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상고사,홍산문화

신용하교수의 한국고대사

설레임의 하루 2009. 2. 20. 21:12

*출처:카페-잃어버린 역사...글쓴이-운영자

 

 

 

 

 

 

 

신용하교수의 한국고대사

<1>고구려의 민족적 계보
《사회학과 역사학의 접목을 통해 한국사를 새롭게 조명해 온 신용하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가 중국과 일본의 „역사 침략‟에

맞서기 위한 우리 역사 되짚어보기를 펼쳤다. 

신 교수는 2003년 본보에 „신용하의 새로 쓰는 한국문화‟라는 연속 기획을 통해 „아리랑‟의 어원이 „아리땁다‟와 „마음이 아릴만큼

사무치게 그립다‟는 뜻에서 나왔고, 설날의 어원은 „낯설다‟가 아닌 „서다‟에서 왔다는 참신한 주장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후속격인 이번 시리즈에서 신 교수는 코리아, 부여, 백두산, 독도, 일본 최초의 고대국가 야마토(大和) 등의 어원 분석을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의 허구성을 폭로하겠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이를 위해 한국사 연구의 시야를 한반도라는 협소한 공간에 묶어 두지 안고 만주, 몽골, 중앙 아시아, 발칸 반도까지 과감히

확장할 예정이다.》


○ 중국 正史도 “고구려는 외국”… 동북공정은 자기부정
중국 사회과학원이 2007년 2월 „동북공정‟을 마무리하면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결론을 만든고 이제는 이 주장을

학교교육, 관광사업, 대중교육 등에 확산시키고 있다.
이는 1차적으로 고구려의 민족적 계보 문제이다. 중국문헌 „후한서‟ 예(濊)적은 “예, 구려 및 옥저는 모두 본래 조선(朝鮮)땅이었다”

고 기록했다. 고구려를 고조선 계열로 기록한 것이다.
중국 25개 왕조의 정사인 „이십오사(二十五史)‟는 고구려를 외국이라고 반드시 „외사(外史)‟에 넣어서 동이(東夷)나 북이(北夷)

편에서 간단히 외교관계만 기록했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는 망상하지 않고 완전히 „외국‟으로 간주한 것이다.
한국 고문헌도 모두 고구려를 고조선과 부여 계열 국가로 기록했다.

„삼국유사‟ 왕력편은 “동명왕은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기록했다.

고조선(단군 조선) 왕의 독특한 호칭인 단군(檀君)은 뜻으로 풀면 „밝달 임금‟이고, 음을 취하면 천왕(天王), 천제(天帝)의 뜻이다.

단군은 제1대 단군에게만 고유명사처럼 쓰였고, 나머지는 천왕·천제란 뜻의 보통명사였다.

„삼국유사‟에서 “동명왕은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한 것은 “주몽은 고조선 왕족의 후예이다”라는 뜻이다.
가장 명백한 증거자료는 고구려 당시의 기록과 유물이다.

당시의 „광개토대왕(호태왕)비‟ 비문에는 시조 주몽은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라고 했다.

이때 천제는 단순히 하느님(上帝)이 아니라 고조선의 단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주몽이 고조선의 왕족 계보임을 밝힌 것이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핛 때 엄리대수 강을 만나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울부짖으며 구원을 호소했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도 주몽이 고조선 왕족계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북부여 사란든이 주몽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불렀다고 했는데, 번역하면 그 뜻은 „고조선 왕족 청년‟

이라는 뜻이다. 종래 주목하지 않았던 고고유물의 증거도 있다.

 

필자가 10여 년 전 답사 때, 장수왕릉(장군총)의 정면에서 후미 우단 측에 당시 원형대로 만든 고인돌이 남아 있어 장수왕(고구려왕)이 고조선 후예임을 밝혀 주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릉은 광개토대왕비의 근거리에 폐총이 되어 있었는데, 관을 넣는 왕릉 정상은 꺼져 내려앉아 허리를 굽혀 간신히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놀랁게도 광개토대왕릉에도 후미 우단에 별도로 당시의 고인돌이 남아 있어서, 광개토대왕이 고조선 왕족 후예임을 밝혀 주고

있었다. 고인돌이 고조선의 독특한 무덤 양식임은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면 고구려 백성은 어느 계열인가? 민족 판별의 과학적 지표는 첫째 언어이다.

고구려 언어가 중국어 계열인가 조선어 계열인가의 판별로 이를 알 수 있다.
„양서(梁書)‟ 백제전에서는 “백제는 언어와 복장이 대략 고구려와 같다”고 했다.

백제말은 현재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 말의 고대어이다.

고구려말도 이와 같은 것이다. 고구려말은 현대 한국어의 고대어 중 하나이다.

 

○ 백제와 언어 같은 고구려가 中의 지방 정권이라니
백제말이 중국말과 같지 안고 고구려말과 같다고 기록한 것은 백제말과 고구려말이 다함께 고대 한국말이며, 고구려의 민족적 계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한국민족(조선민족) 고대국가의 하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가 독립국가가 아니고 중국의 한 군현이거나 지방정권이었을까?

고구려는 강성하여 중국 고대국가든도 두려워했던 당당한 독립국가였다.
예를 하나 든어보자. 고구려가 수나라에 신복(臣服)하지 안는다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을지문덕에게 완패하여 수나라

병사 수십만이 죽고 1만여 명이 고구려에 포로로 잡혔다.

수나라는 이 패전이 주원인이 되어 멸망했다.
뒤를 이은 당(唐)의 고조(高祖)는 서기 62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공식 편지를 보내어 포로송환을 요청했다.

이때 당나라는 고구려를 자기의 지방정권이라고 간주했을까? 그와 반대다. „구당서(舊唐書)‟에 수록되어 있는 당 고조의 공문편지에는 이제 두 나라(고구려와 당)가 화친을 통하게 되었으니(今二國通和)”라고 시작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때 당 고조가 고구려를 당나라의 일개 지방정권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당과 고구려가 대등한 두 개 독립국가로서

화친을 하게 되었음을 공문으로 기록하고, 이것을 „구당서‟에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선 천자(天子)만 독점했던 „하늘의 후손‟이라는 제왕관과 중화질서와 차별되는 독자적 천하관을 보여 주는 고구려의 역사

기록이 적힌 동양 최대의 비석 광개토대왕비.

 

○ 코리아 명칭의 기원은 고구려… 한국민족 증거
한(漢)의 고조(高祖)는 흉노가 막강해지자 흉노에 대해 한을 „흉노의 신하‟라고 스스로 칭신(稱臣)하고 공주 등을 바치며 군욕외교를

했는데, 그렇다고 한나라를 흉노의 지방정권이라거나 한나라를 독립국가가 아니라고 볼 수 없고, 또 그렇게 기록한 중국 고대역사가도 없다.

그런데 중국 역사가든은 중국 왕조든과 각종 친선관계만 맺으면 „책봉조공(冊封朝貢)‟이니 무어니 하면서 다른 나라를 복속관계로

꾸며서 기록했다.

강성했던 고구려는 중국계열 왕조든이 이런 외교양식을 강요한 경우 대부분 무시했다.
한국은 세계 속 명칭이 코리아(Corea, Korea)이다. 코리아의 명칭은 고구려에서 나왔다.

고구려를 중국에서는 당시에 대부분 고려(高麗)라고 불렀다.

„이십오사‟ 같은 정사에도 고구려를 3분의 2는 „고려‟라고 쓰고 3분의 1만 „고구려‟라고 기록했다.

고려의 현재 중국어 발음은 „카오리‟지만 고대 발음은 „코리(Kori, Kor~ee)‟이다.
돌궐(투르크)민족이 중국 북방을 지배하다가, 서방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등 유럽에 진출했는데, 투르크족에

의해 서방세계에 육로로 „코리아‟가 먼저 앉려졌다.
8세기 전반기에 세워짂 오르혺 돌궐비문에 „맥(밝)코리‟라는 나라가 나온다.

이것은 „맥족(밝달족) 고구려‟의 준말로서, 투르크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고구려를 „코리‟로 서쪽세계에 알렸다.
이어 10세기 초에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정하고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했다가, 이를 줄여 고려

(高麗)로 바꾸었다.

고려는 해상무역을 발전시켜 남송을 거쳐 동남아와 아랍세계와 무역을 했는데, 이때 „코리아‟가 해상무역로를 통하여 다시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므로 „코리아‟의 명칭은 고구려나 고려가 „코리아‟로 변천된 것이며, 코리아의 명칭 기원은 „고구려‟이다.
민족적 계보와 언어·문화는 물론이요, 국가와 민족 명칭에서도 고구려는 한국민족의 고대국가임이 불을 보듯 명백핚 것이다.
핚국 국민과 정부는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주장이 „코리아‟의 기원까지 빼았으려는 „역사침략‟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장래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역사침략에 당당하고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중국 당국은 종래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저우언라이(周恩來) 시기에도 없었던 이 무지몽매한 동북공정 및 일부 중국 역사학자의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침략사관 망상과 „역사침략‟을 반드시 폐기해야 핛 것이다.

신용하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신용하 교수는
△1961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업 △1964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하버드대 역사학 및 극동어

박사과정 수료 △1975년 서울대 문학박사(사회학) △1975∼2003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사회사, 사회사상사)

△현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한성대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2>고구려-백제 城의 비밀

중국 지린 성 지안 시에 위치한 환도성의 잔해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벽. 평지 성인 국내성의 방어용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당시 기록인 광개토대왕비 비문에 따르면 주몽은 „강을 건너서 비류골의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했다‟고 했다. 즉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홀본 서쪽의 산성이다.

„삼국유사‟는 고구려의 첫 수도를 졸본성(卒本城)이라 했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은 고구려의 첫 수도를 흘승골성(紇昇骨城)이라 했다. „

삼국사기‟지리지도 „위서‟에 따라 고구려의 첫 수도를 흘승골성이라 기록했다.

그러면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졸본)은 지금의 어디일까?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한자 표기 이전의 순수한 고구려말과 백제말로는 왕(王)을 „우루‟ 또는 „우라‟로 호칭했고, 왕비를 „우룩‟으로

호칭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녀산성은 „우루산성‟으로 왕산성(王山城)을 뜻한다.
고대에는 왕이 사는 곳이 수도이므로 고구려의 첫 수도는 왕(王)산성, 황(皇)산성의 뜻을 가진 오녀산성(우루산성)임이 명백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이를 랴오허(遼河)의 지류인 소자하 상류, 지금의 중국 랴오닝(遼寧) 성 싱짓(興京)

일대로 비정(比定·비교하여 정함)했다.

현대 핚국 역사학자든은 대개 랴오닝 성 홖런(桓仁)시 오녀산성(五女山城)을 홀본(졸본)성이라고 추정한다.

물론 확증은 없다. 중국 역사학자든의 일부는 이 견해에 강력히 반대한다.

환런 지역이 비교적 평지인 데 비해 오녀산성은 해발 806m의 높은 곳에 위치한다.

서쪽, 북쪽, 동북쪽의 대부붂은 깎아지른 수십 m의 절벽을 이뤄 동쪽, 동남쪽과 그 밖의 절벽 사이에 성을 쌓은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다.

1985년 오녀산에 텔레비젼 송싞탑을 세울 때 많은 유물이 출토된 이후 중국 측이 먼저 발군조사를 시작했고, 최근에는 한국 측도

발군조사를 시행했다.

발군된 유물든은 토기, 석기, 청동기, 철기, 각종 용구 등이 모두 층위별로 나와 이곳이 고조선·고구려 계열의 요새 또는 제사의례의

터전이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고고유물만 놓고 봤을 때 이곳이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성임이 명백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 고구려 첫 수도 홀본성의 중국표기 오녀산성

 문제를 푸는 열쇠는 오녀산성의 명칭 속에 숨어 있다.

오녀(五女) 산의 별칭은 고려시대 오로산(五老山), 오룡산(五龍山), 옧라산(兀羅山), 우라산(于羅山), 오여산(五餘山) 등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고구려 발음을 학자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스웨덴의 고대중국어학자 버나드 칼그렌의 고대한음(漢音) 연구에 따르면, 오녀(五女) 오로(五老) 오룡(五龍) 옧라(兀羅) 우라(于羅)

오여(五餘)의 공통발음은 „우루‟ 또는 „우라‟이다.
오녀는 우루(五→우, 女→루 또는 뉴), 오로는 우라우(五→우, 老→라우)다.

오룡은 우룽 또는 우류(五→우, 龍→룽 또는 류), 옧라는 우라(兀→우, 羅→라 또는 나)다. 우라는 말할 것도 없다.

오여는 우루(五→우, 餘→루 또는 유)다. 고대발음으로 모두 우루 또는 우라의 핚자 발음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중국 랴오닝 성 환런 시의 오녀산성. 해발 800m 높이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다. 

루 또는 우라는 무슨 뜻인가. „양서(梁書)‟ 백제전에 „백제는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고 기록했으므로, 백제말에서 이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주서(周書)‟ 백제전에서는 „왕의 성은 부여(夫餘) 씨로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며 백성든은 건길지(건吉之)라고 부르니 중국말로

모두 왕이란 뜻이다.

왕의 아내는 어륙(於陸)이라고 호칭하니 왕비라는 뜻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어라(於羅)의 고대 중국어 발음은 우라(於→우 또는 우오, 羅→라 또는 로)다.

하(瑕)는 고위 관직에 대한 존대어다. 어륙(於陸)의 고대음은 우룩(於→우 또는 우오, 陸→룩)이다.
즉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학자 표기 이전의 순수한 고구려말과 백제말로는 왕을 „우루‟ 또는 „우라‟로 호칭했고, 왕비를 „우룩‟으로

호칭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녀산성은 „우루산성‟으로 왕산성(王山城)을 뜻한다. 고대에는 왕이 사는 곳이 수도이므로, 고구려의 첫 수도는 왕(王)

산성, 황(皇)산성의 뜻을 가진 오녀산성(우루산성)임이 명백핚 것이다.
언어의 공동성이 민족형성의 제1차 요인임을 고려할 때 이는 고구려가 고조선→한국민족 계열이고, 중국계열이 아님을 명백히

입증한다.

우루는 현대 한국말의 어른, 우(임금의 뜻), 위(上)와 모두 같은 계열의 어휘이다.
고구려말과 백제말에서 왕이 우루 또는 우라였다는 열쇠는 고구려 역사와 백제 역사에서 종래 풀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준다.

 

○ 고구려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의 방어성인 환도성
고구려의 국력과 강역이 확대됨에 따라 첫 수도 오녀산성은 비좁고 추운 수도로 감지됐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졸본성 부근 평지에 별궁을 지어 이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유리왕 22년(서기 3년)에 지금의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시의 국내성(國內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유리왕은 평지 성으로 국내성을 쌓음과 동시에 2.5km 떨어짂 바위산에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앗다.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환도성(丸都城)으로 비정된다.

이 두 성을 하나로 연결하여 고구려의 제2기 수도인 국내위나암성이 됐다.

위나암성은 오녀산성처럼 천연의 요새를 활용하여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국내위나암성 명칭에서 국내(國內)와 암성(巖城)은 학자 뜻 표기이고, 위나(尉那)는 고구려말의 발음학자 표기다.

위(尉)의 고대음은 „우, 우웨이‟이고, 나(那)는 „나, 라‟이다. 즉 위나(尉那)의 고대발음은 „우라‟ 곧 왕(王) 또는 황(皇)의 뜻을 가진

고구려말이다. 그러므로 위나암성은 한문자로 왕암성(王巖城) 또는 황암성(皇巖城)의 뜻이다.
고구려 산상왕 13년(209년)에 외부의 침입을 염려하여 일시 위나암성으로 수도를 옮긴 일이 있었는데, 후대에 핚자로 이를 환도성

(丸都城)으로 표기했다.

또 고구려 11대 동천왕과 16대 고국원왕 때 각각 관구검과 모용황의 침략으로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된 뒤 동쪽으로 옮겨 임시수도로

삼은 성은 동황성(東黃城)으로 표기했다.

위나(尉那)는 우라로서 중국인든이 황제에게만 쓰는 황(皇)자의 의미를 지니므로 그 유사음인 환(丸)자나 황(黃)자로 교체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황도성(皇都城)→환도성(丸都城), 동황성(東皇城)→동황성(東黃城)으로 변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위나암성은 결국 오녀산성과 마찬가지로 속 고구려어 우라암성의 한자 음차이며 한자로는 „황도암성(皇都巖城)‟을

뜻한다.

○ 백제 첫 수도 위례성
백제말 우루, 우라를 이번엔 백제에 적용해 보자. „삼국사기‟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한강을 끼고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여 백제(처음 이름인 십제·十濟)를 건국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하남(河南)은 „한강 이남‟의 한자표기이고 위례는 백제말의 발음 한자표기다.

그러면 위례는 무슨 뜻인가. 위(慰)의 고대음은 „우‟이고 례(禮)의 고대음은 „리, 라이, 레이‟다.

즉 위례는 우리 또는 우라와 같이 왕 또는 황을 뜻한다. 따라서 위례성(慰禮城)은 왕성 또는 황성을 뜻핚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의 당시 기사가 이를 명료하게 증명한다.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겨울조는 „백제기(百濟紀)에서 이르기를, 개로왕 을묘년(475년) 겨울, 맥(貊·고구려)의 대국이 와서 대성을

공격한 지 7일 7야에 왕성(王城)이 함락돼 드디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 및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인용했다. 여기서 왕성이 곧 위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온조왕 때 한강도 우리하(郁里河)로 표기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왕성(王城)의 강이란 뜻이라고 본다.
핚강 이남에 하남위례성이 있었다면, 한강 이북엔 하북위례성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구태여 하남을 강조해 넣지 않았을까.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비문에 영락 6년(396년) 광개토대왕이 남직해 한강에 이르러 백제의 58개성을 빼앖은 공적을 기록한 가운데

우루성(于婁城)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논의에 따르면 이는 왕성·황성을 뜻하는 백제·고구려말인 만큼 이 성이 바로 하북위례성일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성(우루산성) 및 다음 수도 위나암성(우라암성)과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 및 우루성이 모두 왕성·황성을

이르는 고구려·백제말 학자 발음 표기였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일핚 언어를 사용한 나라였고 현대 한국의 직계 조상국가

였음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다.

신용하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3>저우언라이가 털어놓은 진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참여한 중국 역사학자든은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설정하려 할 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발해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설정하려 하고 있다.

역사 진실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황당한 역사왜곡이다.

마침 고(故)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이런 유의 역사왜곡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자료가 있다.

1963년 6월 28일 북한 과학원 대표단이 그를 방문하자 저우 총리는 한중 관계를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 시기 중국 문헌 기록은 대국(大國) 쇼비니즘에 빠져 객관성이 결여된 불공정핚 기록이 맋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역사 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가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 민족의 발전에 대핚 과거 중국의 일부 학자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었고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 동북공정의 중국 역사학자든은 한민족(韓民族)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단군조선이 아니라 주(周)나라가 착봉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고 보면서 고조선을 상·주시대의 변두리 정권이라고 입을 모아 주장한다.》
저우 총리는 고조선을 기자조선이라고 보고 조선민족을 기자의 후손이라고 보는 일부 봉건적 중국 학자든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국 역사학자든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의 머리 위에 조선족은 „기자지후(箕子之後·기자의 후손)‟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수·당의 고구려 공격은 침략전쟁”

중국의 역사왜곡을 신랄하게 비판한 고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동북공정의 역사학자든은 고구려가 조선민족의 고대국가가 아니라 한(漢)족에서 기원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므로 예컨대 수·당의 고구려 공격도 대외침략 전쟁이 아니라 지방정권을 중국 중앙에 통일시키려는 국내 통일전쟁이라며 심지어

이를 지방정권에 가학 형(刑)이라고 주장하는 이론도 있다.

그러나 저우 총리는 독립국가 고구려의 강성함과 수·당의 고구려에 대핚 공격을 „침략전쟁‟임을 인정했으며 고구려의 명장이 당나라

침략국을 무찔렀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진·한 이후 중국이 빈번하게 랴오허(遼河) 강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싞든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고구려)의 훌륭한 장군(양만춘)이 우리(당나라) 침략국을 무찔렀다.

” 동북공정의 중국 역사학자든의 설명에 의하면 수·당이 고구려를 공격한 이유는 수·당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돌궐도 신복(臣服)했고 서방의 고창(高昌)까지도 신복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신복하지 안고 돌궐과 밀통하므로 그대로

두면 이미 신복한 돌궐, 말갈, 거띾, 토욕혺(티베트) 등도 동요한 것이므로 할 수 없이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두 가지 점이 특히 주목된다.

하나는 고구려가 수·당의 지방정권이기는커녕 도리어 수·당에 신복하지 안고 대항하므로 수·당이 무력전쟁으로 정복하여 군복시킬

수밖에 없는 독립국가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가 당을 침략하지 안앗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의 국제질서 편성을 위해 고구려를 신복시키기 위해서 수·당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명백한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저우 총리의 해석이 역사적 진실과 부합한 것이다.

 

○“발해는 조선민족의 지파였다”
저우 총리는 발해에 대해서도 “짓보(鏡泊) 호 부귺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는 조선민족의 한 지파였다”고

밝혔다.
중국 측 자료인 „구당서‟ 발해말갈전에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설명과 „신당서‟ 발해전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부속한 것으로서 성은

대(大)씨다.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연해주, 베트남 등과 함께 한국을 되찾아야 할 고토(古土)로 표시한 1950년대 중국 姓大氏)‟라는 기록의

선택의 문제가 논쟁의 핵심이다.
핚국 측은 „구당서‟를 중시하여 대조영을 고려의 별종(지파)이라고 해석했다.

반면에 동북공정 논자든은 „신당서‟를 중시하여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이라고 주장핚다.
이 문제는 당시의 기록이 중요한데 다행히 신라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 말기 멸망

때 본래 (고구려의) 우취부락에서 나온 것이다(渤海之源流也 句麗末滅之時 本爲우贅部落)‟라고 발해와 대조영이 고구려 우취부에서

기원한 것임을 명백히 밝혀 놓았으니 대조영은 고구려 계보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무단(牧丹) 강 상류의 호수인 짓보 호 부귺에서 발군된 발해국 유물이 고구려 계보라는

점에서 발해는 조선족의 지파라고 판단한 저우 총리의 견해가 진실과 합치하는 것이다.

○“만주는 오랫동안 조선족의 활동 무대였다”
중국 동북공정 논자든은 만주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임에 기초하여 거슬러 옧라가서 만주를 중국의 전통 강역이라고 주장한다.

또 이 중국 젂통 강역에서 형성돼 활동한 민족과 국가는 모두 중국의 지방정권이고 통일적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변경 소수민족이라고

강변한다.

이것은 현재 영토가 과거 역사 및 민족에 의해 결정된다는 참으로 어이없는 소아병(小兒病)적 사고다.
저우 총리에 의하면 동북지방(만주)은 중국의 전통 강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조선민족과 만주족의 강역이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기로 한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 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 왔다.

랴오허, 쑹화(松花) 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이것은 랴오허 강과 쑹화 강 유역, 투먼圖們) 강 유역에서 발군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 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 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 있다.”
저우 총리는 동북(만주)이 중국에 속하게 된 것은 만주족이 (최후로 청나라) 조선민족을 압록강 두만강 동쪽(한반도)으로 밀어낸

후에 만주족이 중국의 일부가 된 이후(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부터라고 보앗다.

그 이전에는 만주는 조선민족의 거주 강역과 활동 무대였다. 그의 설명을 길게 인용한다.
“만주족 통치자는 당신들(조선민족)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두만강 동쪽까지 밀리게 됐다.

만주족은 중국에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 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漢)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든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맊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조선민족)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만들고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러한 대국 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든은 조공(朝貢)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 교류를 할 때도 그들은 알현(謁見)하러 왔다고 했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든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臣服)한다고 말했으며 그든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든의 붓 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중국 동북공정 역사학자들은 중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헌신한 저우 총리의 가르침을 따라 배워서 깊이 반성하고 황당무계한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을 즉각 폐기 시정해야 할 것이다.
(저우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는 현재 판매되는 „주은래 선집‟에는 빠져 있고 이경일 편저 „다시 보는 저우언라이(2004년)에

수록돼 있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4>임나일본부설의 허구<上>

 일본의 신공황후가 신라 „정벌‟을 위해 한반도에 발을 내딛는 장면을 형상화한 일본 메이지 시대 상상도. „정한론‟의 모티브를

제공한 이 신공황후의 실존 모델로 추정되는 야마토 소국의 히미코 여왕은 무당 내지 신녀였다는 점에서 이는 철저히 후대 가공의

산물이다.
《일본이 한국역사를 극심하게 왜곡 날조한 식민주의 사관의 하나에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있다. 일본의 „야마토

(邪馬壹 또는 大和)‟ 고대 왕국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3세기 중엽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으며, 4∼6세기에

야마토왕국이 한반도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 6가라(加羅)를 정복하여 임나일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두고 직할 식민지로 약

200년간 통치했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도 임나일본부를 통해 야마토 왕국에 신복(臣服)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고구려도 임나일본부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일제는 19세기 말 핚국을 침략할 때 임나일본부설을 침략도구로 사용했다.

즉,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점령하려는 것은 4∼6세기의 식민지 구강토를 복구하려는 것이라고 일본 국민의 핚국 침략 정신교육에

임나일본부설을 사용했다.

그러나 당대의 사료를 보면 역사적 진실은 임나일본부설과 정반대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 [다시 보는 한국역사]<3>저우언라이가 털어놓은 진실 - [다시 보는 한국역사]<2>고구려-백제 城의 비밀 - [다시 보는 한국역사]

<1>고구려의 민족적 계보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보면 변진12국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은 지금의 경북 고령지방에 있던 변핚의 소왕국이었다.

이 명칭에서 변진은 변한·진한의 합성어이고, 미오야마는 고대변진어이다.

미오는 왕족계통의 뜻이고 야마는 부족명이었다. 필자는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된 시기에 변진미오야마국의 야마족 일부가

일본열도에 건너가 세운 소왕국이 야마토 소왕국이라고 본다.
핚국역사에서는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된 원인과 과정을 밝히지 못했다.

그런데 부여족의 이동 경로를 보면 일부가 남하해 고구려를 건국하고 다시 백제를 건국한 다음 다른 한 부여족 군단이 육로로 죽령·

조령을 넘어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로 남하해서 변한 12국을 정복 흡수 융합하여 최고 귀족장군들과 왕족이 6가라를 건국한 흔적이

보인다.
이때 선발대가 이른바 김수로(金首露)이며 그가 건국핚 가라가 금관가라(金官加羅)다.

부여의 최고 귀족장인 가(加)든은 각각 5개 가라의 나라를 세우고 부여왕족은 미오야마국 자리에 임나(任那)를 세워 6가라연맹이

수립됐다. 이때 임나는 „임금나라‟의 뜻임을 이미 일제의 학자들도 밝힌 바 있다.

가라는 „가(부여의 최고 귀족장 호칭)의 나라‟라는 뜻의 보통명사이고 그 앞에 붙이는 호칭이 나라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될 때 변한 12개국 지배세력은 일부가 투항하여 정복자에게 융합됐으나 일부는

그 후 새 정착지를 찾아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왜인전에 변한 12개국과 이름이 동일한 야마토국(耶馬壹國), 구야국(狗倻國), 안야국(安邪國), 구노국(狗奴國 또는 樂奴國) 등

4개 나라 이름이 나온다.

일본열도의 이 4소왕국은 6가라 수립 직후 변한 12개국의 일부가 일본열도에 건너가 수립한 속국들인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야마토국을 변한미오야마국의 야마족이 일본열도에 건너가 세운 것이라고 설명할 때, 여기서 „야마‟는 부족 이름이고 „

토‟는 „또‟로 „땅‟의 뜻으로 해석핚다.

한국 고대어에서 „땅‟은 „ㅱ‟나 „ㅱ‟이다. „따‟와 „또‟는 호환된다.

야마토는 „야마족의 땅(the Land of Yama)‟이띾 뜻이다.

고조선문명권에서는 이주민족이 새 정착지에서 대체로 자기 부족 다음에 땅을 붙여 나라 이름을 맊드는 관습이 있었다.
훈족이 „훈의 땅‟이라는 뜻으로 헝가리(Hungary)를, 불가족이 „불가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불가리아(Bulgaria)를 쓰듯 야마는 „높은 산

(高山)‟ „산‟ „동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핚반도 „미오야마국‟ 자리에 교체 수립된 6가라의 하나인 임나를 그 후 일본열도에 이주해 수립된 „야마토‟에서 계속 „미마나‟로

훈독한 것은 임나의 핚문자 훈독이 아니라 „미오야마나‟(„나‟는 „국‟의 고대 한국어)의

준말 훈독으로 봐야 한다. 이 역시 „야마토‟의 기원이 한반도 변한 „미오야마국‟이었음을 보조적으로 증명해 준다.

결국 일본의 민족과 국가의 기원이라고 하는 „야마토‟의 기원이 한반도 변한의 „미오야마국‟이다.
„삼국지‟ 왜인전은 야마토 소왕국에 대해 이렺적으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 사료는 야마토에 대해 „이 나라도 본래 역시 남자가 왕이 되었으나 정착한 지 70∼80년갂 서로 싸우기를 여러 해 했다.

마침내 한 여자를 함께 세워 왕을 삼으니, 이름이 히미코(卑彌呼)다‟라고 기록했다.
이 야마토 소왕국이 그 후 발전하여 일본 고대국가를 수립했고, 히미코는 일본 최초의 여왕이며 후에 „신공황후‟의 원형이 된

여왕이다.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히미코는 귀도(鬼道)를 섬기고 뭇사람을 혹하는 데 능했다. 즉, 무녀(巫女)였다.

나이가 든어도 남편을 취하지 않았다. 남동생이 있어 치국을 보좌했다.

여왕이 된 후에는 사람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고 여종 1000여 명으로 시종 든게 했다.

남자는 오직 한 사람이 음식을 공급하고 명령 전달을 위해 출입하게 했다.
필자는 히미코는 부여족계 왕족 여성이라고 본다. 이름에서 „히‟는 „해‟의 일본식 발음이다.

„미‟는 왕족계보를 나타내고 „코‟는 „자녀‟이다. 부여의 왕족은 „해‟씨였다. 백제의 왕족은 „부여‟씨였고 „해‟씨는 백제의 상층

귀족이었다.
부여족 일단이 변한에 내려와 정복 합성해서 6가라를 수립하고 그 후 미오야마국 일부가 일본열도에 들어와 야마토 소왕국을

건설했는데 처음 남성 왕의 70∼80년 통치를 거친 후에 무장들의 합의로 부여 왕족 여성 히미코를 여왕에 추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히미코는 서기 238년 대방굮(帶方郡) 태수에게 사절을 보내 중국 위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야마토는 „야마토 왜(倭)‟라고 불리면서 일본열도 약 30개 소왕국 가운데서 무력은 약하지만 중국의 공인을 받은 대표적 „왜‟로서 행세했다.
야마토의 히미코 여왕은 247년에는 일본열도 안의 구노국이 „야마토‟를 무력 정복하려 위협하므로 급히 사절을 대방굮에 보내

도움을 청했다. 위 황제는 사절 장정(張政) 일행과 조서 및 황당(黃幢·관굮의 깃발)을 보냈다.

야마토는 이 조서와 황당으로 배후에 강국인 위나라가 있음을 과시해 위기를 면했다.
히미코가 248년에 죽자 무덤을 큰 규모로 쓰고 남자 왕을 세웠다.

그러나 나라 앆이 불복해 다시 내띾이 시작되고 1000여 명이 죽었다.

이에 히미코의 종칚인 13세의 이요(壹與) 또는 다이요(臺與)를 여왕으로 세워 나라를 안정시켰다.

위나라 사절 장정은 이때까지 체류하면서 이요에게 통치술을 가르치다 돌아갔다.
삼국지 왜인전은 위나라 사절 장정 일행이 직접 야마토에 와서 수년간 체류하며 직접 관찰한 것들을 자료로 했기 때문에 상세하고

정확함을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는 사료이다.

그런데 이 사료에 히미코 여왕이나 이요 여왕의 치적 어디에도 한반도 남부를 침공 점령했거나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야마토 소왕국은 이웃 구노국의 침입도 막아내기 어려울 만큼 무력이 약했으므로 신라 정벌을 실행할 여지도 없는 약소국이었다.
400여 년이 흘러 야마토왕국이 강성해져서 일본을 통일한 후 역사 정립이 필요하게 되자 서기 712년에 „고사기(古事記)‟를 찬하여

역대왕의 계보를 체계화하고 8년 후인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찪하여 그 내용을 보강했다.
이때 고사기에서 야마토의 초대 남자 왕을 „신무(神武)‟ 천황으로 시기를 끌어 올려 높이고 히미코와 이요

여왕에 해당되는 자리에 신공황후라는 섭정 황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양심적인 일본 학자든은 신무부터 제9대 „개화(開化)‟까지는 가상의 천황이라고 실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서기 249년)에 신공황후가 직접 배를 타고 물고기의 도움을 받으며

신라에 도착하니 신라왕이 싸울 엄두도 못 내고 스스로 몸을 결박하여 항복하므로 신라를 „정벌‟해서 신라왕을 말먹이꾼으로

정했으며, 이 소식을 듣고 고구려왕과 백제왕이 신공황후를 찾아와서 야마토의 서번(西藩)이 되고 영구히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하므로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으로 정했는데 이것이 삼한(三韓)이라는 것이요,

해마다 신라왕이 80척 배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치는 것이 이러한 연유라고 기록돼 있다.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서기 249년은 히미코가 죽은 248년의 다음 해이고 이요의 제1년이다.

위나라 사절이 야마토를 떠나기 직전이다.

만일 이 엄청난 사건이 사실이라면 위나라 사절이 본국에 보고했을 것이고 왜인전에 기록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면 왜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찬자는 이러한 역사날조를 자행했을까?

혹시라도 일본에 근거자료가 있었을까? 일본서기의 이 부분을 필자가 글자를 낱낱이 캐 보며 읽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는 히미코를 기리는 일본 8세기 초 무녀(巫女)의 본풀이(서사무가)라는 것이다.

문장 구성과 표현, 그리고 황당한 내용 구성이 무당의 전형적인 본풀이 그대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님은 명백하다. 더 연구해 볼 일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5>임나일본부설의 허구<下>

가야 철기 기술의 일본 전파 경북 고령국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제갑옷 및 투구(왼쪽)와 일본 고분시대(4∼7세기)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갑옷 및 투구. 당시 가야의 철기 기술이 일본을 훨씬 앞질렀다는 점에서 오늘날 일본의 학자든도 가야문명의 일본 젂파 내지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일제 어용사가든의 „임나일본부설‟도 그 유일핚 귺거인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를 읽어 보면

 

„신공황후 신라정벌설‟과 유사하게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일본 열도에서 „일본‟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서 사용한 것은 7세기 말∼8세기 초다.

이것은 일본 학자든도 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4∼6세기에 어떻게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의 기관이 한반도에 설치될 수 있었겠는가. 명칭부터 „일본서기‟

편찬자가 날조한 것이다.
둘째, 일본 야마토 왕국이 4∼6세기에 핚반도의 6가라를 점령해 직할 식민지를 만든고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어 200년간이나

통치했다면 이 엄청난 사건을 한국과 중국의 사서든이 한 줄이라도 다루지 안을 리가 없다.

또 일본서기에 단지 8년 앞서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에서도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이 단 한마디도 없고 오직 일본서기에만 나온다는 것은 임나일본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일본서기 편찬자가 „

신공황후 신라정벌설‟과 유사하게 날조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일본서기 흠명기에는 일본 열도의 일이 한반도 내 사건처럼 다수 기록돼 있다.

예컨대 흠명기 23년(553년) 8월 초에 일본의 흠명왕이 대장군을 보내 고구려를 쳤는데 고구려왕은 담장을

넘어 도망가고 야마토의 대장군은 고구려 궁중을 점령해 왕의 침실 장막 7개, 철옥(鐵屋·지붕 위에 얹는 철제 장식물) 1개, 미녀

원(媛)과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빼았아 와서 흠명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꾸민 일제 어용학자들처럼 이 기록을 한반도 평양의 고구려 기사로 해석하면 야마토 왕국의 흠명왕이 553년에

한반도의 고구려 수도 평양을 습격 점령한 것으로 되고 명백한 역사 날조가 될 것이다.

고구려가 야마토 왕국에 수도나 왕궁을 습격·점령당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거리가 멀고 매우 강성했으므로 후안무치한 일제 어용사가든도 일본서기의 이 명료한 고구려 궁성 점령 기사를 갖고서도

차마 „야마토 왕국의 고구려 수도 정벌설‟을 꾸며 내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이 기록을 일본 열도에 이주해 간 야마토 왕국 부근의 고구려 이주민 마을의 촌장 집 습격 사건이라고 해석하면 그 짧은

거리나 대장군의 노획물의 영세한 규모가 설명된다.

당시 일본 열도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자치촌, 소분국을 다수 형성해 살고 있었다.

같은 흠명기의 임나 관계 기사들도 이러한 이주민 자치마을, 소분국의 기사가 아닐까?
넷째, 한국 역사에서 실재했던 가라국은 임나를 포함해서 6가라, 임나를 빼면 5가라 체계였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기의 임나일본부가 통치했다는 임나는 10개 가라체계로 가라(加羅), 안라(安羅),

사이기(斯二岐), 다라(多羅), 졸마(卒麻), 고차(古嵯), 자타(子他), 산반하(散半下), 걸착(乞착), 염례(稔禮) 등 10가라가 공존한

것으로 돼 있다.
일제 어용사가든은 일제강점기에 총동원돼 그든의 10개 가라를 한반도에 비정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으나 4개 정도를 비슷하게

찾아내고 나머지는 모두 실패했다.

반면 1960년대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을 제기한 북핚 김일성종합대의 김석형 교수와 그 제자들은 일본 열도 안에서

일본서기의 10개 가라국을 기비(吉備) 지방을 중심으로 모두 찾아냈을 뿐 아니라 몇 개 가라계열 소분국을 더 찾아냈다.
일본서기가 임나일본부를 둬 통치했다는 10개 가라국은 핚반도 내의 6가라가 아니라 일본 열도로 이주해 들어간 6가라 계열

이주민들의 소분국들과 관련된 것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다섯째, 일본서기 흠명기 2년(532년)에는 임나일본부와 함께 „안라(安羅)일본부‟가 병존하여 신라에 항복한 임나의 부흥대챀회의가

거론되는가 하면 안라일본부 관리가 흠명왕의 겫챀을 받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이 한반도 내 일이었다면 모순된 기술이다. 한반도에서 안라는 아라가라(김해가라 또는 함안가라)이고 임나는 본가라(고령가라)

로서 532년에 신라에 병합된 것은 안라가라이고 임나는 그 훨씬 뒤 30년 후인 562년에 신라에 병합됐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와 함께 안라일본부가 532년 이후 기사에도 나오므로 이것은 한반도 안의 일이 될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부의 내용도 임나 또는 안라의 관리들과 연락하는 야마토 조정의 2명 정도의 연락소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임나일본부나 안라일본부는 일본 열도 안에서 야마토 조정의 일본 열도 안 가라계열 이주민

자치촌의 연락사무소 같은 것에 불과하다.
여섯째, 일본서기에는 630년까지 임나가 존재해 계속 야마토 조정에 조공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임나(고령가라)가 신라에 병합돼 사라진 것은 이보다 70여 년 앞선 562년(신라 진흥왕 23년, 일본 흠명왕 32년)의 일이었다.

이 역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열도 안에 있던 기관이었고 임나도 일본 열도 안의 소분국 임나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6세기에 한반도 남부에 직할 식민지를 설치하고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어

200년간 통치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일제 어용사가든이 날조한 허구임이 명명백백한 것이다.
일본이 1945년 패전한 후 황국사관에 의거한 역사 날조에 대해 일본 사학계에서도 반성이 일어났다.

그결과의 하나가 일본 민족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구하여 밝히면서 나온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등의 „기마민족 일본정복설‟이다.
이 학설은 한반도로부터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지방으로 이동해 든어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는데 이것이

제10대 왜왕 숭신(崇神) 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학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제1대∼9대 천황을 가공인물로 보았다.

그리고 제15대 왕인 응신(應神) 때 동정(東征)을 하여 기나이(畿內) 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설명한다.

가라→기타큐슈→기나이 지방으로 연결되는 마구(馬具) 출토품이 동일 유형이라는 점이 증거였다.

에가미는 „신공황후 신라정벌설‟이나 „임나일본부설‟도 가공의 것으로 보앗다.
기마민족설이 여기서 끝났으면 과학적 연구로 끝났을 터인데 에가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안고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을

제기했다.

그 요지는 한반도 진왕(辰王)의 후예라는 의식을 가진 숭신왕이 4세기 초 일본 열도에 건너와 기타큐슈에 수도와 본거지를 두고

한반도 가라(加羅) 지방과 기타큐슈 지방을 아우르는 왜한연합왕국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이 왕국이 강성해져서 4세기 말∼5세기 초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남하를 막는 주도 세력이 됐는데 그 증거가 광개토대왕비의 „왜‟

기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왜한연합왕국설도 6가라 지방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기타큐슈와 대등한 영토였다는 변화뿐이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가공의 역사다. 왜한연합왕국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 기타큐슈에 걸쳐서 200년이나 존속했다면 국호라도 있었을 터인데 이를

증명할 단 한 줄의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6가라는 소국마다 고유 명칭이 있었고 임나는 그 가운데 고령지방의 소왕국이었다.

기타큐슈에 있던 나라는 변한에서 건너간 변한의 구야국의 분국으로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구야왜(狗邪倭)‟라고 불리게 된

소왕국으로 6가라에서 완전히 분리 독립된 별개의 소왕국이었다.

4세기 말∼5세기 초 구야왜가 백제와 가라가 동맹해 신라를 공격했을 때 백제의 요청에 응해 소규모의 원병을 보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강군에게 거의 전멸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도 백제군의 포로가 8000명이 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주력군은 물론 수만 명의 백제군이었고 원병인 왜군은 겨우 1000명

미만의 보조적 원병이었다.

이때 왜군은 왜한연합왕국의 군대가 아니라 기타큐슈 구야왜국의 일회성 파견 원병에 불과했으므로 광개토대왕비문이 왜한연합왕국

실재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제국 말 일본 제국주의자든이 한국을 침략할 때 일제 어용사가들이 침략 도구로 고안한 임나일본부설을 2007년의 일본

중고교 교과서에 수록해 한국 침략 정신을 교육, 고취하고 일본 문부과학성이 이러한 한국 역사 왜곡을 권장 또는 독려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일본 고교 교사용 역사 자료에 실려 있는 „4세기말 조선‟의 지도. 가야에 해당하는 영토를 임나라

칭하면서 신라나 백제보다 크게 그려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명칭을 통해 본 독도의 주인
‘다케시마’ 성인봉 이두 표기서 유래
1905년 무단편입 때 독도 호칭 둔갑
울릉도에는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 몇 개의 고인돌 유적과 남성동 고인돌 덮개돌의 성혈(별자리 구멍)이 보고됐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고조선 사람들이었다.

고인돌은 고조선 특유의 무덤 양식이기 때문이다.
한자 명칭이 시작되기 전에 순수 한국 고대어로 울릉도의 명칭은 무엇이었을까?

일본 고문헌 „공임집(公任集)‟과 „권기(權記)‟는 울릉도의 표류민을 „우루마‟ 사란이라 했다.

우루마가 순수한 신라말, 고려말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우루마는 무슨 뜻인가? „

우루‟는 왕(왕·王, 황·皇, 주상·主上, 성상·聖上)의 뜻이고, „마‟는 뫼(산·山, 릉·陵, 봉·峰, 숭·嵩)의 고대어이다.

즉 „우루마‟는 임금산, 왕검산, 성상봉의 뜻이다. 우루마는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신라에 병합된 뒤 한자

표기가 여러 가지로 분화됐다. „울릉(鬱陵, 蔚陵)‟은 우루를 줄여 „울‟로 하고, 마(뫼)를 „릉(陵)‟으로 한자 의역하여 합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릉(于陵, 芋陵, 무릉·武陵)‟은 우루의 „루‟를 생략하고, 마를 „릉(陵)‟으로 한자 의역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산(于山, 芋山)‟은 우루의 „루‟를 생략하고, 마(뫼)를 „산(山)‟으로 한자 의역하여 합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성인봉(聖人峰)‟은 „왕‟을 중세에는 „성인‟으로도 별칭했으므로 우루(왕)를 „성인‟으로 한자 의역하고, 마(뫼)를 „봉(峰)‟으로 한자

의역해 합성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언제 독도에 우산도라는 명칭이 생겼을까?

1417∼1425년 조선 세종이 김인우(金麟雨)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에 임명해 파견했을 때, 현재의

울릉도에는 „무릉(武陵)‟ 또는 „울릉도‟의 명칭이, 현재의 독도에는 „우산도‟의 명칭이 확실하게 분화돼 붙여졌다.

○日, 17세기 때 竹島(울릉도)-松島(독도)라 호칭

일본은 원래 독도를 다케시마가 아닌 마쓰시마로 부르다 1886년을 전후해 울릉도의 호칭이었던 다케시마로 은근슬쩍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울릉도‟를 어떻게 호칭했을까?

고 이병도 박사는 논문지도 때, 학생이 가져온 17세기 고지도에 성인봉을 弓崇(궁숭)이라 표기한 옆에 „イソダケ(이소다케)‟라고

훈독 표기한 것을 발견했다.

궁숭(弓崇)은 „왕검산‟의 핚국식 이두 표기(왕검을 弓으로, 산을 崇으로 표기)인데, 일본인든이 이를 „이소다케‟로 읽다가 후세

일본인든이 „이소다케시마(磯竹島)‟로 한자 표기를 바꾸고, 다시 „다케시마(竹島)‟로 줄여 호칭했다고 이 박사는 해석했다.

참으로 탁견이다.
일본에서 우산도(독도)는 어떻게 호칭했을까? 일본 관습에서는 송(松)과 죽(竹)은 얶제나 붙어 다니는 한쌍이다.

울릉도에 다케시마(竹島)라는 이름이 붙여지자,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우산도에는 으레 마쓰시마(松島)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17세기 때의 일이다.
신라에 병합(서기 512년)되기 이젂 우산도 사람들은 울릉도와 우산도를 영토로 해상 소왕국을 수립해 살았다.

„세종실록지리지‟는 „우산도와 우릉도 두 섬을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칭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1808년 출간된 „만기요란‟ 굮정편에서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 땅이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이다‟라고 명백히 기록했다.
현대 일본 정부는 1960년 독도를 거록한 최초의 일본 고문헌은 1667년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라고 한국 측에 알려왔다.

이 챀은 출운국(出雲國·지금의 시마네 현을 포함한 지역) 영주가 오키(隱岐) 섬에 관리를 파겫해 일본의 서북 경계를 조사한

보고서이다.

그런데 „은주시청합기‟도 독도(松島)와 울릉도(竹島)는 고려에 속하고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오키 섬까지임을 명백히 했다.
임짂왜란 때 울릉도민이 왜군의 노략질을 당해 조선 정부는 쇄환정책을 강화했다.

이 틈에 일본의 2개 가문 어부가 울릉도와 그 부속섬인 독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하는 허가를 신청하자, 도쿠가와(德川) 막부

정권은 1618년에 „竹島 도해면허(渡海免許)‟를 내어주고, 1656년에는 „松島 도해면허‟를 내주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이것을 일본이 독도를 영유핚 유일한 „역사적‟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반대가 진실이다. 당시 막부의 도해면허는 외국에 나갈 때의 허가장이었으므로, 도해면허를 내어주었다는 것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닌 외국(조선) 영토임을 명증하는 것이다.

1877년 일본 최고 국가기관이었던 태정관이 발행한 공문서. „竹島(울릉도)와 그 외 1도(松島·독도)는 일본과 관계없음을 심득(心得)

하라‟고 명기돼 있다.
또 하나 결정적 증거가 있다.

안용복 등 조선 어부와 일본 2개 가문의 어부가 1693년 울릉도에서 다툰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 독도 영유권 논쟁이 3년갂 일어났을

때, 조선 정부의 항의를 받은 도쿠가와 막부의 최고집정관인 관백(關伯)은 1696년 1월 28일 지방 영주든에게 „竹島와 松島는 조선

영토이므로 일본인든의 출어를 엄금한다‟고 명령하고 두 섬의 도해면허도 취소했다.

일본의 메이지(明治) 정권도 울릉도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예컨대 1876년 일본 근대지적도를 만들 때 시마네 현 지사의 „竹島, 松島를 시마네 현에 포함시킬 것인가 뺄 것인가‟에 대핚 질의에,

 내무성은 약 5개월간 조사한 후 두 섬은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 관계없는 땅이라는 결롞을 내리고 총리대신의 최종결정을 요청했다.

당시 일본 국가최고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의 우대신(右大臣·사실상의 총리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巖倉俱視)는 이를 검토한 다음

1877년 3월 20일 공문서로서 „竹島와 그 외 1도(松島)는 일본과 관계없음을 심득(心得)하라‟고 전국 현지사와 공무원들에게

명령했다. 이것도 결정적 중요성을 가진 자료이다.

○ 다케시마(竹島)가 독도 호칭으로 둔갑한 사연
이 무렵 일본에서 무토 헤이가쿠(武藤平學) 등이 동해에 울릉도와 독도가 아닌 큰 섬을 발겫했다고 „松島개발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일본 해군이 큰 기대를 갖고 현지조사를 해 보니, 그 섬은 조선 울릉도였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이때부터 울릉도를 공식적으로 마쓰시마(松島)로 바꿔 부르고 종래 마쓰시마로 부르던 독도를 서양 이름인

„리앙쿠르‟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일본 어민들도 „홖영수로지(홖瀛水路誌)‟ 제2판이 간행된 1886년경부터는 해군의 지시에 따르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울릉도에 불법으로 이주하는 일본인들을 방치하거나 보호했다.
조선 정부는 종래 쇄환정책을 폐기하고 1882년 울릉도 독도 재개척 정책을 채택해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

(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에 임명했다.

1883년부터 개척민을 모집하여 울릉도에 이주시켰는데 다수가 남해안 호남 어민이었다.

그들은 울릉도 앞마당인 우산도(독도)에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이 섬을 „돌섬‟이라는 뜻의 호남 방언으로 „독섬‟이라 호칭했다.

이에 우산도는 1883년부터 울릉도 개척민들에 의해 한자 의역 표기 때는 석도(石島)라 쓰이고, 음역 표기 때는 독도(獨島)라 쓰이게

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내부관리 우용정(禹用鼎)의 지휘 아래 부산항 감리서 직원 영국인 러포트 등을 울릉도에 파견해 일본인

불법 입도 실태를 조사한 후, 1900년 „칙령 제41호‟로서 강원 울진군에 속했던 울릉도를 „울도군(鬱島郡)‟으로 승격시키고, 그

행정관리 구역을 „울릉도, 죽도(울릉도 옆의 죽서도), 석도(독도)‟로 법정하여 „관보‟를 통해 국내외에 공포했다.

울릉도와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서양 국제법 체계에 따라 선언한 매우 중요한 칙령이었고 제도개혁이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한 후 독도에 일본 해군 망루 설치를 위한 군사 목적으로 군함 신고(新高)호를 예비조사차

울릉도에 파견했다. 신고호는 1904년 9월 25일 울릉도에서 청취조사를 통해 독도에 대해 한국인든은 „獨島‟라고 쓰고, 일본인든은

„리앙쿠르‟라고 부르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보고했다.
한국 정부와 한국 국민 몰래, 일본 정부는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는 주인 없는 무주지이므로 일본에 영토 편입하고

명칭을 다케시마로 의결했다. 일본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부른 것은 이때부터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독도 영토 편입 내각 결정은 독도가 한국이라는 소유주가 있는 „유주지(有主地)‟였으므로 국제법상 무효의

결정에 불과했으며 명백핚 침탈이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1894년 1월 1일 이후 일제가 약취핚 모든 영토는 원주인에게 돌려준다는 원칙 아래,

1946년 1월 2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로 독도를 원주인인 한국에 반환했다.

그러므로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명명백백한 한국 영토이다.

일본은 독도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전혀 없다.

오늘날의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핚국을 침략 강점한 1905년의 구일본 제국주의 침략 정책을 21세기에

계승하려는 침략 책동에 불과하므로 한국 국민과 정부는 일본의 침략 책동을 단호히 규탄 분쇄하고 주권의 일부인 독도 영토를 한

치의 허점도 없이 굳게 지켜야 핛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7>부여족과 불가리아
《부여(夫餘)는 한국 민족 직계 조상 중 하나다.

신채호는 한때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르기조차 하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 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약 1000여 년간 쑹화(松花) 강, 넌(嫩)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사기(史記)‟의 부여(夫餘), „

논어주소(論語注疏)‟의 부유(鳧臾) 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 학자 발음으로 볼 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다. „부르‟는 더 긴 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기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선진국이었다.

예컨대,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는 „그 나라 사란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 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여러 „가(加)‟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四出道)로 나누어 통치했다.

돼지 개 소 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든 가운데 왕족, 왕비를 내거나,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시내에서 바라본 남쪽 비토샤 산의 풍경. 소피아가 자리 잡은 비토샤

산이 발칸 산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강력한 „가‟는 별도로 고추가(古雛加)라 칭했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짓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 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 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 거쳐 중았아시아의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 해까지 이어지는 밝악산(백두산)∼부여호∼발칸산∼발카시호∼발칸산의 명칭 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 준다.

이 지방은 비잔틴 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 앞서 이동해 온 동방민족인 아발(Avar·柔然)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7세기 초까지 돈 강 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Bulghar)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 강 하류, 흑해 연안의 아발 세력이 약화되자, 635년 불가족 족장 쿠브라트(Kubrat)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건국 7년 만인 642년 쿠브라트 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 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 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 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Khazar)족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넷째 아들은 판노니아 평원(지금의 헝가리)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 아들은 다뉴브 강을 건너 비잒틴 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하였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 안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 아들 코트라그(Kotrag)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든이 이름 붙인 볼가(불가·Volga) 강과 카마(고마·Kama) 강의 합류지점에 „

고추불가(Kotchou-Bulghar)‟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든이 „고추가(加)‟임을 표시하여, 그든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 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 도착하여 아랍 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 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 강의

명칭을 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 세계에 그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얶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 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핚편, 셋째 아든 아스파르흐(Asparukh)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앆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굮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굮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 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 제국 로마군 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 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 향해 조상신 „단군(Tangun 또는 Tangur)‟에게 승전전을 기원하는 제천(祭天)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불)족의 땅(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년)이다. 불가족은 귀족이 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 따른

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든이 „부여‟족임을 알려 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 초에 판노니아 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 제국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 1세의 비잒틴 제국은 이를 허용하지 안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 황제 크룸(Krum) 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 칸은 비잔틴 로마굮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 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 칸은 지금의 발칸 반도 대부붂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

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 제사를 올리고, 산 이름을 „발칸 산‟(밝악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정하였다.

필자는 1989년 불가리아를 여행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서울 북악산처럼 발칸 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 있는 높지 안은 산이었으며 크룸 칸의 제천 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 산에서 발칸 산맥, 발칸 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 때는 서울을 „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대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 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 때 백제 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꾸고 수도 이름을 „사비(泗=)‟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 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 황제 크룸 칸은 814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잒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 칸은 비잔틴 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 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Boris) 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 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 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 제국의 공격을 받고 그 속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소수 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 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 모습을 많이 갖게 됐다.
불가리아는 12세기 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제2제국의 지배층은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 온 부여족이 세운 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 역사로 남아 있고, 발칸 산, 발칸 산맥, 발칸 반도, 소비 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 구조로 남아 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 달집놀이, 굿거리 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

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 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 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 역사학자든은 현재 원(原)불가족(Proto Bulgar)이 어디서 왔는지 앉 수 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 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 이젂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8>고조선 아사달문명
《서해(황해)를 둘러싸고 말굽형으로 생긴 한반도 서해안, 요동반도와 발해만 유역, 중국의 동해안 일대와 이 지역 여러 강가에는

수십만 년 전부터 사란들이 살았다.

50만 년 전 베이징원인(北京原人)이나 65만 년 전의 평남 상원 검은모루(黑隅里) 유적은 이 지역이 오래된 구석기시대 인류거주지역

을 잘 증명해 준다.

기원전 8000년∼기원전 3000년경 서해로 흘러드는 한반도의 핚강 금강 임진강 예성강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만주의 요하 대릉하

난하, 중원의 황하 상류, 회하, 양자강 상류 유역에 여러부족의 신석기문화가 형성·발전됐다.》
부족든은 서로 통합하여 고대국가와 고대문명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형성된 고대국가가 „고조선(아사달)‟이고, 뒤이은 것이 고중국(夏)이다.

고조선은 „한‟ „맥(貊)‟ „예(濊)‟ 세 부족이 결합해 수립한 고대국가이다.
„한‟족은 원래 한강 중상류에서 기원해 북으로는 대동강 유역, 남으로는 금강 일대까지 거주했던 부족이다.

한족은 가장 일찍 농경문화로 들어간 선진 부족이었으며, 태양 숭배와 천손(天孫)의식을 가진 부족이었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

양이(陽夷)‟가 이 부족으로 해석된다.

중국 고문헌에는 „한(Q)‟ „한(韓)‟ „한(寒)‟ „한(桓)‟ 등 여러 한자로 기록되어 나오는데, 이는 „한‟이띾 명칭이 순수한 한족 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기(古記)‟에는 „환(桓·환웅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이들은 팽이형토기, 빗살무늬토기, 고인돌무덤, 각종 발달된 신석기 도구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들을 유물로 남기고 있다.
„맥‟족은 지금의 요하(이젂 이름 패수) 중류에서 기원하여 요동·요서와 동으로는 송화강, 압록강, 대동강 유역까지 넓게 퍼져 살던

곰 토템 부족이다. 모계 중심 유목문화와 옥문화를 발전시키고 적석총을 남긴 신석기 부족으로, „후한서‟ 등에 „맥이(貊夷)‟ „웅이

(熊夷)‟라고 기록되어 나옦다.
„예‟족은 요하의 지류인 예하(濊河)에서 기원하여 요동반도와 한반도 서북해안에 거주하던 범(호랑이) 토템 부족이다. „후한서‟

예전에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춘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고 한다.

또 범을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고 기록하였다.

산동반도에서 발군된 고조선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아침 단(旦)을 나타내는 그림 아래 산(당시에는 „달‟이라고

불렸음)이 그려져 있다.

중국 측은 기원전 4300년∼기원전 2200년의 유물로 추정한다. 
이 세 부족의 거주지역이 만나 중첩된 지역인 대동강 중류 강동(江東)지역에서 한족이 왕을 내고 맥족은 왕비를 내며 예족은 소왕을

내는 결합 방식에 의해 동북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이 건국되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문헌 „위서(魏書)‟를 옮기면 “위서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檀君) 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開創)하여 조선(朝鮮)이라 하니 고(高·중국 요임금)와 같은 시기이다”라고 하였다.

이병도 박사의 지적과 같이 „조선‟은 „아사달(아침 땅·아사는 아침, 달은 산·땅)‟의 한자 번역이다.

„아사달‟은 순수한 고조선말 나라이름이었다.
이 중국 고문헌은 기원전 24세기경 고조선(아사달)이 건국되었음을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역사가든은 외국 역사를 깎아내리는 악습이 있으므로, 만일 의심한다면 고조선 건국 시기가 중국 요임금 시대인 기원전

24세기보다 더 이전일 가능성도 있다.
예컨대 소호(少昊)족의 „삼족오태양싞(三足烏太陽神)‟ 전설에는, 이미 바다 건너 동방의 천제(天帝) 준(俊)이 구이(九夷)를 통치한

무렵 한발이 극심하여 요임금이 천제 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에서 요임금이 소왕국의 작은 왕이었을 때 동방의 천제 준은 9개 동이족을 모두 통치하는 천제가 되어 있었으므로 고조선이 요의 소왕국보다 훨씬 이전에 건국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핚 중국 고고학계는 산동반도의 동이족 대문구(大汶口) 문화 유적에서 „아사달‟ 문양이 그려진 팽이형토기(고조선의 독특한 양식

토기) 11개를 발굴했는데, 중국 측은 기원전 4300년∼기원전 2200년의 것으로 연대 측정했다.

이는 고조선 사란들이 고조선 건국 후 건너가 제작한 것이므로, 고조선 건국이 적어도 기원전 43세기∼기원전 22세기 이전의

일이었음을 알려 주는 고고 유물이다.
„고조선‟의 건국은 한강신석기문화(한족, 왕 배출)와 요하신석기문화(맥족, 왕비 배출), 대동강신석기문화(수도 설정)의 세 강의

신석기문화를 통합해서 한 단계 더 높인 동북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건국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은 이 지역 최초의 고대국가였으므로 빠른 속도로 만주 요동·요서지방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수도도 „강동‟에서 요하 부근 개평현 험독(險瀆·검터)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3경5부(三京五部)제를 실시해서 지금의 중국 요령성 조양(朝陽·아사달), 영평부의 조선현(아사나, 고죽국) 내몽고 자치주의

적봉(赤峰·붉달, 밝달)을 부수도로 하여, 넓은 지역을 5개 구역(부)으로 나누어서 그 안에 포함된 부족들을 직접 간접으로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 통치지역에 공통의 „아사달(고조선)문명‟을 창조하여 발전시켰다.
중국 측이 최근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요서·요동지방의 고고 유물을 발굴하다가 신석기시대 맥족문화의 발전에 경악하고 있다.

 

우실하 교수와 심백강, 복기대 씨의 저서 및 답사보고서를 종합하면, 이른바 소하서(小河西)문화, 흥륭와(興隆.)문화, 사해(査海)

문화, 부하(富河)문화, 조보구(趙寶構)문화, 홍산(紅山)문화, 소하연(小河沿)문화 등의 발군, 특히 홍산문화 후기의 우하량(牛河梁)

유적 발군에 기초하여 요하문명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집트문명보다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랜 중국 문명이 요하문명이라고 홍보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중국 측의 „문화‟는 서양 고고학의 „터(site)‟를 과장 표현할 것이다.

 

이 발군 유물·유적들은 고중화문명에 속한 것이 아니고 아사달(고조선)문명에 먼저 속핚 것임을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위의 유물·유적이 모두 맥족과 예족의 신석기시대 것든이다.

맥·예족은 고조선을 형성한 부족이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맥족, 예족을 „동이(東夷), 북이(北夷)‟라 하여 고대 중국 형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배척해 오지 않았는가?
둘째, 가장 발전된 „우하량‟ 유적에서는 실물의 약 세 배 크기 여신(女神) 또는 여성 토상이 발군되었다.

이것은 그든이 신석기시대 모계사회에 관련되어 있으며, 고대문명을 만든 가부장 사회 이전 단계임을 시사한다.

고조선 건국 때 한족이 왕을 내고 맥족이 왕비를 내는 혼인동맹으로 결합하여 최초의 고대국가를 세우고 아사달 문명 단계로

들어갔음을 고려하면, 우하량의 맥족 유적은 고조선 건국과 아사달 문명의 형성 요소로 보아야 한다.
셋째, 우하량 유적에서 대량 발군된 잘 간 „옥‟ 장식물은 지배층의 것인데 곰의 형상이 맞고 곰 토상의 일부도 발굴되어, 이들이

곰 토템 부족임을 알려 준다.

곰 토템 부족(맥족)이 고대국가의 지배층으로 들어간 것은 이 지역에서는 고조선과 아사달문명뿐이다.

중국 요동 출토 옥귀고리 중국 요동 지역의 흥륭와 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옥 귀고리.

기원전 60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 고성 출토 옥귀고리 강원 고성굮 죽왕면 문암리에서 발군된 옥 귀고리.

국내 최초 신석기 시대의 옥 귀고리로 중국 흥륭와 유적의 옥 귀고리와 유사하다. 

넷째, 발굴된 옥돌 가운데 환옥은 우실하 교수가 비교한 바와 같이 한반도 강원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환옥과 동일 형태이다.

이 옥 문화는 맥족과 예족이 공유한 문화로서 핚반도와 요서지방이 동일 고대문명권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함께 발군된 토기들이 검회식 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평저(平底) 화붂형 토기(팽이형토기 말기에 나오는 토기)로서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토기와 같은 유형이다.

창도 등 고중국 토기 유형과는 다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요하문화는 고조선의 아사달문명의 구성 요소의 일부이다.

요하문명은 과장된 것이며, 더구나 이것을 고중국문명이라고 해석해 홍보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여러 하위문화가 모여 문명 단계로 발젂했음을 증명하려면 종합적으로 반드시 고대국가 형성이 동시에 증명되어야 한다.

이 시기에 동북아시아에서 형성된 고대국가는 고조선뿐이며, 고조선 아사달문명이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를 통합하여

한반도와 요동·요서에 걸쳐 새 문명을 개창한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

<9> 아사달문명이 서양사에 미친 영향 돌궐(튀르크) 민족의 발상지 „위투켄‟ 산은
《고조선 국가는 영역이 요동 요서로 넓어짐에 따라 다수의 부족을 후국(侯國) 제도를 통해 통치했다.

후국은 2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1형 후국은 „직핛후국‟으로서 매우 일찍 후국이 된 맥과 예(건국에 참여하지 안았던 경우), 부여, 옥저, 구려, 짂(辰), 숙싞(읍루)

 등이다. 제2형 후국은 „변방후국‟으로서 동호(東胡), 오환(烏桓), 선비(鮮卑), 해(奚), 오손(烏孫), 유연(柔然), 산융(山戎·흉노),

돌궐(突蹶·원튀르크), 실위(室韋·원몽골) 등이 포함된다.

고조선 제왕(단굮·첚제)은 후국에 왕족을 보내거나 부족장을 제후로 임명해 통치했다.

이 때문에 후국 호칭이나 소왕에는 단(檀)씨가 맋앗다. 예컨대, 선비족의 왕은 단석괴(檀石槐), 유연은 대단(大檀·아발), 흉노의 왕

호칭은 단우(單于·„선우‟로 읽는 것은 후의 변화, 단후·檀后와 같음) 등이었다.

아사나(Asana·阿史那=조선·朝鮮)와 해(태양)와 같은 단어의 자취도 찾을 수 있다.

돌궐의 왕족이 „아사나‟이고, „아사나‟의 축소 변음(ㅱㅱ→오손)으로서 오손의 국명, 해(奚)족의 국명, 오(烏)와 홖(桓, 핚·韓)의

합성인 오환의 국명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후국든은 전조선 기간만도 1500여 년간 고조선 통치를 받는 사이에 고조선 문화를 분유 통합하여 상위의 공통 „아사달

(고조선) 문명‟을 형성 발전시키게 되었다.
아사달 문명권의 원민족든이 공유한 주요 문명 항목으로는 △고조선 언어 △통치제도와 양식 △고조선 금속기술 △고조선 무기

△태양숭배 △천손(天孫)사상 △고조선 신앙과 종교 △고조선 기마문화 △고조선 궁사(弓射)문화 △고조선 축제문화 △고조선

경기문화 △고조선 음악과 무용 등을 든 수 있다.
고조선 사란든이 중국 산둥(山東),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성 등에 진출해 자치 소국든을 세워 생활함에 따라 아사달

문명권은 산둥반도 일대와 만리장성 일대, 화이허(淮河) 일대에 미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고중국(하·夏) 문명이 뒤이어 들어왔기 때문에 두 문명이 변경에서는 중첩되었다.

따라서 아사달 문명권은 고조선 국가보다 그 지리적 범위가 더 넓었다.

○ 만리장성은 고조선에 대한 고중국의 방어선
아사달 문명권 민족들과 고중국 문명권은 처음의 협조와 평화 관계가 장기간 존속했다.

그러나 기원전 10세기경부터 고중국 계열 왕국들이 산둥반도의 고조선 계열 소국든(엄·奄, 서·徐, 수·遂, 거·거, 귺·根, 모·牟, 서·舒,

회·淮, 우·우, 우·(옹,우))을 공격함으로써 평화는 깨어졌다.
기원젂 284년 연(燕) 진개(秦開)의 고조선 공격과 반격, 기원젂 214년 진시황의 고조선 공격과 반격이 이어져 약 200년갂 아사달

문명권과 고중국 문명권은 갈등기에 든어갔다.
만리장성은 이 시기 아사달 문명권에 대항한 고중국 문명권의 방어선이었다. 한(漢) 고조 때까지도 열세였던 고중국이 한 무제(武帝)

가 준비한 대병력으로 고조선을 공격해 기원전 108년 마침내 고조선 국가는 패전해 붕괴되고, 고조선 문명권은 해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조선말로 „우뚝한‟ 산이며, 지방민든은 „박달‟ 산이라고도 부른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고조선 문명권에 속했던 여러 민족든은 각각 한족(중국족)과 투쟁하면서 때로는 한족을 군복시키고 때로는 패전하여 쫓기기도

하면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동하였다. 서방으로 이동한 몇 개 민족만 들기로 한다.
고조선 문명권의 가장 서변에 위치해 중국 한족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흉노(훈)족 아틸라(Attila)의 군단이 406년경 발칸반도의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 평원에 도착하여 그곳 동고트(Goth·게르맊족의 일부)족을 몰아내고 정착하여 훈 제국(Hungary·헝가리는

Hun·훈+gary·땅)을 세우고 거대 제국으로 확장했다.
서양사의 게르맊 민족 이동은 먺저 기원전 108년 고조선 해체로 말미암은 동방의 „민족 대이동‟에서 파급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훈 제국은 아틸라의 사망으로 멸망했다. 후에 마자르(Magyar·말갈)족이 도착하여 헝가리 왕국을 계승하였다.
이어 유연(아발, 대단·大檀)족이 서방에 이동해 와 캅카스 지방과 다뉴브 강, 라인 강 우안 일대에 6세기 초 정착해서 250여 년이나

이 지역을 통치했다. 뒤이어 부여족이 캅카스 지방을 거쳐 발칸 반도에 들어가서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하였다.
오손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다가 강거(康居)족과 융합하여 오늘의 카자흐 민족을 형성하였다.
뒤이어 돌궐(튀르크)족이 서방으로 이동했다. „수서(隋書)‟ 돌궐젂은 “돌궐의 선조는 평양(平凉)의 잡호(雜胡)이다.

성은 아사나 씨이다”라고 했다.
캐어 들어가 보면 고조선 해체 무렵 고조선족 마을 하나가 외적에게 초토화됐다.
살아남은 핚 소년과 몇 가족이 흉노족에게 구원되어 앆젂핚 몽골 지역까지 피신해서 혺혃하며 힘을 길러 재기했다.

현재 모든 튀르크 민족든은 기원지를 위투켄(¨Utuk¨an) 산과 기슭이라고 여기며 지금도 극히 신성시한다.

위투켄 산은 몽골의 항가이 산맥 가운데 높이 4021m로 우뚝 솟은 최고봉이며, 몽골인든은 „오트콘 텡그리‟ 산, 지방민들은 „박달

(때로는 복돌)‟ 산이라고도 부르는 산이다.

위투켄 산 끝자락에는 방목에 적합한 고원과 평지가 있다.

○ 튀르크 기원지 „위투켄‟은 고조선 말에서 유래
필자는 „위투켄‟은 고조선 말 „우뚝한(우뚜칸)‟이라고 본다.

옛 중국 역사가들이 突厥(돌궐)이라고 „突‟ 자를 차자한 것도 이 „우뚝한‟의 뜻을 포함한 것이라고 본다.
왖 „우뚝한‟ 산의 고조선어가 돌궐족 발생지에 붙여졌을까? 돌궐족의 시조가 고조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돌궐족은 이어 „유연(아발)‟이 지배핛 때에도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장이 역활을 하며 세력을 기르다가, 아사나 두만(Asana Tuman)이

기원후 552년 알타이 산기슭에 „돌궐제국‟을 건국해 제위에 올랐다.
왕족은 „아사나‟족이고 최고 귀족은 „아사다르(Asadar, 아사덕·阿史德)‟라 호칭했다.

아사나 두만은 재위 30년간 돌궐 제국을 동쪽은 싱안링(興安嶺) 산맥으로부터, 서쪽은 카스피 해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시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돌궐족이 알타이에 돌궐 제국을 건국한 6세기 후반은 한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가 칩략했던

삼국시대라는 사실이다.
얶어구조가 동일한 어족을 „알타이어족‟이라 한다고 해서 한국 민족이나 한국말이 알타이에서 왔느니, 몽골에서 왔느니 설명하는

것은 젂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다.
이미 고조선 말을 보유한 고조선족의 후예 하나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쪽으로 이동해 가서 6세기에 알타이 산기슭에 제국을

세운 것이었다.
돌궐족은 580년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어, 서돌궐은 당(唐)의 회유 정책에 굴복했다가 완전히 멸망했으나, 동돌궐은 682년 „

아사나쿨튀르크(AsanaKulturk, 아사나골돌록·阿史那骨돌祿)‟에 의해 재기해 다시 대제국을 건설해서 당과 겨루었다.
그 후 돌궐족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면서 서서히 서방 이동하는 중에 위구르(지금의 싞장·新疆), 키르기스, 우즈베크, 타지크,

투르크멘 등 다수의 국가와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결국 오스만 베이(Osman Bey)가 아나톨리아 반도 끝까지 진출하여 1299년 오스만

제국을 건국해 오늘의 터키를 탄생시켰다.
이 사이 튀르크말을 사용하는 사란이 약 3억 명에 달하게 되었다.
종래 한국 민족의 기원과 고대문명 이동의 큰 흐름을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왔느니, 몽골, 바이칼, 알타이,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왔느니 하는 가설은 사실이 아니다. 패러다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상호 교류는 있었지만, 역사적 진실은 반대로 동방 „아사달 문명‟이 서방으로 이동한 것이다.

고조선 국가 붕괴의 빅뱅으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서 아사달 문명 후예든이 서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라시아 대륙의 고대역사가

격동하게 된 것이다.

중국 시앆(西安) 부귺 흉노족 무덤에서 춗토된 구리 허리띠에 새겨진 흉노족의 씨름 모습. 사진 제공 싞용하 교수
일제 식민주의 사관이 고조선 역사를 말살 왜곡했고, 이제 중국 동북공정이 고조선과 아사달 문명을 빼앖아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민족의 기원인 고조선과 아사달 문명의 역사 진실을 밝히고 지키는 것은 한국 국민과 학자든의 의무이며,

역사의 독립운동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