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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가 개국시조로 삼은 박혁거세는 부여단군 고두막 외손?

설레임의 하루 2011. 10. 27. 19:49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신화로 포장하고 있으나, 사실 그 하늘이란 부여를 의미한다 하겠습니다.박혁거세의 어머니와 출생설화가 [환단고기]에는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단고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박혁거세의 어머니 이름은 파소이고, 후에 신라에서 예수를 처녀잉태했다는 마리아처럼 성모로 추앙받았습니다. 박혁거세 어머니 파소는 부여황실의 공주입니다. 구체적으로 한나라군을 크게 격퇴시키고 부여민심을 얻어 해모수 왕조를 접수하고 황권을 장악한 부여 5대 단군 고두막의 딸이라는 설과 고무서 단군의 첫째 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동부여에서 부여로 망명하여 6대 고무서 단군의 후계자가 된 고추모의 경우 고무서 단군의 둘째 딸인 소서노와 혼인했던 바, 첫째 딸도 있었다는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박혁거세의 어머니 파소는 고두막의 아들인 고무서의 첫째 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아래 자료는 고두막 단군의 딸이라는 가설이니 좋은 연구자료가 되길 바랍니다.

 

[연구자료]신라新羅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아버지에 대한 가설


1. 서설

본 글은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고우루의 자손인 ‘고사로高斯盧’라는 필자의 추정 하에 쓰여진 글입니다.


대저 “왕대 밭에 왕대 나고 시누대 밭에 시누대 나는 법”입니다. 한민족의 역대 제왕세계帝王世系를 살펴보면, 최소한 대진국 이전까지 모두가 역대 제왕의 혈통을 상전한 것입니다.


대저 왕통王統이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니, 신라의 혁거세 또한 왕통에서 나왔다는 가정 하에 이 글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추정이며 상상입니다.


행여 이 글을 읽고 모든 박씨 가문 일족께서는 “내 조상은 고우루구나.” 하고 단정하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남의 혈통을 망친 자는 그 죄가 천추만대에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남의 혈통을 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저는 처음 우리 북부여사를 조금이라도 밝혀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 글을 지었지만 이내 깊이 감춰 두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가 중국中國 제실帝室의 딸인 사소娑蘇로서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라고 거짓 오도하고 있는 현실을 방치하는 것은, ‘미필적 고의’이니 곧 김일연과 같은 공동정범이 되는 것으로, “그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역사의 중죄인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 글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 중의 하나인 박씨 일족이 ‘추악한 중국인’이 되는 것은 면하게 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 글이 대한민국의 영명한 선비들과 박씨 가문의 출중한 자제들을 자극시킨바 되어서, 진정한 박씨의 혈통을 찾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면 “이 또한 천추만대의 공덕이 아닌가.”하는 간절한 바람에, 용기를 내어서 세상에 공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글은 일대 논란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란은 더욱 증폭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논란 속에서 더 좋은 생각, 더 좋은 이론이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고귀한 혈통인 박씨 가문이 진짜 자기 조상을 되찾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일 개인이 받게 될 천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부여사와 발해사의 멸절입니다.


역사가 왜곡되면 혈통을 부정하게 되고, 혈통을 부정하게 되면 혼혈을 자초하게 됩니다. 일단 혼혈이 되고 나면 역사는 영원히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 혼혈된 나의 조상은 이미 한민족이 아닌 지나인, 왜족, 유대인, 게르만인, 니그로인 등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 글을 바탕으로 박가들이 스스로의 혈통을 되찾고, 그 고귀한 혈통을 영원히 순수하게 간직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전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글은 환단고기를 토대로 한 필자의 개연성 있는 상상합니다.


2.본설

신라新羅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이니 곧 ‘파소婆蘇’다. 파소는 고두막한高豆莫汗의 딸로서 남편이 없이 임신한 여인이다. 그런 파소는 몰래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으로 도망을 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


부여夫餘 제실帝室의 딸 파소는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임신을 하였을까? 또 왜 도망을 쳤을까? 그것도 수 천리 머나먼 길을 혈혈단신으로 도망을 쳤을까?


황실皇室의 딸이 혼전 임신을 하고 도망가야 하는 경우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황실의 명예를 크게 더럽힌 경우와, 왕권에 위협적인 아이를 잉태한 경우다.


훗날의 일이지만 고구려 평강열제平康烈帝의 딸 평강공주는 가난한 평민의 아들 온달溫達과 결혼을 했고, 훗날 사위는 실력으로 평강열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 경우 혼전 임신이랄 수는 없지만, 평강공주가 생면부지의 바보 온달溫達과의 결혼을 고집하자, 황제가 공주를 쫓아 낸 경우의 일이며, 이것은 정권유지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던 일이었다.


이것은 오히려 유력 귀족과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평강공주를 유력 가문에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평강 공주의 고집으로 좌절되자, 상대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서, 평강 공주를 쫓아낸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파소는 몰래 도망갔다. 고두막한이 황녀皇女를 위해 쫓아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자신과 더불어 복중의 아이를 살리기 위한 가장 확실한 선택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고주몽高朱蒙이 동부여의 태자 금와金蛙를 비롯한 귀족들로부터 모진 견제와 냉대 그리고 살해 위협을 끊임없이 당한 일이 있었다.


본래 고주몽은 해부루解夫婁의 태자太子 금와金蛙 보다 2살이 위였는데, 동부여 사람들이 동부여東夫餘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주몽은 어쩔 수 없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북부여로 도망갔다.


이 때 고주몽은 동부여 군사들에게 쫓기어 엄리대수에서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다. 이 때 고주몽을 죽이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두 살 아래로서 경쟁관계였던 금와로 봄이 타당하다. 그 경쟁관계는 훗날 금와의 아들 제3대 동부여왕 대소帶素의 고구려 침략으로 이어진다.


금와가 해부루의 아들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대저 해부루는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이 마주 대한 것을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왕은 하도 괴이하여 돌을 굴리게 하자, 그 속에 금빛 개구리를 닮은 사내아이가 나오자, 이내 기뻐 소리쳐 외치며 “이는 하늘이 나로 하여금 대를 이을 아들을 주었다.”하며 거두어 길러 태자로 삼은 아들이다.


이상을 보면 해부루는 압록 변실을 지나던 중, 자신의 조카인 불리지의 아이를 밴 유화를 동부여로 데려와 거둔 이래, 그 이 삼년 후에 다시 곤연에서 금와를 얻었으니, 이는 해부루에게 아들이 없었음을 뜻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연로한 해부루의 핏줄인 아들이 없었음으로, 고두막한은 해부루의 청을 받아들여 해모수의 종묘사직을 보존하는데 쉬이 동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해부루의 선택은 비슷한 연배인 고주몽과 금와에게 있어서는 피말리는 왕권 경쟁을 불러왔던 것이다.


대저 고주몽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차남인 고진의 손자인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의 아들이다. 더불어 배달, 조선, 북부여 시대 유력 황후족皇后族이었던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결국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그 혈통과 재능으로 인해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드디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에서 동부여군의 추격을 피해 탈출에 성공하여, 단숨에 후북부여後北夫餘의 제7대 단군이 된 인물이다. 모름지기 해부루왕의 입장에서는 고두막한의 의심을 피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하여야 함으로, 부여 일대에서 “활 잘 쏘는 자를 일러 주몽이라 한다.”고 크게 소문난, 너무나도 탁월한 주몽의 혈통과 재능은 불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동부여에서의 고주몽의 왕권 경쟁에서의 패배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하겠다. 모름지기 동부여는 제후국이요, 북부여는 황제국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주몽은 동부여를 탈출함으로써 북부여의 황제가 되었다.


각설하고 박혁거세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점에 있어서는 고주몽과 비슷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받을 수많은 견제와 의심 그리고 살해 위협은 고주몽과 비슷하였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파소의 선택에 의하여 일순간에 해소된다. 이는 어머니 파소가 박혁거세를 임신한 채 북부여 황실皇室을 도망쳤기 때문이다.


대저 고주몽이 엄리대수를 건너 살길을 얻고, 파소가 눈수를 도망쳐 살길을 얻은 점은 비슷하다 하겠다. 그리고 고주몽은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북부여北夫餘의 단군檀君이 되었고, 파소는 눈수嫩水를 도망쳐 그 아들이 진왕辰王인 거서간居西干이 되었다.


삼신오제본기에는 북부여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문화가 있어, 어린 생명을 죽이지 않고, 임신한 생명을 죽이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삼신에게 받은 성性, 명命, 정精을 온전히 태아의 몸에 발현시키는 태교胎敎 문화가 체계적으로 시행되었으니, 이가 바로 북부여 초기 해모수 단군 때 시작된 ‘공양公養 태모지법胎母之法’이다.


또 살생에도 법이 있는데 위로는 국왕에서 아래로는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때와 대상을 가려 한 생명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자고로 “부여에서는 말이 있어도 타지 않았고, 죽이는 것을 금하여 방생하였다.”하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고로 잠든 것을 죽이지 않고, 알 낳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은, 곧 때를 가림이요, 어린 것을 죽이지 않고, 유익한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은, 곧 대상을 가림이니, 생물을 소중히 여김이 지극하다 할 만하다. 삼신오제본기>


아무튼 파소는 이런 문화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쳤다. 왜 그랬을까? 부여에서 어린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쳤다. 왜 그랬을까?


그 의문에 대한 가정으로 먼저 황실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와 비슷한 경우로 하백녀河伯女 유화柳花가 있다. 비서갑의 하백 가문은 배달倍達 이래 황후皇后를 가장 많이 배출한 황후족皇后族으로 황실皇室에 버금가는 존귀함이 있었다. 대저 배달의 시조 거발환 환웅의 부인인 바로 웅씨왕녀熊氏王女이며, 단군성조의 어머니 또한 웅씨왕녀다. 그리고 단군 왕검 또한 비서갑 하백녀를 황후로 삼았으니, 비서갑菲西岬이란 배달국 초대 거발환居發桓 환웅桓雄이 봉한 웅녀군熊女君의 나라를 뜻하며, 하백河伯이란 그 나라를 다스리는 대감大監인 왕검王儉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모든 하백의 여식이 황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비 황후皇后로서의 품격을 지녀야 할 하백녀 유화는, 그만 옥저후 고모수와 처음 눈이 맞아 압록강鴨綠江의 변실邊室에서 사통을 하고, 그 날 그만 고주몽을 잉태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훗날 상제上帝에 천명天命에 의하여 천하天河의 용궁龍宮에 들어가 사해용왕四海龍王이 되는 아버지 하백”은 압록 변실 중에 가두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잠시 가두어 둔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는 백번 죽여야 하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자 임신한 생명을 당시의 풍속에 따라 절대 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유화는 동부여로 가서 고모수와 함께 살며, 불리지 고모수와 처음 만나 사랑의 결실을 맺은 이듬해인 동부여 해부루 8년 임인壬寅 5월 5일에 고주몽을 낳는다.


돌이켜보면 하백이 불같이 노하였던 까닭은 당대 새로운 삼한三韓의 주인이 된 고두막한 때문이다. 훗날 고모수의 소생인 소서노와 유화의 소생인 고주몽이 결혼한 것을 보면, 고모수와 유화는 그 나이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할 것임으로, 후북부여의 태자 고모수의 태자비太子妃로 하백의 딸인 유화가 간택되었을 가능성 내지 태자비로 선택될 가능성은 농후했다 하겠다.


또는 하백의 딸들 중에 한 명은 태자비로 간택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겠다. 그런 하백의 입장에서 딸의 탈선은 이미 엎지러진 물임으로 가문도 살리고, 딸도 살리고, 사위도 살리려면 하백은 사위를 죽일 듯이 뒤쫓는 척하며 놓아 주고 딸은 유폐시켜는 척하며 살려줘야 했을 것이다.


훗날 해부루가 압록 변실 중에 유폐되어 있던 유화를 불리지의 청탁에 의하여 동부여로 데려간 것을 하백이 묵인했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전실 황실의 최고 어른인 해부루解夫婁에 대한 친분 때문이며, 딸을 아끼는 아버지 하백의 너무도 자애로운 마음에 의한 것이다.


아무튼 가문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던 유화를 생각해보면 파소婆蘇의 도주는 지나친 감이 있다. 본래 여인의 정숙한 품행이 더욱 요구받는 것은 황족皇族보다는 황후족皇后族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소가 제실帝室도 예기치 못한 필사의 도주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의심 때문이다. 그것을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아비 없이 임신하였음으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볼 것은 아비 없이 임신하였으면 황실의 망신이요, 나라 망신인데, 역사의 기록에 “황실의 망신”이란 말 대신 “의심을 받았다.”고 표현 하였으니, 이 의심은 바로 역모에 대한 의심이다.

 

이 정권 도전에 대한 의심은, 곧 그 뱃속 아이의 혈통에 대한 의심이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만일 평강공자가 임신한 온달의 아들과 같았다면 정권에는 전혀 도전이 되지 못한다. 그 신분이 원래 비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파소가 도망갈 이유가 되지 못한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개국 공신 또는 유력 가문의 자제라면 적극 혼인시켜 황권을 강화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옛날 평강열제는 원래 유력 귀족의 가문 자제와 결혼 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만 하더라도 왕권 강화를 위해 귀부한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 자신의 딸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의심 받아야 할 유일한 이유는 적국의 혈통血統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적국은 어느 나라인가? 그것은 이미 망한 북부여 황실이다. 본래 북부여 제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전북부여의 마지막 황제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이 병을 이루어 급서한 인물이다. 동명국 고두막한이 갑오년甲午年(BCE 87년) 10월에 병력을 앞세워 나라를 내 놓으라고 위협하니 그만 그 달에 붕어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고우루 단군은 재위년在位年이 총 34년이니 그 장성한 아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고우루의 전대인 제3대 고해사高奚斯 단군 또한 그 재위년이 49년이었음으로, 고우루 단군의 임종년臨終年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임으로, 고우루 단군 34년 갑오에 그 자녀들 또한 그리 어리지 않은 셈이 된다.


이 시대는 또한 강적인 도만 위적 그리고 한나라 등과의 전쟁 속에서 황실의 보존을 위해 혼인과 출산이 전대에 비하여 비교적 빨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적과의 전쟁이 많을 경우에는 동서양의 왕조가 왕이 비명횡사하는 경우를 대비해 반드시 태자를 정하는 일이 많았으니, 고우루 단군 또한 비상시를 위해 태자太子들 두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고우루가 갑자가 죽는 상황에 있어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을 비롯한 국인들은 연륜이 지극한 황제의 동생 해부루를 맞아들여 그 후사로 옹립하였고, 이듬해인 을미乙未(BCE 86년)에 해부루는 스스로를 낮추어 왕王이라 하고 동부여로 옮겨갔으니, 이 때 만일 고우루의 후손이 있었다면 졸지에 황제는 고사하고 왕은 물론이며 왕권王權이나 황권皇權을 회복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쳐 버린 꼴이 된다.


이제 전부여 왕실이 항복하고 동부여로 떠나간 이후 그 빈 도성에는 고두막한이 들어왔으니, 그곳은 바로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혹은 난빈蘭濱이다.


이 때에 파소도 전북부여의 도성都城에 들어갔을 것임으로, 이 때 망한 황실의 후예와 파소가 점차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북부여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훗날 드러나는 일이지만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는 북부여 제6대 단군이 되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시집가지 않은 자신의 딸인 소서노를 고주몽와 결혼시켜 제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고우루의 혈통이더라도 굳이 도망갈 필요가 없을 유일한 경우라면, 고두막한의 아들과 손자들이 많아야 한다. 하지만 파소가 도주하였음은 역설적으로 고두막한의 후손 중에 남성男性이 극히 드물었음을 반증한다. 그 결과가 파소의 도주와 고주몽의 단군 계승이다.


그럼 파소가 박혁거세를 임신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의 즉위 원년은 갑자년(BCE 57년)이다. 이 때 혁거세의 나이 13세였으니, 임신했던 때는 신해년(BCE 70년) 무렵이다. 이때는 고두막 재제위在帝位 17년이니, 전북부여가 동부여로 밀려난 지 17년째가 된다.


그런 점에 있어 파소는 고우루의 아들 보다는 고우루의 손자와 사랑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부여에 망국의 후손을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 황실의 가문에 준하여 예우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제국 부여의 시작은 제3기 단군 조선의 시조인 제44대 구물丘勿 단군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단군 조선은 47대 고열가高列加 단군을 끝으로 막을 내리니 고열가는 제43대 물리勿理 단군의 현손이다. 이 고열가 단군을 결과적으로 몰아낸 것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이니, 해모수는 구물 단군의 후손일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고열가 단군 시대에 해모수는 종실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물 단군의 아들은 제 45대 여루余婁 단군이며, 여루 단군의 아들은 제46대 보을普乙 단군이다.


이제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해모수의 혈통인 제2대 모수리慕漱離, 제3대 고해사高奚斯, 제4세 고우루高于婁로 이어지는 북부여의 제위를 빼앗았음으로, 고두막한은 이제 마찬가지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상대방이 민족을 위해 헌신하며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전통에 따라, 라이벌인 해모수의 직계 혈통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던 것이다.


대저 부여夫餘에 책화責禍가 있었으니, 임금은 그 재앙에 대한 책임을 지었다. 그 재앙 중에서 가장 컸던 것은 외적의 침입이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내외內外의 병란兵亂을 극복하고 종통宗統을 수호한 사람이 보위에 오르게 된 것을 뜻한다.


제43대 물리 단군 때에 융안隆安의 엽호獵戶 우화충于和沖의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백민성 욕살 구물이 그 공으로 제44대 단군이 되었고, 이어 제46대 보을普乙 단군 때에 한개韓介가 이끄는 수유須臾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한 상장군 고열가가 그 공적으로 제47대 단군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오로지 공덕과 실력에 의하여 제위에 오른 경우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모수 단군은 대부여大夫餘 말기의 극심한 분열상을 극복하고 보위에 올랐으며, 또한 고두막은 한무제의 침략을 모두 격퇴한 공덕으로 보위에 올랐으니, 이는 모두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대부여의 역사를 조용히 관조해 보면 이는 어언 400여년 가까이 내려온 부여의 전통인 책화責禍라 할 수 있으니, 이 책화의 전통에 의하면 고우루의 후손이 황실의 버금가는 예우를 받으며 황실의 보호를 받으며 생존했을 가능성은 컸다 하겠다.


하지만 책화란 외적의 침략과 국가를 뒤흔들만한 반란에 당하여 탁월한 공덕을 세워야만 황제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니, 황실의 혈통血統을 이를 사람이 극히 부족하고, 장차 내외의 도전이 예상되는 때에 파소가 고우루의 후손을 임신하였다면, 이는 역심逆心으로 밖에 비춰질 수 없게 된다.


더욱이 이 때 고우루의 후손이 특히 고우루의 태자太子 또는 장남長男 그리고 장손長孫이라면 단순히 묵과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이와 더불어 고우루의 후손이 자신의 세력을 모으려 한다거나, 아니면 동부여와 연결하려 시도했다 발각되었다면, 아무리 자비로운 황제가 보호한다 하더라도 고두막을 따르는 수많은 개국 공신들이 파소와 그 배우자를 그대로 놓아두기 어렵게 된다.


이외에도 “나중에 파소가 황실에 머물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권모술수의 재능으로 기회를 엿보아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보위에 오르게 한다면”이란 가정은 기득권층인 삼백 오가 열후 귀족이라면 누구나 상상하기 조차 싫은 생각이다. 이는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오가 귀족들에게 견제되었던 이유와 같은 경우라 하겠다.


환단고기에는 파소가 도망을 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진실을 알고 보면 파소의 아버지인 고두막께서 피신을 시킨 것이다. 고두막은 본래 호방한 준걸이었음으로, 나중에 자신에게 도전한다 할지라도 뱃속 생명을 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용병을 잘하였음으로 도전을 하면 능히 꺾을 자신이 있었음으로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더구나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잔인하게 죽여, 천추만대에 잔인한 군주로 남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고두막한은 자신의 딸을 자신과 태자 고무서를 따르는 신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딸을 저 멀리 자기를 따르는 신하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시켰다.


파소의 도주한 길이는 장장 3천리가 넘었으니, 이는 오로지 아버지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파소는 북부여의 수도 졸본卒本에서 육로로 지금의 함경도 일대인 동옥저東沃沮에 이르고, 다시 동옥저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경주慶州 일대인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徐羅伐에 도읍을 정한다.


그렇다면 파소는 왜 진한으로 도망쳤을까?


본래 진한의 뿌리는 북진한이니 지금의 만주 일대다. 이 진한의 주민들이 훗날 남쪽 마한 땅에 정착하였으니 이를 일러 남진한이라 한다. 이 남진한은 지금의 경상도 일대다.


이 남진한이 형성된 계기는 북부여 제2대 모수리 단군 정미 원년(BCE 193년)에 도적 위만衛滿이 북번한을 강탈하면서 부터다. 이 때 번한番韓의 상장군 탁卓이 남쪽 마한馬韓 땅에 중마한中馬韓을 세워 스스로 임금이 되고, 변한弁韓, 진한辰韓이 백리의 땅을 봉함 받았으니, 이것이 곧 남변한, 남진한이다.


이 남진한은 이 때 북진한 출신 백성들 중심으로 세워진 이래, 고우루 단군 3년 계해(BCE 118년)에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의 침략을 받아 북진한의 영토인 해성海城 이북 50리의 땅을 점령당했을 때, 이곳에 사는 진한의 백성들이 남진한으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이 땅 남진한은 전북부여의 황실에 대한 향수가 강하였을 터이니, 유약했지만 인정 많았던 고우루 단군의 핏줄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할 것이다.


이제 파소는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였던 한무제漢武帝를 격퇴한 한민족의 불세출의 영웅인 후북부여 단군 고두막의 딸이자, 고우루의 혈통을 임신한 까닭으로, 이곳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받게 된다.


이곳에서 출생한 혁거세는 그 나이 13세에 진왕에 올랐으니, 그 새로 고친 나라 이름은 사로국斯盧國이다. 혁거세가 전통적으로 삼한三韓의 중심을 뜻하는 진한辰韓의 이름을 버리고 감히 사로국이라 한 까닭은 다름 아닌 그 아버지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고사로高斯盧였음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로국’이라 한 것이다.


어머니 파소가 아버지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끝까지 자기 아들의 핏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아들이 북부여 고두막한과 고무서 사후에 나라를 세움에 이르러 그 아버지의 이름을 국명으로 삼았으니, ‘사로’는 박혁거세의 아버지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이다.


혁거세는 진한의 이름을 사로라 함으로써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효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세인의 말과는 달리 아비 없는 자신이 아닌, 영원히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보다 먼저 파소가 북부여를 탈출했을 때, 박혁거세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것은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도리蘇伐都利’였다. 여기서 고허촌의 고허古墟란 ‘고씨의 터’를 뜻하니, 곧 소벌공蘇伐公은 고사로를 추종하는 유력한 신하였다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파소와 혁거세의 미래를 훤히 내다보았던 것은 ‘고두막高豆莫’이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고두막의 심려원모한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두막한은 전북부여 황실을 격하하여 제후로 삼았듯이, 그 전북부여의 직계 혈통 또한 자신의 제후로 삼아, 반독립적인 상태로 남아있던 중마한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런 그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으니 고두막한(혹은 고무서)은 자신의 딸 파소를 매금寐錦으로 봉한다. 이것은 훗날 소서노를 여왕인 어하라로 봉한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고구려본기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라 하였으니 이는 두 여인이 사실상 신라와 백제의 시조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흘러 파소가 도망친 지 11년 후인 임술년壬戌年(BCE 59년)에 고무서가 6대 단군에 올랐을 때 마침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에 이르고, 그 일 년 후인 계해년癸亥年에 고무서高無胥 단군이 아들이 없는 까닭으로 이제 막 사위로 삼은 고주몽에게 보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로서 고주몽은 북부여의 제 7대 단군이자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그 일 년 후인 갑자년甲子年(BCE 58년)에 혁거세는 사로의 시왕이 된다.


대저 신라新羅가 유독 동명제東明帝를 받들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파소는 아버지 고두막한의 딸에 대한 뜨거운 마음, 그 애끓는 애정을 몰랐다.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지아비인 고사로를 덧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 원망을 오직 아버지에게 돌렸다. 이제 그 서운함이 아버지로부터 여왕의 작위를 얻었다 하여 풀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알랴? 파소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으나 후인이 역사 왜곡으로 그 부녀의 사이를 갈라놓았는지?


이제 본국으로 눈길을 돌려 고구려에는 고주몽과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유리琉璃가 동부여서 도망쳐 온다. 예씨 부인은 어머니 유화가 친정인 하백 가문에서 들인 딸로 추정되는 여인이니, 소서노召西努는 자신의 남편 고주몽高朱蒙의 뜻이 예씨禮氏 부인 소생의 유리에게 있음을 눈치 챈다.

소서노는 본래 처녀로서 고주몽에게 시집을 간 황녀이니 임종한 해도 같은 여인이다. 그녀는 세인의 요설처럼 첫 남편 우태와 사별한 과부가 아닌 것이다. 황제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고주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비류와 온조溫祚가 제위를 계승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오백리의 장원을 일구며 훗날을 대비한다. 훗날 소서노가 오백리의 장원을 가지고 본조인 고구려에 귀부하여 여왕女王인 어하라於瑕羅에 책봉되니, 이는 지금 천진天津 일대인 패대浿帶 지방으로 훗날 비류가 계승하여 된다.


그리고 온조는 그 이듬해인 계묘년(BCE 18년) 무렵 중마한의 영토 일부인 지금의 경기 하남시 검단산 일대 하남河南 땅으로 이주하여, 중마한의 봉지를 받아 백제百濟를 건국하게 된다.


비류가 나라를 세운 것은 고주몽과 소서노가 같이 붕어한 해인 고주몽 재위 40년 임인년(BCE 19년)이다.


비류 사후에 그 신하가 그 영토를 가지고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에 터를 잡은 온조에게 투항하니, 이 나라가 훗날 아시아의 넓은 바다를 지배하며 22담로국을 설치하고 태평양을 건너 남북 아메리카를 오가며 교역했던 해상왕국 백제다. 아메리카에서 발견되는 고대 중국 배의 파편이란 모두가 백제의 배이니, 곧 백제가 장악했던 중원 해안의 광동성 일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아! 해모수의 혈통을 물려받은 고모수高慕漱와 비서갑 하백녀 유화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주몽은 당대의 단군 고무서로부터 보위를 물려받았다. 그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아! 당대 단군 고무서의 딸로서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온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백제다.


아! 치우천황 이래 만고에 무력을 떨친 고두막한의 딸 파소와 고우루 단군의 자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혁거세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바로 신라다.


우리 삼국은 모두 서로 사이좋은 형제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부여의 역사가 철저히 말살되고 왜곡됨으로 해서 모두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말았다.


3. 혹설

부여의 역사는 훼손됨이 너무 심하여, 그 가정을 위의 본설에만 한정할 수 없음으로, 위 본론에 더하여 몇 가지 개연성 있는 혹설을 더하고자 한다.


해부루가 곤연에서 금와를 얻은 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연출이다. 그 금와는 자신의 친자일 수도, 아니면 고우루의 핏줄일 수 있다.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하백 가문의 자제일 수 있다. 그러나 황족과 황후족은 원래 서로 혼인 관계가 두텁다. 비단 일방적으로 황실 가문의 일족에 딸들을 공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실 가문의 딸들과 하백 가문의 자제와의 결혼도 그 수만큼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하백녀 유화는 이미 몰락한 전 황실의 황족 불리지와 사통하였음으로, 하백 가문은 고두막한의 눈 밖에 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때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황실의 가문 제녀帝女 파소가 이미 눈 밖에 난 하백 가문의 자제와 사랑하여 임신하고 말았다면, 이는 지엄한 황명을 어긴 것이 되므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멀리 도주하는 길 밖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게 된다.



글 : 송호국  9207. 8. 16. 수정 9207. 9. 20.

참고서적 :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대배달민족사, 개벽실제상황, 통곡하는민족혼


원제 : 신라 박혁거세의 부왕에 대한 가설


[출처] 신라新羅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아버지에 대한 가설 (치우천황) |작성자 치우천황

 

* 추가:신라=진한6촌<부여계 박혁거세의 사로국<흉노선비의 신라

4세기 고구려와 전쟁과정에서 동해안을 타고 들어 온 모용선비족이 신라 김씨 왕조다.

순장금지 등 초원문화를 금지시키고 농경문화를 장려하였고 신라를 공식국호로 사용한

지증왕의 아들 법흥왕의 본명이 모진(모즉지)다. 이는 울진 신라봉평비문에 적혀 있고,

삼국사기,청나라 황실사서 만주원류고,양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선비족은 흉노족을 대거 흡수한 초원세력으로 4세기에 해당하는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모용선비족(전연)이라 할 수 있다.신라 김씨왕조는 부여계 박혁거세를 시조로 삼고,

김씨로 창씨개명한 후에 김알지를 시조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 고구려가 의식을

못하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윤복현

 

 [자료]신라 김씨왕조 시조 모미추왕[慕味鄒]

 

개천(開天) 4181년: 서기 283년, 선비(鮮卑) 소속의 모용부에서 모용외(慕容휺)가 수령으로 떠오르더니 선비족 안의 강력한 세력인 단(段)족과 우문(宇文)족을 제압하고 제일의 세력집단이 되었다,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국호를 연(燕)이라 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가 서기 337년으로 중국의 5호 16국 시대였다. 이렇게 모용씨 왕조(王朝)를 탄생시킨 모용황은 본격적으로 중원 쟁탈전에 뛰어들기 전에 부여족이 이끌고 있는 가우리를 제압하고 제후국으로 복종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가우리(高句麗)는 부여족 중에서도 가장 용맹성이 뛰어난 맥족(貊族)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강국이었다. 몇 번씩이나 협상을 해보았지만 가우리가 신생 연(燕)나라에 무릎을 꿇을 리가 없었다. 결국 최후의 결전밖에 다른 대안이 없게 되었다.

 

서기 342년 8월, 고국원왕(斯由太王)은 모용황의 침입이 있을 것을 감지하고 가우리를 전시체제로 정비하고 그의 수도를 펴라[平壤-현재의 요양]로부터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겼다. 환도성은 전쟁을 위하여 세워 놓은 천연의 방어요새였다. 태왕의 명령을 받은 가우리의 정예병사들이 무려 6만명이나 환도성에 집결하여 모용황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개천(開天) 4240년: 서기 342년 11월, 모용황은 대군을 몰아 침략을 시작했다. 침공군은 총 5만 5천명이었다. 가우리보다 적은 군대로 큰 나라를 침공한 것이다. 이 정도의 군세라면 환도성에서 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침략군을 맞아 결전을 벌였어야 했다. 그러나 사유태왕(斯由太王, 故國原太王)은 모용황에 대하여 겁을 먹고 있었다.

 

모용황은 침공군 5만 5천명 중에서 1만 5천명의 빠른 기병군을 선발하여 선봉군으로 삼았다. 이 병력을 다시 두 대로 나누어 장사(長史)와 왕우(王寓)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고 가우리의 북로(北路)를 따라 북도(北都) 신성(新城)을 향해 출동시켰다.

 

이때 가우리[高句麗]에는 3개의 서울이 있었는데 북경은 신성이고, 남경은 펴라[平羅, 平壤-지금의 요양], 그리고 중경(中京)은 환도(丸都)였다. 국경에 파견되어 있던 정탐꾼들은 곧 장사(長史)와 왕우(王寓)가 이끄는 침략군이 신성(新城)으로 향했음을 보고했다.

 

신성을 격파한 침략군은 멀리 북로(北路)를 타고 환도성(丸都城)으로 향했다. 한편 태왕의 아우 고무(高武)를 대장군으로 하는 가우리군은 어림군 1만 병력을 뒤에 남겨 태왕을 호위하도록 하고, 주력군 5만의 대병력이 출동하였다. 이윽고 침략군과 충돌한 가우리군은 일전에 침략군을 풍지박살 내며 승리하였다. 그러나 빠른 말(馬)로 무장한 침략군은 더 이상 가우리의 보기군단과 싸우려 하지 않고 멀리 우회하여 환도성으로 가려했다. 이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가우리군은 이들을 포위 섬멸하기 위하여 추격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꼼짝도 않고 대기하던 모용황의 주력군 4만은 가우리의 주력군이 선발대의 뒤를 쫓아 환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갑자기 전속력을 다하여 환도성으로 달려들었다. 모용황의 작전에 가우리군은 완전히 농락당했던 것이다. 왕성을 수비하던 1만명의 가우리군은 질풍같이 달려드는 모용황의 침략군 본진과 마주치게 되었다. 전투는 삽시간에 끝났고 겁에 질린 사유태왕은 소수의 어림군만 데리고 단웅곡(斷熊谷)이란 깊은 산골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침략군의 선봉장 모여니(慕輿쵹)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태황의 모친 주씨와 왕비 그리고 백성 5만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가우리의 주력군을 유인하며 멀리 환도성을 돌아 모용황의 본군과 합세하려던 침략군의 선발대는, 가우리 전국에서 뒤늦게 달려온 토벌군들에게 쫓기면서도 지금쯤 가우리의 환도성에 입성해 있을 모용황에게 가기 위하여 함경도의 험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가우리군의 강한 반격으로 모용황의 주력군은 벌써 본국으로 쫓겨가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이미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된 선발군은 되돌아가기엔 너무나도 가우리 영토 깊숙이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분산하여 모국으로 돌아가려 하다가는 가우리의 토벌대에게 각개격파 당하며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위기에 빠진 이들은 할 수 없이 추격군을 피하여 본국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점점 더 멀리 동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한편, 침략군을 추격하던 가우리군은 사유태왕(斯由太王)의 명령에 따라 황성 복구작업에 나서게 되고 또 다른 군사들은 모두 국경지대에 재배치 되었다. 어차피 침략군의 선발대가 제 나라로 돌아가려면 국경지대를 통과해야 하므로 국경만 철통같이 봉쇄해 놓으면 선발대는 가우리 국내에서 토벌 당하게 될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다.

 

그러나 선발대는 가우리 군지도부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침략군의 선발대를 이끌고 있던 장수는 모미추(慕味鄒)로 생각된다. 전쟁 초기의 선발대는 분명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 수행 도중 전사하였거나 혹은 먼저 본대로 합류하는데 성공하였을지도 모른다.

 

삼국사기는 '왕우 등은 북로에서 싸우다 모두 패하여 죽었다.(會王寓帶戰於北道, 皆敗沒)'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려 1만 5천명의 날쌘 기병들이 모두 전멸 당하여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선발대는 모용황 군대 중에서도 가장 날쌘 병사들로서 모두가 기병대(騎兵隊)로만 조직되어 가우리[高句麗]의 주력군을 유인하여 도성(都城)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특수임무를 띠고 있는 부대였다. 그런 부대가 전멸 당했다고 한 기록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쨌든 신라 국경에 근접한 지점까지 도착해온 이들 선발대의 장군은 모미추(慕味鄒)였다. 삼국사기는 미조(味照)라 했고 삼국유사는 미추(味鄒)라고 쓰고 일명 미조(未租)라고도 썼다. 또 다시 소리말을 뜻글로 기록하려는 모순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다.

 

모미추의 성씨가 모(慕)씨였을 이유는 그가 실제적으로 경주 김씨를 일으킨 최초의 인물이고 그의 후손인 법흥왕(法興王) 때에 이르러 모씨(慕氏)성을 김(金)씨로 바꾸었음이 최근 장한식씨의 연구 결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미추는 모용씨(慕容氏) 가문의 귀족(貴族) 중의 한 사람이었고 이번 전쟁에도 장군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지금은 적어도 1만명이 넘는 선발대를 인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선발대가 실라[新羅] 국경에 도착하고 보니 때마침 실라는 이서고국(伊西高國: 淸道)의 침략을 받아 수도 금성(金城)을 방어하느라고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당시 실라는 훗날 백제를 멸망시킬 만큼의 강국이 아닌 작고 초라한 부족국가의 하나였다. 그 동안 가야연맹의 승인을 받아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지방의 보잘 것 없는 세력집단인 이서고국 정도의 침략에도 서울인 금성까지 쫓기며 허덕이고 있던 중이었다.

 

현지의 사정을 알게 된 모미추(慕味鄒) 장군은 이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 먼저 금성 공격에 열중이던 이서고국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아직 재래식 군사장비로 일관하고 있던 실라나 이서고국 병사들은 북방 대륙의 현대적 병기로 무장한 개마무사단


(鎧馬武士團)의 위용에 기가 질려 단번에 압도당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금성을 위기에서 구하고 성내의 환영을 받으며 당당하게 금성으로 입성한 모미추군은 실라 왕실의 허약한 모습을 간파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아예 왕족들을 축출하고 말았다.

 

이때 실라는 석씨왕조(昔氏王朝)가 이끌고 있었는데 왕은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이었다. 본 저자가 당시의 왕을 유례 이사금으로 보는 이유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모미추군의 활약상 때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전하기를 '실라 제14대 유례 이사금 14년에 이서고국(伊西高國)이 쳐들어 와 수도 금성을 에워쌌다. 아군이 이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있을 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와 적군들을 격파하였다.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군사들이 모두 댓잎을 머리에 꽂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댓잎 수만 개가 죽장릉(竹長陵: 味鄒王陵)에 쌓여 있더라.'라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그들 이상한 군대가 바로 모미추왕의 군대였음이 확실하게 증명된 셈이다.

 

삼국사기는 계속하여 '유례 이사금 15년 2월에 서울에 크게 안개가 끼어서 옆 사람도 분간할 수가 없었는데, 5일 만에야 날이 개었다. 그리고 1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한 사건기록이다. 이서고국군을 격파하고 금성을 구해냈던 모미추는 불과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다음해 2월, 실라왕실의 허약함을 알고 혁명군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서울 금성에서는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는 대 혼란이 일어났고, 이 싸움에 패한 왕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때 왕권을 빼앗긴 석씨들은 대거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우리는 그 동안 초기 실라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실라[新羅]는 처음부터 밝[朴]씨, 석(昔)씨, 그리고 (金)씨 등 3씨의 성씨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사이좋게 돌아가며 왕권을 주고받는 인류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환상적인 공화제를 이룩한 문명국가라 배웠다.

 

조금이라도 정권의 힘이 무엇인지 그 기초적인 상식만 가진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역사의 기록을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그 절대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웠던가?.... 본서는 비록 이런 이야기들이 정사(正史)라고 인정받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그 기록이 함축하고 있는 사건의 본체를 파헤쳐 밝히고 정리하여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라의 역사는 사실상 3개의 전혀 다른 씨족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3개의 독립 왕조들을 "실라"라고 하는 큰 우산 속에 넣어 마치 하나의 나라가 장구한 역사를 장식하며 존재해 온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다.

 

실라 왕조의 제 1기는 밝혁거세[朴赫居世] 거서칸 왕조(王朝)이다. 이때의 국명은 서라불로서 초기엔 지금의 서울지구에 있었다가 주위의 압력에 밀려 차츰 남쪽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 때까지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등의 무인(巫人)들이 집단으로 이끌었는데, 결국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경주지역에 도착하여 선주 세력인 큰무라와 그들 일족의 운명을 걸고 벌인 알천전투(閼川戰鬪) 끝에 큰무라와 공존하기로 한 협상에 성공하고 경주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실라의 제 2기는 석씨왕조(昔氏王朝)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석씨들은 큰무라(健牟羅)족들로서 경주지역을 선점하고 있었는데도 뒤늦게 도착한 밝씨 집단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차츰 일족의 단결을 도모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을 내세워 밝씨 아달라왕(阿達羅王)을 축출하고 석씨왕조를 일으켰다. 한 개의 왕조(王朝)라 하면 적어도 수대에 걸친 왕위의 계승과 더불어 수십 년 이상의 독점적인 정권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라 제 3기로 김씨왕조(金氏王朝)를 들 수 있다. 이미 앞에서 간단히 들여다 본 것처럼 김씨들은 원래 선비(鮮卑)족에 속해있던 훈족(匈奴-風夷) 계열의 집단이다.


그들의 성씨는 모용(慕容)씨 혹은 모요(慕輿)씨 들인데 이들은 다같이 모씨를 지칭하는 것이다. 원래 두 자였던 성씨가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한 글자 성(姓)인 "모"씨가 되었는데 募, 慕, 毛, 牟 등은 모두가 모씨를 가리키고 있다.
모씨왕조는 법흥왕 때 이르러 왕의 성씨를 김(金)씨로 바꿨다. 삼국사기를 보면 왕의 성씨를 모씨(募氏) 이름을 태(泰)라고 분명히 밝힌 후, 왕의 휘(諱: 이름)는 원종(原宗)이라 했다.

 

한편 중국의 양서(梁書)에는 모진(募秦)으로, 남사(南史)에는 모태(募泰)로 적고 있고 통전(通典)에는 모진의 성씨를 募(모을 모)자로 쓰는 것은 틀렸고 慕(사모할 모)자로 써야 옳다고 주석까지 달고 있다. 이로써 실라 김씨들의 본래의 성씨들이 모용(慕容)씨의 모(慕)자임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이제 실라[新羅]라고 하는 왕국을 정복하고 왕권을 쟁취한 모씨(慕氏)들은 고향 땅인 선비(鮮卑)지역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실라의 왕조를 지키기로 결심한다. 이리하여 옛 성씨인 모(慕)씨를 버리고 새로운 지신(地神) 님을 뜻하는 金(원래 발음은 "")씨를 성씨로 택하게 된다. 이것이 신라 김씨의 탄생 배경이다./출처 http://rohss66.com.ne.kr/105dae/105dae091.html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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