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스크랩] 서안의 대(臺)에 대한 의문과 낙랑군왕(樂浪郡王)에 관하여-

설레임의 하루 2012. 1. 28. 03:23

좌계님 글 잘 읽었습니다.
내시는 글마다 미쳐 남이 생각지 못하는 추론과 결론을 이끌어 내시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오늘날도 종교가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라는 것은 무시못할 지경인데,
봉건시대 왕권체제하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니 좌계님 말씀에 공감하는 바 큽니다.
기왕지사, 피라미드에 관하여 까지 언급해 주셔서 머리속에 있는 의문하나 꺼내 볼까 합니다.

 

 

--서안의 대(臺)에 대한 의문--

 

 

함양고적도 부분. 

 

함양고적도를 보면 두우성 밖의 동쪽과 서쪽에 의문스러운 구조물이 있습니다.
서쪽에 있는것은 영대(靈臺) , 동쪽에 있는것은 한승로대(漢承露臺)라고 적고 있지요.
건축적인 면으로 보면 대(臺), 또는 노대(露臺)란 지붕이 없는 높은 단상, 연단이나 옥상, balcony등를 말하는 것인데 저기 그려진 대(臺)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거대한 황제릉을 반형으로 자그마하게 그려놓은것에 반해 저 대(臺)는 성문이나 누각등, 웬만한 건물보다 큽니다. '咸陽'이라는 글자 위의 반원형이 황제릉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영대나 한승로대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는데 영대(靈臺)라는 말은 주나라 때

영대(靈臺)라는 시에서 처음 나온다는 정도가 고작입니다.
명칭으로 보아 서쪽의 영대는 주(周)시대에 만들어 진것 같고 한승로대는 서한대에 만들어 진 듯합니다만, 성(城)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구조물로  보여 두우성이 만들어 지기 훨씬 이전에 만들어 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수 있겠지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예 부터 피라미드형 구조물이 저곳에 있었는데 무엇인지(무덤인지 제단인지)를 몰랐다. 이름붙이기를 그저 대(臺)라고 했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해 본 것이고 저 구조물이 현재 서안이나 함양지역의 장방형 고분의 위치와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궁성도( 唐宮城圖)부분.

 

위의 당궁성도를 보면 역시 경복대라는 대(臺)가 서 있지요.
좌우대칭으로 이루어진 성 건축물들의 배치로 보아 당나라 때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이나
이 대(臺)를 끼고 궁성이 건축되었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진덕여왕릉이 있는 소릉도 부분. 

 

소릉도 부분에는 망릉탑(望陵塔)이라는 두개의 탑이 보이나, 이것도 우리가 아는 동양적인 탑과는 거리가 먼 형태를 하고 있지요. 탑이라기 보다는 대(臺)에 누각을 지은것인데,
현재 지나인들이 장방형으로 복원한 소호 금천릉의 능위에 누각을 세워놓은 모습과 똑 같습니다.
곽거병묘 위에도 누각이 서 있지요. 훨씬 후대에 세웠을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대(臺)가 위의 지도들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란지리지도 부분(1344)

 

1344년에 제작된 거란지리지도(契丹地理之圖)인데
현재의 요하동쪽에 이릉대(李陵臺)라는 대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릉(李陵)은 서한의 장수로 흉노와의 싸움에서 항복하자 무제(武帝)가  대노하여 그 일가를 몰살시킬 지경이 되었는데, 사마천(司馬遷)이 이를 만류하다 결국은 궁형에 처해진 얘기는 너무 유명하지요.
그런데 정작 이릉과  저 이릉대가 서 있는 곳과는 하등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이름이 잘못 붙혀진 것이지요.

 

대명구변만국인적노정전도 부분(1663)                                       역대분야지도고금인물사적( 1679)

 

위 지도들를 보면 이릉대는 태원서북쪽 안동위 근처에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이릉이 흉노와 싸운 지역이나 그가 감숙성 출신이라는 것등을 고려하면 위 지도상의 이릉대 위치가 맞겠지요.
거란지리지도가 시대적으로 훨씬 앞서긴 하지만 기원전의 인물이니 거란도 제작자가 잘못 알았을 것으로 봅니다.
서안의 대(臺)들처럼 능인지도 모르고 옛 기록에 이릉대에 관한 얘기가 있으니 저것이 이릉대 일것이다라는  추측으로 그려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거란도에 그려진 저 축조물은 바로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장수왕릉(장군총)을 그린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서안의 저 대(臺)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자료가 나와야 서안, 더 나아가 동북아 지역의
피라미드에 관한 의문들이 풀려질듯 합니다.
좌계님 말씀처럼 종교적 용도에 가까웠는지, 아니면 패권자의 위세에 의해 만들어 진 결과물인지 말입니다.

 

 

 

--낙랑군왕(樂浪郡王)이 주는 의미--

 

낙랑군왕이라는 봉칭(封稱)은 진평,선덕,진덕왕에게 내려 졌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단, 우리사서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 중, 낙랑군왕(樂浪郡王)이라는 봉칭을 처음 받은 진평왕은  문헌통고(마단립) 사예고에는

" 唐武德四年,王眞平遣使入朝。後三年,拜柱國,封樂浪郡王、新羅王。"  라고,

'낙랑군왕'과 '신라왕'을 구분한 기록도 있습니다.

두 직책을 겸직한 것으로 '낙랑과 신라'는 같은 대상을 지칭한것이 아니라 별개의 대상에

부여된 별개의 직명이라는 것이지요.

 

저 위의 소릉도에는 진덕여왕과 같이  석상을 만든 14개 번국왕에 들면서 묘(墓)를 만든 인물이 딱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진덕여왕릉 바로 우측에 있는 "아사나십발필(阿史那什鉢苾)" 입니다.
아사나십발필은 동돌궐의 우두머리인데, 구당서 3권 태종기에

"..初令天下決死刑必三覆奏,在京諸司五覆奏,其日尙食進蔬食,內敎坊及太常不擧樂。九月乙丑,賜群官大射于武德殿。 冬十月,右衛大將軍、順州都督、北平郡王阿史那什鉢苾卒。"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사나십발필의 봉칭은 순주도독(順州都督)이자 북평군왕(北平郡王)이었다는 것이지요.
북평이 어디냐하는 정확한 위치는 차지하고 현재의 하북성 북부 어딘가로 본다면 바로 낙랑과

근접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 두 군왕을 예로 들면 낙랑군왕이나 북평군왕이라는 봉칭은  한 민족이나 나라를 대표하는 우두머리인 군(君) 차원에서 붙혀진 봉칭이 아니라 당나라가 통치를 일임한 지역(郡)의 우두머리라는 차원에서 붙혀진 봉칭이었을 것입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왕의 자격하에 붙혀진 봉칭이라면 세대를 달리하는 둘, 또는 세명의 왕에게

내리 같은 봉칭을 부여한다는 것은 제가 아는 한, 기록에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다시말하면, 당이 고구려를 밀쳐내고 빼앗은 지역인 북평(北平)을 돌궐의 아사나십발필에게 통치를

맡김으로서 그 지역의 우두머리라는 북평군(郡)왕이 된것이고, 당이 백제를 밀쳐내고 빼앗은

옛 낙랑군(천진일대로 추정)을 진덕여왕에게 통치를 맡김으로서 낙랑군(郡)왕이라 봉칭한 것이라

봅니다.


아사나십발필은 자신의 국가인 동돌궐이외에 북평땅을 통치했던 것이고,
진덕여왕은 기존의 신라이외에 낙랑땅을 통치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낙랑땅과 북평땅은 당연히 당의 번국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상호 얻어지는 이득이

큰 탓이었을 것입니다.
당으로서는 툭하면 변방을 유린하는 고구려를 북평군왕과 낙랑군왕에게 막아내게 하는 효과는 물론,
꼬박 꼬박 조공을 받아 챙기는 이득이 이었을 것이고, 북평군왕과 낙랑군왕은 당이라는 동맹국의

뒷받침으로  고구려의 칩입을 막고 영토를 넓히는 이득이 이었다는 것이지요.
신라는 기존의 자국영토는 물론 낙랑땅도 다 같은 자국의 영토가 되고 진덕여왕은 이 모든 영토의

통치자임이 분명하나 당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통치를 진덕왕에게 일임한 낙랑만은 번국으로 관리하고,  그 지역의 통치자는 당연히 당 황제의 신하 격이니 낙랑군(郡)왕이라는 봉칭이 내려졌다고 봅니다.

정식 봉칭인 "신라낙랑군왕김진덕(新羅樂浪郡王金眞德)"은 ["신라"와  "낙랑군" 의 왕 , 김진덕]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지요.


아사나십발필의 경우, 동돌궐의 왕이면서 우위대장군,순주도독이라는 당의 신하직위를 겸하면서

북평군왕이니 더욱 위와 같은 상황전개가 설득력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14 번국 중에 확실하게 "나라이름+ 왕" 의 봉칭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고창왕우무위장군국지용(高昌王右武衛將軍麴智勇)" 과  "파라문제나복제국왕아나순
(婆羅門帝那伏帝國王阿那順 -인도북부)" , "언기왕돌기지(焉耆王突騎支)",  "구자왕가려포실포실필
  (龜玆王訶黎布失布失畢)" , "임읍왕범두리(林邑王範頭利-南夷秦時故林邑縣-월남)" 등 인데,
이들나라 보다 신라나 돌궐이 작거나 무력한 나라는 아니었을 것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가묘(墓)든 진묘든 석상을 만든 14개 번국왕들 중 유일하게 낙랑땅을 준 진덕여왕과 북평땅을 준

아사나십발필 만이 황제릉에 문,무신들과 함께 배장되었던 이유도 될것입니다.

 

 

--끝.

출처 : 향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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