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거란,몽골,원,금.청,터기,요,왜,일본

[스크랩] 쇼큐태자는 무령왕의 후손(야마토정권은 백제황실에서 나감)

설레임의 하루 2011. 9. 21. 02:28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43>백제왕가의 성씨 '야마토' 和
고대 백제왕실의 기상 日상징으로 '우뚝'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고대 구다라스(百濟洲)에 속한 고장이던 지금의 일본 오사카부 다이시마치(太子町)에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574∼622)의 묘소가 있다. 또 쇼토쿠태자의 사당(聖德皇太子磯長御廟)도 역사 유적으로 이름이 높다. 사당 경내 한복판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야마토’(和)라는 글씨가 양각된 옛날 비석이다. 오랜 풍상에 시달려서 당초 새겨졌던 잔 글씨들은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야마토’라고 부르는 국가 명칭의 뿌리는 무엇인가. 우선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의 왕성(王姓)이 ‘화’(和)씨였다. 일본 왕실 역사서 ‘속일본기’에 보면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純陀太子)의 직계 후손이 화을계(和乙繼)이며 그의 딸은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이다. 화신립 황태후는 일본 제50대 간무천황(桓武天皇)의 생모이다”라는 자세한 기사가 나온다. 고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야마토’는 일본 국가와 민족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야마토’가 일본 고대부터 국호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야마토’는 ‘백제왕가’를 가리킨다 할 수 있다.

간무왕의 직계 선대인 제30대 민달왕(敏達·572∼585 재위)대로 올라가보자.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를 보면 “나라(奈良) 땅의 ‘백제대정’(百濟大井·지금의 奈良縣 廣陵町 百濟 지역/필자주)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세운 것은 민달천황이다”라고 적혀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815년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신찬성씨록’에 “민달천황은 백제왕족”이라고 적힌 부분이다. 민달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서명(敍明)왕도 할아버지가 ‘백제대정궁’을 세웠던 “백제강(百濟川) 강변에 백제궁을 세웠다”(‘일본서기’).

그러기에 이들 백제왕족 일왕들에 의해서 고대 일본 왕실이 계승되어 왔다. 즉 ‘구다라(백제) 왕가’는 ‘일본왕가’와 한 핏줄이라는 내용이다. 이들 백제계 일왕들의 역사시대를 일컬어 ‘야마토시대’라고 부른다. 서기 5세기경부터 일본 왕실의 기틀을 확고하게 이룬 것은 백제왕족인 응신(應神)왕이었다. ‘야마토 왕가’가 곧 ‘백제 왕가’라는 일본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자.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학자들의 학문 연구를 제약했던 일제가 1945년 연합국에 패하자, 비로소 역사학자들의 한일 관계사 연구가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쿄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 교수는 1949년 기마민족국가설(騎馬民族國家說), 즉 고대 한국인 정복자들이 일본 열도에 터를 잡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해 역사학계는 물론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천황가는 그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기마민족 이주자들이었다. 4세기 초 조선에 있던 기마민족이 일본 규슈 지방에 먼저 쳐들어와서 이미 그 이전부터 조선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와 있던 수많은 귀화인들을 조직해 일본을 정복하게 됐다”는 게 그의 학설 골자이다.

이에 대해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1917∼1983) 교수는 저명한 사학자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씨의 비판론을 인용, ‘시기적으로 약 500년이 뒤늦는 일본 정복설’이라고 논했다. 그는 “미카미씨에 의하면 부여(만주땅)며 고구려 백제 등의 지배자는 수렵민족적인 기마민족이다. 그뿐 아니라 일본 국가를 성립시킨 주체가 되는 대부분의 사람도 그와 같은 성질의 민족으로서 차질이 없을 것이다. 야요이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의 기타큐슈의 지석묘(고인돌)들은 똑같은 시기에 조선 남쪽에서도 행해졌던 묘제(墓制)였다. 이는 조선에서 갓 등장했던 계급사회의 지배자가 기타큐슈로 이동하여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기마민족이 규슈로 쳐들어온 시기를 기원전 2세기 경이라고 한다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에가미씨처럼 그 시기를 4세기 초로 두는 것은 어떨 것인가”(‘日本國家 の起源’ 1967)라고 시기가 어긋났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두 학자의 연구는 각기 한반도로부터 기마민족이 건너가서 일본을 정복했다는 데는 일치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시나가노미사사기에 안장돼 있는 쇼토쿠태자릉.

한편 일본 역사학자로서 응신왕을 구체적으로 ‘백제인 일본 정복왕’으로 간주한 것은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祐·1918∼2000) 교수였다(‘日本古代の國家形成’ 1978). 미즈노 교수의 학설을 지지한 것은 앞서 말한 이노우에 교수였고 이 두 사학자의 학설을 더욱 구체화시킨 것은 도쿄도립지토세고등학교의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1926∼ ) 교유(敎諭)였다.

이시와타리 교유는 “백제 곤지왕자는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시조왕(始祖王)이 되었다. 5세기쯤 백제인들의 대량 도래가 시작되었다. 곤지왕자가 왜국왕(응신천황)이 되었던 5세기 말에 본국 백제의 국왕은 곤지왕자의 아들인 동성왕(백제 제24대 왕·479∼501 재위)이었다. 그 때문에 양국이 협동하여 백제인들을 왜국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1)고 봤다.

‘야마토’(和) 비석이 서있는 쇼토쿠태자사당의 주인공 쇼토쿠태자는 백제 왕족이다. 필자는 1970년 초에 일본 나라 땅의 ‘호류지(法隆寺) 고문서’를 발굴했고, 고문서 중의 하나인 ‘성예초’(聖譽抄·1394∼1427)에는 쇼토쿠태자가 ‘백제인 핏줄’이라는 것과 쇼토쿠태자는 백제 제26대 성왕(523∼554 재위)의 화신(化身)으로서 태어났다고 하는 불교 환생설 기사가 상세하게 담겨 있다(연재 제4회 참조).

‘신찬성씨록’의 민달왕은 쇼토쿠태자의 백부이다. 즉 민달왕은 쇼토쿠태자의 생부인 일본 제31대 용명왕(585∼587 재위)의 친형이다. 두 말할 나위없이 용명왕과 그의 왕자 쇼토쿠태자도 성씨는 ‘화씨’이다. 그러기에 이 역사의 발자취를 입증하는 ‘화(和·やまと) 비석’이 쇼토쿠태자사당 앞에 우뚝 서있다고 본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쇼토쿠태자 사당인 ‘시나가노미사사기’ 사당 경내 한폭판에 서있는 ‘화’(和) 비석.(왼쪽) ◇쇼토쿠태자를 위령하는 이중탑

필자의 졸서 ‘일본고대사 문제점의 새로운 규명’(2005.12)을 보면 화씨인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왕자가 백제 제26대 성왕이고, 성왕의 제1왕자는 백제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이며, 제2왕자는 일본의 민달왕이다. (백제)무령왕→(백제)성왕(일본의 긴메이왕 겸임)→(백제)위덕왕→(일본)민달왕→(일본)용명왕→(일본)쇼토쿠태자과 같은 식으로 고대 왜왕들은 어김없이 화씨(和氏)의 왕성을 잇대어 타고났다.

이른바 야마토시대(4∼7세기)를 일본 역사서에서는 이두식으로 다음과 같은 4가지 한자어를 함께 써왔다. 和, 倭, 大和, 大倭 등인데 가장 대표적인 표기는 ‘화’(和)이며, 훗날 큰대(大)자를 붙여 ‘대화’(大和)로도 쓰게 됐다. ‘대왜(大倭)는 “서기 720년에 관찬 역사책인 ‘일본서기’를 편찬할 때 ‘야마토’(倭)에다 큰 대(大)자가 첨가돼 ‘야마토’(大倭)로 쓰게 되었다”고 도쿄대 사학과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 교수 등이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에 보면 이 역사서에서 신(神)의 시대가 등장하는 역사의 앞부분에는 이두식인 ‘만요가나’의 한자어로 ‘야마토(耶麻騰)’라고 쓰기도 했다. 현대 한 ‘일본어대사전’(講談社·1992)을 보면 “和를 倭라고도 한다. 일본과 일본어에 대한 것. 일본의 자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왕가를 경영한 백제인 왕족들은 고대 일본을 지배하던 나라(奈良) 땅 일대를 ‘야마토’로 호칭했었고, 백제계의 일본 고대 왕조를 ‘야마토 조정’으로 불러 왔다. ‘일본서기’에 보면 무령왕의 직계 후손인 ‘왜군’(倭君·야마토노키미)이 등장하고 있다. ‘신찬성씨록’을 보면 무령왕의 왕자였던 순타태자(純陀太子)의 직계 후손에 ‘화사’(和史·야마토노후히토)라는 왜나라 조정의 대신도 기록돼 있다. 이 화사를 일컬어 ‘화조신’(和朝臣·야마토노아손)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화조신은 백제국 도모왕(都慕王)의 18대손 무령왕의 후손이다”라고 밝혀져 있다. 왜군을 비롯해 화사며 화조신 등 백제 무령왕의 직계 왕족들이 왜왕실에 살면서 ‘야마토’(倭·和)라는 두 가지 글자를 이름 머리에다 얹고 군림했던 것이다. 이는 ‘야마토’의 본거지가 고대 백제 왕실 터전이었음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쇼토쿠태자 사당의 편액

백제왕족 ‘화씨 가문의 춤’인 ‘화무’(和舞·야마토마이)도 주목할 부분이다. ‘화무’가 백제춤이라는 것은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이미 논급해 온 지 오래되었다.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1970년 ‘日本神話’에서 “궁정(宮廷)의 어신악(御神樂·일본왕실의 한국신들에 대한 ‘新嘗祭’ 등 궁중 제사)에 있어서 한풍(韓風·가라부리·한국의 격식)은 다각적으로 규명이 가능하다”면서 “왕실에서 ‘어신악 제사’를 거행할 때 연주되는 화무는 본래는 한국인 씨족인 화씨(和氏) 가문에 의해서 생겨난 춤이었다”고 논증했다.

쓰치하시 유다카(土橋寬) 교수도 “화무는 어신악에서 행하는 춤이며 그 밖에도 궁중의 진혼제며 히라노마쓰리와 대상제(大嘗祭·왕이 즉위한 해의 11월 첫 범날 제사) 등에서도 화무를 춤추었다. 히라노신사(平野神社, 京都市 北區에 소재하는 백제 제26대 성왕의 사당/필자주)는 백제에서 건너 온 화씨 문중의 씨신(氏神) 4좌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4좌의 씨신 중의 제1신은 이마키신(今木神·한국에서 방금 오신 신)인 화씨의 씨신(백제 성왕의 神主/필자주)이다. 화씨 문중에서 태어난 화신립 공주(和新笠姬)가 고닌천황의 부인이 되었고, 간무천황의 생모가 된 데서부터 그녀의 가문(백제 왕가)의 조상 씨신인 이마키신(성왕의 신주)을 헤이안경(교토 땅으로 천도한 새 왕도/필자주)으로 옮겨서 제사 지내게 된 사당이 히라노신사이다”(‘古代歌謠’ 1959)라고 밝혔다.

 

고대부터 궁중 한국신 제사인 어신악에 반주 악기로 써왔던 악기로 ‘화금’(和琴)이 있다. 무사시노음악대의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 교수는 “‘금’(琴)을 가리키는 일본어 ‘고토’(琴·こと)는 한국 ‘거문고’(玄琴)의 옛말 ‘곳’(kot·琴)에서 생긴 것”이라며 “화금은 글자를 왜금(倭琴)으로도 쓰며 이를 ‘와곤’ 또는 ‘야마토고토’라고 부르며, 현을 금의 끝쪽에다 거는 방법이 한국의 거문고와 똑같다. 화무가 한국에서 전래된 화씨의 춤이라는 점에서 화금도 일본 고대의 금이 아닌 화씨의 금(和氏の琴)에서 생긴 명칭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고 본다”(‘音樂から見た古代日本と朝鮮’ 1973)고 말했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sakha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