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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스페셜 비판 (광개토대왕 비문 재해석 Part 2/`부락`과 `영`에 대하여)

설레임의 하루 2012. 4. 18. 09:31

영(營)이라는 한자는

宮(궁)+熒(형)을 합친 글자입니다.

 

궁(宮)은 건물 안에 방들이 이어져 있는 모양이고

형(熒)은 촛불 또는 등불을 의미하는 글자입니다.

 

따라서 영(營)자는 궁궐 안에 많은 방들이 있는데

이들을 촛불이나 등불로 밝히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영(營)은, 보(堡)<새(塞)<위(衛)<관(關)<영(營)<성(城)의 순서가 말해주듯

성(城)보다는 작을 수 있지만 오늘날 군대의 연대(聯隊)급에 해당하는 군대의 단위로

고대로 부터 사용되고 있는 글자입니다.

 

다음은 영(營)에 대한 역사의 기록 중 일부입니다.

 

三國史記 雜志第九 신라의 병제

諸軍官

將軍共三十六人 掌大幢四人 貴幢四人 漢山停(羅人謂營爲停)三人 完山停三人 河西停二人 牛首停二人

 

여러 군관(諸軍官)

장군(將軍)은 모두 36명이었다. 대당(大幢)을 맡은 장군은 4명, 귀당(貴幢)에 4명, 한산정(漢山停)<신라 사람들은 영(營)을 정(停)이라고 하였다.>에 3명, 완산정(完山停)에 3명, 하서정(河西停)에 2명, 우수정(牛首停)에 2명이었다.

 

[1417년(태종 17)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영(營)을 이곳 병영으로 정했을 때 쓸 만한 나무는 모조리 다 베어 버렸으나...]

 

[유난히 능행이 잦았던 숙종은-중략-종래 4영(營)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만들어 5영(營)을 완성하기도...]

 

[고종은 재위 17년(1880)-중략-군제도 5영(營)에서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2영(營)으로 개편...]

 

[계백은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신라군에 대비 3개의 영(營)을 쳤다고...-삼국사기 백제본기]

 

[부산 수영구는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던 곳으로 수군의 ‘水’, 절도사영의 ‘營’을 따서 수영구(水營區)가...]

 

[통영시(統營市)의 유래는 1604년 조선 선조 37년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지금의 위치에 세운 것으로부터...]

속오군은 임진왜란중 훈련도감 설립 뒤인 1594년(선조27)에-중략-속오군의 편제는 기효신서를 따랐는데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구성되었는데, 각 부대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5人→1伍 (5인)

2伍→1隊 (10인)

3~5隊→1旗 (30~50인)

3~5旗→1哨 (90~250인)

3~5哨→1司 (270~1250인)

3~5司→1營 (810~6250인)

 

속오군의 최상부 단위인 영(營)에는 최고 책임자로서 영장(營將)이어서 해당 영의 군사를 통솔하였다. 하부편성인 초(哨), 기(旗), 대(隊)는 면리(面里) 이하의 편제로서--하략--

 

이러한 엄연한 기록이 있음에도 KBS 역사스페셜은,

‘영(營)은 초원 가운데 있는 유목민들의 마을을 의미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화면에 등장하는 중국 촌부가 하는 말은

“여기는 대영자촌(大營子村/대영자 마을)입니다.”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영(營)’이 ‘마을’이라는 말로 쓰인다면서,

이곳 사람들에겐 그게 아주 친근한 말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달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바꾸자면 “여기는 신촌(新村)입니다” 라고 말을 했는데도

KBS 역사스페셜은 “신(新)은 마을을 의미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이런 민가(民家)를 다 쳐부순 겁니다”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의도된 오역(誤譯)을 연출해가면서까지 시청자들을 설득하고 있는 셈입니다.

 

학자 분들께서 반성하셔야 할 대목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태왕비(太王碑)에 새겨진 '부락(部洛)'의 '락(洛)'은...

우리가 부락(部落)이라고 할 때의 '락(落)과 비슷하긴 하지만 전혀 다른 한자(漢子)입니다.

 

     洛          落

太王碑      部落 

 

Beef(쇠고기)와 Beep(삐삐~)는

철자 하나 빼곤, 나머지가 모두 같아 비슷하긴 해도, 이 두 단어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부락(部洛)'을 부락(部落)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완전한 오역(誤譯)인 것이며

이는 역사에 대한 중대한 결례(缺禮)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학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의심받기에 충분합니다.

 

태왕비(太王碑)를 세운 장수왕[長壽王/AD394~491]은,

 

부왕이신 호태왕(好太王)께서, 당시 거대한 유목지의 본거지이며

6~700곳이나 되는 영(營)을 거느린, 대규모의 세 'BULAK'을 치신 것이기에

그러한 사실을 비문에 새겨 후대에 알리고자, '부락(部洛)'이라고 정확히 구분하여 

바르게 비문에 새기셨음에도, 우리가 [오늘], 이를 바로 잡아 후대에 알리지 못한다면

 

[어제]까지 저지른 잘못을,

[오늘], 또 다시 반복하는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wellu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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