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삼국지 조조의 시로 본 창해는 어디인가?

설레임의 하루 2012. 5. 4. 00:54

*출처:역사복원신문 

 

 

 

 

삼국지 조조의 시로 본 창해는 어디인가? (23-2부)

진시황 만리장성(갈석산)과 발해의 위치를 밝힌 조조의 시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2/03/29 
(원문) 12세 아한단군 재위 52년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에 외뿔 달린 짐승이 송화강(松花江) 북변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다 요하(遼河)의 좌측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후에 창해역사 여홍성(滄海力士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 시 한수를 읊었다.
“마을 교외 변한이라는 부르는 곳에 유난히 특이한 돌 하나 서있구나
받침은 무너지고 철쭉꽃이 붉게 피었고 글자는 이지러져 이끼가 푸르구나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져 흥망의 황혼에 서있구나
문헌으로 고증할 길 없으나 이 어찌 단씨(=단군)의 유적이 아니겠는가!”

을묘 29년(B.C1806) 청아(菁莪)의 욕살인 비신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貊城)의 욕살인 돌개를 봉하여 열한(列汗)으로

삼았다. 


창해역사 여홍성의 고향인 창해군은 어디일까?

지난 (1부)에서는 창해역사 여홍성과 장량이 진시황을 저격한 박랑사의 위치와 미수에 그친 그 저격상황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창해공(滄海公) 여홍성의 창해는 과연 어디일까?

이 창해를 밝히면 위 <단군세기> 원문의 요하가 어디인지 저절로 알 수 있게 된다.

참고로 창해는 기록에 따라 滄海 또는 蒼海로 한자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같은 지명으로 보인다. 

먼저 <중국백과사전>에 언급된 창해군에 대한 역사연혁은 다음과 같다.
(번역) 창해군 : <한서 무제기>에 “원삭 원년(B.C128) 가을 동이족 예의 임금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한 곳을 창해군으로 했다.

3년 봄에 창해군을 없앴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건은 “예맥은 진한의 북쪽에 있고,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고, 동쪽 끝이 대해이다.”고 주를 달았으며, 안사고는 “남려라는 자는 예의

임금 이름이다.”는 주를 달았다.
<사기 평준서>에는 “팽오가 예와 조선을 돈으로 사서 창해군을 설치했다.”라고 전하며,
<한서 식화지>에는 “팽오가 예맥·조선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했다.”고 전한다.
범엽이 쓴 <후한서 동이전>에는 “원삭 원년 예의 임금 남려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는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도착해 내속되었다.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이라 했고, 수년 뒤 폐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모든 설이 같지 않다.
복건의 위치 설에 의하면, 창해군의 관할지는 당연히 한나라 무제 원봉 3년(B.C108)에 설치한 임둔군(=한사군)을 포괄한다.

역사서의 기록이 간략한 연유로 그 세운 정황을 고증하기 어렵다. 

(원문) 苍海郡 : <汉书武帝纪>记载:元朔元年秋,“东夷薉君南闾等口二十八万人,降为苍海郡”,“三年春罢苍海郡”。

服虔注:“秽貊在辰韩之北,高句丽、沃沮之南,东穷于大海。”颜师古注:“南闾者,薉君之名。”

<史记平准书>云:“彭吴贾秽、朝鲜,置沧海郡。(則燕齊之間 靡然發動)”<汉书食货志>云:“彭吴穿秽貊朝鲜,置沧海郡。

”范晔<后汉书东夷传>则说:“元朔元年,濊君南闾等衅右渠,率二十八万口诣辽东内属。武帝以其地为苍海郡,数年乃罢。

”诸说不同。案服虔所说,苍海郡辖地应包括武帝元封三年所置的临屯郡。由于史籍记载简略,其建制情况已难以考证。

위 역사연혁에 대한 필자의 주는 다음과 같다.
* 주1 : 아래 <사기 평준서>의 문구 뒤에는 다음의 일부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則燕齊之間 靡然發動)”

즉 창해군은 연나라와 제나라 부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주2 : 팽오가 돈으로 산 조선은 나라가 아니라 아래 <한서지리지>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25개현 중 하나인 조선현을 말하는 것이다.

예맥의 동쪽 끝인 대해 즉 창해는 발해(渤海)로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큰 내륙호수를 말하는 것이다.

(乐浪郡 낙랑군)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유주에 속한다)。

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조선),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

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昭明,高部都尉治。

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

夫租。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창해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번역) 창해군 : <한서>에 팽오가 예맥과 조선을 뚫어 창해군을 설치했다. <사기>에서 창해군이라 한 것을 후에 임둔군으로 했다.

(지금의 압록강과 동가강의 두 강에 이르는 흥경 부근의 땅이다. 혹 소위 창해군은 지금의 한반도 남부에 있다.)
(원문) 沧海郡 : 汉书彭吴穿秽貊、朝鲜置沧海郡,史记作苍海郡,后为真番郡,

(今辽宁省鸭绿、佟佳两江及兴京附近之地,或谓沧海郡当在今朝鲜南部。)
* 편집자 주 : ( ) 안의 지명 설명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으로 사실과 다르다. 

즉 창해군은 한사군(漢四郡)의 핵심인 낙랑군 지역에 있었으며, 번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였던 패수(浿水) 근처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패수는 연나라 장수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하며 건넜던 강이며, 한 무제와 번조선 우거왕과의 한사군전쟁의 주 무대였으며, 고구리의

남쪽 경계라고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패수현과 조선현이 속한 낙랑군의 위치는 황하북부 하남성 일대이다.
(패수와 조선현과 발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아래 싸이트 참조)
(제목) 조선과 燕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어디인가?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72§ion=sc6§ion2=
(제목) 동북공정의 핵심은 지명을 국명으로의 역사왜곡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689§ion=sc6§ion2=
(제목) ‘발해’를 지명조작하여 역사왜곡한 중국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150§ion=sc7§ion2=

결론적으로 창해공 여홍성은 황하북부 하남성 출신으로 박랑사 부근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시황을 저격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가 식민사학계의 이론대로 강원도 강릉 출신이라면 절대로 이런 일을 기획할 수도 실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여홍성이 보고 시를 읊었다는 순수관경비가 세워진 요하도 황하변 하남성에 있는 강일 수밖에 없다. 

▲ 한사군은 원래 황하변 하남성에 있었다.

갈석산과 패수의 지명이동으로 하북성과 한반도로 옮겨져 해석되고 있다.  



조조의 시로 본 창해는 어디인가? 

또한 창해라는 지명은 <삼국지>의 주인공인 조조의 시 ‘관창해(觀滄海)’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 시가 어떤 시인지 아래와 같이 <중국백과사전>의 설명을 보기로 하자.
(번역) <관창해> : 건안 12년(207) 9월 북쪽으로 오환을 정벌하고, 원소의 잔류부대를 소탕하는 승리를 거둔 후 돌아오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해(海)를 바라보며 자연의 경치를 노래한 4언시이다.

중국고전의 서경시 중 비교적 일찍 출현한 명작이다.
(원문) 《观沧海》: 是建安十二年(207)九月曹操北征乌桓,消灭了袁绍残留部队胜利班师途中登临碣石山时所作。

这首四言诗借诗人登山望海所见到的自然景物,描绘了祖国河山的雄伟壮丽,既刻划了高山大海的动人形象,

更表达了诗人豪迈乐观的进取精神,是建安时代描写自然景物的名篇,也是我国古典写景诗中出现较早的名作之一。

东临碣石,以观沧海  (동쪽으로 와 갈석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네)
水何澹澹,山岛竦峙  (물은 어찌 저리 담담하고 산과 섬은 우뚝 솟아있도다) 
树木丛生,百草丰茂  (수목이 울창하고 백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구나)
秋风萧瑟,洪波涌起  (가을바람 소슬하니 큰 물결이 이는구나)
日月之行,若出其中  (달과 해의 운행도 그 속에서 나오고)
星汉灿烂,若出其里  (은하수의 찬란함도 그 속에서 이는 듯)
幸甚至哉,歌以咏志  (다행히 내가 보아 그 뜻을 노래하노라) 

위 시에 대한 <중국백과사전>의 해설은 다음과 같은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갈석산의 위치와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알려진 임조(臨兆)=롱서(曨西)의 원래

지명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갈석산은 대대로 고대중국과 동이족의 경계로 기록되어 있으며, 롱서는 진시황 만리장성의 역사왜곡을 위해 현재 서안 서쪽의 감숙성

남부로 옮겨져 있는 지명이다.

참고로 진시황이 쌓은 장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기 진본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몽염의 30만 대군으로 하여금 북쪽의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얻어 장성을 쌓았는데 임조(=롱서)

에서 일어나 요동까지로 길이가 만여리이다.

(<史记秦纪> 始皇并天下,使蒙恬将三十万众,北逐戎狄,收河南,筑长城,因地形开附制塞,起临洮至辽东,处袤万余里)”
주: 여기서의 하남은 황하변 하남성을 말하는 것이다.
갈석산과 만리장성 역사왜곡에 대한 상세한 것은 아래 싸이트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제목) 진짜 갈석산은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230§ion=sc6§ion2=
(제목) 진시황은 지금의 만리장성을 쌓은 적이 없다
http://www.historynews.kr/sub_read.html?uid=214§ion=sc6§ion2=

▲ 원래 산서성 남단 갈석산과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던 진시황 장성이 지금의 만리장성으로 왜곡돠어 있다.

진장성의 서쪽 기점인 롱서가 산서성 서남단에서 감숙성 남부로 옮겨져 있다.     © 역사복원신문



(중요한 부분만 번역) 해설 :

<관창해>라는 제목은 후세사람이 붙인 것이고, 원래는 <보출하문행>의 제1장으로 혹은 <롱서행>이라고도 하며 한락부 중 <상여가.금주곡>

에 속한다.

하문은 원래 낙양 북면 서쪽 머리의 성문이며, 한나라 때는 하문으로 칭했으며 위.진 때는 대하문이라 칭했다.

조조는 이 작품을 <송서.락지>의 <대곡>에 넣어 제목을 <갈석보출하문행>이라 지었다.

이 시는 건안 12년(207) 북쪽 오환을 정벌하고 승리를 얻어 돌아오는 도중에 지었다.
(원문) 解说 : 《观沧海》是后人加的,原是《步出夏门行》的第一章。《步出夏门行》,又名《陇西行》,属汉乐府中《相如歌·瑟调曲》。

夏门原是洛阳北面西头的城门,汉代称夏门,魏晋称大夏门。古辞仅存“市朝人易,千岁墓平”二句(见《文选》李善注)。《

乐府诗集》另录古辞“邪径过空庐”一篇写升仙得道之事。曹操此篇,《宋书 · 乐志》归入 《大曲》,题作《碣石步出夏门行》

从诗的内容看,与题意了无关系,可见,只是借古题写时事罢了。诗开头有“艳”辞(序曲),下分《观沧海》、《冬十月》、《土不同》、

《龟虽寿》四解(章)。当作于公元207年(建安十二年)北征乌桓得胜回师途中。 

위 해설에서 보듯이, 우리는 조조가 지은 시의 제목으로부터 갈석산은 낙양에서 걸어서 갈 정도로 가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갈석산에 진시황 장성의 서쪽 기점인 롱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조의 시에 등장하는 갈석산은 지금의 중조산으로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큰 산이었다.

조조가 갈석산을 올라갔는지, 아니면 갈석산 건너편에서 갈석산을 보고 읊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碣石步出(낙양에서 걸어서 갈석)이라는 용어로 보아 하남성 낙양 북쪽에 있는 황하변에서 건너편에 있는 갈석산을 보고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조의 위 시는 시인의 감성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조조가 북쪽 오환족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는 것은 후대의 역사조작으로 보인다.

참고로 오환족(烏桓族)은 글자 그대로 까마귀 환족으로 고구리(高句麗)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 진시황, 한무제, 조조, 수양제, 당태종 등 중국의 유명한 9명의 황제가 올랐다는 갈석산은 원래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지금의 중조산인데, 이를 각각 하북성과 한반도 황해도에 있는 것으로 역사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가짜 갈석산(해발 695m)의 모습.

중국은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조조의 시 '관창해'를 이곳에 새겨 놓았다.  

 

▲ 갈석산에 올라 '관창해'라는 시를 읊었다는 조조의 시를 하북성 가짜 갈석산에 새겨 놓았다.  물론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창해에 대한 부연설명을 다음과 같이 했다.
(번역) 창해 : 창해라는 문구는 큰 바다를 가르킬 수도 있으나 해수의 색을 말하는 것이다.

여갈홍의 <포박자.궁달>에 나오는 “우물 안 개구리는 창해를 알지 못한다.”의 창해는 대해로 역시 동해의 별칭이다.

본 시의 창해는 동해를 가르키는 것이다.

<초학기>의 여섯가지 해석 방법에는 “고대의 동해는 발해를 칭하는 것으로 역시 소위 창해로 통한다.

여기서 말한 동해는 중국동부해역으로, 지금의 절강성 동쪽 해역인 동해와 같지 않다.”
(원문) 沧海 : “沧海”一词,可泛指大海,因为海水苍色,一望无际,故称。如葛洪《抱朴子·穷达》:“井蛙之不知苍海”。苍海:即沧海,

大海。“沧海”又作东海的别称。本诗“东临碣石,以观沧海”,“沧海”指东海。《初学记》六解释道:“按东海之别有澥,故东海共称渤海,

又通谓之沧海。这里说的东海泛指我国东部海域,与今天特指浙江以东的海域“东海”不同。 

즉 조조의 시에 나오는 창해는 고대에 창해 또는 동해라고도 불렸던 하남성 동부에 있는 발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푸른색

바다 즉 낙양 북쪽을 지나는 황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 해석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고대 중국의 동해가 하남성 동쪽에 있던 발해라는 사실이고, 지금의 절강성 앞바다가 고대 중국의 동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단군세기>와 <북부여기>에 기록된 창해역사 여홍성에 관한 기록이 주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고대역사강역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엄연히 기록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를 위서 운운하는 식민사학계를 바라보노라면 웃음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니들이 그러고도 문학박사냐? 이 나쁜 者들아! 

▲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던 큰 내륙호수인 대야택은 고대 중국의 동해였던 발해로 일명 창해라고도 불렸다.                                        

      © 역사복원신문


이어지는 (23-3)부에서는 위 기록에서 숱하게 언급된 예, 맥, 옥저가 어디인지 밝혀집니다.



기사입력: 2012/03/29 [15:12]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