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고조선(한단고기)

[스크랩] 燕將 진개가 고조선 영역 침입? 그 진실을 밝힌다.(Was Qinkai`s invation to Gochosun truth?)

설레임의 하루 2012. 7. 27. 00:44

 

진개의 동호영역 1000리 침범 그러나 200리 ? 진실은...

그 답을 중국인들이 연나라 지역이라 불리우는 요서지역에서 유물발굴 결과가 말해주는데 결론은 ?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지를 2000여리나 침입했다는 믿지못할 역사적 사실로 위의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지도처럼 하남에서 할거하던 주나라 방국중 하나인 연나라가 갑자기 하북 고조선 수도지역에 버티고 있는 역사지도 ...결국 거짓이란 자백은 요서와 고대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이형구 박사가 연나라 지역을 고고발굴 하였으나 연나라 왕족의 무덤이라 할수있는 고분은 발굴되지 아니하였고 달랑 연나라 양식의 유물만이 발굴되었다하니 그것이 증빙한다.     

 

 

 

연의 동호침입 허구성을 설명하기위해 경향신문의 연재기사 <코리안루트>를 발췌하면;

 

중산국과 고조선 등 동이의 나라들과 국경을 맞댄 연나라의 역사를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BC 1046년쯤)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봉했다. 그런데 소공이 연나라 땅에 분봉을 받았음에도 주나라의 도읍지 풍(豊·지금의 펑이:豊邑) 주변을 맴돌며, 결국은 섬(陝·지금의 허난성 산셴:陝縣)의 서쪽 지방을 관할하는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 두고두고 이상한 일이다.

즉 “주나라 2대왕 성왕(成王·BC 1042~BC 1021년)이 소공에게 뤄이(洛邑·뤄양)를 건설하게 했고, 나중에는 섬(陝)의 서쪽 지방을 관장하게 하였다”(사기 주본기·사기 연소공세가)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더욱이 주나라 초에는 은(상) 유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다. 주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이 은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성왕이 즉위한 뒤에야 겨우 산둥성(山東省)에 살던 동이족들을 정벌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이족 계열인 은(상)의 반발이 거셌다는 얘기다.

“이는 무왕이 소공을 연에 봉했을 때는 주나라의 세력이 아직은 크지 않았다는 뜻이지. 성왕 초기에도 동쪽인 산둥성에서 헤매고 있었거든…. 은(상)의 항거가 워낙 거셌던 탓에….” (선문대 이형구 교수)



■ 연나라의 유적·유물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왕이 소공에게 분봉했다는 연(燕)은 어디일까.

“처음엔 지금의 허난성 옌스(河南省 偃師)일 가능성이 많아요. 언(偃)은 연(燕)자와 같거든. 그리고 성왕 이후에 지금의 베이징 서남쪽인 팡산셴(房山縣) 부근으로 둥지를 옮겼을 겁니다. 역사서에는 연의 도읍지를 지셴(계縣·上都)과 이셴(易縣·下都)이라고 했거든. 어쨌던 류리허(琉璃河)에서 확인된 연나라 왕의 무덤이 그 단서가 될 것 같아요. 류리허에서 서주 초에 축조된 연나라 성터와 왕의 무덤이 발굴되었거든.” 그런데 이것이 마지막이다. 이 류리허 유적의 북쪽, 즉 옌산(燕山) 이북에서는 전형적인 춘추시대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이라 하면 하나의 세트, 하나의 패턴을 갖춘 유적과 유물의 조합을 뜻한다.

“유적이나 유물들이 ‘하나의 문화’, 혹은 ‘하나의 영역’으로 규정되려면 유적·유물이 하나의 정연한 세트를 이뤄 일정한 패턴으로 확인돼야 합니다. 그냥 한 두 점씩 여기저기 흩어져 나온다면 유의미한 문화라 할 수 없어요.”(이 교수)

만약 춘추시대 연나라가 옌산을 넘어 다링허 유역은 물론 랴오둥 반도까지 영역을 넓혔다면 류리허 같은,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유적들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하지만 옌산 이북부터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단검) 문화로 대표되는 고조선(기자조선)의 문화가 보일 뿐이다.

■ 천하의 유세가 소진(蘇秦)이 남긴 한마디

또 하나 중요한 단서가 ‘전국책’ 연책(燕策)과 ‘사기’ 소진열전 등 사료에 숨어 있다.

전국시대를 혀(舌) 하나로 누빈 합종(合從)의 유세가로 6국의 재상을 겸한 소진(蘇秦)의 유세를 보자. BC 334년 소진은 합종을 위해 연나라로 가서 “연·제·위·한·조·초 등 6국이 합종하지 않으면 강대한 진(秦)나라를 이길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앞세운 말.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과 요동에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와 누번이 있습니다.(燕東有朝鮮遼東~)”

혀로 천하를 호령한 소진 같은 유세가가 연나라를 중심으로 말을 꺼낸다면 있는 순서대로, 즉 조선→요동 순으로 차례차례 말했다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그러니까 조선은 요동의 서쪽, 즉 랴오시(遼西)에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또 하나 소진의 말에서 또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이 시기, 즉 BC 334년에는 최소한 조선과 랴오둥은 연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연나라의 전성기

그렇다면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중국 사료, 즉 연의 강역이 동으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른다는 기록은 어찌된 것인가. 여기에는 한가지 오해가 있다. 우선 춘추시대 연나라의 강역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사기’ 연소공세가와 조선열전, 흉노열전 등에 나오는 연나라의 강역은 전국시대 중기~말기, 즉 연나라 전성기의 기록이다.

“연나라는 밖으로 만맥(蠻貊·북동쪽 동이족을 멸시한 명칭일 것) 등 여러 종족과 대항하고, 안으로는 제(齊)와 진(晉)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느라 국력이 가장 약했고, 망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800~900년간 사직을 보존했으며~.” 사마천의 논평(연소공세가)은 전국 7웅이지만 국력이 가장 약한 연나라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 것이다. 하기야 그랬을 것이다.

BC 316년, 연왕 쾌(쾌)가 재상인 자지(子之)에게 왕권을 넘겨주자 연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는데, 이 때를 틈타 제나라와 중산국이 손을 잡고 연나라를 쳤다.이때 중산국에 땅 500리와 성 10곳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314년), 나라는 거의 망국에 이른다. 이 때 등장한 이가 바로 연나라의 중흥군주 소왕(昭王·재위 BC 311~BC 279년)이다.

소왕은 인재를 널리 구하는 데 힘썼다. 군사전략가인 악의(樂毅·BC 406년 중산국을 멸한 위나라 악양의 후손)가 위(魏)에서,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趨衍)이 제나라에서, 힘이 장사인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일제히 달려왔다.

소왕은 BC 283년 무렵 진(秦), 초, 한, 조, 위 등과 함께 제나라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다섯 나라 중 유일하게 연나라 군사만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까지 진입, 제나라의 궁묘와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제나라 성 가운데는 즉묵(卽墨·산동성 핑두셴:平度縣) 등 3성만이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속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제나라가 6년간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 진개의 침략

그런데 이 글의 맨 처음에 인용한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연나라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뢰를 받은 후 돌아와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습격, 패주시켰다. 동호는 1000여리나 후퇴했다. 진개는 훗날 자객인 형가(荊軻)를 수행해서, 진왕(秦王·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의 할아버지이다. 연나라는 조양,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이제 이 문제의 인물인 ‘진개’가 등장한다. 진개는 언제 적 사람인가.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명한 ‘형가의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에서 추론할 수 있다. 형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BC 227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형가를 수행한 진무양의 할아버지인 진개는 연 소왕의 전성기, 즉 BC 283~BC 279년 사이에 활약했던 장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 진개란 인물이 또 한 번 등장하는, 그 유명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조를 보자.

“조선후(朝鮮侯) 준(準)이 감히 왕(王)을 칭하였다. 연나라 망명인인 위만(衛滿)이 공격하여 (기자조선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 단 한 줄에 불과한 이 기록에 덧붙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AD 233~297년)는 ‘위략(魏略)’이라는 역사서를 장황하게 인용한다. 전체적인 내용과 풀이는 다음 회로 넘기기로 하고 연나라의 강역 부분만 인용해보면…. “위략에 따르면 조선왕이 왕을 칭하는 등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리를 취하였다.”(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 진수가 인용한 ‘위략’ 에서 부분 발췌)

그러니까 ‘사기’ 흉노열전과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사서를 종합하면 연나라가 소왕 때, 즉 BC 300~BC 280년 사이 북방으로는 1000리, 동쪽으로는 2000리를 공격, 강토를 넓혔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다시 증거물, 즉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서가 품고 있는 숨은 뜻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상 이기환 기자 )

 

 

 그림 구이넷 발췌 (운영자 생각엔 그래도 원래 위치보다 북으로 많이 올라가 있다)

 

진개에게 2000여리나 빼았겼다는 위만조선의 강토가 180여년후 소위 한에게 망한후 조선역적 5대신에게   분봉한 봉지를 보면 연나라 진개의 동호침입과 이로인해 늘렸다는 연나라의 영역이 얼마나 터무니없는것인가를 보여준다.

 

운영자 심제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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