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다음카페-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心濟 2012.01.18. http://cafe.daum.net/dobulwonin/GBuf/374
3천년전 갑골문에 ‘남녀차별’ 내용
(가)“부호(왕비)가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아들일까요?(婦好娩 嘉)” 그 가운데 법정 배우자는 3명이었는데, 부호는 바로 2번째 왕비였다. 부호의 출산이 임박하자 조정은 점(占)을 쳤다. 태어날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물었다. (가)(나)(다)는 점을 치고, 그 결과를 적은 갑골문의 내용이다. 갑골의 내용을 보면 아들을 낳으면 ‘길(吉)’하고, ‘기쁘다’는 뜻의 ‘가(嘉)’로 표현했다. 반면 딸은 ‘불길(不吉)’하고 ‘기쁘지 않다(不嘉)’라 했다. 즉 점을 친 결과, ‘길’하면 아들을 낳아, 매우 기쁘지만 ‘불길’하면 딸을 낳고, 재수 없다는 뜻이다. 남아선호, 남녀차별의 뿌리는 이처럼 깊다. 은 무정(재위 기원전 1250~1192)의 왕비 부호가 출산을 앞두고 점을 친 과정과 결과를 새긴 갑골문. 만약에 정(丁)일이나 경(庚)일에 낳는다면 아들일 것이라는 점궤를 얻었다. 하지만 31일 뒤 갑인일(甲寅日)에 출산했는데, 딸이었다.
은(상)의 시조인 설(설)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었다. 간적은 강가에서 놀다가 새(현조·玄鳥)의 알을 주워 삼킨 뒤 설을 낳았다. <시경>은 이를 두고 “하늘이 현조에게 명하여 내려와 상(商)을 낳았다(天命玄鳥 降而生商)”고 했다. 여기서 ‘알을 삼켜 낳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는 뜻이다. 즉 ‘간적’은 모계 씨족사회의 마지막 여성지도자이며, ‘설’은 부계사회의 시조라는 것이다. 자연 남녀차별의 풍조가 퍼졌을 것이다. 위 갑골문의 상세한 내용.
한비자(韓非子·기원전 280?∼233)는 “아들을 낳으면 서로 축하하고. 딸을 낳으면 죽였다”고 증언했다. 오죽했으면 성인이라는 공자(孔子)도 “여자와 소인은 길들이기 힘들다.(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고 했을까. 그 이유가 기막히다. 주나라를 세운 무왕이 대표적이다. 은(상)의 마지막 군주(주왕)을 치면서 출사표를 던진다. (牝鷄之晨 惟家之索) 은 왕은 부인의 말만 듣고 선조에게 드리는 제사를 그만두고 나라를 어지럽혔소.” 주왕은 달기를 위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어 벌거벗은 남녀들을 풀어놓았다. 또 불 위에 기름기둥을 걸어놓고는 죄수들에게 걷게 했다. 그들이 미끌어져 떨어지는 모습을 즐긴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포락형(포烙刑)’이다. 사실 나라를 망친 장본인은 주왕 그 사람이다. 그런데도 주 무왕은 애꿎은 달기에게 책임을 물어 ‘암탉 운운’하면서 꾸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왕비 부호의 출산을 앞두고 친 점궤. 갑골에 “신(申)일에 낳으면 길(吉)해서 ‘아들일 것’(嘉)이라는 점궤가 나왔지만, 갑인(甲寅)일에 출산했다. 그래서 ‘불길(不吉)’하여 딸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신라 선덕여왕의 시대를 일컬어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폄훼했다. 신라는 여자를 왕으로 세웠으니 참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男尊而女卑 豈可許 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幸也)”(<삼국사기> ‘신라본기·선덕여왕조’) 만월부인을 새 왕비로 들였다. 왕은 표훈스님을 불러 “제발 아들이 생기도록 천제에게 빌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천제의 응답은 “딸은 낳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천제는 표훈스님을 통해 “딸을 아들로 바꾸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고 경고한다. 왕은 “그래도 괜찮다”고 고집을 피운다. 혜공왕은 마침내 반란군에게 살해됐다. 지나친 ‘아들타령’이 나라를 기울게 만든 것이다. ■경국지색의 고사 = 그런데 역사가들은 “여성의 빼어난 미모가 나라를 기울게 한다”고까지 하면서 또 여성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것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고사이다. 고사(故事)는 한나라 무제 때 나왔다. 당대의 음악가인 이연년이 황제 앞에서 춤을 추며 노래했다. 눈길 한 번에 성이 기울고 눈길 두 번에 나라가 기우네.(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성과 나라를 기울게 함을 어찌 모를까.(寧不知傾城與傾國)”(<한서>·‘이부인전’> 왕은 여자를 웃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유왕은 전쟁에 대비하여 봉수와 대고(大鼓·큰 북)를 만들었다.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봉화를 올리고 북을 쳐서 제후들을 불러 모으려 한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포사가 깔깔 대며 웃는 것이 아닌가. 유왕은 ‘이거다’ 싶어 그 다음부터 날이면 날마다 거짓봉화를 올렸다. 제후들은 화가 나서 오지 않았다. 그런데 훗날 오랑캐(견융)와 끌어들인 반란이 진짜로 일어났다. 유왕은 다급하게 봉화를 올렸다. 하지만 양치기 소년이 된 유왕을 위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주나라는 이 때부터 급속도로 쇠락했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부차(夫差·기원전 496∼473)는 월나라 구천(勾踐·재위 기원전 496∼465)이 바친 서시(西施)라는 여인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 당나라 현종도 양귀비 때문에 현혹되어 나라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렸다. 서양속담 중에서도 동양의 ‘경국지색’을 상징하는 것들이 제법 있다. (수천 척의 배를 동원하고 트로이의 많은 탑을 무너뜨린 것은 헬렌의 미모였던가?) 잘난 남성들이 정치를 제대로 했다면 결코 나라를 잃는 수난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천하’가 태평성대였던 때도 꽤 있었다. 물론 정권을 잡기까지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특히 고조 생전에 총애를 받던 척부인의 손발을 절단내고, 눈과 귀를 파내 돼지우리에 살게 했다. 그러면서 ‘사람돼지(人체)’라 불렀다. 그런 만행을 저질렀지만 여태후의 시대는 한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태평한 시대로 꼽힌다.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이같은 여태후의 비정한 정치와 정권욕을 맹비난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백성들이 농삿일에 힘쓰니 의식이 나날이 풍족해졌다.”(<사기> ‘여태후본기’) 온갖 간계를 써서 황후가 된 그는 당나라 고종의 건강을 핑계 삼아 독재권력을 휘둘렀다. 문예와 이무(吏務)에 뛰어난 신흥관리를 등용하여 구 귀족층을 배척하였다. 690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중국 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 15년간 천하를 지배했다. 치세 내내 악랄한 책략과 잔인한 탄압을 가했다. 하지만 과거제의 인원수를 늘려 과거체제의 위상을 높였다. 이같은 획기적인 인재선발 정책은 일반인도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꿈을 불어넣었다. 토지-상업자본-학식이 결합된 지배층의 기반이 과거제를 통해 확립됐다. 이로써 전제왕정의 안정을 기했다. 농업발전에도 힘썼다. 또 당근과 채찍으로 이민족을 다스려서 변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절정의 정치력과 외교력을 발휘한 것이다. 결국 역사가 ‘여자 핑계’를 대는 것은 그야말로 ‘비겁한 변명’이었을 뿐이다. 모두 여성이 차지했다. 이제 은(상)의 정인(貞人·점을 주관한 사람)이 와서 점을 치면 점궤가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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