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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참회 - "단군(檀君)은 신화(神話) 아닌 우리 국조(國祖)"

설레임의 하루 2013. 6. 10. 09:25

*출처:다음카페-한국고대사  글쓴이-새하늘새땅 2013.06.05. http://cafe.daum.net/121315/BV5Z/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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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도의 참회 - "단군(檀君)은 신화(神話) 아닌 우리 국조(國祖)"

다들 아시듯이 서울대교수였던 이병도(李丙燾 :1896 ~ 1989)씨는 한국의 대학(강단) 역사학계의 '우두머리'였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한국인의 기상을 꺽기위해서 폄하, 조작된 한국사를 편찬하기 위한 기관인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는데

이병도씨도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해방 후에 그는 한국 대학(강단) 역사학계의 '최고 우두머리'가 되었죠.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해방 후에도 일제가 폄하, 조작한 한국고대사를 크게 바꾸지 못했다는 평을 들었다 하겠으며

특히 삼국유사 등의 [단군임금 기록]을 단지 신화에 불과한 것처럼 본다는 듯하게 보여졌고 그래서 재야사학계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하겠습니다.

 

그랬던 그가 1986년도에 그동안 솔직히 토로하지 못했던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글이 바로 아래 기고문이라 하겠습니다.

 

이 기고문에서 그는 그때까지의 그의 (남들에게 보여진) 입장과는 180도 다르게  

 

"단군(檀君)임금 관련기록은 신화(神話)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봐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여러가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대개 알려진 내용이지만 좀 간략하게 발췌해 봤습니다. 

 

 

 

- 아래는 위 기사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단군(檀君)은 신화(神話) 아닌 우리 국조(國祖)

 

- 원로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 때 끊겼다"

 

대체 천(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天)을 군장(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開天節)은

즉 「군장(君長)을 개설(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開國), 건국(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開天)은 즉 최고(最古) 시조인 단군(檀君)의 즉위와 개국(開國)을 의미하는 개천(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 퍼온이 주 : 위 글에  '최고(最古) 시조 단군(檀君)'이라는 표현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죠. 

그 이전에 이미 환인임금과 환웅임금의 시대가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마문명의 시대가 있었다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원조 고대한국문명 ] 즉 [마 문명] <- 관련글 )

 

 

 

환웅천왕이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기(古記)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고기(古記)에는 웅(熊)이 여신(女神)으로 화(化)한 것이라 하나

이는 熊(곰) 토템족(族)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年來) 주장해 오고 있다.
즉 熊(곰)을 신성시(神聖視)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 퍼온이주 : '熊(곰)을 신성시(神聖視)'한다기 보다는

지금의 한국 프로야구에 '베어스(곰들)이라는 팀이 있듯이

곰을 자기 부족의 상징동물로 내세운 것이라 봅니다. - 곰토템부족.

 

 

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地上族)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天上族), 천신족(天神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개천절(開天節)이라 하여 단군의 개국일(開國日)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시월절(十月節)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시월절(十月節)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절제(季節祭(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낙종(落種 - 씨를 뿌림)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신(神)에게 연사(年事)의 풍등(豊登 = 풍년)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薦新祭)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落種期)의 제전(祭典)을 5월(五月)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天神)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飮酒)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君民)이 동락

(同樂)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 단오(端午)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시월(十月)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신(神)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시제(時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5월제(五月祭) 시월제(十月祭)의 유풍(遺風)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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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과 같은 사가(史家)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고성기자지택(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 않고 선인왕검지택야

(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 것은 김부식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양이 선인왕검(仙人王儉 )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

(史實)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퍼온이 주 : 선인왕검(仙人王儉 ) = 단군왕검(檀君王儉) )

내외사서(內外史書)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양을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 퍼온이주 : 다들 아시듯이 삼국유사 단군사화(檀君史話)는 고기(古記)라는 책을 많이 인용했는데  

아래는 고기(古記)라는 책이 실존하는 책이었음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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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고기(古記)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史記地理誌高句麗條에서 古記云朱蒙自夫餘逃難至卒本則紇升骨城

②史記 志一 祭祀條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③史記 列傳 金庾信上에서 金春秋가 講和하려고 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言眞平王 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傳故兩存之」라고 하였다.

 

 

( 퍼온이주 : 위 한문을 해설하면

① 삼국사기(史記) 지리지(地理誌) 고구려조(高句麗條)에서

"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 (고구려시조) 주몽(朱蒙)이 부여(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 (卒本)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곧 홀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 (卒本)은 같은 곳이다."

 

② 삼국사기(史記) 지일(志一) 제사조(祭祀條)에서

"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온조왕(溫祚王) 20년 봄 2월에 단(壇)을 세우고 하늘과 땅에 제사지냈다."

 

③ 삼국사기(史記) 열전(列傳) 김유신(金庾信) 상(上)에서 김춘추(金春秋)가 강화(講和)하려고 고구려(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 이는 본기 진평왕 12년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은 사건이지만 (내용은) 조금 다르다.

모두 고기(古記)에 전하는 것이므로 둘 다 남겨둔다.)

 

 


여기에서 보면 고기(古記)에는 단군기사(檀君記史)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高句麗)에 김춘추(金春秋)가

갔던 서기(西紀) 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이 (삼국)사기(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동천왕(東川王) 21년 2월조(條)에서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택(宅)」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古記)이거나 단군기(檀君記)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신라(新羅)의 6촌(六村)도 조선(朝鮮)의 유민(遺民)이 산간(山間)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 퍼온이 주 : 여기서 조선(朝鮮)은 고조선.)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제1(第一)에 보면

「始祖姓 朴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 先時朝鮮遺民分居 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 퍼온이 주 : 위 한문 풀이

 

" 시조. 성은 박씨(朴氏)이고 ... 왕위에 오르니, 이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 (徐那伐)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朝鮮)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일연(一然)이 인용한 고기(古記)의 단군기재(檀君記載)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이 평양이 선인(단군)왕검(仙人(檀君)王儉)의 택(宅)이라고 명기한 데서 고기(古記)가 단군기사

(檀君記事)를 실재(實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연(一然)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古記)를 들먹여서 단군기사(檀君記事)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國難)을 겪으면서도 단군묘(檀君廟)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世年歌)에 의하여 단군(檀君)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 권40 세종10년 무신(戊申)6월 조(條)에 유관(柳寬)의 상서(上書)를 보면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 동령(東嶺)

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北壁)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文化縣) 사람들은 이를 삼성(三聖)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聖堂里)라고 한다고 하였다.

 

 

문화(文化)의 동쪽에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노(父老 : 노인)들이 전하기를 단군(檀君)의 도읍지(都邑地 : 수도, 서울)라고 한다‥」하였으며

「구월산(九月山) 아래(下)에는 환웅(桓雄)을 남면(南面)으로 모시고 동서향(東西向)으로 환인(桓因)과 단군(檀君)을 모신

삼성당(三聖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檀君)이 입도(立都)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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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제시한 유관(柳寬)의 상서(上書)에 따르면 삼성당(三聖堂)은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동령(東嶺에) 있다.

유관(柳寬)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노(父老)들로부터 단군사적(檀君事迹)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삼성당(三聖堂)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文獻備考) 권(卷) 64 찰고(札考)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三聖祠)는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있으며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모셨으며 춘추(春秋 :

봄, 가을)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成宗)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李芮之)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九月山)에

삼성묘(三聖廟)를 세우고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香祝: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卷)42 문화현(文化縣) 사묘조(祠廟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三聖祠)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사(祠:사당)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卷)51 평양 조(條)」에 보면 두 수(首)의 시(詩)를 통하여

 「개국(開國)한 지가 멀고 먼 단군(檀君)은 조선시조(朝鮮始祖)이다.

단군(檀君)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堯: 요임금)와 함께 개국(開國)하였다고 들었으니 거금(去今: 지금으로부터) 4천년

(四千年)이며 단군묘(檀君廟)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사상(主體思想)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 퍼온이주 : 주체사상(主體思想)이란 말은 천년 이상 전부터 쓰이는 말이며 원래 공산주의와는 상관 없는 말입니다.) 

 

고려 조선 양조(두 왕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廟: 사당)를 세우고 제사(祭祀)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國祖)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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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檀君朝鮮) 연구 숙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기재(檀君記載)는 타서(他書)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일연(一然)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연(一然)이 인용한 고기(古記)도 김부식의 인용 고기(古記)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고기(古記)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도 선인왕검(仙人王儉)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古記)에는 단군사기(檀君史記)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단군(檀君)의 세년가(世年歌)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識者)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단군(檀君)의 사묘(祠廟) 제천단

(祭天壇)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향단군진설도(享檀君陳設圖)가 세전(世傳)되어 왔고 그것은 단군제의(檀君祭儀)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조의(朝議: 조정회의)에 의하여 건묘(建廟 : 사당을 지음) 봉제사(奉祭祀 : 제사를 올림)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檀君)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하략)

 

 

- 이상 이병도교수의 기고문 발췌

 

 

 

*출처:다음카페:한국고대사  글쓴이-새하늘새땅 2013.06.05.  http://cafe.daum.net/121315/BV5Z/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