼럼니스트/중부일보 <조창용칼럼>집필) |
지난 번 중국 창춘(長春)에서 열린 겨울아시안게임은 온통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의 중국식 표기)’으로 도배했다. 주최 측은 각국 기자들에게 ‘중국 국가자연유산-창바이산’이란 CD와 책자를 배포하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대회 주제가도 백두산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는 ‘아시아의 별(亞州之星)’이다. 성화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백두산 천지에서 채화됐다. 지난 1990년 베이징 여름아시안게임 때 티베트에서 성화를 채화해 ‘티베트는 중국 땅’ 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던 것과 같은 속셈이다. 개막식 공연도 백두산이 주요 테마였다. 백두산 일대의 사람, 자연과 문화를 한데 녹여 표현했다’는 게 연출자의 설명이다. 스포츠 제전이 ‘백두산은 중국 산’이라는 ‘백두산 공정’의 마무리 장으로 활용된 느낌이다.
“'백두산 공정'은 통일대비 영유권 노림수” 최근 들어 백두산 영유권문제는 한·중 간 민감한 외교의제로 부각됐다. 이는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조금 더 부각됐을 따름이지 실상은 중국이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의도된 결과물이다. 이른바 ‘백두산 공정’으로 일컫는 프로젝트다. 백두산 북부일대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지역개발을 명분으로 시작된 국가사업이다. 그러나 숨겨진 의도는 백두산 영유권 확보에 있다. 그런 만큼 ‘백두산 공정’은 21세기 중국의 주요 의제 중의 하나다. 동북공정이 역사적 연원 확보에 있었다면, ‘백두산 공정’은 영토상 권리 확보를 확고히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고구려·발해 등 우리역사까지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킨 왜곡 역사 기반위에 백두산을 ‘창바이산’으로 둔갑시키는 일이다. 이 같은 시도는 백두산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간도지역 영유권을 확고히 하겠다는 게 노림수다. 중국이 백두산에 대해 집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역사적 근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백두산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나 「고려사」등 사서나 「대동여지도」등 고지도에 무수히 발견된다. 반면 ‘창바이산’에 대한 기록은 후대 역사서인 「요사(遼史)」에 보일 뿐, 중국 고대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712년에 세운 ‘백두산정계비’ 해석만 해도 그렇다. 이 비석 비문 중 ‘동쪽 경계는 토문으로 한다. (東爲土門)’는 지난 300년 간 조선과 청나라 간 국경 획정에 있어 논란의 중심이었다. ‘토문’을 두고 우리 측은 ‘송화강 상류’로 해석한 반면, 중국 측은 ‘두만강’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그 동안 실사와 사료발굴을 통해 우리 측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는 곧 간도지역이 우리 땅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된다. 북한과 중국이 1962년에 맺은 「조·중국경조약」도 문제다. 이 조약으로 국경은 두만강에서 압록강으로 확정되면서 백두산이 천지를 기준으로 북한이 55%, 중국이 45% 소유로 분할되었다. 이 조약을 계기로 간도가 중국 관할로 넘어갔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 조약이 국제법상 유효성 여부다. 이 조약은 현재까지 유엔에 등록하지 않고 있어 제3국에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승계여부도 문제다. 1978년 ‘빈 협약’에 의해 무효나 종료 사유가 있으면 조약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이 조약은 한국의 동의 없이 체결된 불평등조약인 만큼 통일한국이 승계를 거부할 수 있다. 따라서 이래저래 조약으로서 실효(失效)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학술연구와 여론조성으로 심각성 일깨워야” 그런 이유로 중국은 통일한국 이후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1909년 체결된 「간도협약」 역시 무효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간도와 백두산 영유권 문제는 한국과의 갈등 요인임은 물론 난처한 입장으로 내모는 현안문제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중국은 ‘백두산 공정’에 박차를 가하고, 백두산 일대의 세계 유산 등재까지 추진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남북한은 꿀 먹은 벙어리나 마찬가지다. 북한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두산 정기를 받아 태어난 지도자로 선전하면서도 정작 중국의 백두산 침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우리 역시 정부의 반대로 국회에 제출된 ‘백두산영유권 확인결의안’과 ‘간도협약 원천무효에 관한 결의안’이 상정조차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어려운 환경이겠지만 학계의 학술적인 뒷받침과 언론의 여론조성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환기시키는 일밖에 없다.(인천신문 2007년 3월 12일 <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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