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식민지 낙랑군으로 둔갑된 우리역사 낙랑국 (2부)

설레임의 하루 2014. 3. 17. 19:22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401§ion=sc1§ion2
 
스카이데일리 기사입력  2014/01/12 [11:22]
 
식민지 낙랑군으로 둔갑된 우리역사 낙랑국 (2부)

전한 때 한사군이 과연 존재했을까?

 

전쟁에 참패하고도 한 무제는 항복한 5명 대신들을 제후로 삼아 우거가 다스리던 번조선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다.

직할령이 아니라 지역 제후를 통해 다스리는 자치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 조선열전>의 서두에도 “한나라가 일어났으나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부속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듯이, 번조선 땅은 본국에서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사군의 핵심 낙랑군은 애초에 없었다
 
그 땅은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대로 원래는 홰청, 적저, 평주, 기, 온양의 5군으로 한사군의 대명사인 낙랑(樂浪)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이 5군을 180년 후에 반고가 <한서>를 편찬하면서 낙랑, 현토, 임둔, 진번의 4군(식민지)으로 바꾸어 기록하면서부터 한사군의 역사가  잘못 왜곡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5군 중 어느 하나가 나중에 낙랑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이다. 당시 낙랑이라는 지명은 분명히 있었으나 한나라 군현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기 조선열전>에 언급된 5개의 지명에 없었던 것이다. 낙랑은 당시 우거의 영향력이 미쳤던 번조선(번한)의 땅이 아니라, 북부여의 마조선(마한)의 영토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록의 근거는 아래 <북부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북부여 3세 고해사 단군조에 “원년 임신(B.C169) 정월 낙랑 왕 최숭이 곡식 3백석을 해성(海城)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에서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싣고 海를 건너 마한의 도읍 왕검성에 이르렀다.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B.C195)의 겨울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여기서의 海는 황해바다가 아니라 바로 황하를 의미하는 것이다.  
 

▲ 증산도의 잘못된 낙랑국도.

    이 낙랑국이 나중에 낙랑군으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아래 중국 한사군도와 무엇이 다른가.

 
▲ 중국이 그린 전한 시대의 한사군도     © 편집부
 
 
위 기록에서 당시 최숭이 마한의 도읍에서 낙랑국을 세우고 왕이 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던 낙랑국에서 마한의 왕검성에 보물만  싣고 온 것인지는 불명확하나, 여하튼 낙랑국은 번조선이 아니라 마조선(마한)과 관련된 나라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번조선 땅을 소유했던 우거와는 아무 상관도 없으므로 한나라의 군현이 될 수 없었기에 <사기 조선열전>에 낙랑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반고의 <한서> 기록은 중국의 고의적인 역사왜곡이라 할 수 있다.

 
 
B.C 195년부터 역사기록에 나타나는 최숭의 낙랑국은 이후 계속 존속하다가, 고구리 대무신왕 15년(A.D32) 고구리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먼 낙랑공주가 자국의 자명고를 찢음으로써 낙랑국왕 최리가 고구리에게 항복해 망하게 된다.

이렇듯 낙랑국은 최소 역년 227년의 엄연한 우리 부속국의 역사였던 것이다.

이러한 낙랑국을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으로 둔갑시킨 자들이 바로 <한서>를 지은 반고를 비롯한 중국학자들이었던 것이다.

 
설치 후 곧 와해되는 한나라 군현
 
<북부여기>에 “4세 고우루 단군 13년 계유년(B.C108) 한나라 유철(무제)이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사군(四郡)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번조선의 백성들 모두가 의병장 고두막한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으로 보아, 5명의 반역대신들의 통치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곧 와해된 것으로 보인다. 

 
▲ 당시 낙랑군과 낙랑국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모 재야사학     © 편집부

고두막한은 B.C 108년 스스로 졸본에서 즉위하고 나라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했다.

을해년(B.C106) 고두막한이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고, 격문을 전하니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오천 명이 모였다.

싸울 때마다 적들은 먼 곳에서 고두막한의 모습만 봐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다.

의병으로 시작한 고두막한이 나라까지 선포하고는 한나라 도적들을 격파해나가면서 지역주민들을 하나씩 흡수 통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북부여기>에 “갑오(B.C87) 고두막한이 장수를 보내 배천의 한나라 도적들을 쳐부수고 유민들과 힘을 합해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이듬해 을미년 가을 8월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나라 도적들과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라는 기록 이후에 한나라와의 전투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한나라 군현(식민지)은 거의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보인다.

 
상국 북부여까지 굴복시킨 고두막한
 
B.C 87년 10월에는 고두막한이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북부여의 고우루 단군에게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고 위협하자 마침내 근심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였고,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이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위협을 계속하자 도성을 내주고 옮겨가고 만다. 이를 동부여라 한다.

“을미(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자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식민반도사관과 다를 바 없는 증산도의 잘못된 고두막한 행적도     © 편집부

 
의병 수준에서 조그맣게 시작한 고두막한이 비록 소국이지만 동명국을 세우고 지역주민들을 규합해 세력이 커지자 상국인 북부여의

도읍을 빼앗고 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북부여까지 항복시킨 것으로 보아 엄청나게 군사력이 막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고두막한이 한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 군현은 지리멸멸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토착세력이 한나라 군현에 대한 저항을 격렬하게 했다.

이에 한나라는 B.C 82년 4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의 2개 군을 폐했고, (중략) 통합된 다수의 속현에 한나라에서 관리가 파견되지

못하고 토착세력의 수장이 지방관리로 임명되어 군현의 업무를 대행했다.

군현이 통폐합된 이후에도 군현 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예맥 땅 현도군에서의 저항이 심했다.

(중략) 중국이 양한(兩漢) 교체기의 혼란에 빠져 이전과 같은 군사·재정지원을 못하게 되자 낙랑군과 현도군의 세력은 현저하게 위축돼 갔다”라는 설명이 나온 것이다.

 
 227년 역년의 엄연한 우리역사인 낙랑국을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령 한사군의 핵심 낙랑군으로 둔갑시킨 것이 한사군의 실체였던 

것이다.

또한 현토군 지역에 있던 고구려현(高句麗縣)은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의 고향이었다.

그런 성지를 적에게 넘겨주고 가만있었을 북부여가 아니다.

북부여가 한나라와 직접 전쟁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현토군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한 시기 한사군의 주축이었다는 낙랑군과 현토군은 허구 그 자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강단식민사학의 잘못된 한국사 체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