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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제국에 대한 광개토왕비의 논리

설레임의 하루 2013. 6. 11. 17:34

 


한반도 제국에 대한 광개토왕비의 논리

posted by 조의선인
date : 2013.03.28 - 11:34 , update : 2013.04.27 -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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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경 청국 관리가 발견한 뒤로 광개토왕비는 글자의 마멸, 무수한 탁본, 석회칠, 비문 조작설, 내용에 대한 논란과 주관적인 해석 등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 점차 본모습을 잃어버려 지금은 상흔을 많이 입은 불구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현재는 석회를 칠하기 이전에 제작된 탁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비문 조작설이 매우 퇴조하고 일부 마멸된 글자에 대한 논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문 자체에 대한 왜곡된 해석들이 난무한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비문에 등장하는 한반도 제국에 대한 고구려인의 논리를 무시하고 그릇된 선입관에 입각하여 곡해하는 일이 한국인의 역사 인식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제 광개토왕 때 고구려와 한반도 제국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쟁점을 추적하고, 이를 광개토왕비의 논리에 입각하여 해석해 보고자 한다.

 

| ‘신묘년 기사에 대한 해석 |

비의 내용 가운데 한 · 일 양국 사학계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유명한 신묘년 기사’를 알아보자.

기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백제와 신라는 본디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 왔으나, 왜가 신묘년(391) 이래로 백제,

신라 등을 깨뜨려 신민으로 삼으므로, 6(396)년 병신에 광개토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국을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문맥으로 볼 때 이를 신묘년 기사라고 일컫는 것은 합당하지 않지만, 이미 오래도록 써 온 명사이기 때문에 그대로 쓰기로

한다.

기사를 위와 같이 해석한 것은 일본 사학자들인데, 이들은 이 기사를 이용하여 임나일본부설, 4세기 말 고대 일본이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하였다는 이론을 정당화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한국 사학자들이 수많은 비판을 내놓았다. 정인보 등은 기사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백제와 신라를 번국으로 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왜가 백제와 신라를 번국으로 삼았는데도 고구려가 왜는 치지 않고 백제만을 쳤다는 점이

어색하다고 하였다.

, 이진희 등은 아예 비문의 글자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단언하였다. 이진희의 이 비문 조작설은 한 · 일 양국 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인보 등과 같이 기사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아야 한다면, 비문을 쓴 사관은 기사에서 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체를 고구려로 본다면 짤막한 기사에서 주어가 여러 번 바뀌어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더욱이 앞뒤 문맥과는 전혀 관계없이

왜가 언급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정인보 외에도 다른 여러 학자들이 기사의 대주어를 고구려로 보고 내놓은 해석들이 다양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복잡하게만 만들었다.

비문 조작설 또한 문제가 많다.

이진희 외에도 다른 몇몇 학자들이 조작설을 여러 번 제기한 바 있었지만, 우선 조작설 자체가 단순한 추측 차원에서 성립된

가설일 뿐만 아니라 현재 쏟아져 나오는 원석 탁본들 가운데에도 조작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은 없다.

지금은 증거가 부족하여 조작설이 많이 퇴조하였지만, 일반인들은 아직까지 그 조작설을 사실로 믿고 있는 현실이다.

이와 같이 대주어를 고구려로 보는 해석들은 주체가 무조건 고구려여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 신묘년 기사는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결국 일본 측이 처음 내놓은 해석이 정답이다. 일본 측의 해석이 문맥적으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아야만 광개토왕의 한반도 정벌이 정당해지기 때문이다.

아들 장수왕은 부왕을 무지막지한 침략자로 묘사하기 위해 비를 세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벌의 명분을 정당화하고자 왜를 끌어들인 것이다. 비문에 등장하는 왜의 정체에 대해서는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 백제는 고구려의 주적이었는가? |

많은 사람들은 광개토왕비가 후연과의 전쟁은 한 줄도 싣지 않고 백제와의 전쟁을 위주로 서술한 것으로 인식한다.  

  심지어 백제와의 전쟁만으로는 왕의 업적을 노래할 수 없으며, 후연과의 전쟁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땅을 넓혔다는 광개토경

의미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광개토왕비가 백제와의 전쟁을 위주로 서술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을까?

여기에는 비문의 논리를 잘못 이해한 일부 그릇된 해석들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물론 백제가 비문에 한 번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문 자체가 백제와의 전쟁을 위주로 서술하였다는 증거는 내용 어디에도 없다.

비문에서 백제는 영락 6(396)년과 9(399)년, 17(407)년에 등장하며, 더욱이 백제와의 전쟁은 6년과 17년이다.

그밖에는 거의 왜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를 주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복속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가 6년에 벌인 백제와의 전쟁도 두 나라가 서로 대등하게 맞붙은 것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복속하기 위해 벌인 것이다. 

고구려가 백제를 주적으로 간주하였다면, 전쟁을 마치고도 백제왕의 노객 서약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비문이 백제와의 전쟁을 위주로 서술하였다는 해석은 영락 10(400)년과 14(404), 17(407)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모두 백제가 주도한 것으로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 영락 8년 기사의 복속 대상은? |

비문에서 논란이 많은 기사들 가운데 하나가 영락 8(398)년 기사이다.

고구려의 소규모 군대가 식신(숙신)의 땅과 계곡을 순시하고 가까운 곳에서 곧장 막신라성과 가태라곡의 남녀 300여 명을 인질로

삼음으로써 조공을 규정하였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인데, 이를 두고 식신을 정복하였다거나 강원도 일대의 약소한 세력을 복속하였다

는 등 논란이 있다.

그러나 식신은 일찍이 서천왕 때 복속된 바 있기 때문에, 고구려 관군은 식신을 토벌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일종의 지배권 강화였다.

결국 대상 국명의 생략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일고 있지만, 8년 기사를 앞의 6년 기사와 연결하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우선 8년 기사에는 정토의 명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비문은 상대 세력을 정복할 때 항상 명분을 앞세우는 논리로 서술되었기

때문   에, 기사에서 정토의 명분을 찾으려면 신묘년 기사를 참조할 수밖에 없다.

즉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왜에게 정복당한 백제는 6년에 이미 복속하였기 때문에, 8년에는 신라를 복속하여야 비문의 논리에 꼭 들어맞는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막신라성도 신라와 관련이 있는 성으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는 강원도의 식신 땅을 순시하고 인접한 국가곧 신라를 복속한 것이다.

9년에 왜가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왕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앞서 8년 고구려에 귀의함으로써 이루어진 연장선상의 일이다.

 

| 영락 9년 신라를 침략한 것은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인가, 왜군인가? |

광개토왕이 5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침략한 왜군을 무찌른 일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사건이다.

고구려와 왜의 전쟁 가운데 지금의 여러 역사책에서 강조되는 사건도 이것이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상하게도 영락 9년 신라를 침략한 것이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인 것으로 이해한다.

역사를 탐구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이 신라를 침략하였다는 엉뚱한 해석이 나온 것인가?

기사에는 다만 신라를 침략하다가 고구려에게 패퇴한 왜군만이 등장할 뿐이다.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 따위는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이 주장은 백제가 전쟁을 주도하였을 것이라는 고착 관념 속에서 나온 것이다.

, 백제가 주도하고 왜와 가야가 추종하는 양상으로 오해한 데서 나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전쟁을 백제가 주도하였다는 내용이 비문 어디에 나와 있는가?

백제는 다만 9년에 왜와 내통한 것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전쟁을 주도한 사실은 기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가야 또한 왜와 연합한 일도 없고, 신라를 침략한 사실도 없다.

다만 고구려 관군이 신라 땅에서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잠깐 등장하여 아무런 저항 없이 고구려에 항복하였을 뿐이다.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을 이야기하는 연구자들은 왜를 해적질, 노략질이나 일삼는 수준의 약소한 족속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백제가 왜와 가야를 조종하여 신라를 침략하였다고 오해한 것이다.

 

| 비문 최대의 쟁점 - 영락 17년 고구려가 토멸한 세력은? |

글자의 마멸이 심한 영락 17년 기사의 정토 대상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최대의 쟁점이 되어 왔다.

고구려의 5만 대군이 적군을 참살하여 철갑옷 만여 벌과 무수히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개선하면서 6개의 성을 깨뜨렸다는 것이

요지이다.

문제는 대상을 기재한 부분이 마멸되어 이를 두고 백제, , 가야, 후연 등 의견이 분분한데, 대부분 후연 쪽으로 기울고 있다.

기사의 정토 대상이 후연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거반 고구려가 후연을 멸망시켰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중원을 칠 명분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짤막한 기사에 왜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 후연이 등장하는가?

이는 광개토왕을 명분도 없이 후연군을 참살한 무지막지한 침략자로 묘사하는 것으로서, 비문의 논리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것이다. 

후연을 내세우는 연구자들은 온갖 사료와 시대 상황을 내세워 정토 대상을 후연으로 고정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해답은 매우 간단하다. 앞서 9년 기사에 백제가 왜와 내통하고, 14년 기사에 왜가 고구려 땅을 침략하자 광개토왕이 이를

무찔렀다고 밝혔으므로, 17년 기사의 정토 대상은 당연히 왜와 백제가 되는 것이다.

백제는 일찍이 노객을 맹세하고도 그것을 어겨 고구려 중심적 천하 질서를 위반하고, 왜는 신라 땅을 유린한 것도 모자라 고구려

영토까지 침공하였으니, 광개토왕이 아예 그 뿌리를 뽑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후연을 내세우는 연구자들은 이미 토벌한 왜와 백제에 다시 5만 대군을 보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왜의 침략군을

 무수히 참살하고도 그 근거지를 치지 않는 한 왜는 얼마든지 다시 침략군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광개토왕은 왜의 연이은 침략을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그 근거지를 파괴한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왕은 왜와 결탁한 백제를 응징하고자 평양으로 내려갔지만 왜의 도발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수년 동안

응징을 못 하고 벼르다가 결국 17년에 정벌하여 백제를 무력화한 것이다.

또, 후연을 칠 명분을 기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후연은 고구려의 철천지원수이므로 명분을 적을 필요도 없으며, 후연이 고구려

땅을 침략한 사실을 적는 것도 고구려에게는 치욕적인 기술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전자는 어떻게든 후연을 고정시키기 위해 아전인수 격으로 동원한 말도 안 되는 주관일 뿐이다.

그리고 후자도 문제가 많은데, 후연의 침략은 한 줄도 기재하지 않으면서 14년 왜의 침공은 구체적으로 기술한 이유가 무엇인가?

후연이 기재될 만한 아무리 타당한 근거를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어차피 전체적인 맥락에서 후연을 등장시키지 않는 비문의 논리상

후연은 결국 정토 대상으로 기재될 수 없다.

기사에 보이는 참살탕진(베고 죽여 남김없이 싹 쓸었다.)’이라는 잔혹한 표현도 백제나 가야에게는 쓸 수 없고 후연이나 왜에게만

쓸 수 있으나, 비문의 전체적인 논리상 후연은 언급하지 않으며, 백제는 고구려 중심적 천하 질서를 위반한 탓에 6개 성이 깨어졌으므

로, 결국 해답은 왜와 백제가 되는 것이다.

후연을 내세우는 연구자들은 기사에 보이는 철갑옷 만 벌의 언급을 들어, 당시 철갑옷 만 벌 이상을 운용할 수 있는 국가는 중원의

후연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꼭 후연만이 철갑옷 만 벌 이상을 운용할 수 있다는 관념 역시 어디까지나 선입견일 뿐이다.

철갑옷 만 벌의 문제는 광개토왕이 10년과 17년에 파병한 보병과 기병 5만 명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풀린다.

5만 대군은 광개토왕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파병한 군대인데, 이는 그 정도의 병력을 내어야만 상대할 수 있는 강적이 왜였음을

말해 준다.

, 왜가 고구려와 맞먹도록 최소 5만 명 이상의 대병력을 보유하였다는 뜻이다.

왜의 병력이 5만 이상이므로 철갑옷 만 벌쯤은 얼마든지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 비문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세력, |

광개토왕비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주변국들 가운데 수수께끼가 되는 것은 바로 왜의 정체이다.

비문에서 왜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방해하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왜냐하면 비문에 고구려의 정토 대상으로는 왜가 가장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왜를 정토할 때에는 항상 적을 참살하고 섬멸시키며, 어떠한 노객 서약도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광개토왕은 백제나 신라, 식신, 동부여 등을 복속의 대상으로, 왜를 토멸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는데, 이는 왜가 고구려의 세력권

밖에 존재하며 광개토왕의 남하 정책에 주도적으로 대항한 강자였기 때문이다.

종래 많은 사람들이 왜를 고대부터 일본 열도에 존재하면서 백제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가 고구려에게 섬멸당한 부수적인 존재로

인식하는데, 고구려 당대에 만들어진 사료인 광개토왕비를 면밀히 분석하면 당시의 왜는 일본 열도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면서 오히려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툰 강자였음이 드러난다.

비문에 등장하는 주변국들 가운데 패려나 식신, 동부여 등 부수적인 세력들은 각각 한 번씩만 등장하고 백제는 영락 6년과 9년,

17년에 걸쳐 세 번, 신라는 9년과 10년에 걸쳐 두 번 등장하지만, 왜는 9, 10, 14, 17년에 걸쳐 네 번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왜이다.

일본 측 사학자들은 광개토왕 때인 4세기 말 일본 열도에서는 통일된 정권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본서기에 비록 390년경 야마토 정권이 생겨났다고는 하지만, 야마토 정권은 통일 국가도 아니었고 광개토왕이 즉위한 당시

세워졌기 때문에 즉각 고구려와 싸울 국력도 갖추지 못하였다.

더구나 당시 왜가 일본 열도에 있었다면, 굳이 대한 해협을 건너 백제나 신라 땅을 모두 거치면서까지 고구려와 싸웠어야 할

당위성을 찾을 수 없다.

설령 바닷길만 이용해 고구려를 친다고 하더라도, 당시에는 그럴 만큼 발전된 항해술도 없었다.

결국 비문에 등장하는 왜는 정체불명의 세력인 셈이다. 이제 비문을 분석하여 이 정체불명의 세력인 왜의 실체를 추적해 보자.

영락 9년 조에는 백제와 내통한 왜가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의 내물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왜인들이 신라 국경에 가득 찼다.’

하며 구원을 청하였다고 전해진다.

왜가 신라 땅 전체를 점령할 정도로 대군을 보유하였다는 뜻이다.

신라의 청원을 받아들인 광개토왕이 이듬해 105만 대군을 파견한 것도 왜가 맞먹는 병력을 보유한 강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열도에는 그 정도의 병력을 낼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17년 조에는 고구려의 5만 대군이 적군을 섬멸하여 철갑옷 만여 벌과 무수히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고 개선하면서 6개의 성을

깨뜨렸다고 전해진다.

앞서 밝혔듯이 17년 조의 정토 대상은 왜와 백제인데, 고구려 관군이 왜적을 참살하고 획득한 철갑옷 만여 벌을 일본 열도로부터

다시 바다를 건너 고구려로 가져가는 상황은 매우 어색하다이로써 당시 왜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툰 왜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본 사학자인 에가미 나미오는 북방의 기마 민족이 대규모 이동을 시작하여 한반도 남부를 거친 뒤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이른바

 왜 · 한 연합 정권을 세우고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였다는 기마 민족설을 주장하였다.

그가 말한 북방의 기마 민족은 중국의 유목 민족과 우리나라의 부여족을 포함하여 지칭하는 것인데, 이 학설은 가끔씩 오류가

있지만 현재 일본 사학계에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가 기마 민족의 국가라는 사실은 광개토왕비에서도 증명되는데, 영락 10년 광개토왕이 왜의 강병을 물리치기 위해 파병한 5

기병대와 17년 왜적을 참살하고 획득한 철갑옷 만여 벌이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존재한 왜국은 기마 민족이 세운 국가인 것이다.

일본 측은 고대 일본이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만들어 한반도 남부를 식민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데 광개토왕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바 있지만, 비문의 왜는 지금의 일본을 가리키는 세력이 아니므로 일본 측의

주장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때 발굴된 왜인의 유적인 나주시 반남면 고분군 역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반도

남부의 왜 세력이 고대 일본 열도를 지배한 사실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왕비에 등장하는 한반도 제국에 관한 여러 쟁점들을 비문에 반영된 고구려인의 논리로써 추적하고 해석해

보았다.

   광개토왕비는 당대에 만들어진 일차적 사료로서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조명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보물이다.

따라서 비문에 관한 그릇된 관념들 역시 바로잡혀야 한다

잘못된 선입관을 과감히 떨치고 비문을 고구려인의 사관에서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더욱 빛내는 데 일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