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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Kankardesh (칸카르데쉬)

설레임의 하루 2012. 5. 2. 00:15

 

(한국전쟁에 참가한 터어키군 - 사진 구글에서 발췌) 

 

 (2002년 한-일월드컵 3.4위전 후 터어키팀과 나란히 행진.)

 

어제가 한국정쟁이 발발한지 한갑자 그러니까 만60년 되는해 였다. 전쟁의 성격으로 따지자면 미-소의 대리전이요 중공은 중공군의 현대화를 위해 한국전쟁에 참가해서 거의 100만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내었다. 6월초 부터 KBS에서 방송한 <한국전쟁>이란 실록영상을 보면 미국의 역할과 소련의 역할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근자에 불거진 이념논쟁에서 북침설을 제기한 사람들에 대해서 필자는 강하게 No 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필자의 부친과 모친이 38선에서 가까운 지역에 살았기에 그 진위를 이미 듣고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침설이 나오는 정황을 보면 50년이 넘어 기밀 해제된 미국문서보관소의 기록을 보면 미국과 소련이 서로의 헤게모니 점유를 위해 그리하도록 유도한것으로 보인다. 서로에게 빌미를 제공하도록 상황을 그리만들어갔다는 이야기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전쟁이 나도록 힘이 보잘것 없었던 대한민국 그리고 대한민국인의 죄요 의도적 공산주의 지배야욕을 만들어낸 스탈린이 두번째 죄인이요 그 사이에서 권력을 움켜쥐려던 김성주가 매우 몹쓸 죄인이며 전쟁이 일어나도록 상황적으로 느슨함을 보여준 미국이 그 죄인이며 그 사이에서 반사이익을 얻으려던 중공이 그 죄인이다. 소련,미국,중공 욕해 봐야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쟤들이 몽둥이로 나를 때렸어"라고 우는 철부지와 같은 어리석은 하소연 뿐 일것이다.  

 

한국전쟁에서는 철저한 대리전의 양상을 띈다 소련은 김성주를 보병으로 무장시켜 연합군의 총알 받이를 만들었고 중공도 그렇게 이용하였으며 그들 자신은 군사고문단과 공군으로 지원하여 1000여대가 넘는 미군 전투기 폭격기들을 격추시켰다.(실제로 공중전에서 주로 평안북도 영공에 나타난 소련제 미그15는 미국이 최종 개발한 F86 세이버도 상대하기 힘든 기종이었다)  미국 또한 전쟁에 참가한 16개국의 보병들을 미군의 호위 또는 척후 임무로 투입 하였다.전장내에서도 이이제이전법을 쓴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터어키군의 참전은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모병 5000명 정원중 3일만에  15000명 이상이 지원하여 그 지원 열기는 대단하였는데 지원 목적은 첫째로 한국이 역사적으로 그들과 형제라는 연대감,두번째는 미국이 주도하는 NATO일원이 되기위한 옵션 수행 때문이었다. 5060명의 터어키군은 한국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터어키 에스켄데룬항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여 전쟁을 수행하고 평안북도 덕천군의 군우리 전투에 참가하여 중공군의 투입으로 인하여 철수하는 미군의 후방을 확보하다 700여명이 전사한다.   

 

1.4후퇴로 인해 남으로 밀려간 연합군이 재북진하던 시기에 터키군은 경기도 남부 금양장리 전투에서 총탄이 떨어지가 그들의 특기인 백병전으로 12명의 터어키군이 1900여명의 중공군을 섬멸한다. 그 이유는 무었인가 바로 이슬람인들에게 내려오는 백병전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의 속담중에 "피를 흘리지 않은 땅은 조국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고하고 죽기살기로 싸우는 그들의 전통은 이러한 연유에서 기인한다 전한다.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용맹한 흉노의 전통을 이어받고 7세기 시기에 수와 당의 이간책으로 동서로 갈라진 돌궐의 전통이 서진하여 오스만 튀르크제국을 이루고 아랍의 대부분을 지배했었던 대제국의 위대한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수 없다.  

 

그들은 전쟁중에도 정이 깊은 일면이 있어 전쟁고아 아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모습이 남달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원근방에 터어키 고아원을 세우고 1960년대까지 그들을 보살폈다 이러한 모습은 미국 이외에 어느 나라에서도 행하지 못했던 선행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어디서 왔을까 ? 터어키어 한 단어에 압축된다  

 

바로 Kankardesh ! (칸카르데쉬 - 피를나눈형제!)

 

필자는 한국인이 모르는 터어키와 한국이 왜 형제인지 본인의 글 <고구려>에서 설명한적이 있다 다시 인용해보면  터키는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우방이. 터키는 한자로 突厥(돌궐)이라고 표기한다. 몽골과 함께 중국에서 匈奴(흉노)라 칭하던 민족의 하나로,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다. 고구려 전성기엔 글안, 여진(숙신)과 마찬가지로 일부는 고구려의 基層(기층)민중에 속했다.

돌궐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668), 고구려의 遺民(유민)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과 특별히 긴밀해졌다.고구려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서민들은 초기엔 唐(), 후엔 신라의 지배를 받으면 한반도에서 살아갔으나, 족계급 등 중상류층 가운데 일부는 唐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일부는 몽골, 글안, 돌궐 등 타민족에 섞여 살다 682년 동돌궐이 올란바토르(현 몽고의 수도)에 「돌궐 제2제국」을 수립할 때, 여기에 참여했다. 그 숫자는 인구의 절반인 20만명이 넘었다는 설도 있다.

돌궐의 왕은 「單于(선우)」 또는 「可汗(가한)」이라고 불리며 그 아래에 左賢王(좌현왕), 右賢王(우현왕)었다. 돌궐 제2제국의 單于는 고구려 遺民을 우대하여, 고구려 왕족의 일원이며 遺民의 수장인 高文簡(고문간)高麗王(고려왕)으로 봉했다. 왕은 둘 밖에 없는 것이 돌궐의 전통이었으나, 고구려 유민의 숫자가 너무 많으이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王을 한명 더 늘려 고구려인을 앉힌 것이다. 돌궐은 특히 고구려 遺民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首長(수장)인 제사장에 임명했다. 이를 탕구르, 또는 탱글리 라고 했다고 한다. 고조선시대 샤머즘의 首長 호칭이 단군이었다는 설을 인정한다면 아마도 같은 계통의 단어가 아닐까 싶다.


돌궐은 7세기에 톤유크라는 사람이 중앙아시아 소그드語 계통의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했다. 고대 터키어로 기록된 돌궐 碑文(비문)이 몽골 오르혼江, 남시베리아 예니세이江 상류 및 서북 몽골지방에 세워져 있다.(히 오르혼 江 비문은 1893년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이 현대 터어키어로 해독을 함으로써 터키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논쟁을 종식시켰다. 터키의 역사첵 가운데 고대사 부분을 보면 흉노와 돌궐족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자신들의 조상이 흉노, 돌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碑文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다면 많은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현재의 터키에서 수천리 떨어진 몽골고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된 돌궐은 8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의 용병으로 南下(남하)한다. 사라센은 이슬람교 창시자 모하메트의 후계자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 이룩한 대제국 이었다.  용병에 불과했던 돌궐은 11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을 멸망시키고 셀주크투르크 제국을 건설했다. 징기스칸의 몽골에 패해 그들의 지배를 받던 투르크는 13세기 말, 다시 오스만투르크를 세워 20세기 초반까지 7세기를 이어오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국민혁명으로 멸망했다. 동서양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터키는 1차 세계전에서 독일편을 들다 독일이 패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소국으로 전락했다.

터키는 과거 고구려의 기층민중이었으며, 「돌궐 제2제국」을 같이 한 우리 한민족에 대해 깊은 유대감과 함께 형제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625때 북괴가 남침하자,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군대(14936, 전사 721, 부상2147)를 파견해 우리를 도왔던 것이다. 파병이 늦어지자, 터키의 고등학생들이 『왜 형제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면서 데모를 벌였다는 말이 있다. 7세기 때부터 문자를 갖고 있는 그들은 역사를 통해 터키와 한민족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실제 唐書와 隋書의 내용을 보면 북쪽인 만주는 차치하고서라도 고구려의 남쪽 領地는 황하의 남쪽인 하남유역에 이르며 고구려가 패망한 이후에도 그 이전부터 고구려와 민족적으로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돌궐은 민족적으,그리고 정치적 적국인 唐에 대한 정치적 제어를 위하여 전 고구려 막리지이자 돌궐 首長의 사위이기도 했던 <高文簡>이 돌궐과 함께 당과의 전쟁을 벌이다 당의 이간책에 말려 돌궐이 분열되어 그 일부가 패하고 당에 속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위 인용글에 대한 사실 확인을 위해 필자가 舊唐書를 찾아보니 (터어키의 前身)과 고구려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내용을 찾아내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구당서 권144 돌궐전() – 고구려 막리지 高文簡의 封地는 河南.

睿宗天祚,默啜又遣使請和親。制以宋王成器女金山公主許嫁之。默啜乃遣其男楊我支特勒來朝,
授右驍衛員外大將軍。俄而睿宗傳位,親竟不成。
예종(ad662-716)이 왕위를 이었다. 묵철이 시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송왕으로 제수하고 성기의 딸을 금산공주로 하여 허씨에 시집 보내었다. 묵철은 그의 아들 양아지특륵을 조정에 보내니 우효위원외대장
군으로 제수하였다.  

初,默啜景雲中率兵西擊娑葛,破滅之。契丹及奚,自神功之後,常受其征役,其地東西萬餘裡,控弦四十萬,頡利之後最為強盛。自恃兵威,虐用其眾。默啜老,部落漸多逃散。開元二年,遣其子移涅可汗及同俄特勒、婿火拔頡利發石阿失畢率精騎圍逼北庭。右驍衛將軍郭虔瓘嬰城固守,俄而出兵擒同俄特勒於城下,斬之。虜因退縮,火拔懼不敢歸,其妻來奔,制授左衛大將軍,封燕北郡王,封其妻金山公主,賜宅一區,奴婢十人,馬十匹,物千段。

明年,十姓部落左廂五咄六啜、右廂五弩失畢五俟斤及子婿高麗莫離支高文簡、睟跌都督崿跌思泰等各率其眾,相繼來降,前後總萬余帳。制令居河南之舊地。授高文簡左衛員外大將軍,封遼西郡王;睟跌思泰特進、右衛員外大將軍兼睟跌都督,封樓煩郡公。自余首領,封拜賜物各有差。默啜女婿阿史德胡祿,俄又歸朝,授以特進。其秋,默啜與九姓首領阿布思等戰於磧北。九姓大潰,人畜多死,阿布思率眾來降。

(상략)— 685년 십성부락 좌상오 돌육철, 우상오 노실필오사근과 그의 사위 고려 막리지 <고문간>, 협질도독 악질사태 등이 그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 들어왔다. 약 일만의 군막 정도 되었다. 그들을 하남의 옛 땅에 기거하게 하였다. 고문간은 좌위원외대장군 요서군왕에 봉했으며 협질사태는 특별히 진급시켜 위원외대장군겸 악질도독으로 하여 누번군공에 봉했다.----(하략)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의 영토가 하남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고 고구려가 한반도 이북과 만주지역 정도에 존재했었다는 왜곡된 기존의 역사적 내용을 계속하여 주장하려면 구당서의 이러한 내용을 부정하는 근거를 내놓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막리지의 옛 땅이 하남이었다는 사실인것이다 이래도 당서에 기록된 하남이 경기도 河南인가?. 또한 정도 고구려 패망 이후 8세기 정도 부터 지명변경이 있었음을 측할수 있습니다, 즉 太原이란 말그대로 큰 평원을 이야기함인데 지명적으로 산서성 남서부 汾河와 黃河가 만나는 광대한 평원을 고대에는 太原이라 했으며 이러한 근거는 지도에서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또한  遼가 동으로 이동하여 舊遼東이 遼西로 바뀌어 칭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막리지 <고문간>이 바로 돌궐(현 튀르크)로 넘어가 흉노의 일파인 돌궐을 이끈 터키고대사의 비밀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터키인들은 알고 한국인들은 모른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우리는 후안무치한것 아닌가? 그 후안무치는 바로 일본인에게 교육받고 하수인 노릇을한 한국의 국정교과서편찬자에서 비롯된것이다. 

 

심제 씀.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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