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 동예, 예맥이 있던 곳은 원래 어디인가? (23-3부) | ||||||||||
옥저, 예, 맥은 낙랑군 땅으로 산서성 동남부와 북부 하남성 일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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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 원문) 12세 아한단군 재위 52년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에 외뿔 달린 짐승이 송화강(松花江) 북변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다 요하(遼河)의 좌측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후에 창해역사 여홍성(滄海力士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읊었다. “마을 교외 변한이라는 부르는 곳에 유난히 특이한 돌 하나 서있구나 받침은 무너지고 철쭉꽃이 붉게 피었고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가 푸르구나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져 흥망의 황혼에 서있구나 문헌으로 고증할 길 없으나 이 어찌 단씨(=단군)의 유적이 아니겠는가!” 을묘 29년(B.C1806) 청아(菁莪)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열한(列汗)으로 삼았다. 지난 (23-1,2)부에서는 위 원문에 나오는 요하와 창해군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23-3)부에서는 우리 귀에 익숙한 옥저(沃沮)와 예(濊), 맥(貊)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위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장문이라 2부로 나뉘어 연재합니다) 욕살은 한 지방을 다스리는 관직명인데, 중앙에서 관리를 임명하여 다스리던 지역을 자치권이 있는 제후국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인 것이다. 그리고 원래 예와 맥은 각각 다른 지역인데 우리에게는 예맥(濊貊)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예는 제천행사인 무천(舞天)을 행한 동예(東濊)로 알려져 있다.
맥[貊] : 1) 상고시대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 종족.(2) 고조선 시대, 강원도 지방에 있던 나라. 예맥[濊貊] : (1) 만주와 한반도 북동부에 걸쳐 살았던 고대 민족. 부여(夫餘)와 고구려 등이 그로부터 생겨났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東京)은 예맥의 옛 땅에 자리하였고 일명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다. (2) 상고시대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 나라. 만주와 한반도 북쪽의 예(濊)와 인접해 있어 이렇게 불렀다. (3) 우리 겨레의 조상을 통틀어 이르던 일반적 이름. 동예[東濊] : 상고시대에 함경남도 남부와 강원도 북부 지역에 있던 부족 국가. 족외혼(族外婚)의 풍습이 있었고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으며 호랑이를 신으로 섬겼다. 해마다 10월이면 무천(舞天)이라는 추수감사제(주:제천행사)를 지냈으며 명주나 삼베 따위의 방직기술이 발달하였다. 반어피(班魚皮), 과하마(果下馬), 단궁(檀弓), 표범 가죽이 유명하였다.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한반도 내 강원도와 함경도 지방에 있었던 부족국가라는 설명인데 과연 그럴까? 이는 민족반역자 이병도로부터 이어지는 식민사학계의 이론인 반도사관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않다. 그렇다면 과연 예, 맥, 옥저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도읍은 환도의 아래에 있고, 넓이는 방 이천리, 가구 수는 3만이다. (高句丽在辽东之东千里。南与朝鲜·濊貊,东与沃沮,北与夫余接。都于丸都之下,方可二千里,户三万。) 그 지형은 동북쪽이 좁고 서남쪽이 길어 천리가 가능하며, 북으로 읍루와 부여와 접하고, 남으로 예맥과 접한다. 호는 오천이며, 대군왕이 없어 세세토록 읍락이며 각기 장수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거의 같은데 때때로 다를 때도 있다. 한무제 원봉 2년(B.C109) 조선을 정벌해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사군으로 나누었는데 옥저성이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맥족이 거기를 침입해 구려(현)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소위 현토 옛 부이고, 옥저는 여전히 낙랑군에 속했다. (원문) 东沃沮在高句丽盖马大山之东,滨大海而居。其地形东北狭,西南长,可千里,北与挹娄、夫余,南与濊貊接。 户五千,无大君王,世世邑落,各有长帅。其言语与句丽大同,时时小异。汉初,燕亡人卫满王朝鲜,时沃沮皆属焉。 汉武帝元封二年,伐朝鲜,杀满孙右渠,分其地为四郡,以沃沮城为玄菟郡。后为夷貊所侵,徙句丽西北,今所谓玄菟故府是也。 沃沮还属乐浪。 <주> 개마는 현의 이름으로 현토군에 속하고,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 서쪽에 있다. (《后汉书东夷传》东沃沮在高名骊盖马大山之东,《注》盖马,县名,属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 예와 옥저와 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 기자가 예의와 누에치기를 가르쳤고 또 8조의 가르침을 만들었다. 그 사람들은 도둑질 할 생각을 안했고, 문이 없이 열어놓고 지냈다. 부인들은 정숙하고 믿음이 있으며, 변두(도마)를 사용하며 음식을 지었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준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 나라가 손자 우거에까지 전해졌다. 한무제 원삭 원년(B.C128) 예의 임금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가구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러 예속하기를 청하여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했다가 수년 뒤 없앴다. 한무제 원봉 3년(B.C108)까지 (번)조선을 없애고 낙랑, 임둔, 현토, 진번으로 나누어 4군을 설치했다. 한소제 시원 5년 임둔과 진번을 낙랑과 현토에 병합했다. 현토는 옮겨 구려(현)로 돌아갔다. 단단대령부터 이미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했다. 이로써 그 땅이 넓고 멀어 고개 동쪽을 7현으로 나누었고,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다. 箕子教以礼义田蚕,又制八条之教。其人终不相益,无门户之闭。妇人贞信。饮食以笾豆。其后四十余世,至朝鲜侯准自称王。 汉初大乱,燕、齐、赵人往避地者数万口,而燕人卫满击破准,而自王朝鲜,传国至孙右渠。 临屯、玄菟、真番四郡。至昭帝始元五年,罢临屯、真番,以并乐浪、玄菟。玄菟复徙居句骊。自单单大领已东,沃沮、濊貊悉属乐浪。 后以境土广远,复分领东七县,置乐浪东部都尉。 조선현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은 지명인 조선현과 고구려현을 때때로 나라인 조선과 고구리로 해석해 엄청난 역사왜곡을 해왔다. 우리가 위 <삼국지 동이전>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맥은 고구리의 남쪽으로 낙랑군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 역시 낙랑군 땅에 있는데 그 위치가 예맥의 동북쪽임을 알 수 있다.
낙랑군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낙랑군에 속한 패수의 위치를 추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즉 낙랑군은 황하 북부 하남성 일대에 있었다. (아래 컬럼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 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 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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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5/02 [17:38]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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