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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숨길 수 없는 한겨레의 후예 일본인들

설레임의 하루 2011. 9. 21. 02:53

한민족과 몽골(터키) 그리고 일본.

 

 

 이 지구상에  어느 민족보다 서로 닮았다..아니똑같다고 말할수있는 민족이 있다면

몽고인이다.

 

고조선때 제1단군이 인류최초로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을 이루었는데 이때는 한 나라였으나 후일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갈라진 이후, 돌궐(몽고)과 고구려로 이어졌는데 이후에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전하지를 않아서 그렇지 원래는 실은 몽고인은 우리 한민족이다. 고구려사에도 돌궐과는 형제국으로 친하게 지냈다는 내용은 전해지는데, 그것이 고구려가 당과 같은 민족의 나라인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전해지면서 같은 민족임을 외면하게 되었고 오늘에 이어진것일 뿐, 이조와는 전혀 다른 역사였던 큰 민족이었다.

 

즉, 고구려이후, 역사가 단절되고 왜곡되어서 역사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 몽고는 한민족의 직계임에 틀림없다.

 

몽고 다음으로, 닮았으면서도 다르고,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 두 민족의 비교연구는 문화인류·고고·역사·언어·민속 등 여러 학문분야에서 19세기 후반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 왔지만 연구부족에 따른 무지와 시야의 제약, 「황국사관」으로 통칭되는 일본 국수주의에 의한 악의적인 사실조작과 왜곡해석으로 비틀리고 가려진 대목이 아직 많다.

 

『시사월간 WIN』은 이같은 잘못을 바로잡아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고 상호이해를 넓히는 뜻에서 두 나라 생활문화를 심층 비교하는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집필을 맡은 김광언 교수는 70년대 중반 일본에 유학, 학위를 받았고 30여년간 두 나라 민속을 비교 연구해왔다.


그의 결론은 흔히 생각하듯 일본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어 한국문화가 건너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이질화하면서 일본으로 독립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일본 안에 남은 사료·유적과 현장조사를 통해 한국 뿌리의 변종 일본」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일 것이다.
<편집자 註>

 

◀ 한국을 향한 바다쪽에 세운 신사의 도리이(鳥居)

여러해 전 어떤 신문사에서 조직한 학술조사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후쿠오카 (福岡)를 거쳐 대마도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후쿠오카에서 규슈(九州)대학의 한국 유학생 서너명과 우리문화 전공의 일본 교수가 숙소로 찾아와 불고기집에서 저녁을 들게 됐다.
나는 유학생이 주축이 된 젊은패에 끼여 앉았다. 한창때의 사람들이라 술잔이 뻔질나게 돌았는데, 일본 선생은 몇차례나 건너뛰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떼를 쓰듯이 잔을 건네고 어서 내라고 재촉하였다.

 

 

견디다 못한 그는 『못 먹는 사람에게 자꾸 주면 어쩌느냐』며 울상을 지었다. 이때 나는 『술이란 몸에 나쁜 것인데 당신 같은 일본 사람에게나 줘야지 어찌 내 동포에게 권할 것인가』 했다. 유학생들의 얼굴은 잿빛이 됐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껄껄 웃으며 『그럴듯한 말』이라고 받아넘기는 것이 아닌가. 내친김에 『내 이야기에 오히려 웃는 것을 보니 당신의 조상은 한국인임에 틀림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는 이번에도 웃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우리는 가까워졌고 그(松原孝俊)가 서울에 오면 우리집에도 들르고는 한다.

 

 

 

내가 생면부지였던 그에게 「무례한」 농담을 던진 것은 규슈지방 사람들의 기질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東京) 중심의 중부이북 사람들은 농담을 즐기지도 않거니와 상대의 우스개를 삭일 줄도 모른다.

 

 


『만약 도쿄에서 같은 농담을 던졌다면 따귀께나 맞았을 것』이라는 내 말에 그는 『물론이죠』 했다. 나중 도쿄대학의 문화인류학자(末成男道)에게 같은 내용을 털어놓자 그 역시 「따귀감」이라는 의견이었다.

 


다음은 대마도의 이즈하라(嚴原)에서 일어난 일이다.


술집 순례에 나선 어느날 저녁 타치바나(橋厚志)씨를 만났다. 그는 부산에 며칠 머문 적이 있다면서 아내가 「목포의 눈물」을 부를 줄 아는데 들어보겠느냐고 물었다. 그리 고 내가 무어라기도 전에 『지금 야간 근무중이니 물어봅시다』며 전화기를 들었다. 그는 조금 기다리자고 했다. 아내가 상관에게 노래를 불러도 좋은지 알아보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곧 허락이 떨어졌다는 대답이 왔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그네의 음성은 부드럽고 분명했다. 「가물거리며」하는 대목의 장식음도 매끄럽게 넘어갔다.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의 뒷골목 술집에서 생면부지의 여인이 불러주는 「목포의 눈물」을, 그것도 전화기를 통해 듣는 감회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는 술잔을 거푸 들이켰다.

 

타치바나씨는 이튿날 아침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길라잡이가 되겠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농기구 조사를 위해서는 구석진 곳을 뒤져야 하는데 길을 모르는 데다가 마땅한 차편도 없어 걱정이 태산같던 터였다. 도시락을 사러 점방으로 갔더니 공교롭게도 「휴업」 팻말이 걸려 있었다. 사무실로 되돌아간 그는 동료의 도시락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본인들이 없어서 허락도 없이 가져왔지만 그들은 라면으로 때울 것이라며 천연덕스러웠다. 그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의 도시락을 씹어 삼키며 나는 목이 메이는 듯했다.

 

 

 

지난해 어떤 방송국에서 만든 「대마도 아리랑」이라는 프로그램에 타치바나씨도 등장해 몹시 반가웠다. 이즈하라 죠(町)의 상공과장이 된 어엿한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대마도는 일본이 아니라 부산시 대마도구』라는 익살을 떨었다. 그가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은 옳다. 대마도는 실제로 우리 땅이었다. 16세기초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의 「옛날에는 우리 계림(경상도 鷄林을 말함)에 속한 땅이었는데 어느 때부터 왜인이 살게 됐는지 알 수 없다. 대마도는 경상도 지도 안에 들어 있다」는 기록이 그 증거다. 같은 내용은 세종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 보이는데 「그 땅이 심히 적고 또 바다 가운데에 있어, 왕래가 어려워 백성이 살지 않았다」고 해 내팽개쳐둔 까닭을 들었다. 생산도 거의 없는 데다 도둑만 들끓자 귀찮게 여긴 것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임금의 한분으로 손꼽히는 세종의 안목이 이 수준에 머물렀던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다. 17세기 윤두서의 지도에도 대마도가 우리 영토로 그려진 것을 보면 저 섬이 우리 땅이거니 하는 생각은 그때까지 이어져 내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 얼굴이 긴 형(빨간점)과 짧은 형(검은점)의 분포도

한국거쳐 규슈에 이르는 남쪽길 이동

연재의 첫머리에 개인적인 체험을 다소 장황하게 소개하는 까닭은 일본과 일본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리적으로 가까울수록 한국과의 관계가 인종적·문화적 ·역사적으로 깊다는 것을 두 건의 에피소드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일본 땅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20만년 전에서 13만∼14만년 전부터다. 이때의 주민들은 아시아 대륙에서 한국을 거쳐 규슈에 이르는 남쪽길을 따라 이동했다. 북위 45도선 이북의 북쪽길은 혹한으로 폐쇄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佐タ木).

 

 


따라서 한국으로부터의 첫 이민은 이미 구석기시대 전기에 이루어진 셈이다. 이들은 중국대륙 북부에 분포한 나우만(Naumann) 코끼리나 원우(原牛) 따위의 초원성(草原性) 황토(黃土) 동물떼가 건너갔을 때 동행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쓴 박편첨두기 (剝片尖頭器)나 세석석인석기(細石石刃石器) 따위의 유물들도 우리 것과 일치해 이주사실을 알려준다.

 

더구나 갱신세(更新世)인 2백만년 전부터 1만년 전 사이에는 지구가 얼었다가(氷河期) 녹는(間氷期) 일이 네 차례나 거듭됐고 빙하기의 해면은 지금보다 1백40여m나 낮아서 한국과 중국이 육지로 연결된 것은 물론이고 한국 남부와 규슈 일대도 맞붙어 있었으며 지금의 동해는 큰 호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인간이나 동물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베링해협조차 얼어붙어서 몽고족이 걸어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간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석기 전기에 한국에서 들어간 사람이 어느 정도였으며 일본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현재까지 일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람의 뼈는 후기 구석기시대(약 2만년 전)의 신인(新人)뿐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정은 우리도 비슷해서 20만년 전 사람들의 생활문화는 알지 못하며 신석기시대의 1만년을 전후한 무렵에 이르러서야 설명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항천인(港川人)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가장 오랜 사람 뼈가 오키나와(沖繩) 본도에서 나온 것은 매우 뜻깊다.

 

이를 정밀측정한 결과 일본인의 조상은 남아시아에서 북으로 올라온 고몽고로이드 (古 Mongoloid)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제4 빙하기에는 동남 아시아의 섬들이 육지의 일부가 됐고 뉴기니아·오스트랄리아·타스마니아 섬들도 서로 이어져 있었다.

 

 

 

 현재의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하는 육괴(陸塊)인 선덜랜드 (Sundalland)와 오스트랄리아를 포함하는 대륙인 사헐랜드(Sahulland)의 남아 시아인들이 북쪽으로의 이주 길에 나선 것은 이 무렵이다. 두 지역은 인류의 낙원으로 불릴 만큼 기온이 따뜻하고 먹거리가 풍족하였으나 급격한 인구팽창에 따라 자원이 말라붙었던 것이다. 이들은 빙하기가 끝나는 1만2천년 전에 중국 양자강 북부에 이르렀고 한 줄기는 일본으로 들어갔다. 앞의 항천인이 1만8천년 전의 것으로 측정되는 중국의 유강인(柳江人·廣西壯族 柳江縣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같은 이름이 붙었다)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도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의 하나다(埴原和郞). 따라서 이들 남아시아계의 고몽고로이드들은 일본 전국으로 퍼져 나가서 이른바 죠몬인(繩紋人)의 뿌리가 됐다.

 

 

 

일본 민족형성의 변혁기 야요이시대

고몽고로이드인 죠몬사람들은 사냥과 야생식물을 거두는 수렵채집생활을 이어왔지만, 일부 냇가에서 잡히는 연어와 송어도 큰 보탬이 됐다. 『이들이 조선반도 동부의 것을 본뜬 낚시를 썼다』(佐佐木)고 하므로, 당시에 이미 우리 문화가 일본 동북지방으로 직접 건너가기도 했음이 분명하다. 이들 죠몬사람들이 동북지방에 몰려 살았던 점은 특이하다. 한 통계는 죠몬시대 말기의 일본 전인구(7만5천8백명) 가운데 반 이상(3 만9천5백명)이 이 지역에서 거주한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비해 중부(현재의 京都· 大阪 지역) 이남인 서일본의 인구 분포율은 3.6%에 지나지 않았다(일본에서는 중부 이남을 「서일본」, 이북을 「동일본」이라 부른다). 이같은 현상이 나타난 것은 동부 지역에 나무열매나 야생의 감자류 그리고 큰 사냥감 등이 풍부했던 점이 주원 이다.


그러나 죠몬시대 인구는 초기에서 후기에 이르면서 오히려 줄어들었다. 중기에 26만이던 인구가 후기에는 16만, 그리고 말기에 이르러서는 7만5천명으로 감소한 것이다(小三修三). 점점 추워진 기후와 식량자원의 빈곤화 등이 이유다. 초기의 인구 증가와 집중 분포현상이 이같은 사태를 낳은 것이다.

 

야요이시대에 이르면서 사람들은 중부 및 큐슈 북부지역으로 몰려들었고 그 숫자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한국인의 일본이주 결과다. 인류학에서는 야요 이시대 초기와 19세기말 이후의 시기를 일본 역사상 가장 큰 변혁기라고 한다. 이 때 일본민족의 체질적 특징이 크게 달라졌고 현대 일본인 형성은 이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19세기말의 명치유신에 힘입어 재빨리 근대화의 길을 걸었고 이에 따라 영양 조건의 개선, 생활양식의 변화, 도시화, 통혼권의 확대 등으로 빚어진 「잡종강세」 (雜種强勢) 현상이 일어났다. 평균 키가 10㎝나 커지고 머리형을 나타내는 두장폭시 수(頭長幅示數)가 단두형(短頭型)으로 바뀌며 코뿌리가 좁아지는 대신 높이는 솟아오 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근대화 과정을 겪는 민족 사이에 흔히 일어나는 것으로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일본민족 형성에 가장 큰 변혁을 가져온 계기는 야요이시대 6백년 사이에 생겼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때에 일어난 변혁은 어떤 것이고 또 그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일본인의 키가 5㎝가량 커지고 머리형은 장두형에 가까워졌으며 코 뿌리(鼻根)가 넓 어지는 대신 코의 높이는 낮아졌다. 또 위턱뼈의 변화에 따라 얼굴도 둥근형에서 달걀형 의 갸름한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같은 체질적 변화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겨레의 이 주에 따라 나타난 것이다. 「조선반도로부터의 도래」 사실은 1953년에 이미 야요이 전 기 유적(山口縣 豊浦郡의 유적으로 2백여명의 인골이 나왔다)을 조사한 학자(金關丈夫) 에 의해 밝혀졌으나 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한 대 목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단시되는 형편이었음에도 그러한 때 이 유적이 도래인 또는 그 영향을 짙게 받은 집단이라고 잘라 말하는 데에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埴原和郞)

 

천년 동안 4차례 한민족 대이동

 

또 76년 부산시 북부의 예안리(禮安里) 고분군(1∼6세기)을 한국과 합동으로 발굴조사한 일본학자들은 북규슈형의 야요이사람이 이들과 완전히 일치되는 사실도 알았다.


이밖에 89년 야요이시대의 대표적 유적(吉野ケ里)에서 나온 인골을 정밀 측정한 학자(松下孝幸·長崎대 의학부)는 『이 인골이 조선반도 남부의 조도(朝島)의 조개 무지, 예안리 고분인, 동북 조선의 초도(草島)인, 중국 북부의 서하(西夏)인과 비 슷하며 조선반도로부터의 도래인으로 생각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 학자들이 모두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일단 수용하는 경우라도 묘한 뉘앙스를 풍겨서 안개로 싸 감추려 한다.

 

단두형 분포도, 남한지역 전체와 일본 중부지역에 분포돼 있음을 보여준다. ▶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현재 일본 민족학박물관 관장)인 사사키 고오메이(佐佐木高明)가 낸 책(『日本の歷史①』 『日本史誕生』·集英社)에 실린 다음 내용이 좋은 보기다.

 

 


「북아시아의 신몽고로이드들이 점차 남하하여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왔다」 이 「조선을 거쳐」라는 짧은 구절은 매우 큰 함정이다. 그(다른 여러 사람도 마 찬가지다)는 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몽고로이드들 이 일본으로 들어갈 때 한국에서 잠시 쉬었거나 아니면 쉬지 않고 지나쳤다고 말하 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이주한 사람은 고몽고로이드지 한국인이 아니라는 주장 이다. 우리 조상이 북아시아계의 신몽고로이드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말대로라면 당시의 신몽고로이드들은 쫓기듯이 줄달음질을 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같은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이땅에 살면서 벼농사 기술을 익히고 철기를 제작하는 가운데 한민족(韓民族)이라는 동질성을 굳혔으며 따라서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당시에는 고몽고로이드가 아닌 한국인으로 탈바꿈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연장·토기·인골 그리고 주거양식 등이 우리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우리에게서 건너간 문화를 대륙 운운하면서 둘러대는 관습은 오늘날에도 뿌리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한 설명이 덧붙여질 것이다.

한편 하니하라 가즈로오(埴原和郞)는 최근 우리 겨레의 일본 이주를 구체적으로 분명하 게 밝혀서 앞사람과 큰 대조를 보인다. 그는 1995년 11월10일에 낸 책(『日本人の成り立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긴키(近畿) 지방의 고분시대(古墳時代)인의 특징은 대체로 이 지방 현대 일본인에 가깝고 또 조선반도의 현대인과도 닮았다. 이 사실은 당연히 도이가하마 유적의 야요이인과도 가까운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북규슈 동부의 고분인처럼, 긴키의 고분인도 도래계 집단의 특징이 우세한 셈이다. 긴키인, 특히 기내인(畿內人, 奈良·京都·大阪지방 사람)은 각별히 조선인 집단과 가까운 뜻에서 「특수한 일본인」이라 부를 만하다』


도쿄대에서 정년을 맞은 그는 현재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에서 연구중인데 그의 이러한 발표에 대해 저명한 사회인류학자(中根千枝)는 『매우 용기있는 행동』 이라고 칭송하였고 앞의 연구소장(梅原猛) 또한 『그의 끈질긴 추구와 진리에 대한 참으로 솔직한 태도에 깊이 경의를 표한다』는 옹호론을 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런 주장은 아직 소수다.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일본은 독립한 정치·문화의 주체였으며 한국보다 늘 우위에 서서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고 , 역사기록을 조작해서라도 「일본의 영광」을 강변하고 싶은 「황국사관」의 미망이 학자의 양식마저 마비시키는 일본적인 풍토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민족의 기원은 북방 알타이계와 남방의 말레이폴리네시아계 등 여러 인종의 혼혈」이라고 막연하게 기술하고 『일본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라는 따위 의 표현으로 초점을 흐린다. 이미 5천년전에 단군조선이란 국가를 형성하고 민족으 로서 정체성을 획득한 한국인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는 절대로 분명한 언급을 안 하는 것이다. 하니하라의 연구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도 현재 일본학계의 이같은 동 향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야요이시대 우리 겨레의 일본이주는 다음의 네 차례로 나눌 수 있다(上田正男).

제1기. 서기전 2백년께 이주 집단의 규모가 조금씩 커졌다.


제2기. 4∼5세기로 이주민들은 여러 소국가들을 통합, 일본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해가는 동시에 긴키지방에 조정을 세워서 국가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3기. 5세기 후반 ∼6세기 초로 백제계의 많은 기술자들이 건너와 농경·기술·학문 등의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4기. 7세기 후반으로 나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으로 그 어느때 보다도 많은 사람이 건너갔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8세기 초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性氏錄)에 따르면 기내(畿內·京都에서 가까운 山城·大和·和泉·攝津의 다섯 곳)의 1천1백82씨족 가운데 거의 3분의 1을 한국계가 차지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더욱 두드러지는 씨족은 신라계의 진(秦)씨와 백 제계의 한(漢)씨 그리고 고구려계의 고려(高麗)씨들로 8세기에는 동부 일본에 까지 퍼져 나갔다.

 

 

 

서기 7세기 전체 주민중 9할이 「한국계」

◀ 고몽고로이드계의 아이누인(왼쪽)과 신몽고로이드계의 퉁구스인(오른쪽)

1984년에 나온 통계는 이보다 더 구체적이다(小山修三). 한국인의 대거 이주는 서기전 3세기에서 7세기에 걸치는 1천년 동안에 일어났으며 그 결과 죠몬시대 말기에 7만5천으로 줄어들었던 인구가 야요이시대에는 60만으로 불어나고 고분시대에는 5백40만명에 이르 렀다고 한다.


뒤를 이어, 하니하라 가즈로오는 당시 원주민과 이주민의 비율이 1:8.6이라는 수치까지 제시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계산한 나 자신도 놀랐을 정도의 엄청난 숫자고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더 더욱 놀랄 것』이라는 소감을 적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 엄청난 숫자고 일본 학계나 국민에게는 「폭탄선언」과 다름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말하자면 7세기에는 일본 전인구 10명 가운데 한국인이 약 9명이고 일본인은 1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와 견주어서, 남한 인구 가운데 부산사람(3백76만)만큼만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한다면 우린들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발표는 유전자의 비율을 계산한 결과와도 일치하여 틀림없는 진실임이 입증됐 다. 현대 일본인에는 동남아시아계(고몽고로이드)의 유전자 2에 북아시아계(신몽고 로이드·한국계)가 8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尾本秀市). 또 85년에는 『일본 중부 와 한국 남부지역 사람들의 체질은 매우 비슷해서 그 차이는 한국 남부와 북부지방 주민 사이에 나타나는 정도』라는 보고도 나왔다(松本秀雄·大阪 醫大).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한국인과 일본 중부지방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들은 중부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 8세기에는 북부지방까지 이르렀으나, 북해도나 오키나와 일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남북으로 떨어진 이 두 지역의 주민에게서는 지금도 고몽고로이드의 특징이 나타난 다. 현대의 일본인은 한국계인 신몽고로이드와 남아시아계인 고몽고로이드의 이중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백제 멸망 10년 뒤에야 日本국호 등장

야요이시대 규슈시 지역 한국계 이주민의 분포도(왼쪽)와 고분시대 한국계 이주민의 동일본 지역 확산도(오른쪽) ▶

한국인의 일본이주 사실은 지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추운 북쪽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온 까닭에 남쪽은 「앞」이고 뒤는 「북」이었다.

 

 

따라서 마을 남쪽의 산을 앞산이라 불렀으며 경주시와 대구시의 앞산이 「남산」인 것도 이 때문이다. 뒷간 이라는 이름도 이 공간을 집 뒤에 둔 데에서 왔다.


그러나 호칭체계가 일본에서는 반대로 나타난다. 북(한국쪽)이 「앞」이고 남은 「뒤」인 것이다. 에도시대(江戶時代·17∼19세기)의 지도를 보면 규슈의 경우 우리와 가까운 지금의 후쿠오카는 스쿠젠(筑前)임에도 이보다 남쪽에 위치한 사가현(佐賀縣) 일대는 치쿠고(筑後)로 적혀 있다. 히젠(肥前)과 히고(肥後), 훙젠(豊前)과 훙고(豊後)도 마찬가지다. 본도(本島)의 경우도 다르지 않아서 동해쪽의 에스젠(越煎)·에츄(越中) ·에스고(越後)와 하젠(羽前)·하고(羽後)도 우리와 가까운 쪽은 앞(前) 먼 쪽은 「뒤(後)」다. 이러한 지명은 고국을 그리던 정이 사무친 나머지 언제나 한국 쪽을 바라고 지냈기에 나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밖에 대마도를 비롯하여 우리와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신사(神社)의 도리이 (鳥居)가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세워진 점도 기억해둘 만하다. 도리이는 신사의 출입 문과도 같은 것으로 성역임을 알리는 표지다.
따라서 도리이가 바다에서 육지의 신사 쪽으로 세워진 것은 이곳의 신(海神)이 바다를 건너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다. 실제로 대마도 니이(仁位)의 와다스미(和多都美) 신사에서 도리이의 방향을 측정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서북쪽인 신라 고도 경주를 향하 고 있었다.

 

 

한국인의 일본 이주는 기온이 점차 낮아짐에 따라 자연히 「따뜻한 남쪽나라」에 대한 동경이 커진 점과 서기전 3세기 무렵 한(漢)족이 고조선을 침략하고 서기전 207년에 진 (秦) 또한 한에 망하므로써 많은 피난민과 망명객들이 우리에게로 들어오는 등의 정치 적 격변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가나문자가 신라의 이두에서 비롯됐다(金澤壓三郞)거나 일본 귀족학교에서 백제 선생이 백제 말로 강의를 했다(司馬遼太郞)는 내용 따위는 우리가 다 잘 아는 터이므로 덧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자 재명(齊明)여왕이 2만7천여명의 원군을 보냈다는 사실(『일본서기』)만은 그냥 넘길 수 없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당시의 인구 5백6십만명에 비교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인 것이 다. 그 반(2백80만명)을 남자로 잡고 노인과 어린이를 다시 반으로 치면 전인구의 2 0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나선 셈이다. 이들의 패망소식이 전해지 자 당시의 귀족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겼으니 조상의 무덤에 두 번 다시 못 가게 됐다」고 통탄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 663년 9월7일조에 전한다.


7세기 후반까지의 일본은 백제의 분국이나 다름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 이름이 백 제가 망하고 10년 뒤(670)에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이 무렵에 나온 역사서를 『일 본서기』라 하여 나라 이름을 앞세운 것도 그 내용이 백제사와 다르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7세기 후반 이전까지의 일본은 한국에 있는 나라들의 해외 영토였던 것이다.

 

백제멸망 후 1천3백여년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와 일본은 완전히 남남 이 되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 기질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 온다. 앞에 든 예화처럼 규슈나 대마도 사람들에게 우리를 닮은 기질이나 행동양식이 남아 있지 않은가. 기질도 유전자만큼이나 바뀌지 않는 셈이다.

 

출처: 칸코리아   올린이: 한니발

출처 : 삼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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