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진시황 병마용갱의 진짜주인은 누구인가?

설레임의 하루 2011. 10. 27. 20:11

*출처:  

 

 

 

 

진시황 병마용갱의 진짜주인은 누구인가? (8부)

섬서성 서안 부근 빈.기까지 점령했던 단군조선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1/09/19 [12:15]
 
 
(단군세기 원문)
2세 부루단군 재위 58년
▲ 머리카락을 땋아 목을 덮도록 하면 이렇다.

계묘 3년(B.C2238)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안하였다.

(해설)
위 기록인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는 댕기머리 또는 땋은 머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이 우리 민족의 상징인 상투로 발전하는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머리를 땋는 풍습이 없었다. 그 기록의 근거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상투가 조선족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위만이 조선족화(朝鮮族化) 했다는 것을 망명 시 조선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위만에 대한 설명. 위만이 기자조선을 멸하고 위만조선을 세워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역사복원신문

 
섬서성 서안 부근에서 발견된 병마용갱(兵馬俑坑)에서 발견된 토용(土俑)들도 모두 상투를 튼 모습이다. 그 무덤이 진시황의 것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따지고 보면 진시황도 동이족이었다. 또한 병마용갱은 13대 흘달단군과 22세 색불루단군 때 조선이 서안 서쪽에 있는 빈.기(邠.岐)를 점령하고 있을 때 조선이 만든 유적일 가능성도 있다. <단군세기>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 병마용갱에 있는 토용들의 머리는 한결같이 땋은 머리 즉 동이족의 상징인 상투를 튼 모습이다.     © 역사복원신문


“13세 흘달단군 갑오 16년(B.C1767)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가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환(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위 기록에서 우리는 단군조선의 의중에 따라 하나라와 은나라의 판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하나라 도읍은 안읍(安邑)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하현(夏縣)이며, 은나라 도읍은 조가(朝歌)로 지금의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신양시 위휘현이다. 이 두 나라가 싸우는데 조선이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다는 것은 조선이 이 두 나라와 가깝게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견(畎)은 섬서성에 있던 견이(畎夷)를 의미하는 것이고, 낙랑(樂浪)은 산서성 최남부 원곡(垣曲) 일대, 빈(邠)은 섬서성 함양시 일대, 기(岐)는 섬서성 기산현의 동북쪽이다.

安邑县 : 夏禹所都,春秋时魏绛自魏徙此,战国为魏都,汉置县,今夏县安邑县之地,后魏分安邑为南安、邑北、安邑三县,旋改北安邑为夏县,故城在今山西夏县北,即后魏分置之县也,清属山西解州,民国移治运城,寻复故,属山西河东道,县境有盐池,为山西省惟一产盐之区,左传谓郇瑕氏之地,沃饶而近盐,即指此地而言,池水不流,凝成固粒,朝取夕复,终无灭损,其利甚溥。
(안읍현 : 하나라 우의 도읍.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하현 북쪽의 땅) 

朝歌县 : 古沫邑,帝乙所者,(按今本竹书纪年,武乙三年自殷迁于河北,十五年自河北迁于沫,帝王世纪,帝乙复济河北徙朝歌,罗振玉殷虚书契考释云,以卜辞证之,迁沫必在帝乙之世,竹书误,)周武王灭殷,封康叔为卫国,《书酒诰》明大命于妹邦,《孔传》“纣所都朝歌以北是也,”项羽立马邛为殷王,都朝歌,即此,汉置县,三国魏置朝歌郡于此,寻废郡,故城在今河南淇县东北,隋移治,改为卫县。
(조가현 : 하남성 신양시 위현으로 기현의 동북쪽 - 은허 서쪽)

또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따르면, 은 탕왕이 하 걸왕을 정벌한 곳은 순임금이 죽은 명조(鳴條)라는 지명으로 산서성 남부 운성시에 있는 염지(鹽池) 일대이다. 맹자가 말하길 “이 땅이 동이족의 땅”이라 했으니 바로 여기까지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것이다.
“명조 : 고대 지명으로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 안읍진 북에 있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정벌한 전투지이다. 고후원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산서성 운성시 하현의 서쪽, 일설에는 하남성 낙양부근, 또 일설에는 하남성 신향시 봉구 동쪽에 있다고 한다.
(鳴條:“古地名。在今山西运城安邑镇北,相传商汤伐夏桀战于此地。又名 高侯原 。古地名,又名高侯原,其地具体位置,异说甚多,一说在今山西省运城市夏县之西,一说在今河南洛阳附近,还有一说在河南省新乡市封丘东。)”
 
▲고지도에 그려진 빈(邠).기(岐)는 섬서성 서안 서쪽 땅. 산동성에 보이는 지명들은 역사왜곡을 위해 하남성에서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 조선의 빈.기 점령 기록과 관련된 지명들.  청색은 현 지명이다.                                                    © 역사복원신문


위 <단군세기>의 기록은 중국의 고대 사서인 한나라 사람 유향이 쓴 <설원 권모(設苑權謀)> 편에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신빙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탕이 걸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말하기를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펴보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九夷=조선)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의 군사를 요청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토벌하니 걸왕은 남소씨의 땅으로 도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위 <단군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위 기록 이외에 조선이 빈.기를 점령했다는 기록이 <단군세기>에 또 있다.
“22세 색불루단군 을묘 20년(B.C 1266) 이때에 람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과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람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여기서의 람국(藍國)은 산서성 장치(長治)시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중국통사 참고자료 고대부분(中國通史參考資料古代部分)-4에 따르면, “람수는 산서성 둔류현 서남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장으로 들어간다(蓝水,源出於山西屯留县西南,东流入漳。)”라는 문구가 있으며, 보다 상세한 자료로는 아래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 나오는 “강수(絳水)는 산서성 동남부 둔류현을 흐르는 강”이라는 설명이 있다. 

绛水 : 源出山西屯留县西南八十里盘秀山之阴,八泉涌出如珠,合而东流,至潞城县界交漳村入漳,水经注谓之陈水,《清一统志》水经注有绛水而无蓝水,其绛水所行之道,皆今蓝水也,而别有陈水,则今绛水所行之道也,与今府县诸志不合,惟魏书地形志有绛水,又有蓝水,与今水道相同。
(강수 : 산서성 둔류현 서남 80리 반수산 남쪽에서 나와 동으로 로성현 경계와 만나는 장촌까지 흘러 장수로 들어간다. <수경주>에서는 진수라 한다, <청일통지> ‘수경주’에 강수라고 있는데 무람수라 하는데 그 물길이 모두 같다. 다른 이름으로 진수라 한다. ‘위서지형지’에는 강수와 람수가 있는데 물길이 같다. 즉 강수=람수) 

고죽군(孤竹君)은 고죽국(孤竹國)의 왕으로 청절지사로 유명한 백이.숙제의 부왕이다.
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죽국의 땅은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서쪽에 있는 영제(永濟)시 일대로 이곳이 바로 요서군(遼西郡)의 땅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유적으로 고죽국의 왕자였던 백이.숙제의 묘가 황하가 꺾이는 곳에서 최근 발견되었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현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 황하가 꺾이는 산서성 최남단 영제시에서 발견된고죽국의 왕자 백이.숙제의 묘는 요서군의 상징.              © 역사복원신문


엄독골(奄瀆忽)의 현재 지명은 불분명하나 엄(奄)이란 지명이 산동성 곡부(曲阜) 또는 황하 남부 하남성 평정산시 서쪽에 있는 노산현(魯山縣)으로 나오며, 고 임승국교수는 험독현(險瀆縣)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노나라 사람인 공자의 고향이라는 산동성 곡부는 역사왜곡을 위해 대야택 서쪽 하남성에서 지명이동된 것이고, 노산현은 약간 멀기는 하나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여하튼 엄독골이 은나라 땅과 가까웠다 하니 은나라 도읍인 조가(朝歌:하남성 기현) 사방 오백리 안쪽 어딘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맹자가 말하기를 “하나라 뒤의 은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의 강역도 일천리가 넘지 않았다.(夏后殷周之盛地未過千里者也) ”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국(黎國)에 대해 아래 여러 문헌에서는 산서성 장치시(상당군) 일대로 말하고 있으나 이는 춘추시기에 도읍을 옮겨간 곳으로 보이며, 최초 여국은 주 문왕(서백창)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아 섬서성 서안 일대가 확실하다. 위 <단군세기>의 문맥으로 보아도 섬서성 서안 부근으로 읽힌다.
* <설문> : 은나라 제후국으로 상당군 동북에 있다.
《说文》曰:“殷诸侯国,在上党东北
* <괄지지> : 옛 여성으로 여후국이며 로주의 여성현 동북 18리에 있다.
《扩地志》曰:“故黎城,黎侯国也,在潞州黎城县东北十八里。
* <원화군현지> : 상당군 호소현에 여정이 잇다. 고대 여국이다.
《元和郡县志》曰:“上党郡壶关有黎亭,故黎国。”
* <후한서군국지> 호소현 여정이 고대 여국이다.
《后汉书﹒郡国志》曰:“壶关县,黎亭故黎国。” 

<중국백과사전>에서의 여국(黎國)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黎国 : 商末为周文王所灭的黎国,在周武王分封诸侯时,被封给帝尧的后裔,赐爵为侯,并且仍然沿用黎国的名称。春秋时黎国迁都于山西黎城县东北的黎侯城,后为晋国(在今山西西南部)所灭
(여국 : 은나라 말기 주 문왕이 여국을 멸하고, 주 문왕이 제후를 나누어 봉할 때 요임금의 후예에게 작위를 내려 제후로 삼았다. 이러한 연유로 여국이라는 별칭을 쓴 것이다. 춘추 때 여국은 산서성 여성현 동북에 있는 여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후에 산서성 서남부에 있던 진국이 멸했다.) 

또한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빈 땅에) 고공단부(古公亶父)가 살고 있었는데 훈육과 융적(戎狄)이 쳐들어와 재물을 요구하고 땅과 백성들을 차지하려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융적에 맞서 싸우자고 하였으나 고공단부는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면서 기산 기슭으로 옮겨가자 백성들 역시 그를 따라 기산으로 모였다. (중략) 주나라를 세운 문왕 서백창은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쪽에 있는 견융(犬戎)과 밀수숙(密須國)과 기국(耆國)을 정벌하였다.” 

고공단부는 주 문왕의 조부이며, 기국과 여국이 같다는 근거는 <사기 주본기 정의>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세워진 여국(=기국)이 나중에 서백창에 의해 망해 산서성 장치시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위 <사기>의 기록이 <단군세기>의 빈.기 점령사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맹자의 <이루장구 하>에 따르면, “문왕(서백창)은 기주(岐周)에서 태어나고 필영(畢郢)에서 돌아가셨으니 그는 서이(西夷) 사람이다.(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나라를 세운 문왕도 단군의 후예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나라가 기국(=여국)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여국에서 주나라를 세운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단군세기>에 기록된 조선의 빈.기(邠.岐) 점령 사실은 중국사서의 여러 기록에서 이를 입증해주고 있으며, 상당 기간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기록 액면 그대로 주 문왕이 여국(=기국)을 멸했다 하더라도 여국은 섬서성 서안 부근에서 약 100년 이상 존재했던 나라이다. 

▲ 진시황의 병마용갱으로 알려진 유적은 조선(동이족)이 만든 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 역사복원신문


진시황의 병마용갱으로 알려진 유적은 이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진시황은 전국시대를 통일한 후 겨우 11년간 재위에 있었으며, 그 후 진제국은 약 5년간 존재하다가 망한 짧은 수명의 나라였다. 그러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과 병마용갱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너무도 과장된 역사해석이라고 본다.  

특히 죽지 않으려고 불로초(不老草)까지 구하려 했던 진시황이 자기 무덤을 생전에 만들었다는 것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또한 진시황 사후 진나라는 제위를 둘러싼 거듭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그러한 병마용갱을 만들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병마용갱은 조선이 빈.기(邠.岐)를 점령하고 있을 때 단군조선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토용들의 상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1963년 서안 남쪽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를 발굴할 때 그 안에서 동이족의 유물이 나오자 중국 정부는 발굴을 중단하고 출입을 통제시키고 항공사진에 찍히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 위장했다. 왜 그랬을까? 이 서안 남쪽의 피라미드도 조선의 빈.기(邠,岐) 점령 때 만들어진 유적이 아니가 한다. 
 
▲  미 공군의 항공사진에 찍힌 서안 남쪽의 피라미드에서 동이족의 유물이 나오자 중국정부는 나무를 심어 은폐했다.     © 역사복원신문


단군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만 있던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의 빈.기 점령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이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면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실현될 수가 없다. 섬서성과 조선이 서로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록들이 가능한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필자는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을 산서성으로 보며, 동으로부터 한반도와 만주, 몽고와 시베리아, 섬서성 또는 하남성 일부를 제외한 중국대륙 대부분, 티베트와 위그르, 중앙아시아를 거쳐 터어키까지 광대한 영토를 연방 형태로 다스렸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였던 것이다. 단지 조선왕조와 일제의 식민사학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 단군조선은 아시아 거의 대부분을 연방 형태로 다스린 대제국이었다.                                        ©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09/19 [12:15]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