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2/02] 100년전의 사진 석굴암 원형을 찾았다. | |
작성일: 2002/04/26 수정일: 2002/05/03 | |
제144회 홍보자료 ** 100년 논쟁, 석굴암 원형을 밝혀라. ** 1. 제 목 : 발견, 100년전의 사진 석굴암 원형을 찾았다. 2. 방송일시 : 2002년 2월 2일 (토) 20:00-21:00 KBS 1TV 3. P D : 강희중 PD [TEL 781-3555] / 작가 : 정성혜 4. 내용 요약 :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한 장의 사진, 석굴암 원형을 둘러싼 논쟁 종식시키다. 최근 국내에 반입된 이 한 권의 책을 학계는 주목한다. 석굴암의 원형을 담은 최초의 사진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사진 속 석굴암은 현재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데... 과연 석굴암의 원형은 밝혀지는가? 이번 주 역사스페셜에서 새롭게 되살아난 석굴암의 원형을 만나본다. 하이테크의 정수, 석굴암의 제습 메카니즘 석굴암의 제습 메카니즘은 100년의 현대과학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다. 1000년 이상 그 원형을 유지해 온 석굴암. 그런 석굴암이 일제의 보수공사 후엔 바로 결로 현상이 생겼는데... 석굴암의 훼손을 막기위해 지난 100년간 현대 과학을 총동원하였지만 보수공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현대과학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석굴암의 제습 메카니즘은 무엇일까? 이번 주 역사스페셜에서는 한장의 석굴암 사진을 토대로 복원한 석굴암을 만나보고 석굴암이 지닌 고대 과학기술의 정수를 들여다본다. 5. 세부내용 1) 최초의 석굴암 사진, 원형을 밝히다. 근대 최초의 조선미술사연구서 <조선미술대관> 이 책엔 석굴암 원형을 둘러싼 지난 100년 논쟁을 종식시켜 줄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석굴암 복원 이전, 원형을 담은 최초의 사진. 충격적이게도 사진 속에 나타난 석굴암의 모습은 현재 석굴암과 판이하다. 현재 석굴암의 전실은 네 개의 신장상이 모두 일렬로 배치된 반면 사진 속 전실은 세 개는 일렬로 배치되고 네 번째는 꺾여있는 굴곡형이다. 제작진은 석굴암 복원 이전의 사진을 입체로 복원, 석굴암 원형의 3차원 모델링을 시도한다. 2) 석굴암엔 목조전실이 없었다. 현재 석굴암 전실앞에는 목조건물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조선미술대관>에 실린 사진뿐만 아니라 일제의 보수공사가 있기 전 찍은 그 어떤 사진에도 목조건물은 흔적 조차 없다. 전실 앞의 목조건물, 과연 있었을까? 석굴 주위에서 출토된 기와파편과 쇠못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목조건물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해동지도>와 <산중일기>, <불국사 사적기>등 석굴암과 관련된 어떤 기록에도 목조건물에 대한 언급은 없다. 심지어 일제가 석굴암 복원 전에 기록한 <재래기초평면도>에도 목조건물은 없다. 무엇보다도 석굴암의 전실구조는 목조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건축적인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3) 석굴암은 간접조명을 받았다. -1200여년전의 간접조명, 화강암을 이용하라.- 동짓날 일출방향과 마주보는 석굴암 본존불. 때문에 석굴암엔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한 광창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석굴암 수리 공사 후 남은 삼각형 구멍이 있는 석재이다. 하지만 이 석재를 광창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넣어보니 크기가 맞지 않았다. 만약 광창이 없었다면 석굴암의 채광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 답의 실마리를 당나라의 고승, 현장의 견문록에 해당하는 대당서역기에서 찾았다. 이 책엔 커다란 거울을 바닥에 놓고 빛을 끌어들인 인도석굴의 조명방식이 나타나 있다. 인도로 성지순례를 많이 갔던 당시, 석굴암도 잘 연마된 화강암을 석굴암 입구에 놓고 빛을 끌어들이는 간접조명을 택했을 것이다. 제작진은 1200여년전의 간접조명을 석굴암 모형을 통해 재현한다. 4) 백년의 복원이 천년의 건축물을 훼손시켰다. 1913년 일제는 대대적인 석굴암 수리공사를 단행한다. 수리의 기본방침은 전부 해체하고 재조립한 뒤 콘크리트를 치는 것이었다. 신기술의 상징, 콘크리트 하지만 이것은 준공 후 2년도 못되어 누수현상을 불러오고 말았다. 콘크리트는 여름철 습기를 막지 못했고 급기야 석굴 조각 표면에 이끼까지 생겼다. 1961년 누수를 막기 위해 기존 콘크리트 돔 위에 다시 2중 돔을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습기를 막기 위한 목조건물까지 들어섰지만 습기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제습 기계 장치를 들여놓고 그것도 부족하여 밀폐를 위한 유리벽을 설치했다. 유리벽 너머로 석굴암을 봐야만하는 지금의 현실. 그것은 신기술을 맹신한 일제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이다. 5) 하이테크의 정수, 석굴암의 제습 메카니즘 신기술의 상징, 콘크리트도 막지 못한 결로현상. 하지만 석굴암은 일제의 보수공사가 있기 전 1000년 이상동안 결로로 인한 별다른 손상없이 그 원형을 유지해왔다. 석굴암의 제습 메카니즘,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제작진은 복원 과정에서 1m에 달하는 암석층이 콘크리트로 변한 석굴암의 지붕구조에 주목했다. 제작진은 암석층을 덮은 모형과 콘크리트를 덮은 모형을 만들어 제습작용을 실험했다. 정확한 실험결과를 위해 기후조건도 장마철 석굴암의 기후조건과 같게 했다. 결과 암석층을 덮은 모형에는 결로가 나타나지 않았다. 석굴암의 제습 메카니즘은 바로 암석층을 통한 공기의 순환에 있었던 것이다. 석굴암 제습 메카니즘, 이것은 석굴암을 예술성 높은 건축물 이상으로 보게하는 새로운 발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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