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개토태왕은 지나의 강자로 부상한 북위을 제압하기 위해 북위 서쪽인 감숙성(甘肅省), 청해성(靑海省) 방면에 있었던 토욕(모용선비족)까지 정벌하였다. 장수태왕은 기존 사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평양천도설과는 무관한 왕이다. [요사]에서도 명백히 기록하고 있듯이 장수태왕시절에 고구려 수도성은 단군임금께서 단군조선을 개국하신 아사달(조양)이였다.남평양성(북한 평양성)으로 천도한 고구려왕은 평원태왕이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시정할 일이다. |
[삼국사기] "장수왕(長壽王) 15년(A.D 427년)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十五年移都平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삼국기록]에서 평양이란 '조양(아사달)'을 의미하며, 현재 북한 평양은 남평양이다. 기존 사학계는 고국원태왕이 백제와 전투에서 화살맞고 죽은 남평양성을 고구려 평양으로 착각하는데서 이해의 오류가 나고 있다.
[요사]"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 장수태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 곳은 요의 동경(조양=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元魏 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遼史 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즉,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 평양성인 조양을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고구려 평원태왕은 남평양성으로 도읍을 천도했고 고구려말기까지 운명을 함께 했다는 기록이다. 평원태왕은 남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전에 40여년에 걸친 성곽공사를 하여 당시 20여만이 거주했던 남평양성(북한 평양성=장안성)은 당나라 장안성보다 큰 세계 최대성으로 축조했던 것이다.
당시 세계최대규모의 고구려 마지막 수도성-북한 평양성(남평양성=장안성)
광개토태왕,지나대륙을 휘젖고 다니다!
▲ 중앙 아시아 돈황 석굴에 그려진 ㄷ자형의 고구려성 그림. 5호16국 시대 토욕혼 위에 위치했던 서량이 돈황을 수도로 삼았다. 서량이 멸망한 뒤 돈황은 북량·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당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위 돈황석굴의 고구려성 그림은 광개토태왕 시기부터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고구려가 유라시아 초원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해동역사]기록에 "고구려와 서량국(西涼國) 등의 악기 가운데는 뱀껍질[蛇皮]로 만든 비파(琵琶)가 있다..담고(擔鼓)는 서량과 고구려의 악기이다. 모양이 항아리와 같이 생겼는데, 항아리보다는 작다. 먼저 가죽으로 뒤집어 씌우고 칠을 하는데, 이것이 만드는 방법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이는 당시 서량과 고구려의 유기체적인 연대성과 교류상황을 의미한다.가야는 신라에 망해서 가야의 악기(가야금)은 신라로 넘어 갔다. 서량이 고구려와 악기를 공유한 것은 그들이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에 복속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해동역사]에서 기록하기를 " 북위왕 세종이 이르기를,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고구려 문자태왕13년 504년때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이 북위에 갔을 때 북위왕이 한 말인데, 이는 고구려가 북위는 물론이고 북위 동쪽의 백제 ,북위 서쪽의 서량, 서남쪽의 토욕혼, 심지어 남조까지 고구려가 정벌내지는 굴복시켰다는 것이다.
[요사(遼史)]에는, “개황(開皇) 8년에 거란(契丹)의 별부(別部)로 고구려에 붙어 살던 출복(出伏)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부(內附)하였다. 이에 앞서 원위(元魏) 말기에 기수(寄首)팔부(八部)가 고구려와 유유(蠕蠕)의 침입을 받아 겨우 1만여 구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는데, 이들이 모여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나라 문선제(文宣帝)가 평주(平州)로부터 세 갈래로 나누어 쳐들어 와 남녀 10여 만 구(口)를 포로로 잡아 갔다. 계속해서 돌궐(突厥)의 핍박을 받아 고구려로 도망쳐 가 붙어 산 자가 1만 호에 불과하였으며, 부락이 흩어져서 다시는 옛날의 팔부(八部)가 되지 못하였다. 개황 말기에 여러 부족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자, 출복 등이 고구려를 두려워 하여 내부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갈해나안(渴奚那顔)의 북쪽에 이들을 머물게 한 것이다.”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아시아 해안지역에 22담로국을 거느린 황제국가 백제가 출정하면 신라 진흥왕이전까지 가야.신라.왜군이 함께 출정했다. 이는 고구려에 대항하는 백제연합군이였던 그들의 상국이 78개 읍단위 국가들을 거느린 마한연방을 복속한, 남3한의 맹주 백제였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라도 3국 통일이 아니라 비록 당나라의 힘을 빌렸지만 대동강이남에 만족하는 남3한을 통일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유(유연)은 고구려가 출정할때 같이 나간 것이다.유연은 원래 작은 부족으로 광개토태왕 때는 이름조차 생소한 초원국가었다. 광개토태왕 이후 강해졌지만 돌궐의 공격으로 약해졌다. 그러니 광개토태왕 때는 고구려에 복속되거나 고구려를 상국으로 섬겼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서량과 토욕혼을 공격하는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을것이다.
당시 찰갑 기마군으로 종횡무진했던 고구려의 위상을 드러 내는 기록이며, <고구려.백제가 강성할 때는 100만 대군으로 지나땅을 휩쓸었다.>는 신라 김춘추의 증언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환단고기-고구려 본기]"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산월.좌월이 있었다. 문자태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회계.오월.좌월.산월.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오늘날 '홍콩지역'에 해당하는 '천주'지역에 신라관련 지명이 많은 연유라 할 것이다. 신라는 마한의 해상세력인 이사금이 왕위에 올라 월주지역을 개척하여 월주신라을 만들어 한반도 신라인들을 거주시켰는데, 고구려 문자태왕이 서백제지역을 차지하면서 월주지역 신라인들을 천주지역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다.)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 고구려 수렵도. 고구려KOREA의 후예인 몽골 기마군의 막강한 전투능력은 고구려인들처럼 어릴적부터 말을 타고 익힌 사냥술에서 나온 것이다. "착한 마음은 화살! 나쁜 마음은 과녁!(2대 부루 단군천황때부터 부르게 하였던 우리 민족 최초의 애국가-어아가의 내용)"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는 나쁜 마음들은 모두 국민화살의 과녁이 되는 것이다.
자주주권적이며 세계 중심국가가 될 수 있는 민족적 에너지는 KOREA고구려
중국지역과 몽골.만주.한반도.일본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유지한 광개토태왕 치세 21년과 장수태왕79년을 합치면 100년인데, 이 100년 동안 고구려는 그야말로 로마에서도 '마쿠리(마고+구리=마고구려=맥고구려)로 알려질 만큼 그 어떤 나라도 범하지 못했던 유라시아 최강대국이였던 것이다. 어떠한 외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자주국방과 더불어 분열된 모든 단군민족이 더불어 살아 가자는 단군조선공동체를 복원하였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 KOREA고구려 후예가 바로 유라시아 전역에 해당하는 고대 12환국연방을 회복하고 유라시아공동체 시대을 열었던 KOREA족 징기즈칸이다. 징기즈칸은 통합과 복지를 가로 막는 내부 분열.독점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몽골통합을 실현하였고, 교역을 요청한 몽골사신을 끓는 물에 넣어 죽어 버린 코라즘이나,기독교문명제일주의로 담을 쌓고 자기만이 최고라는 오만하고 배타적인 유럽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처참히 붕괴시키고 동-서를 하나로 이었다.
태양처럼 세계를 환하게 비추자는 광명사상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해민족과 대한민국이 확고한 자주주권국가로 설 수 있고 인류공동체 실현을 위한 세계중심국가가 될 수 있는 에너지가 바로 KOREA고구려여야 하는 이유다. 고구려를 위협하고 침략하는 사악한 세력에 대해 반드시 응징하고 공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고구려 상무정신과 그러한 고구려세력이 적실한 대한민국이다.
KOREA고구려였다면 독소조항인 ISD를 앞세우고 헌법을 비롯한 국내법들을 위협하는 한미FTA와 같은 굴욕적이고 불공정한 경제협정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지나문헌들이 기록한 대백제의 실재
![](http://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MWpoMEh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SzE1MC8xMTcvMTE3MDEuanBn&filename=bakjae.jpg)
당나라인들이 기록한 [구당서]"부여에서 나온 백제(본국)는 마한(馬韓한반도)의 옛 땅에 있다. 경사(장안)에서 동쪽으로 6천리에 있으며, 바다 끝에 있다. 백제의 영역은 서쪽으로 바다건너 월주(양자강지역)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건너 왜(일본열도)에 이른다..그들의 왕이 거처하는 곳은 동쪽(일본열도)와 서쪽(지나지역)에 두 개의 성이 있다" 百濟國,本亦扶余之別種,嘗為馬韓故地,在京師東六千二百裡,處大海之北,小海之南。東北至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其王所居有東西兩城 [영상]아시아 해양강국 대백제(구다라)
"人民唐代錄 [gudangseo]“授予來自百濟(家庭),一馬漢(馬韓半島)是古老的土地。陡度(長安),6裡,東和海是在最後。百濟向西部的面積wolju隔海相望(長江中下游地區)我到達南海(日本列島),金額為居住在國王的東 ... ...他們(日本列島),西(或地區)是兩個高度“
[자치통감]"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남제서]"북위 오랑캐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 가니, 모대(백제 동성대왕)가 장수 <사법명>··<해례곤>·<목간나>를 보내어 북위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건무'이년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옛부터 봉함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화를 입고, 절과 부인 분에 넘치는 것을 받아 오랑캐를 물리치었습니다. '저근'등이 가서 광택을 입고, 신은 두루 평안합니다. 경오년에 가서 '험윤'이 깨닫지 못하고, 병사를 내어 깊이 쳐들어 오니, 신이 '사법명'등 군사로 토벌하고, 야간에 번개같이 엄습하니 '흉'의 이장이 두려워 하고 무너저 바다로 쓸어버렸다. 달아나는 것을 베어 죽은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를 꺽으니, 흉폭함을 잡았다. 이제 나라가 조용해지니 실로 '명'등의 다스림이니, 그 공훈을 생각하여 칭찬함이 마땅하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삼고, '찬수류'는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은 행무위장군 불중후, '목간나'는 전의 무공이 있고 또한 대방을 빼앗으니 행광위장군 면중왕으로 삼으소서. 업드려 원하니 하늘의 은혜로 청을 들어 주옵소소 하였다. 또 표에 말하길, 신이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인 신 '모유',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인 신 '왕무', 겸 참군이고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인 신 '장색',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쓰며, 위급함에 명을 받들어 어려움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 인신이 사신으로 보내어, 험한 물결을 무릅쓰고 나아가니 정성이 지극합니다. 실로 작위를 내림이 마땅하니 각각 베풀어 주십시오. 업드려 올바른 제수가 있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군호를 내리었다."
* [남제서]기록내용은 지나국을 높게 기록한 춘추필법이지, 실제로는 22제후국을 거느린 대백제 동성대왕이 북위와의 전쟁을 위하여 남제왕에게 백제담로왕들에게 적극 지원해 달라고 명령을 하고 있는 내용이다. 즉, 당시 고구려가 북위의 상국을 자처하며 지나북부지역을 보호해 주는 멘토역할을 했다면 대백제는 남제의 상국을 자처하며 북위의 침략으로부터 지나남부지역을 보호해 주는 멘토역할을 했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료내용이다.
[고증자료]
![](http://pds13.egloos.com/pds/200901/15/20/a0101120_496e1b8c70ee2.jpg)
그 성씨를 흑치로 삼았다'는 것. 흑치는 어디인가? 흑치는 이빨은 검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이는 '띨랑'이라는 열대 과일을 씹는 습관 때문이다. 흑치의 선조가 봉해졌다는 땅은 무더운 남방의 땅이었다. 백제의 활동무대는 그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백제의 국호를 다시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백제멸망이후의 동.서백제에 대한 기록
* 백제 멸망 후에 서백제지역은 당나라가 신라방으로 행정구역을 바꿨다
![](http://pds11.egloos.com/pds/200901/15/20/a0101120_496e1b8cd1944.jpg)
백제인들이 기록한 [일본서기]"어찌하랴.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서 끊겼으니
선조의 무덤을 어찌 오간단 말인가!" 동백제 일본땅에서 백제는 선조의 나라
인 본국이었다.서기 670년 왜 열도는 '일본'이란 국호로 새롭게 태어난다.
무리들은 차츰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졌다. 그 군주(담로 제후)인
부여순 도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부여씨는 소멸됐다."
백제 700년 역사, 그 장엄했던 백제는 그렇게 어둠의 저편으로 저물어 갔다.
고구려.백제가 다물(담로)정신으로 회복하고자 했던 단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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