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상원갑자원년 천체환국상고사 BC.8937 http://www.bc8937.pe.ne.kr/index.html
4~5 세기 대륙신라 백제인들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서...
진흥왕은 백제와 화친하기도 하였지만 때로는 적이 되어 성을 빼앗기도 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강력하게
견제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우다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로 하여금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빼앗고 성을
증축하고 군사1만을 주둔시켜 지키게 하는 등 신라는 건국 600여년 만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졌다고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비석이 대부분 심하게 손상 되어 비문의 내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창녕비가 세워진 것은
561년, 황초령비 568년, 북한산비 555 년, 마운령비는 568년 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 추정해보면 上大等(상대등), 大等(대등), 軍主(군주,) 道使(도사), 一伐干(일벌한), 一尺干(일척한),
述干(술간), 一吉干(일길한), 沙尺干(사척한), 及尺干(급척한) 등의 관직명(名)이 나오고 인명(人名)으로는 小里夫
(소리부), 居七夫(거칠부),彗忍(혜인) 등이 있으며 특히 단양적성비에는 伊史夫(이사부)의 이름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신라 진흥왕의 유적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비석에 대한 몇가지 의문점은 남는다.
첫째, 쉽게 옮길 수 있었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고, 둘째, 비문은 변조, 조작 등이 비교적 쉽기 때문에 일제가
조직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는 점. 셋째, 비석의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불가능 하다는 것은
자칫하면 역사의 오류를 인정하게되는 꼴이 된다. 넷째 정사의 기록으로 확인이 안되는 것. 즉, 신라본기 진흥왕조에
순수비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 그리고 어떤 비석은 너무 깨끗한 것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4~5 세기 당시 한반도는 실크로드문화의 종단지역으로 대륙의 산동 신라지역과 하남성 백제지역의 사람들이 대거
건너와 무역 또는 정복사업을 하였던 때라고 보여진다.
(이 때 한반도 선 거주민은 고조선, 고구려, 흉노 등 북방계통으로 추정 됨)
인하여 대륙중부와 남동부지역의 송(宋) 제(濟) 진(陣) 후양(後梁) 등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들 중 한대(漢代)의 왕망전(王莽錢)이 발견 된 것이나 경주고분에서 스키타이 양식의
금관과 함께 출토 된 로마제유리잔(로만글라스)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신라인지는 지금 단정 지을 수 없다.
4~5 세기 대륙산동지역이나 상해 부근은 아라비아 상인들이 북새통을 이루어 교역이 활발 할 때 였다.
우리나라에서 로마 수입품이 흔하게 발견되지 않는 것은 그 여파가 바다를 건너 경주까지 오긴했어도 이를 소화시킬
만한 세력이 이땅에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유물들도 초기 것은 모두 이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나 남동부지역의 서진 . 동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4~5세기 한반도는 미개척지로 고구려문화가 선점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신라와 백제문화가 유입되면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아름답고 독특한 문화가 꽃피게되었다.
주로 신라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사찰이 건립되고 석굴암, 다보탑, 미륵반가사유상, 첨성대 등 우리나라만의 유일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묘제를 보면 대부분 북방양식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들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첨성대 상단부 정자석의 우물정(井)字나 호우총의 우물정(井)字가 새겨진 광개토왕제기 그리고 경주지역의 귀면와
(치우상을 새긴 기와) 등 경주지역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물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러한 사실은 경주는 신라가 아니라 최소한 4세기 이전에는 고구려유민들의 땅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후 지증마립간, 법흥왕, 진흥왕을 거치면서 대륙의 신라인들이 우리나라 경주로 들어왔다고 볼 수는 있다.
아직까지 이땅에 명실상부하게 존재했던 나라들의 이름이 밝혀진 것이 없는 까닭은 이들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들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민자들 중에 신라와 백제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그룹도 있었을 것이지만 크게 세력을 잡고도 그
이름이 대륙에 알려지기를 꺼려하며 '쉬'하고 조용히 지내려 했던 부족들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다시말해 그들은 대륙에서 죄를 지었거나 추방 된 자가 아니라면 나라가 망해서 망명을 해온 이민자들 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자급자족으로 살았으며 대륙의 문물을 쉽게 접할 수는 없었고 교역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거라고
생각이 든다.
불교의 유입과 대륙문화의 전파
남북조시대는 모두 불교가 융성했다. 이 시대의 문화를 육조문화라 일컷는다.
중국문화의 중심이 되는 황하 유역으로 부터 강남지방(양자강 유역)으로 옮겨가며 화려하고 정교한 육조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시 한반도와 대륙의 상황을 삼국사기를 인용하여 비교해 보겠다.
번역출처 : http://www.koreandb.net/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500 AD.~ 514 AD.)
이 왕위에 올랐다. 성(姓)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다. ...중략... 전왕(前王)이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당시 나이는 64세였다.
김부식의 사론(史論): 신라 왕으로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었다.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에서는 모두를 아무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의 칭호는 쓰지 않았으니, 혹시 그 말이 촌스러워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일까?
좌전(左傳)과 한서(漢書)는 중국의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楚)나라 말인 곡오도(穀於), 흉노(匈奴) 말인 탱리고도
(撑犁孤塗) 등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지금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중략....
4년(503)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 또는 신라(新羅)
라고도 칭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또 살펴 보건대 옛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만을 칭하고 높이는 호칭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이제 뭇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왕이 이에 따랐다.
....중략......
13년(512) 여름 6월에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하여 해마다 토산물을 바쳤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서 힘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려우나 꾀로는 복속시킬 수 있다.”하고, 이에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말하자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 곧 항복하였다.
15년(514) 봄 정월에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 지방 사람들을 옮겨 그 곳을 채웠다.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호를 쓰는 법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지증마립간이 승하하고 그해 법흥왕(法興王 : 514 AD.~ 540 AD.)이 즉위.
진흥왕 (眞興王: 540~576 AD.)
이름은 삼맥종(麥宗)이다.<혹은 심맥부(深麥夫)라고도 썼다.> 그때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고,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
(思道夫人)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하였다.
2년(541) 봄 3월에 눈이 한 자나 내렸다. 이사부(異斯夫)를 병부령(兵部令)으로 삼고 중앙과 지방의 군사 일을 맡게
하였다.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중략......
10년(549) 봄에 양나라에서 사신과 입학승(入學僧) 각덕(覺德)을 파견하여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내왔다.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 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중략......
11년(550)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쳐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 명을 머물러 두어 지키게 하였다.
....중략......
25년(564)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6년(565) 봄 2월에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아찬 춘부(春賦)에게 명하여 나아가 국원(國原)을 지키게 하였다.
9월에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
27년(566) 2월에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 두 절이 이루어졌다. 왕자 동륜(銅輪)을 왕태자로 삼았다.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황룡사가 준공되었다.
28년(567) 봄 3월에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29년(568)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다.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또 비열홀주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31년(570) 여름 6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2년(571)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3년(572) 봄 정월에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3월에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20일에 전쟁에서 죽은 사졸을 위하여 바깥의 절에서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열어 7일만에 마쳤다.
....중략......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중략......
그리고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하고 뭇 백성들과 접(接)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고, 하였다고
자랑함이 없는 일[無爲之事]을 하고, 말없는 가르침[無言之敎]을 행함은 주나라 주사(柱史)의 뜻이며,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이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 말하였다.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배우고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
(稜伽經)과 승만경(勝經) 및 부처의 사리를 바쳤다. 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
(法雲)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상 인용 끝
지증마립간 때 신라의 국호가 정식으로 정해졌다면 건국한지 554년 만이다.
신라는 秦(진)나라가 망했을 때 가난한 백성들은 대부분 마한의 동쪽(漢나라)으로 피난을 가서 살았고 일부는 흉노의
무리가 되었으며 귀족 출신의 김방이는 뽕나무 농사를 지으며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다.
김방이의 손자 김추(金錐)가 나라를 세웠다. 이 기록은 설화 형태로 유양잡조전집(酉陽雜俎前集)에 실려 있다.
아마도 김추(金錐)가 박혁거세였던것 같다.
방이설화는 한(漢)나라에 쫒겨 숨어살면서 다시 진(秦)나라를 건국하려했던 신라인의 마음이 새겨져 있는 설화 이다.
진(秦)나라는 지나(支那)라고 중국어 사전에 실려있고 인도어로 Sino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秦(진)那(나라)의 뜻으로
'시나' 라고 읽는다.
신라는 중국식 발음으로 新신[xin] 羅[lou] 이다.
즉,인도식으로 지나(支那)라고 하는 것이나 중국에서 秦(진)那(나라)를 발음하는 것들이 신라와 비교하여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으로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똑 같은 음을 취하고 뜻을 약간 바꾼것 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라를 잃고 떠돌아 다닌지 554년만에 정식으로 진(秦)나라를 다시 세운 것이다.
후에 신라가 망하기 전 최치원은 초기 왕들이 방언을 사용한 것을 모두 왕으로 고쳐 썼다고 김부식은 힐책하고 있다.
13년(512) 여름 6월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혹은 울릉도(鬱陵島)라고도 한다.
땅은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가 되어 말하기를...에서 명주(溟州)와 하슬라주(何瑟羅州) 는 산서성
임분현으로 삼국사기지리지 명주(溟州)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명주(溟州)는 본래 고구려 땅인 하서량(河西良)이다. 일명 하슬라(何瑟羅)라고 한다.
후일에 신라에 속했다.
가탐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따르면, 신라의 북쪽 경계선에는 명주(溟州)가 있었다.
이곳은 옛날 예(濊) 즉 예맥(濊貊)의 나라가 있던 곳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명주를 소경(小京)으로 삼고 관리를 두었다.
태종무열왕 5년, 즉 당나라 현경(顯慶) 3년에,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과의 접경지대이므로, 경(京)을 주(州)로
삼고 군사령부를 두었다.
경덕왕 16년에 명주(溟州)로 이름을 바꾸고, 현(縣) 4곳을 관할하게 했다."
신라는 대륙에 있었다는 말이다.
법흥왕 15년(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지나의 남북조시대 불교가 융성한 것과 같이 이때 부터 우리나라에도 불교가 전해져 의상, 원효, 지눌 등
대선각자들이 들어와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전에 북방유목민출신의 고구려계 사람들이 선점하고 있었던 한반도는 이들 대륙으로 부터 망명, 이민, 추방, 유배,
포교, 무역 등 여러가지 이유로 들어오게 된 선진유민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북방계 선이주민들은 지식부족, 뒤떨어진 문화, 열악한 전쟁무기 등이 원인이
되어 대륙에서 유입 된 신세력에 동화되는 과정을 격게되어 한반도의 주축세력은 차츰 대륙에서 건너온 신라, 백제
출신으로 교체되어 졌다.
지금 우리나라의 땅속 출토 유물들이 모두 이런 상정들을 반영하고 있으니 보다 많은 관심과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신라 .백제의 무덤이라는 것들은 모두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것은 불교가 이땅에 들어오기 전에
고조선 . 고구려의 유풍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끝으로 진흥왕 25년(564)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부터 ~ 33년(572) 봄 정월 까지 매년 조공을 했다고 해석되어 있는데 이를 올바른 해석이라고 보면 안된다.
모두 반대로 뒤집어 생각하면된다. 별루 어렵지 않다. 북제(北齊)에서 사신을 보내와 조공을 하였다. 로 고쳐서
생각하시라는 것이다.
당시 한반도에 신라가 있었다면 소국이거나 분국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상황은 매년 조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경주에서 육로로 중국 남부에 있는 진(陳)나라 까지 다녀오려면 도착해서 바로 돌아나와도 1년은 걸릴 것인데 무엇
때문에 별로 힘세지도 않는 나라에 조공을 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다녔겠는가?
이는 신라와 백제 그리고 송(宋) 제(濟) 진(陣) 후양(後梁) 등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증거 이다.
남조시대의 소국들은 모두가 백제의 제후국 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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