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스크랩] 고구려.백제.신라는 지나대륙에서 개국하지 않았다

설레임의 하루 2012. 1. 4. 01:33

고구려.백제.신라는 지나대륙에서 개국하지 않았다

 

 

- 명나라는 고려 노비 주원장이 세운 나라,청나라는 신라 왕실의 후손이 세운 나라-

 

 

윤복현의 역사논단 2011-12-29

 
우리 민족사를 바로 연구해야 합니다.즉 해민족의 고유 영토인 해머리땅 한반도와 만주를 중심으로 동북아지역이 마고.환인.환웅.환검씨의 핵이 되는 지역입니다. 고로 단군조선 영역은 만주(진조선)를 중심으로 지나 동해안 지역(번조선)과 한반도.일본열도(마조선)이 중심지역입니다.  


 

 

유라시아 초원세력.아메리카 인디언.북극의 에스키모인들의 선조는 모두 동북아인들이다



 

고열가 단군임금을 마지막으로 단군3조선연방(전3한)이 붕괴되고 해모수 부여가 들어서게 된 후에 연나라에서 투항한 강도 위만세력에게 기자조선(번조선)을 강탈당한 기준세력이 서해를 건너서 남한지역에다가 마한을 상국으로 삼는 남3한연방(후3한)을 세웁니다.

고추모가 동부여에서 망명하여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어 부여7대 단군에 직위했으나 정치적 기반이 약한 바람에 를 추종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압록강 지역(환인)에서 선조들의 국호인 고리(고려)로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옛영토를 모두 회복하겠다는 다물을 국시로 삼았습니다.


 

대무신왕 때 자주노선을 견지하여 만주의 패권을 장악했고, 태조왕 때 요하를 건너 서안평과 번조선 땅을 다물하였다. 고구려 6대왕 '고궁'에게 태조라는 시호를 붙인 이유는 고구려가 동북아의 강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다졌기 때문이다. 송.원.명.청.고려.조선 등 개국시조에게 '태조'라는 시호를 붙이게 되었는데, 그 기원은 고구려 6대왕 태조 태왕으로 부터 시작한다.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는 강성해 졌다.

 

3대 대무신 태왕 때 복속을 강요하는 동부여의 대소왕을 죽이면서 만주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였고, 태조태왕 시기에는 요하를 건너 고구려 선조의 나라인 고리국이 있었던 서안평을 회복하였고 번조선 지역을 회복하여 10개성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흉노족에게 패하여 대홍안령 산맥에 거주하던 선비족이 2세기 이후 강성해져 지나대륙에는 선비족이 세운 5호16국 시대가 열리면서 고구려는 요하 동쪽으로 다시 영토가 축소되었다가 찰갑 개마무사 군대로 무장한 광개토태왕시기에 이르러 천하무적 고구려로 성장하여 만주.몽골.한반도.일본열도.지나대륙 북부와 동부 전역을 다물했습니다. 
 

 

 

 

 

 

부여왕의 아들이였던 구태가 세운 백제는 요동(구당서:"백제는 본래 요동에 있었다.")에 거주하다가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요동태수 공손강이 황해도로 이주하여 대방군을 세울 때 함께 서해를 타고 웅진(공주)에서 백제를 세우고(후한서-마한54국 속에 백제국이 들어 있다), 한강지역의 온조'십제'를 통합한 후에 마한의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마한 해상세력의 항해술과 선박제조술을 기반으로 지나 동.남해안 지역과 일본열도.동남아에 담로를 건설하여 아시아 해상제국이 되었습니다.


 

[북사][만주원류고] 등 지나문헌들이 기록하고 있듯이, 후한 말에 동명(부여의 고두막)의 후예 구태가 부여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강의 사위가 되어 100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대방의 옛땅(해머리땅 한반도-웅진-공주)에 나라를 세우니 동이강국이 되었다. 백제는 100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넜다는 '백가제해'에서 나온  국호다.

 

고구려에서 나온 온조는 대릉하 하류지역에다 소서노.비류가 세운 어하라에서 분가하여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인천으로 들어와 부천를 지나 서울 한강지역에 나라를 세우니 십제이고,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친 신민(고구려 제후국 어하라) 백잔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류세력도 나중에 십제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구태세력이 웅진에 세운 백제는 이잔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십제는 205년경에 구태세력에게 통합되었고, 구태왕통으로 바뀌면서 근초고대왕 시기에 한강지역은 백제연방의 중심지역이 된 것이다.

 

근초고대왕 시기에 백제연방에 복속하지 않는 마한세력을 정벌하게 되는데, 목라근자와 부여수(훗날 근구수대왕=응신천황)가 각각 1군과 2군의 사령관이 되어 마한의 영향권에 있던 전라도와 경상도지역을 정벌한 것이 그것이다. 부여수는 마한의 영향권에 있던 일본열도까지 평정하고 야마토왕조를 기반으로 백제담로시대를 열었고, 9년간의 백제왕노릇을 마치고 일본열도로 건너가 응신천황(고대 일본인들이 응신천황을 그린 아래 그림사진:백제옷을 입고 있다)이 되었다.

 

 

 

응신천황릉(위 오른쪽 사진:인덕천황릉에서는 공주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청동거울.환두대도 등 백제 유물들과 동일한 유물들이 나왔다)의 주인이 되는 근구수대왕은 태자시절에 마한세력이 세운 야마토 왕조의 왕녀와 부여수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인덕천황으로 백제의 왕인박사를 초청하여 백제의 학문을 일본에 전수하게 한 천황이다. 현재 일본천황가의 주관으로 백제의 개국 조상들인 온조.비류.구태.근초고왕.근구수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역사적이고 혈통적 배경인 것이다. 일본은 백제인 것이다. 




신라는 전한을 무너 뜨리고 세운 흉노계 신나라가 망한 후 한반도 망명한 흉노계 김알지 세력(진골)과 4세기 고구려전쟁중에 동해안을 타고 내려온 모용선비족(성골)이 세운 나라입니다.

흉노족을 흡수한 모용선비족은 신라 왕조를 세우고 고구려를 의식하여 김씨로 창씨개명합니다. 김원종으로 개명한 법흥왕 본명이 모진입니다.울진 봉평비문에 당시 법흥왕 이름과 많은 모씨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월주 신라방은 마한세력으로 신라왕이 되었던  석탈해 해상세력이 월주지역에 개척한 지역으로 고구려 문자명 태왕 시기에 지나지역의 백제담로지역을 차지할 때 천주지역으로 이주시킨 신라세력이기도 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민족사학을 운운하며 고구려.백제.신라가 지나대륙에서 개국했다는 논리를 펴는 역사 매니아들이 많은데, 사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전혀 어불성설이며 사학계에서 인정받지도 못할 뿐더러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논리밖에 안 됩니다.



청나라 황실사서[만주원류고]가 기술하고 있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영역 지도 -만주에서 동해안을 타고 내려 오면 신라와 일본열도로 이어 진다.흉노를 흡수한 선비족의 이주로다.

"곧 지금의 봉천奉天 요양遼陽으로부터 남으로 봉황성鳳凰城에 이르고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조선 함경 평안도 등에 이르는 곳이 모두 고구려 땅이다...오늘의 개원에서부터 광녕 금의 영원, 남으로 개평 복주 영해에 이르고 또한 동남으로 바다를 건너 조선의 전라 황해 충청도 등이 모두 백제이다...신라의 영토는 동남으로 오늘의 조선 경상 강원 두개 도와 서북으로는 곧바로 오늘의 길림吉林 오라烏拉에 이르고 또한 서쪽으로는 개원開元 철령鐵嶺에 가까워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로 개의 이빨처럼 튀어 나왔다. 그러므로 동북 동남으로 길게 뻗은 경계로 백제와 고구려 모두 가까이에 있다."고 [만주원류고]는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백제.신라는 지나대륙에서 일어난 나라들이 아니라,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어나 지나지역으로 진출한 나라들임을 알 수 있다. 지나대륙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 개국되었다는 역사논리는 지나국의 동북공정을 돕는 헛소리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지나 문헌들을 운운하면서도 내용 조차 이해 못하거나, 자위적으로 해석하여 대중에게 혼란을 주면서 해민족사를 망치는 자들이 있으니 경계할 일이다.

흑룡강.송화강 지역의 부여에서 나온 고구려는 압록강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고, 부여에서 나온 백제는 웅진(웅진)에서 나라를 세웠고,모용선비족은 4세기 말에 동해안을 타고 경주지역을 점령하고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시는 단군조선(대부여)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겠다는 국시(다물=담로)를 내세우며 만주.한반도지역과 번조선 땅인 지나대륙의 동해안지역과 지나대륙의 북부지역을 장악해 나갔다.

역시 부여에서 나왔으나 고구려.백제의 틈바니 속에 허덕이던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공멸시킨 후에 비로소 완전독립을 쟁취하였고 토번의 침략을 당하여 위기에 빠진당나라의 정세를 이용하여 만주까지 잠시 점유하기도 하였으나 대진국의 흥기로 대동강이남으로 물러 나야 했다.

고로 삼국통일이란 용어는 역사날조 용어이며, 통일신라시대가 아니라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가 맞다. 통일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우리 해민족의 구성원인 고구려의 계승국 대진국(발해:당나라가 부른 이름)을 제외시키는, 신라우월사관의 민족분단 용어가 된다.

 




전남 해남 출신의 주원장은 고려 귀족 청주 한씨의 노비출신으로 신분의 제약을 느껴 서해를 건너 지나대륙으로 이주하여 홍건족 반란을 주도하여 명나라 황제가 되었다. 주원장의 황후나 참모들이 모두 고려인들이다.



▲ MBC'서프라이즈'방송화면 자료

청주 한씨 문정공파 족보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麗妃 明 太宗 永樂帝 西成府院君永恭愼夫人 明 宣宗宣德帝上 同昭惠王后 德宗大王 西原府院君確丁巳誕降 甲子昇遐..." 청주 한씨 여비가 주원장의 황후가 되어 명나라 황제 영락제를 낳았다는 족보 내용이다.
 
지나대륙의 주인이 되는 황제 정도면 황제의 생가 정도는 널리 알려져야 상식이다. 그러나 주원장의 생가는 그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주원장이 지나대륙으로 이주해 온 고려인이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전라도 해남의 한영정집안의 머슴이었을 때 주인집 딸인 한여비와 눈이 맞아 지나국으로 도피하였거나 주원장이 지나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은 후에 여비를 불러들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나,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모친이며 주원장의 부인되는 여비를 낳은 문정공파 한씨의 족보에 고려 중엽에 왕후들(容信王后,容懿王后)를 배출한 고려 최고의 명문 대가다.
 
따라서 지나 사학계가 주원장의 황후 여비에 대해 공녀 운운함은 이미 앞에서도 기술한 바 홍건족의 민란이 일어나던 시기에 해당함으로 오히려 원나라에 공녀를 바쳤어야 했던 상황에 비하면 이미 명나라를 개국하기 전에 혼인을 하여 자식(영락제)을 낳던 연대상 혹은 조건상에서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민간 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지나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 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주원장의 출생지로 회자되는 곳이 우리 나라의 전라남도 해남 마을로 전해져 내려 온다.
 
이성계 아버지가 고려 당대 유명한 풍수지리가 '유현'으로부터 천하 명당이 전라남도 해남 바닷가 어딘가에 있음을 알아 내고는 급히 찾아가 보았는데, 수영을 잘 하고 털이 많고 피부가 붉그래해서 털복숭아라는 별명을 가진 주원장(초상화의 이미지와 동일)이라는 사람이 3년전에 자기 부모를 모신 후 지나지역의 '안휘'라는 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말년에 주원장의 유언에 의해 극비밀리에 해남에 묻혔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나국 화교들이 최고로 치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묘지라고 불리는 곳인 명효능이란 곳에는 터만 성대하게 궁궐같이 지어져 있을 뿐, 묘지가 없다.




금(김)과 청나라는 금나라와 청나라의 황실사서를 통하여 신라왕실의 출신의 고려인 김함보가 금나라 시조 아골타이고, 청나라 황제들의 <신라>를 기억하자는 '애신각라'이니 만큼, 신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자, 분개한 마의태자가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 지역으로 들어 갔고(나머지 아들은 전북 부안지역에 정착하여 부안 김씨 시조가 되었다),

마의태자의 아들 중에 김행이란 인물이 김함보라는 법명으로 이름을 바꾸어 고려군의 추적을 피하여 만주 길림지역으로 이주하여 여진족을 결집하여 후손인 아골타 시대에 금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차지했고, 후금을 계승한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우고 아들 홍타이 시대에 명나라를 무너 뜨리고 지나대륙을 평정하였던 것은 이제 기본적인 역사의 상식이 되었다.

양심적인 지나국의 정치인 주은래가 밝혔듯이, 지나 공산국의 지금의 지나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해 준 만주족(고구려의 후예=청나라)을 몰아 내었다. 지나국은 최소한 요하 동쪽 만주지역을 통일한국에 토해 내고, 러시아 또한 100년전 조선영토인 연해주를 토해 내야 한다. 간도(만주와 연해주)는 100년전 명백히 조선영토이며 현재 국제법상 영토 분쟁지역이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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