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김치의 역사 (History of Kimchi)

설레임의 하루 2014. 3. 11. 00:36

*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心濟 2013.12.06. http://cafe.daum.net/dobulwonin/IWCC/204 

 

 

 

김치의 역사 (History of Kimchi)

 

 
김치에 관한 첫 기록은 2600 - 3000년 전에 쓰여진 중국 최초의 시집, <<시경(詩經)>>에 나와 있다. “밭 두둑에 외가 열렸다.

외를 깎아서 저()를 담자는 구절이 있는데, ‘가 염채(鹽菜), 즉 김치의 시조(始祖).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는 공자가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말(漢末) 경의 사전인 <<석명(釋名)>>

에도 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석명>>에는 김치에 대해, “채소를 소금에 발효시키면 젖산이 생성되고, 이 젖산이 소금과 더불어 채소의 짓무름과 부패를 막는다

라고 풀이했다. 여기서 가 채소를 젖산발효시켜 저장해 온 산미가공식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 때의 <<주례천관염인(周禮天官鹽人)>>에도 순무 순채 아욱 미나리 죽순 부추 등의 칠저(七菹)’를 담가 관리하는 관청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때의 일곱 가지 는 염지(鹽漬)와 장아찌醬沈등 염장채저류(鹽醬菜菹類)의 원시형 종류였을 것이다.

한나라의 가 낙랑을 거쳐 부족국가시대의 한반도로 전해졌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뒷받침되는 문헌은 아직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시경>>의 기록 연대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2000년대 유물 중, 볍씨와 함께 박씨, 오이씨 등이 경기도 일산에서

출토됐다.

중국의 중원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도 오이를 비롯한 다른 야채류를 재배해 와 같은 발효식품으로 간수해 먹은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식초와 소금에만 절이던 방법에서, 술지게미, 누룩, 곡물 껍질류에 채소를 발효시키는 것과 장()에 절이는

방법들이 발달하게 됐다.

이런 발효의 지혜는 곡물 채소 생선을 버무려 삭힌 오늘날 함경도 지방의 가자미 식해안동 식해’ ‘북어 식해등에 잘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김치에 관한 문헌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6대 임금인 성종(成宗)이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

음식 중에 미나리 죽순 무 부추 등으로 담근 김치무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중엽의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1168 - 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가포육영(家圃六詠)’조에 오이 가지

순무 파 아욱 박의 여섯 가지 채소를 읊은 시가 있는데, 여기 김치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장에 담근 무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 겨울 내내 반찬되네”.

고려 때 김치로는 무 장아찌와 무 소금절임짠지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엽 이달충(李達衷)이 쓴 <산촌잡영(山村雜詠)>이라는 시에는 여뀌라는 들풀에 마름을 섞어 소금절이를 했다는 구절이 있다.

여뀌를 비롯한 돌나물 산나물 등의 야생초로도 김치를 담가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록만으로는 고려시대의 절임류가 오늘날의 김장 김치, 순무 동치미, 짠지 등의 형태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무와 배추가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일본의 <<정창원문서>><<연희식>>에 채소에다 조피 나무열매, 여뀌, 양하 등의 향신료를 섞은 김치가 보이고, 원나라 때 식품서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 마늘 생강 같은 향신료를 채소에 섞은 김치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 이미 향신료를 섞은

김치들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고려 고종년간(1214 - 1259)에 편찬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 배추, 즉 숭은 줄기가 짧고 잎은 넓고 두터우며 광대해

순무와도 비슷하나, 실털이 많은 것으로 설명돼 있다. 당시 배추의 모양은 순무와 거의 같았다.

식물학의 분류에도 순무는 배추과에 속한다. 따라서 순무, , 배추가 고려시대의 절임야채를 담근 주요 재료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도입되면서 음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우리 민족은 원래 열이 많고 매운 음식을 애호했다.

겨자 후추 등 자극성 강한 향신료를 즐겨 써왔는데, 고추가 도입되면서 이들을 대신하게 됐다.

소금물에만 담그거나 천초 회향 등의 향신료에만 의지했던 김치 절임에도 고추를 첨가하게 됐다.

 

고추를 사용함으로써 김치의 부패를 방지하고 소금의 사용량을 줄이는 효과를 경험하면서, 고춧가루를 넣어 만든 수십 종의 김치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고추를 양념으로 사용한 김치가 나온 것은 고추 도입 당시가 아닌, 훨씬 후의 일이다.

이전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담근 붉지 않은 김치들이 주를 이루었다.

 

조선 중종 20(1525)에 간행된 <<간이벽온방(簡易僻瘟方)>>박딤최라는 것이 나오는데, 한자(漢字)와 함께 쓰인 원문으로,

 “쉰 무수나 박팀칫구글집 안해 얼운이며 아회돌히 다 하나 져그나머그라라고 돼 있다.

순무 나박 김치의 국물을 어른 아이 대소 간에 모두 마시라는 뜻이다.

나박 김치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데, 순무 김치가 동치미형과 나박 김치형으로 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중엽의 <<주방문(酒方文)>>에도 각종 채소 절임류들이 나와 있다.

가지 외 죽순을 후추 마늘 파 등의 양념에 무쳐 볶은 다음 끓인 간장을 부어 담근 약지히藥沈菜’, 생강을 식초로 절인 생강침’,

고사리를 소금에 절인 팀고사리’, 외 가지 무를 뜨거운 소금물에 담근 침채류, 청태콩을 소금에 절인 청태침등이 있다.

어떤 절임류든 아직 고추를 쓰지 않았다 1715년 경 홍만선(洪萬選)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치선(治膳)’조에 김치류를

소개했다. 대부분 고추를 넣지 않고 소금 식초에 절이거나 향신료와 섞어 만든 것이다. ‘()’ 만드는 법 다섯 가지를 소개했는데,

<<석명>>에는 ()의 일종으로 소금과 쌀로 물고기를 삭혀서 먹는 것이라 했다.

오늘날의 생선 식해와 비슷한 것이다. <<산림경제>>에서는 김치 담그는 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소금을 적게 넣는 담저법(淡菹法)’과 짜게 담그는 함저법(鹹菹法)’으로, 배추 김치나 동치미, 오이 소박이와 오이 짠지까지를 분류

했다. 배추 김치는 담저법에 속하며, 오이는 짠지류와 양념속을 넣은 소박이류 두 가지로 분류했다.

나박 김치는 동치미류고, 무지는 양념을 넣은 것으로 나와 있다.

양념을 넣은 무지는 애호박 호박순과 줄기까지 섞어 담갔는데, 호박이 고추와 함께 김치에 쓰인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동치미, 배추 김치, 용인 오이지, 겨울가지 김치, 전복 김치, 굴 김치 등이 보인다.

 

1766년 경에 나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는 영조 때 유학자 유중임(柳重臨)이 쓴 책이다.

김치류를 별도의 항목으로 정해놓지는 않았으나, 원예작물 재배법에 관한 치포조(治圃條)’의 채명(菜名)속방(俗方)’이라면서

()’를 소개했다. 여기에 고춧가루를 사용한 김치가 나온다.

무 짠지 담그는 침나복함저법(沈蘿蔔鹹菹法)’, “잎줄기가 달린 무에 청각 호박 가지 등의 채소를 넣고, 고추 천초 겨자를 향신료로

섞어 마늘즙을 듬뿍 넣어 담근다고 쓰여 있다. 오늘날의 총각 김치와 비슷한 것이다.

황과담저법(黃瓜淡菹法)’오이에 세 개의 칼집을 만들고 그 속에 고춧가루 마늘을 넣어 삭히는 것으로, 오이 소박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 문헌은 고추와 고춧가루를 김치의 양념으로 사용했으며, 마늘 파 부추 등도 주재료가 아닌 김치 양념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당시의 우리 김치들은 이웃 중국에도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712년에 기록된 김창업(金昌業)<<연행일기(燕行日記)>>에 보면 우리나라에서 귀화한 노파가 그곳에서 김치를 담가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담근 동치미의 맛이 서울의 것과 똑같다라고 나와 있다.

1803년의 <<계산기정>>에는 통관(通官) 집의 김치는 우리나라의 김치 담그는 법을 모방해서 그 맛이 꽤 좋다라고 쓰여 있다.

어떤 종류의 김치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18세기에는 우리의 김치가 중국에 건너가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유명한 김치인 쓰촨포채四川泡菜는 우리나라의 동치미와도 비슷하다.

 8%의 소금물을 옹기 항아리에 절반 가량 넣고 소금물의 0.1%의 천초와 3%의 고추, 3%의 술을 넣은 다음, 썬 채소를 20%의 소금물에

 절였다가 꺼내 포채 항아리에서 숙성시켜 먹는 김치다.

 

<<임원십육지>>에서는 김치의 종류를 크게 '엄장채(掩藏菜)' '자채(蔗菜)' '제채(醍菜)' '저채(菹菜, 沈菜)' 네 가지로 나누었다.

엄장채는 소금 술지게미 향신료 등에 채소를 쟁여, 주로 겨울철에 장기간 저장하는 것이다. 자채와 저채는 비슷한데, 자채는소금과

쌀로 발효시킨 것이고, 저채는 젓갈 장 생강 마늘 식초 등 짜고 시고 매운 맛을 조화시킨 절임류다.

엄장채 자채 제채가 다 ''에 속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독특하게 개발된 종류의 ''를 특히 '저채'라고 했다.

이를 굳이 구별하자면 저채는 발효시킨 뒤 그냥 먹는 것이고, 엄장채류는 물에 씻어 2차 가공을 하거나 조리 식품의 재료로 쓴다는

것이다.

또 제채는 잘게 썰어 담근 것이고, 저채는 채소를 통째 발효시켜 오랜 기간 보존하는 저장 김치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우리나라 김치의 주종을 이룬 것은 역시 저채며, 다른 것은 '잡종저류'로 보조적인 존재다.

 

<<임원십육지>>에는 본격적 젓갈 김치인 해저방(海菹方)’, 곧 섞박지가 나온다.

소금 절임한 잎줄기 달린 무에 오이 배추 등의 채소나 청각 같은 해초를 넣고, 고추 생강 천초 마늘 겨자 등의 향신료를 넣어 담근다.

거기에 젓갈류 조기 전복 소라 낙지 등의 해산물과 신 맛을 막아주는 석회질인 전복 껍질이나 생굴 껍질을 넣은 다음, 알맞은 농도의

소금과 적절한 온도에서 익혀 먹게 된다. 여기서 해저(海菹)’는 젓국지를 뜻한다.

 

<<임원십육지>> 속의 김치들은 대부분 <<산림경제>><<증보산림경제>>에서 인용된 것이다.

재료나 종류에서 여러 채소들이 많이 정리되고, 무가 부상했다.

무 김치류에서 담저(淡菹)’는 동치미고, ‘황아저(黃牙菹)’는 무청 김치다.

무염지(無鹽菹)’는 소금을 전혀 안 쓰고 청수(淸水)를 여러 번 갈아가며 익히는 것이고, 배추 김치는 역시 담저법으로 담갔다.

 

이후 1849년 홍석모가 편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당시 서울의 김장 모습이 잘 설명돼 있고, 1934년 방신영(方信榮)

 지은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서는 김치를 담그는 방법에 대해 현대식 조리 용어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증보산림경제>>에서 속방으로 소개됐던 김치가 비로소 완전 본류의 음식으로 다뤄진 것이다.

 

김만조 박사는 김치의 어원을 함채(鹹采)’라는 말에서 찾는다. 함채는 소금으로 처리된 채소또는 소금으로 절인 야채란 뜻으로부터

 전래된 말이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함차이(Hahm Tsay)’ 또는 감차이(Kahm Tsay)’인데, 이것이 우리 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김치(Kimchi)’로 된

것이다.

19668월 폴란드 바르샤바의 제2회 국제식품이공학회에서 한국 김치의 영문표기가 ‘Kimchi’로 정해졌으며, 처음으로 김치의 정의

(定義)에 대한 논의와 결정이 있었다.

 

참고-김만조 박사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