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의 금동 신발의 영역은 어디까지?
백제 후왕 지역 [담로]의 규슈지역 탐색
글:글돋선생
[사마(斯麻)]는 과연 누구인가? 그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우전팔번경(隅田八幡鏡/일본 보물 동경으로 '사마'란 글구가 새겨져 있다)의 제작 주체로서,또한 명문의 내용을 직접 쓴 사람으로서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뿐만아니라, 명문의 정당한 해석을 위해서 더더욱 중요한 일이다.
5세기말에 영토 확장을 위해 남진하던 고구려 세력에 패하여 개로왕이 죽은 다음에 일어났던 백제의 위축과 왕권의 약화에 따른 급격한 국내의 정세 변동에 관해서는 ,곤지의 아들이었던 동성왕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즉위한 뒤로 백제는 가까스로 다시 국력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동성왕 역시 재위 23년 501년에 불만을 품은 신하들에 의해 시해되었다.
<사진:무령왕릉에서 나온 금동신발>
사마가 그 뒤를 이어 백제왕에 등극하니, 그가 곧 제25대 무령왕이다. 그는 가장 먼저 국내의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내치에 힘썼던 것은 물론, 즉위 직후부터 그에게 맡겨진 대외적 과제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다. 한강 일대에서 고구려의 공격에 밀려 금강유역으로 후퇴한 백제의 쇠락한 국력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던 것이다.
<사진:일본 큐슈 구마모도 현 다마나시 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 발견된 금동신발-고분에서 발견된 은상감된 대도(큰칼) 명문 속 *鹵王 이란 글자로 봐서,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은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신하로 데리고 있던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필자도 일본 큐슈 다마나(담로)지역이 백제의 제후국(분국)설을 주장하였다(임나신론/95년 고려원)대도(개로왕시대),무령왕릉과 동일한 금동신발, 개로왕이 죽자 왜에서 동성왕을 데리고 와서 백제왕으로 되고 동성왕이 죽자 왜(야마다정권)에서 무령왕을 데리고 온점을 보아 이미 왜국(일본)은 백제대왕의 관치하에 들어있었다 >
고구려는 무왕인 개로왕을 죽인 철천지 원수, 그리하여 사마왕은 즉위 원년부터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과 부왕을 위한 복수심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한다.
그리하여 고구려에 수차례의 공격을 감행하여 연이은 승리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북방의 강성한 고구려가 그 세력을 남진정책에 투입시킨 이래 백제는 어느덧 중국으로 가는 황해연안 항로가 봉쇄돼 있었다. 때문에 그 대안으로 활발한 해상교역을 통한 국부를 쌓기 위해서는 새로운 해양로의 개척이 필효했고, 선박의 건조가 절실한 문제였다. 따라서 이 무렵 백제는 획기적인 원양선의 독자적 모델을 개발하여 독특한 선박을 만들었던 것 같다.
당시 백제인들이 건조한 소위 [백제선]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7세기경의 [견당사선도]가 다행히 아직 일본에 남아서 전한다. 이것은 가장 한국적인 배의 모형으로 볼 수 있는 그림으로서 ,이를 통해 백제의 조선기술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진:사마왕이 일본 계체천황에게 준 '우전팔번경'(방제경)"사진 옆 명문이 보인다/ 그 속에 사마,계체왕 비밀이 감춰있다>
백제는 이와 같은 모양의 배를 타고 금강 수로를 통해 당시 중국의 남조와 활발한 해상교역을 펼쳤던 것이다. 백제의 선단은 황해를 비스듬히 가로 질러 중국 내륙 연안수의 남하하는 조류를 타고 내려가 양자강으로 들어가는 남경항에 이르렀던 것이다.
백제와 양나라와 교역로
남경은 당시 중국남조의 일국이었던 양나라 수도, 백제는 그 훨씬 이전부터 중국과의 지속적인 해상교류를 해왔지만, 사마왕(무령왕)시대에 그 교역활동은 가히 정점에 이르렀다. 당연히, 이때 선적해 간 백제의 산물들은 남경에서 하역되고, 남조의 유명한 도자기 등 각종 중국 특산품들이 그대로 백제로 들어왔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당시의 중국산 물건들은 모두 이때의 것들이다. 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은 모두 108종, 2906점의 각종 유물들이었다.
요컨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각종 도자기들은, 오늘날 남경박물관에 들어가 보면 이것과 똑같은 형태 및 크기의 남경산 출토의 유물들과 만날 수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무령왕릉 지석위의 오수전과 거푸집
양나라의 엽전을 찍어냈던 거푸집이 무령왕릉의 지석 위에 놓여 있던 바로 그 엽전(오수전)을 찍어냈을 것이다. 또한 왕권의 상징인 청동경도 남경에서 출토된 거울과 똑 같은 것이다. 이것이 백제의 무역선에 실려 머나면 동지나해와 황해의 항로를 따라 백제의 무령왕을 속으로 들어갔던 것으로 보면 쉽게 이해 된다.
백제의 무덤 양식은 전통적으로 횡혈식 석실고분이었다. 그런데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에서는 꽤 보기 드문 횡혈식 전축분이이었다. 천장은 부드러운 곡선의 아치형(궁륭형)으로 꾸민 이와 같은 형식의 현실구조는, 바로 중국 남조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무덤양식이었던 아치형 전축분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왼쪽 사진:우전팔번경>
말하자면 무령왕릉은 부장품뿐만 아니라 무덤자체 양식까지도 남조의 양식을 그대 수입했던 셈이다. 연꽃무늬를 새긴 남조의 벽돌도 무령왕릉의 현실을 꾸미는 데 그대로 제공되어, 백제의 기와나 벽돌에서 흔히 불 수 있는 연꽃무늬를 새기는 수법의 기원까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능케했던 것은 무엇보다 백제가 지녔던 뛰어난 해상능력이었다. 활발한 해상교류를 통해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었던 백제는, 당시 동아시아의 정시 상황으로 볼 때, 해양강국으로서의 뚜렷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과연 그들의 발길이 가 닿는 곳은 어디까지며, 그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우전팔번경 속의 비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하나의 답변을 시사해주고 있는 우전팔번경 속에서 우리는 1500년 전 무령왕의 시대에서 우리는 1500년 전 무령왕의 시대에 아시아의 해상을 누볐던 백제인의 바닷길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더욱이 고대에 그와 같은 진귀한 동경은 "권위의 상징"으로서, 신이 부여한 일종의 신기(神器)와 같은 보물로 여겼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모든 재앙을 물리칠 수 있는 [제마구(除魔具)]와 같은 주술적인 성격을 지닌 [통치도구]와 다름없었다.
일본상고사의 관행으로 볼 때, 이른바 '삼종의 신기'와 황통의 승계는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이 점은 남제왕(계체천황)의 즉위 시에 대반금촌대련이 鏡(경)과 검(칼)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는 대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것은 엄숙하고도 장엄한 의례행사로서, 실로 만백성 위에 군림하는 천황의 신위를 받는 행위였다.
이처럼 통치자에게 정치권력을 창출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던 고대의 동경은 단순한 [헌상물]일 수 없다. 말하자면 동경의 수수는, 상왕으로부터 하사되는 일종의 [신임부여]와도 같은 의미를 띈다.
더욱이, 사마(무령왕)가 만들어 남제왕에게 준 '우전팔번경'은 그렇게 소중한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문의 내용에 의하면 이백간이나 되는 중량의 백동으로 만든 수많은 경(거울)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이 한 가지 사례만으로도 당시 사마의 권위는 미루어 짐작할 수있을 것이다.
무령왕릉의 관목의 비밀(일본 금송)
어쨌든,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온갖 유물들은, 중국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본에서 출토되는 유물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왕과 왕비의 몸을 감쌌던 금은제품의 팔장식과 구슬, 귀걸이, 허리띠 외에도 학계의 관심을 가장 집중시켰던 것은 당시 왕의 시체를 담았던 목관(木棺)이었다.
1500년의 세월에 이미 낡아 부스러지고 파손된 상태였지만, 놀랄 만큼 내구성이 강한 관의 목질 때문에 남은 조각들 만으로서도 처음의 목관 형태를 쉽사리 상상하여 복원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집 모양으로 관을 짜고 검은 꽃 장식을 한 형태였다.
<사진:무령왕릉 목관>
또한 그 관목의 비밀도 경북대학교 수종분석 연구실에서 밝혀졌다. 실험용으로 가져간 관재 조각을 세밀히 조사한 결과, 전자현미경 분석사진에 촬영된 목질 세포의 그물눈 속에 빈 타원형의 구멍들(소위 창상벽공)이 보이는 특이한 형태의 구조였고, 이것은 일본에서만 분포하는 금송(金松)으로 만든 관이었음이 밝혀졌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사용하는 관목은 보통 주목이나 느티나무,상수리나무였다. 그런데 무령왕의 관재가 한국에서 전혀 자생하지 않는 금송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자, 무령왕과 일본과의 관계는 다시금 비상한 관심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KBS(한국방송공사)취재팀은 [무령왕의 7가지 비밀]을 캐기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한 바 있다. 이때 왕의 관계로 쓰였던 금송의 출처를 추적한 결과,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일본에서만 널리 분포하는 금송은 예로부터 규슈 남부에서 혼슈 중앙부까지 자생하고 있으나, 무령왕릉의 관재에 사용된 그것은 대판(오사카) 부근의 고야산(高野山)의 그 주산지였다는 사실이다. 해발 8백 미터의 고야산은, 현재의 행정구역상 명칭인 오카야마켄(岡山縣) 고야산市에 속해 있다.
이 고야산에서 자라는 금송은 그 산명을 따서 흔히 [고야마키]라고 불리며, 일본인들은 이 나무를 매우 신성시하고들 있다 한다 [고야산을 그 지역 사람들은 <다카노야마>라 읽지 않고, <코오야산>으로 발음하고 있다]
무령왕의 관재가 바로 이 고야산에서 온 것으로 판명된 이상, 일찍이 무령왕과 이 지역과는 분명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대로 축자(츠쿠시)의 해중에 있는 '각라도'에서 태어난 사망왕은, 그 탄생에서부터 마지막 안치된 목관의 재료에 이르기까지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특이한 생애를 살았던 사마왕과 이 지역과의 특별한 관계도 궁금하거니와, 나아가 그가 어떤 인물이었던가를 보다 깊이 알기 위해서도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관재의 고향인 고야산의 산맥을 넘어가면 인근에 오사카가 있고, 그 근교에 오사카府 하비키노市가 있다. 포도산지로 유명한 하비키노시의 포도밭 곳곳에 널려있는 고분군은 횡혈식 석실분으로, 백제 고유의 무덤양식이다.
특히 관음총(觀音塚)으로 알려진 고분은 그 대표적 케이스다. 고분의 돌벽 위에 새겨진 그림에는, 말을 타고 머리에 깃털을 꽂는 형태를 한 북방 기마족의 무사가 보여, 이곳이 과거 토착민과는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 살던 곳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바로 이곳이 그 옛날 아스카(飛鳥)지역으로 일컬어졌던 곳이며, 백제인들이 만들었던 것으로 학계에서 공인하고 있다.
<사진: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동다리미(국립공주박물관)>
모두 6~7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고분군에서 백제식 토기들이 대량 발굴됨으로써 확실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이들 숱한 고분군을 [비조천총(飛鳥千塚)]이라 부를 만큼 백제식의 횡혈석실분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또한 하비키노시의 외곽을 흐르는 개천을 건너면 고정전산(高井田山) 횡혈고분이 있다. 바로 여기서 출토된 청동다리미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하면 그 크기나 형태 등에서 놀랄 만큼 완전히 동일하다. 누가 봐도 같은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고 믿을 정도이다.
게다가, 하비키노시의 중심부에 있는 비조호신사(飛鳥戶神社:아스카베진쟈)는 아스카의 조상신을 모신 곳으로 곤지왕(백제 개로왕의 동생)=일본에서는 곤기왕으로 통함=주신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곳은 과거 곤지왕이 다스렸던 땅이었던 것이다.요컨대 고야산의 그늘 아래 아스카 문화를 이룩한 수많은 백제인들이 이 일대에 터를 잡고, 집단으로 거주했던 부정할 수 없는 흔적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462 년~501년까지 사마는 왜왕의 지위에 있었다.
사마(斯麻), 즉 무령왕이 신사년(501년)에 40세의 나이로 백제의 제 25대왕으로 즉위하기까지는, 그 역시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소진철 박사의 견해(금석문으로 본 백제무령왕의 세계)에 따르면, 서기 462년(일본서기 기년으로는 461년)에 그가 각라도에서 탄생하고, 502년 백제로 환국하기 전까지 [嶋君(사마군)]의 신분으로 [왜국]에 있었다는 사실은, 왜왕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하였다. 또, 이 시대의 [군(君)]이란 것은 [예기]에도 나와 있듯이, 대왕의 [候(후)]였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軍君=곤지왕]이나 [嶋(사마)君]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무열기>7년(505년)에 당시 백제왕이었던 사마왕이 태자인[사아군(斯我君)]을 왜국에 보내 천황을 섬기게 했다는 이야기와 그 후에 사아군이 자식을 두어 [法師君]이라 했는데, 그가 곧 [倭君의 선조]였다고 [일본서기]는 기술하고 있다. 하여간 이들은 모두 왜국과 깊은 관련을 가진 사람들이다.
소 박사는, 왜군의 선조라는 말은 곧 [왜왕의 선조]라는 말과도 같은 뜻으로, 이들 모두가 백제왕의 候王으로 [왜]에 보내져 그 땅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백제의 고유의 "담로(擔魯)"체제이다. [梁書] <백제전>에는 당시 백제의 통치체제인 이 [담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지면 관계로 원문 생략하고 한글 해석분을 게재한다.
(다스리는 곳의 성을 이름하여 [고마]라 하고, 읍을 일컬어 [담로]라 하는데, 중국말의 군현에서 비롯했다. 그 나라는 [22담로]가 있어 모두 자제종족으로써 이를 나누어 다스린다)
이와 같이, 볼 때 앞의 다마나市 에다 후나야마 고분의 신발,대도의 명문(개로왕)으로 볼 때, 이 곳이 백제 담로 1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임나신론/고려원/95년,김인배.김문배 공저)
백제는 일찍부터 신개척지에 자제종족을 파견하여 [담로]라는 통치체제에 따라 그곳을 다스렸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여러 곳에 백제왕이 그의 골족을 왜국에 파견했다고 한 史實들도 이러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동제 신발과 똑같은 것이 일본에서도 출토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이런 관점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백제식 고분의 비교적 이른 시기의 모양을 본 딴 것으로, 규슈의 다마나(玉名)군에 있는 <에다(江田)후나야마(船山)고분.은 국왕급의 화려하고 풍부한 부장품, 그리고 75자의 명문이 은으로 상감된 칼의 출토로 유명한 고분이다.
특히 관모 모양의 금동제 관과 금귀고리, 그리고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금동제 신발들 등은 한국에 연원을 둔 것임을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특히 무령왕릉 출토의 심엽형 금귀고리와 똑 같다. 이것은 무덤의 축조 연대와 관련시켜 볼 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동관모는 전라남도 나주의 반남면 신촌리9호분에서 나온 관이나 경주 천마총의 것과 똑 간은 물품이다. 또 금동신발은 무령왕을의 그것과도 같고, 또 1986년 발굴된 전북 익산군 웅포면 입점리의 백제고분에서 금동관모와 함께 출토된 금동신발과도 완전히 같다.
심지어 밑바닥에 9개의 못이 있는 것까지도 동일하여, 그 제작 솜씨가 같은 장인의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이 지역의 명칭인 [다마나]는 백제으 통치체제의 특징으로 보면 지방군현에 해당하는 [담로]와 같은 의미이다.
담로가 다스리는 곳 [고마=도성]의 지명 규슈 熊本(구마모토) 동일
고대에서, [나,노,로,라]등의 음을 표기한 차용한자들은 서로 대채 가능한 글자로서, 모두 [지방]이나 [토지] 및 광의의 [읍] 혹은 [國]을 뜻했다. 따라서 <담나>의 일본식 발음인 <다마나>와 <담로>는 같은 뜻이므로, 이는 백제의 군현 명칭이었던 [담로]의 음사로 볼 수 있다. 이 점, [양서<백제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다스리는 곳의 성(=都城)을 [고마(固麻)]라고 했다는 점과 관련해볼 때, 韓地 백제의 도읍지는 [熊津(고마나리,구마나리)]이었듯이,규슈의 다마나(玉名)가 熊本(=구마모토)에 속해 있는 점까지 유사하다.
담로체제의 명칭에서 뿐만 아니라, 백제식 횡혈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까지 동일하여, 고대에 비후(肥後/히고)지방은 이곳의 북부지대는 물론이고, '히고'의 남부지역까지도 백제와 밀접한 관련을 지녔다고 불 수 있다. 즉, 히고 남부지역에는 아직도 백제 지명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아시키타(葦北.위북) 고을의 구다라키(백제來)촌이 대표적이다.
구다라키는 [久多良木(구다라키)라고도 쓰는데, 한자표기는 어떻든간에 마을 이름이 한국의 백제에서 나왔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 마을은 일본 고대 역사상 유명한 니치라(日羅.일라)가 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일본서기]<민달기12년/583년> 7월조에, 천황은 임나부흥을 도모하기 위해 [지금 백제에 있는 히(火.肥) 땅의'위북국조"인 아리사등(아리시토)의 아들 달솔(백제관등명) 일라(니치라)가 현명하고 용기가 있어, 짐이 그 사람과 계획하려고 한다]하고 조칙을 내려,{길비해부지우도}와 {기국조압승}을 백제에 보내 일라(日羅)를 불렀다는 기사가 있다.
백제는 그 시절 한국 땅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비후(히고)' 땅의 日羅(니리차)가 살던 곳도 역시 백제 영역이었음을 기록은 잘 증명해주고 있다.
[일본지명대사전]에도 니치라가 살던 마을 안에는 구다라키(백제來) 地臟堂(지장당)이 있고, 이는 '니치라'가 만들어 안치한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요컨대 히고 땅에서도 고대엔 지역에 따라 여러 계통의 소집단들이 나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분의 분포를 종합해 보면, 북부 히고는 기쿠치가와(菊池川.국지천) 유역 일대인'다마나'(玉名)군. 키쿠치군 등을 포괄하는 하나의 정치문화권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중부 히고는 시라가와(白川) 이남 지역으로, 우토반도(宇土半島) 및 야스시로(八代) 일대가 하나의 문화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남부 히고는 구마카와(球磨川)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구마군과 아시기타(葦北)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른바 '고마키미(肥君)'의 본거지를 바로 이 '구마천' 하류 야스시로 평야(八代平野) 일대로 비정하는 것 같다. 놀라운 것은 [구마천]의 한국어 음이 백제의 도성이었던 [熊津/구마나리]과 똑같이 [구마나리]라는 점이다.
왕릉급의 백제식 무덤에서 출토되는 금동제 신발이나 부장품들은, 당시 백제의 군현이었던 [담로] 체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매우 중대한 의미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금동신발의 영역
말하자면,백제인들의 발길이 가 닿은 곳은 이른바 [금동신발의 영역]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백제인들에 의해 다스려졌던 곳이이기도 하다.
이로써 우리는 무령왕릉의 발굴을 통하여 한.일 고대사의 한 결락 부분을 복원해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사마왕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본 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은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史實임을 깨달을 수 있다.(글돋선생)
참고 문헌:<神들의 이름/2009년,오늘/ 金仁培.金文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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