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옥저, 동예, 예맥이 있던 곳은 원래 어디인가?

설레임의 하루 2012. 5. 4. 01:01

*출처:역사복원신문

 

 

 

 

옥저, 동예, 예맥이 있던 곳은 원래 어디인가? (23-3부)

옥저, 예, 맥은 낙랑군 땅으로 산서성 동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2/05/02 
(단군세기 원문) 12세 아한단군 재위 52년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에 외뿔 달린 짐승이 송화강(松花江) 북변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다 요하(遼河)의 좌측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후에 창해역사 여홍성(滄海力士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읊었다.
“마을 교외 변한이라는 부르는 곳에 유난히 특이한 돌 하나 서있구나
받침은 무너지고 철쭉꽃이 붉게 피었고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가 푸르구나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져 흥망의 황혼에 서있구나
문헌으로 고증할 길 없으나 이 어찌 단씨(=단군)의 유적이 아니겠는가!”
을묘 29년(B.C1806) 청아(菁莪)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열한(列汗)으로

삼았다.
 

지난 (23-1,2)부에서는 위 원문에 나오는 요하와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23-3)부에서는 우리 귀에 익숙한 옥저(沃沮)와 예(濊), 맥(貊)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장문이라 2부로 나뉘어 연재합니다)

을묘년 기사는 청아, 서옥저, 맥성의 욕살들을 각기 제후국의 임금으로 봉했다는 말이다.

욕살은 한 지방을 다스리는 관직명인데, 중앙에서 관리를 임명하여 다스리던 지역을 자치권이 있는 제후국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원래 예와 맥은 각각 다른 지역인데 우리에게는 예맥(濊貊)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예는 제천행사인 무천(舞天)을 행한 동예(東濊)로

알려져 있다.  

먼저 각각에 대한 <대한민국 백과사전>의 설명을 보도록 하겠다. 참고로 청아(菁莪)는 어디에 있는 지명인지 알 수가 없다. 

▲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동예, 옥저의 위치는 한반도 동북부 

맥[貊] : 1) 상고시대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 종족.
(2) 고조선 시대, 강원도 지방에 있던 나라.

예맥[濊貊] : (1) 만주와 한반도 북동부걸쳐 살았던 고대 민족. 부여(夫餘)와 고구려 등이 그로부터 생겨났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東京)은 예맥의 옛 땅에 자리하였고 일명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다.
(2) 상고시대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 나라. 만주와 한반도 북쪽의 예(濊)와 인접해 있어 이렇게 불렀다.
(3) 우리 겨레의 조상을 통틀어 이르던 일반적 이름.

동예[東濊] : 상고시대에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지역에 있던 부족 국가.

족외혼(族外婚)의 풍습이 있었고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으며 호랑이를 신으로 섬겼다.

해마다 10월이면 무천(舞天)이라는 추수감사제(주:제천행사)를 지냈으며 명주나 삼베 따위의

방직기술이 발달하였다.

반어피(班魚皮), 과하마(果下馬), 단궁(檀弓), 표범 가죽이 유명하였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옥저[沃沮] : 우리나라 고대 국가 가운데 함경도 함흥 일대에 있던 나라. 또는 그 나라의 부족. 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위 <백과사전>의 설명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지도로 보듯이, 예맥과 동예와 옥저 모두

한반도 내 강원도와 함경도 지방에 있었던 부족국가라는 설명인데 과연 그럴까?

이는 민족반역자 이병도로부터 이어지는 식민사학계의 이론인 반도사관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않다. 그렇다면 과연 예, 맥, 옥저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예, 맥, 옥저에 관해 기록한 중국사서의 기록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1. 삼국지 위서 권30 오환선비동이전 (三国志 魏书卷三十 乌丸鲜卑东夷传)
(번역) 고구리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현)과 예맥에 접하고,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한다.

도읍은 환도의 아래에 있고, 넓이는 방 이천리, 가구 수는 3만이다.

(高句丽在辽东之东千里。南与朝鲜·濊貊,东与沃沮,北与夫余接。都于丸都之下,方可二千里,户三万。)

(번역) 동옥저는 고구려(현)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대해변(=황하변)에 있다.

그 지형은 동북쪽이 좁고 서남쪽이 길어 천리가 가능하며, 북으로 읍루와 부여와 접하고,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

호는 오천이며, 대군왕이 없어 세세토록 읍락이며 각기 장수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거의 같은데 때때로 다를 때도 있다.
한나라 초기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망명하여 왕이 되었을 때 옥저가 거기에 속했다.

한무제 원봉 2년(B.C109) 조선을 정벌해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사군으로 나누었는데 옥저성이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맥족이 거기를 침입해 구려(현)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소위 현토 옛 부이고, 옥저는 여전히 낙랑군에 속했다.

(원문) 东沃沮在高句丽盖马大山之东,滨大海而居。其地形东北狭,西南长,可千里,北与挹娄、夫余,南与濊貊接。

户五千,无大君王,世世邑落,各有长帅。其言语与句丽大同,时时小异。汉初,燕亡人卫满王朝鲜,时沃沮皆属焉。

汉武帝元封二年,伐朝鲜,杀满孙右渠,分其地为四郡,以沃沮城为玄菟郡。后为夷貊所侵,徙句丽西北,今所谓玄菟故府是也。

沃沮还属乐浪。

2.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后汉书 卷八十五 东夷列传 第七十五)
<후한서 동이전>에도 위 <삼국지 동이전>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후한서 동이전> 동옥저는 고구려(현)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주>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토군에 속하고,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后汉书东夷传》东沃沮在高名骊盖马大山之东,《注》盖马,县名,属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

예.맥과 옥저가 낙랑군에 속했다는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번역) 예의 북쪽은 고구려(현)과 옥저에 접하고, 남쪽은 진한과 접하고, 동쪽으로 대해, 서로는 낙랑에 접한다.

예와 옥저와 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 기자가 예의와 누에치기를 가르쳤고 또 8조의 가르침을 만들었다.

그 사람들은 도둑질 할 생각을 안했고, 문이 없이 열어놓고 지냈다. 부인들은 정숙하고 믿음이 있으며, 변두(도마)를 사용하며 음식을 지었다. 
그 후 40여세가 내려가 조선후 준이 자칭 왕이 된다. 한나라 초기 대란이 있자 연, 제, 월 지방의 사람들이 피난간 자가 수만 명이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나라가 손자 우거에까지 전해졌다.

한무제 원삭 원년(B.C128) 예의 임금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가구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러 예속하기를 청하여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했다가 수년 뒤 없앴다.

한무제 원봉 3년(B.C108)까지 (번)조선을 없애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어 4군을 설치했다.

한소제 시원 5년 임둔과 진번을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현토는 옮겨 구려(현)로 돌아갔다.

단단대령부터 이미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했다.

이로써 그 땅이 넓고 멀어 고개 동쪽을 7현으로 나누었고,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다.

(원문) 濊北与高句骊、沃沮,南与辰韩接,东穷大海,西至乐浪。濊及沃沮、句骊,本皆朝鲜之地也。昔武王封箕子于朝鲜,

箕子教以礼义田蚕,又制八条之教。其人终不相益,无门户之闭。妇人贞信。饮食以笾豆。其后四十余世,至朝鲜侯准自称王。

汉初大乱,燕、齐、赵人往避地者数万口,而燕人卫满击破准,而自王朝鲜,传国至孙右渠。
元朔元年,濊君南闾等畔右渠,率二十八万口诣辽东内属,武帝以其地为苍海郡,数年乃罢。至元封三年,灭朝鲜,分置乐浪、

临屯、玄菟、真番四郡。至昭帝始元五年,罢临屯、真番,以并乐浪、玄菟。玄菟复徙居句骊。自单单大领已东,沃沮、濊貊悉属乐浪

后以境土广远,复分领东七县,置乐浪东部都尉。

위 기록에 언급된 조선은 아래 <한서지리지> 기록에서 보듯이, 단군이 다스렸던 나라가 아니라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25개현 중의 하나인

조선현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은 지명인 조선현과 고구려현을 때때로 나라인 조선과 고구리로 해석해 엄청난 역사왜곡을 해왔다.

우리가 위 <삼국지 동이전>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맥은 고구리의 남쪽으로 낙랑군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 역시 낙랑군 땅에 있는데 그 위치가 예맥의 동북쪽임을 알 수 있다.


▲ 원래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에 있었던 낙랑군이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한반도로 옮겨져 역사왜곡 되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위치를 알면 예맥과 옥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하겠다.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낙랑군에 속한 패수의 위치를 추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낙랑군은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에 있었다. (아래 컬럼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제목) 조선과 燕나라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어디인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72§ion=sc6§ion2=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유주에 속한다)。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

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

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

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 <수경주>에 기록된 패수는 낙랑군에 속했으며 동류하는 강인데, 이병도의 일제식민사학은 서류하는 청천강을 패수로 비정했다.     © 역사복원신문


 
곧 이어지는 (23-4부)에서 예, 맥, 옥저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집니다.



기사입력: 2012/05/02 [17:38]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