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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황제(고종)가 간택한 영친왕비는 따로 있었다.

설레임의 하루 2011. 12. 14. 01:25

*출처:역사복원신문

                          

 

 

 

 

 

 

 

광무황제(고종)가 간택한 영친왕비는 따로 있었다.

이방자여사는 일제가 정한 영친왕비
 
김민수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1/12/07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0년 황자(皇子) 의친왕(義親王)과 영친왕을 친왕(親王)으로

책봉(冊封)하였다.

고조 광무제는 명성황후 민씨, 귀인 장씨, 귀비 엄씨, 귀인 이씨, 소의 이씨, 귀인 정씨, 귀인 양씨 등 총 7명의 황후와 후궁과의

사이에 많은 황자들이 있었고, 고조 광무제와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 경운궁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는 1919년에 대한제국 황실의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했다. 
 

▲ 대한제국 황실 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 광무황제, 순종왕후 윤씨, 의친왕비 김씨, 의친왕 큰아들 이건     © 역사복원신문


황제가 다스리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崩御)로 4월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의 직계 후손 중 황위 승계 1순위는 의친왕의 후손이 되어야 마땅했다.

의친왕은 10여명의 후궁 사이에 13황자 9옹주가 있었으며 공주는 없었다.

 

의친왕은 1893년 12월 6일 의친왕비 김수덕(金修德)과 혼인하였으며, 1900년 8월 의친왕에 책봉되었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부장이

되었고,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의친왕은 2대 순종 융희제의 다음 서열로 황위 승계 1순위이었으나,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와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친일파가 득세하자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여 대한광복운동가들과

끊임없이 접촉.교신하며 대한광복운동을 지원하였다.

 

1911년 11월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의친왕을 망명하게 하여 대한광복운동을 활성하려 한 대동단

(大同團)의 김가진과 전협과 망명을 모의하였으나 간도 안동에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지만 일본에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사동궁에서 임어하다가 1955년 8월 서울시 종로구 안동궁에서 훙(薨)하였다.

 

대한제국의 황위 승계 1순위인 황태제 의친왕을 3대 황제로 추숭하여 태묘에 부묘(祔廟)하고, 대한광복운동기에 민족자결의

 국제정세를 인식하고도 일제에 전혀 저항하지 않은 영친왕의 신주를 천위(遷位)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 고조 광무제는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추책하였으며 1907년 민갑완(閔甲完)을 영친왕비로 간택하였고, 1910년

8월 일제의 불법침략에 의한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은 무효이다.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로 9월 상해에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영친왕은 대한제국 1대 고조 광무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황후를 모시는 시위상궁이었던 귀인 엄씨로 1895년 일본

정부의 명성황후 시해 후 엄씨가 황후의 역할을 하게 된다.

 

1900년(광무 4) 8월 영친왕이 책봉되고 1907년 영친왕비 민갑완은 영친왕비로 간택되고 택일하여 가례를 올릴 예정이었으나,

이토 통감이 영친왕을 대한제국 강제병합의 볼모로 일본에 데려갔고 영친왕은 일제에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영친왕비로 간택된 민갑완은 영친왕을 기다리며 책을 벗 삼아 지냈으며 일제의 방해로 끝내 영친왕비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 영친왕과 일제가 정한 영친왕비 이방자여사     ©역사복원신문

전제군주제의 대한제국은 1919년 1월 고조 광무제의 붕어로 4월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었다.

대한제국 황족의 책봉권자인 고조 광무제는 1907년 민갑완을 영친왕비로 간택하였고, 영친왕비(민갑완) 9등 적의(翟衣)는 1907년

영친왕과의 가례를 위해 다른 황족의 적의와 함께 궁내부 직조과(宮內府 織造課)에서 제작되었다.

심청색 이화문 적의는 대한제국 황후와 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착용한 대례복이다. 

일제가 마사코에게 착용시킨 후 촬영한 적의는 1922년 일본 교토에서 제작한 것이다.

 

대한제국 황족이 아닌 일본 왕족 마사코를 일본으로 송환하고 영친왕비 민갑완을 영친왕릉에 합장해야 한다.

고궁박물관은 제왕기록실과 대한제국실의 대한제국 황실 연표에 1대 고조 광무제(1897-1919.1), 2대 순종 융희제(1919.1-4),

황태제 의친왕과 영친왕비 민갑완으로 바로 기술하여야 하며, 대한제국실의 영친왕비 사진을 민갑완으로 교체하고 왕실생활실의

심청색 이화문 9등 적의를 대한제국 황태자비와 의친왕비가 착용한 대례복으로 바로 전시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기사입력: 2011/12/07 [13:04]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