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스크랩] 상문명(商文明)에 대한 소고(小考)

설레임의 하루 2011. 11. 2. 06:34

 

 

 

 

상문명(商文明)에 대한 소고(小考)


[글을 들어가며]


은(殷)나라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제곡(帝嚳)의 둘째부인이다. 간적 자매가 목욕을 하러 가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했다. 그가 설이다 (史記 은본기)



[사기]에 나오는 은(殷)은 본래 상(商)나라이다. 최근 중국학계와 정부는 「하상주夏商周 단대(斷代) 공정」에 따라 [상나라]의 연대를 확정했다. 즉 BC 1600년에 성탕(成湯)이라는 영웅이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며, BC 1300년에 [은]으로 천도한 뒤 BC 1046년 주(紂)임금 때 주(周) 무왕에 의해 멸망했다. 여기에서 [은]이라는 나라 명칭은 [상왕조]의 마지막 도읍인데 [주나라] 사람들이 이를 [은]이라는 소도읍(小都邑) 이름으로 낮춰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상나라]의 실체를 알면 더욱 확실해진다. [하·상·주]의 왕조교체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다. 지금의 개념대로라면 [동이족]이 한족(漢族)과 처절한 중원쟁탈전을 벌인 끝에 [하나라]를 무찌르고 550년 가까이 천하를 통일했다. 그것이 바로 [상나라]이다. 그런 [상나라]를 다시 중원의 종족(한족·漢族)이 몰아내고 [주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줄곧 [한족]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상나라는 중국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갑골문자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으며 동이의 예제를 확립했기 때문입니다.(이형구 선문대 교수)”


[상나라] 시조인 설(契)은 요순시절에 우(禹)의 치수(治水)를 도운 덕에 상(商)이라는 곳에 봉지를 받았다. 그래서 [상]이라는 나라 이름이 생겼다. 상토(相土·설로부터 3대)는 마차를 발명했으며 그 세력을 <해외>까지 넓혔다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왕해(王亥·7대)는 비단과 소를 화폐로 삼아 부락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다. 훗날 왕해는 유역(有易)이라는 마을에서 엄청난 환대를 받는다. 왕해의 아우 왕항(王恒)은 유역족을 대패시키고 재물을 빼앗았다. 세력을 넓혀간 [상]은 훗날 <성탕>이라는 영웅을 만난다. [탕]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요리사 출신인 이윤(伊尹)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세를 떨친다. 이 무렵 [하왕조]는 <걸> 임금의 학정 때문에 멸망기에 접어든다. 천하의 인심을 얻은 [성탕]은 도읍을 박(毫 - 여기에서도 동이의 흔적이 보인다. 천도한 도읍의 이름에 <밝은 터라는 박>이 들어있는 것이다)으로 옮긴 뒤 드디어 11차례의 접전 끝에 [하왕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때가 BC 1600년이다. 그 뒤에도 역마살이 끼였는지 다섯 차례나 도읍을 옮겼는데 반경(盤庚)이 BC 1300년 [은]으로 천도한 뒤에야 완전히 정착했다.



역사를 알았으니 우선 도성의 규모를 보자. 국가의 중심이자 왕조의 위세를 나타내주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릇하게도 멸망 때까지 10차례가 넘는 천도가 있었으나 흩어져 있는 도성의 규모는 만만치 않았으며(화하인華夏人들은 이 무렵 축성築城을 그리 중요시 않았다) 모든 도성을 [판축기법]으로 쌓은 점은 특기할 만하다.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관은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으로 보면 기원 후 1세기 때부터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풍납토성과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 참고로 한족의 성은 [토축기법]으로 확연히 다르다.



특히 [발해산] 청동기로 무장한 [상왕조]는 이것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하나라]를 압도했다. 짐승문양, 도철(괴수)문양 등 왕권과 신권을 상징하는 다양한 청동예기는 물론 다양한 형태와 쓰임새가 자랑인 다양한 생활용기도 [상왕조]의 문화를 살찌웠다.


그렇다면 상나라 문화와 동이족과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상나라]는 처음부터 사해 흥륭와 문화(BC 6000~BC 5000년)-홍산문화(BC 4500~BC 3000년)-하가점 하층문화(BC 2000~BC 1500년·고조선의 문화로 여겨짐)로 이어지는 찬란한 [발해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BC 1600년 무렵 이들의 일파가 남하하여 중원 [하나라]를 쓸어버린 뒤 천하를 통일한 나라였다. 특히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이 문화가 [부여]의 문명을 빼다 박은 듯 하다는 것이다. 천천히 그들의 설화를 더듬어 보자.



(시조인) 설 현왕(玄王)이 아들 소명(설로부터 2대)을 낳고 지석(砥石)에 거주했다. (순자·성상편)



중국 문헌은 동이족인 상족(商族)이 중원으로 내려와 하나라를 멸할 때까지의 역사와 활동무대 즉 시조 [설]부터 [성탕]의 상나라 건국(BC1600년)까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던져놓았다.



처음에 인용한 순자 성상(荀子 成相)편의 기록을 검토해보자.



<요(遼·랴오허를 뜻함)는 지석에서 나온다>는 내용이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편에 나온다. 이 내용을 주석한 가오유(高誘)는 <지석은 산의 이름이며 변방의 바깥에 있고 그들이 부르는 요수(遼水·랴오허)가 그곳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고 했다.


즉 시조 [설]은 랴오허의 발원지인 [지석]에 살았으며, 지금의 내몽고(內蒙古) 자치구 적봉(赤峰)시 극집극등기(克什克藤旗) 부근이라는 것이다. 물론 <남쪽바다>는 발해이다.


또한 여씨춘추 유시(有始)편에는 <하늘에는 9개의 들이 있는데 북방을 일컬어 현천(玄天)이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중국사학자 김경방(金景芳)도 이 모든 문헌을 근거로 “설 즉 현왕은 북방의 왕”이라 단정했다. 구태여 [현왕]이라 덧붙인 이유가 자명하게 드러난다.



<상토(설로부터 3대)가 맹렬하게 퍼져 해외에서 끊어졌다(相土烈烈 海外有截)> (시경·상송)는 내용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상토]는 시조 [설]의 손자인데 중국 학계는 지금도 이 기록을 토대로 [상토] 때 [상족]의 활동무대를 발해 연안으로 보고 있다. [상토]는 무공이 매우 뛰어났으며 마차를 발명하여 세력을 떨친 사내이다. 시조 [설]로부터 7~8대인 왕해(王亥)와 상갑미(上甲微) 때는 하백(河伯)의 군사를 빌려 유역족(有易族)을 쳐 멸망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유역족]은 역수(易水)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으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역현(易縣) 일대이다. 상족이 초기에 이미 여기까지 들어와 세력을 떨쳤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고고학자 쑤빙치(소병기蘇秉琦)는 <상의 조상은 남으로는 연산(燕山)에서 북으로는 백산흑수(백두산과 흑수)까지 이른다>고 단언하고 있다. 또한 유명한 안양 은허(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다시 그들의 원향(原鄕)인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설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부터 설명하려는 1970년대 이후 발해 연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발굴 성과가 이 같은 학설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은허(殷墟) 인골(人骨)의 비밀 - 인종학적 검토



아무튼 [상나라] 사람들과 발해 연안의 친연관계는 인종학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인골전문가인 판지펑(반기풍潘其風)은 [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들을 분석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결과를 얻어냈다.



“발굴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묘장제나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갖추고 있습니다.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황허 중하류의 토착세력인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또 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흔적들이다. 즉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항상적으로 동북방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이 모든 중국 문헌과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로 미루어 보면 BC 6000년[사해·흥륭와 문화]부터 시작된 발해 고조선문명의 창조자들이 그 유명한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를 거쳐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BC 2000년 무렵~BC 1500년)를 이루었고 [상문명]까지 연결되어지고 있음이 확실시 된다.



따라서 [상나라]의 시조 [설]은 흥륭와 문화-홍산문화의 맥을 이은 발해문명의 계승자로서 하가점 하층문화의 주인공들에게서 갈라져 나온 이들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설]과 그의 손자인 [상토] 그리고 7~8대인 [왕해]와 [상갑미]를 거치면서 남방으로 뻗어갔으며 급기야 BC 1600년 무렵엔 중원의 [하나라]를 대파하고 서토의 주인이 되었다.



[쑤빙치]가 <하나라 시대에 이미 중국 동북방 발해 연안에는 하나라를 방불케 하는 강력한 방국(方國) 즉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언한 근거이다. 물론 중국 문헌에는 대릉하·요하 유역인 즉 발해 연안을 풍미한 문명의 주인공들이 과연 누구인지 다 알아 볼 수 있음에도 공백으로 남겨놓고 있다. 중국 학계는 단순히 [상나라]의 선조가 동북민족과 관련이 깊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냥 오랜 시기에 출현한 그리고 지금은 그쪽 지역에 있지 않다는 증거들이 속출하는 <연나라의 옛 땅>이라는 군색한 표현으로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누누이 강조했듯 [상나라]를 이룬 동이족 그 가운데서도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 등 우리의 역사를 이룬 고조선 민족과는 강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신화적(神話的) 공툥성과 의미심장한 부여



이제부터는 [상나라]와 [동이] 그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들과의 친연성을 차근차근 따져보자. 먼저 [시조설화]를 들추어 본다.



(목욕을 갔던) [간적]이 제비 알을 삼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설(契·상나라의 시조)이다.(사기 은본기)



북이(北夷)의 탁리국왕이 출행했는데 왕의 시녀가 후에 임신했다. 왕이 시녀를 죽이려 하자 그녀는 <전에 하늘 위에서 기를 보았는데 큰 계란 같았다(혹은 닭처럼 생긴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시켰다) 왕이 시녀를 가두었는데, 뒤에 남자아이를 낳았다.......그 이름을 [동명]이라 했다.......[동명]은 부여에 이르러 왕 노릇을 했다. 곧 부여의 시조이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논형 길험편 등)



옛날 시조 추모왕이 창업의 기초를 열었다. 추모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에서 태어나 세상에 나오니 성덕이 깊었다. 이는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광개토대왕릉비)



재미있는 신화의 공통점이다. 상나라의 시조신화와 부여·고구려 등 동이족의 신화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중국학계도 <새알을 삼켜 탄생하는 이른바 난생설화는 (중원이 아니라) 동북아 민족의 공통분모이다> (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라고 인정한다.



아울러 <하늘이 현조(玄鳥)에 명해 상나라 조상을 낳아 넓디넓은 은 땅에 살게 했다> (시경 상송 현조 詩經 商頌 玄鳥)의 기록은 [상나라]와 새를 숭배하는 우리 조이계(鳥夷系)와의 깊은 관계를 웅변해준다.



여기에서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고구려와 백제의 조상인 부여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고조선과 달리 중국 측 문헌자료도 풍부하기에 논란의 여지는 적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부여에 관한 중국사서와 우리 측 문헌인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보면 아주 재미있게 중첩되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우선 중국 위·촉·오 등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와 중국 후한의 정사를 기록한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 유송의 범엽이 5세기 무렵 저술> 그리고 당태종의 지시로 편찬된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 측 사료를 종합해보자.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사람들은 거칠고 씩씩하고 용맹스러우며 근실하고 인후해서 도둑질이나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 창, 칼로 무기를 삼으며.......음식을 먹는 데 조두(俎豆·제기)를 썼고 모일 때에는 벼슬이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권했다. 또한 읍을 하고 사양하면서 오르내린다. 은(상)나라의 정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以殷正月祭天)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連日飮食歌舞)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흰색을 숭상하고 해외에 나갈 때는 비단옷 입기를 숭상한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소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숫자가 많을 때는 100명이 되었다. 남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걸이와 패물을 떼어놓으니 이는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한 면이 있다(大體與中國相彷彿也)



글귀마다 숨어있는 뜻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므로 다소 장황하게 인용했다. 살피면 살필수록 상나라의 습속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은(殷)나라 역법(曆法)을 쓴 이유



<이형구 교수>는 이렇게 언급한다. <부여가 은(상)나라 달력을 써서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라고 보여집니다. 역법(曆法)이라는 것은 왕권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역법을 바꾸어 새 왕조가 천운에 따랐음을 나타냈지요> (이형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참조)



[역법]이 왕권과 국가의 상징일진대 부여가 한족계열인 하夏·주周·진秦의 역법이 아니라 [상나라]의 역법을 같이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BC 1600년) [성탕]은 바로 역법을 바꾼 것 외에도 옷 색깔(服色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하나라]는 흑색(黑色)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黑馬)를 탔고, 제사 때는 검은 빛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는 백색(白色)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白馬)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赤色)을 숭상했는데........”(예기 단궁상 禮記 檀弓上)



이는 앞서 언급한 부여의 습속 즉 <부여가 흰색을 숭상했다>는 사료와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뿐이 아니다.



마지막 왕 주(紂)는 온갖 악행으로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랬다면 물론 나쁜 짓이지만 한번쯤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혹시 그들의 풍습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멸망을 정당화하려고 한 [주나라]의 많은 왜곡이 들어갔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왕은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놓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놓고는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 (사기 은본기) 라는 이 대목에서 <부여에서는 음식과 가무를 즐기고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료가 겹쳐서 떠오르는 것은 나 뿐일까?



[갑골문화]의 연원인 [동이족]과의 연계성



[갑골문화]는 [동이]의 지표라는 것이 근자에 서서히 확립되는 추세이다. 처음 [상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로만 여겨 대만의 스장루(石璋如석장여)·리지(李濟이제)같은 유명한 중국학자는 물론 대륙의 후허우쉬안(胡厚宣호후선)도 모두 갑골문화의 원형을 황화 중류와 산둥반도에서 찾았다. 하지만 갑골문화의 분포지를 유심히 살핀 결과 발해연안 즉 [동이족]의 영역에 집중되고 있음을 발굴조사로 알아내었다.



갑골(甲骨)은 복골(卜骨)이라고도 하는데 귀갑(龜甲·거북의 배 부분)이나 동물의 견갑골(어깨뼈)로 점을 치는 행위(占卜)를 말한다. 즉 거북이나 짐승 뼈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에 못 이겨 좌우로 터지는데 그 문양(兆紋)을 보고 길흉을 판단한다. 그래서 한자의 [복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또한 발음이 복(우리발음), 혹은 부(중국 발음)인 것도 터질 때 나는 소리일 수도 있다. 점복은 왕이 주관했으며 길흉을 점친 것을 판정하는 사람을 정인(貞人)이라 했다. [상왕조] 말(제을~주왕·BC 1101~BC 1046년)에는 왕이 직접 정인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貞)자를 잘 뜯어보면 맨 위에 [卜]자가 있고 그 밑에 눈(目])자 맨 밑에 사람(人) 등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점(卜)을 보는(目) 사람(人)이라는 뜻이다.”


점을 친 뒤에는 질문 내용과 점괘 그리고 실제 상황과 맞아 떨어졌는지를 반드시 기록한다. 가장 오래된 <월식>사실을 기록한 무정(武丁·BC 1250~BC 1192년) 때의 갑골을 보자.



“癸未卜爭貞 旬無禍 三日乙酉夕 月有食 聞 八月(계미일에 정인 쟁이 묻습니다. (왕실에) 열흘간 화가 없겠습니까? 3일 뒤인 을유년 저녁에 달이 먹히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여덟번째 달에 (김경일 교수의 ‘갑골문 이야기’, 바다출판사)



이렇게 점을 친 뒤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놓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책(冊)이다. <오로지 은(殷)의 선인들만 전(典)과 책(冊)이 있다>는 상서(尙書) 다사(多士)편은 옳은 기록이다.



점복 활동과 관계된 기록을 복사(卜辭) 또는 갑골문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갑골문화야말로 발해문명 즉 동이족이 창조한 문명의 상징이지요. 갑골문을 보면 선왕선고(先王先考) 즉 조상에게 제사 지냈다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결국 발해문명 창조자인 동이가 세운 전통이었던 동방의 예법과 효 사상을 꾸준히 받아들인 유습이라 보면 됩니다.(이형구 교수)



사실 하늘신과 조상신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동이족만의 특징이었다. 가장 오랜 제의형태로 보는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보이는 신전과 적석총 제단 등 [3위 일체] 유적은 바로 하늘신·지모신·조상신에 대한 우러름을 표시한 예법의 탄생이자 제정일치 사회의 개막을 상징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기원한 점복신앙과 갑골문화가 탄생되었다.



“군사를 일으킬 때 소를 잡아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출진 여부를 결정했다. 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 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



이렇듯 부여·고구려의 점복기사는 <삼국지 위지>뿐 아니라 <후한서>와 진서(晋書) 등 중국사서에 차고 넘친다.



갑골의 원류 발견



우선 발해 연안. 1962년 시라무렌(西拉木倫서랍목륜)강 유역인 내몽고 자치구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富河溝門)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갑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유적에서는 갑골 외에도 [동이족]의 대표 유물인 지(之)자형 빗살무늬 토기가 같이 출토되었다(연대추정 BC 3500~BC 3000년) 이 연대는 중국·대만학계가 갑골문화의 원조로 보고 있던 하북(河北)·호남(河南)·산둥(山東)반도의 용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이나 더 이르다. 또한 고조선 문화에 해당하는 발해연안의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 유적에서도 갑골이 흔히 발견된다. 적봉 지주산(蜘蛛山)·약왕묘(藥王廟) 유적, 영성(寧城) 남산근(南山根) 유적, 북표풍하(北票豊下) 유적 등에서도 다량의 갑골이 나왔다. 물론 연대는 상나라 초기 갑골이 출토된 유적보다 이르다. 갑골의 재료도 거북이가 아니라 사슴과 돼지 같은 짐승 뼈를 사용했다.



[갑골문화]는 [상]의 중기~말기, 즉 무정왕~주왕(BC 1250~BC 1046년) 사이에 극성했다. 글자가 있는 갑골인 유자갑골(有字甲骨)도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모두 글자 없는 갑골로 무자갑골(無字甲骨)으며 대부분 발해 연안에서 나타난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난다. 무자에서 유자로 변하는 추세도 그렇거니와 또 하나 갑골의 분포도를 보면 그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그려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발해 연안 시기 주재료는 사슴과 양의 어깨뼈였는데 시대가 흐르고 또한 남으로 내려오면서 소가 많아지다가 이윽고 거북이 등딱지로 완성되는 것이다. 또 하나 고조선 사람들이 기후가 온화한 중원으로 갑골문화를 대동하고 남천(南遷)했음을 보여주는 명쾌한 증거이기도 하다. 발해 연안에서 태동한 갑골문화는 중원으로만 확산된 게 아니었다. 1959년 두만강 유역 함북 무산 호곡동에서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하나 있었다.



<왜 한반도에는 갑골이 보이지 않는지였다. 갑골문화는 일본 야오이(彌生미생)시대와 고분(古墳)시대에도 보이는 현상인데 왜 한반도에는 없을까. 같은 동이족의 영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난제는 갑자기 풀렸다. 당시 동아대 <정중환> 교수가 <김해 부원동 유적’ 보고서>에서 AD 1~3세기에 한반도에서도 갑골문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 이후 봇물이 터졌다. 김해 봉황동 유적과 사천 늑도, 전남 해남 군곡리 패총, 경북 경산 임당 저습지와 전북 군산 여방동 남전패총 등에서 갑골이 속출했다.



수 천 년 전부터 점복과 굿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며 지금도 20만 명에 이르는 무당과, 30만 명에 달하는 역술인들이 성업 중인 ‘별난’ 나라, ‘별난’ 민족의 전통은 이토록 뿌리깊은 것이다.



1986년 3월 요령성 금주(錦州)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청동꺾창(銅戈동과)이었다. 출토된 곳은 금현(錦縣) 수수영자(水手營子) 마을이었다. 발해만에서 북쪽으로 10㎞ 정도 떨어진 데에서 발굴된 [청동꺾창]은 [상나라] 초기의 특징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하가점 하층문화에 속하지만 고조선과는 연관성이 매우 깊은 지역이었다.



그때까지 발견된 [청동꺾창]은 대부분 자루(柄병)부분이 목재여서 썩어 없어진 상태였는데 이 꺾창은 몸 전체를 청동으로 주조한 게 특징이었다. 무게는 1.105㎏에 달했고 전체 길이는 80.2㎝였다. 연대는 BC 1500년으로 평가됐다. [꺾창]은 [상나라] 도읍지였던 하남성(河南省) 중부 언사현(偃師縣) 이리두(二里頭) 유적에서 확인된 청동꺾창(연대는 BC 1500년 추정)과 거의 구분이 어렵다. 이는 둘 다 [상나라]가 내려 온 초기 즉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꺾창]이라는 뜻이며 그 전통이 발해연안에서도 꾸준히 숨쉬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형구>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청동꺾창은 선사시대의 농사용 즉 수확용 돌낫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다. 그 직접적인 단서가 바로 발해연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이교수가 말하는 유물은 요동(遼東) 반도 남단 양두와(羊頭窪)에서 확인된 돌꺾창(石戈석과)를 가리킨다. 리지(李濟)는 <양두와 문화의 연대는 하(夏·BC 2070~BC 1600년)와 비슷하다> 면서 <이 돌창이 수수영자 출토 청동꺾창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고조선 수장(首長)의 권장(權杖)으로서의 예기(禮器)



원래 과(戈·꺾창)를 자전(字典)에서 찾으면 <한두 개의 가지가 있는 창>이라는 풀이와 함께 두 번째 뜻으로 <전쟁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나온다. 고대사회에서는 [과]가 오늘날의 [총] 같은 대표적인 무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수수영자에서 나온 [청동꺾창]을 살펴보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비실용적이라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 [과]는 원래 무기다. 때문에 창날(戈) 부분은 무게 있는 청동으로 만들어 날을 세우고 자루부분은 가벼운 나무를 사용한다. 그래야 적을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청동꺾창]은 창날과 자루를 모두 미끈한 청동으로 만들었다. 오히려 가벼워야 할 자루(柄)는 무겁고 두껍다. 하지만 [과]는 얇고 가볍다. 또한 자루 양면은 정교한 문양을 주조했고 녹송석(綠松石)으로 요철식 상감을 해놓았다. 이래가지고서야 무기라 할 수가 없다.



이교수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러니 이것은 살상무기가 아니라 의례(儀禮)용 병기로 볼 수밖에 없는 이른바 권장(權杖) 즉 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항은 출토된 수수영자는 요동 반도와 인접한 곳에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핵심이 도출된다.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고조선의 터전이었고 [청동꺾창]은 바로 고조선의 수장이 지녔던 권장이 아닌가하는 결론이다. 문득 [상]의 왕족인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상서(尙書)의 기록이 떠오를만 하다. 저들이 왜곡을 하였어도 <기자(箕子)가 조선을 건국했다>가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뜻이니 기록상으로도 이미 발해연안에는 강성한 조선이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또 하나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경향신문 탐사단이 처음 공개했던 삼좌점(三座店)·성자산(城子山)의 거대한 고조선의 석성유적이다(경향신문 2007년 10월13일 ‘고조선 추정 싼줘뎬·청쯔산 유적’ 참조)



이뿐이라면 또 <‘초’를 치는군>하면서 중국인 특유의 [허풍]으로 폄훼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제단·신전·적석총이 확인된 뉴허량 제2지점 4호 적석총 내부에서 나온 청동제 환식(環飾·고리 장식)은 무엇을 말해줄까? 조사단 분석으로 홍동질(紅銅質), 즉 원시청동인 순동이었다. 증좌가 또 있다. 1987년 오한기(敖漢旗) 서대자(西台子) 유적 다시 말해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층에서 출토된 다량의 도범(거푸집)이다. 도범 속에는 낚시 바늘 형태의 틈새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것은 청동낚시바늘을 만들기 위한 주형(鑄型)이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발굴 성과를 토대로 추측하면 중국의 청동기 시대 아니 동북아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BC 30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할 때란 얘기다. 그런데 이런 [홍산문화]의 전통은 이른바 [하가점] 하층문화를 거쳐 [상나라]로 그대로 넘어온다.



수수영자에서 나온 청동꺾창(BC 1500년)도 중요하지만 BC 1600년 유적으로 평가되는 대순자(大甸子) 유적도 홍산문화-하가점 하층문화-상나라 문화를 연결해주는 상징적인 유적으로 정평이 나있다. 마지막으로 움직일 수 없는 쐐기를 박겠다. 1973년 대릉하(大凌河) 유역 오한기 서대자에서는 모두 1683건의 도기(陶器)가 확인됐다. 거기에서 도기 가운데 400점에 달하는 완전한 [채회도기]들이 쏟아졌다. 헌데 도기의 모양이라든가 문양의 모티브가 훗날 상나라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했다. 특히 솥과 잔, 사발, 시루, 단지에 나타난 도철(괴수의 얼굴)·운뇌문(雲雷·구름과 번개)·목뇌(目雷·눈과 번개)·기룡(夔龍·추상화한 용) 문양 등은 상나라의 청동기 문양과 똑같다. 그리고 삼좌점·성자산의 거대한 석성구조 역시…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인 [홍산문화] 시기에 청동기 문화의 맹아가 텄다. 그리고 여기로부터 시작된 등급사회와 예제(禮制)가 갈수록 발전했고 청동기와 석성, 적석총의 전통이 하가점 하층문화 시기에 꽃을 피웠다. 쑤빙치(蘇秉琦소병기)의 말처럼 발해연안에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BC 1600년)와 같은 반열의 강력한 방국(方國·왕국의 의미)이 존재했다. <쑤빙치>는 그 방국이 어디인지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방국은 고조선이다. 그리고 이 발해문명 창조자 가운데 일부 갈래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중원으로 내려와 상나라(BC 1600~BC 1046년)를 건국한다.



이 모든 해석은 중국학계도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출토된 유적과 유물상으로 확인되어 다 아는 [고조선 부분]만 빼고 말이다. 돌려 말하면 <쑤빙치>를 비롯한 중국 고고학자들의 대부분이 (한때 중원을 제패한) 상나라 문화의 기원은 발해만의 고조선에 있었다(先商文化在渤海灣)라고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출처 : 하나가라 우리나라
글쓴이 : 대수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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