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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의 대명사 낙랑군은 그야말로 역사왜곡 (1부)

설레임의 하루 2014. 3. 17. 19:14

 *출처: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401§ion=sc1§ion2

스카이데일리 기사입력  2014/01/04 [13:19]
 
식민지의 대명사 낙랑군은 그야말로 역사왜곡 (1부)

본국이 사분오열 되어도 굳세게 존재하는 한사군.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은 학교에서 잘못된 역사를 배워서 그런지 우리 역사 최대의 치욕인 식민지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서 400년

이상 존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의 역사이론으로는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900년 기자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위만조선이 B.C 108년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지금의 북한 땅에 낙랑·현토·임둔·진번이라는 식민지 한사군이 설치돼 400년 이상 지속되다가 고구려 미천왕 때인 313년 소멸된 것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그런지 우선 식민지 한사군의 종주국인 한(漢)나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B.C 206년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무제 때 전성기를 이루는 등 214년간 지속되다가 A.D 8년 재상이던 왕망에게 망해 신(新)나라가 들어서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전한(前漢) 또는 서한

(西漢)이라 한다.

이후 신나라는 15년간 지속되다가 A.D 23년 왕망이 유방의 후예인 유수에게 죽임을 당해 멸망한다.

 
A.D 25년 유수가 황제로 추대되어 다시 유씨의 나라가 들어서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 한다.

 

후한은 이후 175년간 존재했으나 잦은 왕위교체와 외척·환관들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하고 나라의 힘이 없었던 시기였다.

 후한은 A.D 220년 황건적의 난으로 망하고 위·오·촉 삼국으로 나눠져 서로 싸우다가, A.D 280년 서진(西晉)에 의해 잠시 통일됐다가 304년부터 5호16국이 난립하는 사분오열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과연 이런 상태에서 한나라의 식민지가 400년 이상 굳건하게 존재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특히 종주국 한나라가 A.D 220년 본토에서 멸망해버린 상태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가 100년 가까이 더 존재했고, 또 한나라

이후에는 위·오·촉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느라 식민지를 돌볼 겨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세게 식민지 한사군이 존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로 보인다.

 
1. <인터넷 백과사전>에서의 한사군 설명
 
과연 그런지 우리나라 <인터넷 백과사전>의 아래 설명을 봐도 현재의 국사교과서와 마찬가지이며, 결국 중국 동북공정의 역사이론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사실이다.

▲ 중국이 그린 서한의 한사군도와 일치하는 우리 국사교과서의 한사군도     ©편집부

“약 1년에 걸친 전쟁 끝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B.C 108년 고조선의 옛 땅에 낙랑·진번·임둔의 3개 군을 설치했고, 이어 B.C 107년에는 20여 년 전 창해군을 설치했던 예맥의 땅에 현도군을 설치했다. 그리하여 4군을 유주의 관할 아래 둠으로써 오랜 야욕이던 동방경략을 완성했다. 한나라는 4군의 산하에 많은 현을 두고 중앙정부에서 태수와 현령을 직접 파견해 다스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토착세력이 한나라 군현에 대한 저항을 격렬하게 했다. 이에 한은 B.C 82년 4군 가운데 진번과 임둔의 2개 군을 폐하고, 진·번의 속현들은 낙랑군에 합치고 임둔의 속현들은 현도군에 속하여 관할하도록 했다. 따라서 으뜸 현인 조선현을 비롯해 패수·점제·수성 등 11개현으로 출발했던 낙랑군은 진번군의 속현 15개를 추가로 관할하게 되어 외형상 군의 세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낙랑·현도 2군에 귀속된 진번·임둔의 속현 전체에 대한 지배는 이미 군현의 통폐합 당시에도 어려웠다. 즉, 통합된 다수의 속현에 한의 관리가 파견되지 못하고 토착세력의 수장이 지방관리로 임명되어 군현의 업무를 대행했다. 군현이 통폐합된 이후에도 군현 지배에 대한 토착세력의 반발은 계속되었으며, 특히 예맥 땅 현도군에서의 저항이 심했다.
 
결국 B.C 75년에는 임둔의 속현들을 넘겨받았던 현도군이 고구려족의 반발에 밀려 군의 치소인 고구려현을 압록강 중류지역에서 서북 방면으로 옮겼다. 현도군은 옛 임둔군의 속현에 대한 관할권을 낙랑군에 넘기고 스스로도 고구려·상은대·서개마 3개현의 4만5006호와 인구 22만 명을 거느리는 보통 규모의 군으로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현도군의 치소였던 옛 고구려현의 자리는 예맥계의 중심세력으로 새롭게 부상하던 고구려의 중심부가 됐다.
 
한편 옛 진번군의 15개현을 넘겨받았던 낙랑군은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가 어느 정도 가능한 대방·열구 등 7개현만으로 낙랑 남부도위를 구성했다. 현도군의 축소로 옛 임둔군의 속현마저 군의 관할로 넘겨지자 낙랑군은 지배력 행사가 가능한 동이 등 7개현만을 다스리는 낙랑 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나머지 8현은 방기했다.
 
2차에 걸친 군현의 통폐합으로 고조선 옛 땅에서의 중국 군현세력은 크게 약화됐는데, 고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낙랑군의 세력은 오히려 증대됐다. 당시 2개의 도위를 거느린 낙랑군은 25개의 현에 6만2812 호, 인구 40만6748 명의 큰 군이었으며, 주변 토착세력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강성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고구려·예·한 등 토착세력의 성장과 반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고구려족의 저항에 밀려 치소를 서북 방면으로 옮겼던 현도군은 고구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푸순 방면으로 치소를 옮김으로써, 본래의 기능이었던 예맥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중국이 양한(兩漢) 교체기의 혼란에 빠져 이전과 같은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못하게 되자 낙랑군과 현도군의 세력은 현저하게 위축돼 갔다”(이상)
 
▲ 후한 이후 중국의 변천도. 이런 와중에도 한사군이 굳세게 존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 편집부

 
위 백과사전의 설명은 그야말로 역사소설 같은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한사군이 2개 군으로 통합된 후 “한의 관리가 파견되지 못하고 토착세력의 수장이 지방관리로 임명되어 군현의 업무를 대행했다”면서 한나라가 식민지를 토착인에게 위탁관리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설명과 “2차에 걸친 군현의 통폐합으로 중국 군현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고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오히려 낙랑군의 세력은 증대됐다”는 이야기가 과연 성립될 수 있는지?

정말로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뭔가 사연이 있고 숨겨진 역사적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간단히 종합하자면 한사군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설사 존재했더라도 중국 본국의 힘이 강했을 때 잠시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다보니 군이 통폐합되어 토착인에게 위탁관리를 했고, 그 세력이 강했다가 약했다가 고무줄 같이 탄력적이라는 등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설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 한사군의 대명사인 낙랑군은 당시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