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사국시대

[스크랩] 한반도 동남부에서 흉노족 인골 발굴되는 이유.(인용)

설레임의 하루 2011. 9. 3. 03:35

운영자의 글 <前燕 모용황의 고구려 침입과 신라왕권의 지각변동 기록> 먼저 참고하면 아래글과의 연관성이 쉽게 이해됩니다.(운영자 주) 

 

이는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왕족의 묘비에도 자신들의 시조는 성한왕이라 기록되어 있죠. 아무튼, 경주의 김씨 왕릉에서 발굴된 전형적인 흉노(스키타이계열)의 적석목곽분부터, 금을 숭상했던 화려한 금제유물들( 중앙아시아의 그것과 흡사한 양식의 나뭇가지와 사슴뿔과 잎사귀들을 형상화한 화려한 금관), 동복, 천마도(천마도의 재질이 몽골리아지방의 자작나무인것도 밝혀졌죠) 등등 수많은 유물에서 신라 김씨세력이 흉노의 후예라는 주장에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김씨 흉노설의 쐐기를 박는 증거가 바로 강원도 동해시 추암동에서 발굴된 유골의 DNA가 고구려 백제 마한 등과는 상이한 예맥계가 아닌 엉뚱하게도 서몽골의 흉노족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라 이제는 거의 정설화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신라의 김씨세력이 흉노족의 후예라는 주장이 사실이라면,우리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멀리 북방의 흉노족들이 어떤 루트로 어느정도의 규모로 경상도 지방에 유입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물마립간이 김씨왕계를 공고히하는 4세기 후반은 아무리 흉노족이 전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는 시대였다고 하지만 이미 아시아에서는 남쪽의 중국왕조와 선비족 등에 의해 그 세력이 와해되어 서쪽으로 집단이주하거나 그 주변 민족들에 흡수되어가던 시기였습니다.그럼, 흉노족의 세력이 와해되어 뿔뿔히 흩어지는 와중에 그 일파가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얘기인데 기록상으로 보면, 흉노족이 신라땅에 들어온 것은 1세기 무렵의 일입니다.

 

더구나  추암동 고분이 6세기의 것이기에, 이미 1세기를 전후하여 신라땅에 흉노족이 유입된지 500년가량이 지난 시점에서 유골의 유전자가 서몽골지방의 흉노족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수준을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유는, 아무리 신라김씨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해도, 진골 성골 제도가 확립된 것은 추암동 고분이 세워지고나서 몇십년 이후인 선덕,진덕여왕 시대이고, 내물마립간이전 김씨가 신라사회에서 왕권을 독점하기 이전에는 박씨 석씨 뿐만 아니라 여러 귀족세력과의 혼인이 이루어져왔기 때문에 흉노족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있는 추암동고분의 피장자가 1세기에 신라땅에 이주한 성한왕의 후예로 보기에는 상당히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증왕의 부인중에 박씨부인이 있었죠.)

 

더구나, 근친혼의 절정을 보여준 김씨왕족의 무덤은 대부분 경주에 집중되있는데 반해,추암동고분은 강원도 동해라는 점에서 더더욱 의아하게 됩니다.그렇다면, 1세기 흉노세력의 유입말고 그 이후 2차,3차에 걸쳐 또다른 흉노족의 유입이 경상도에 발생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는 신라처럼 흉노족의 무덤양식과 문화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가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현 김해시, 부산을 중심으로한 금관가야)

 

수로왕릉에서 발굴된 유적 유물 또한 북방유목민족의 것들이 즐비한것을 볼때 신라김씨와 가야김씨가 경상도에 유입된 시기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신기한것은 3세기 후반~4세기 중반을 무렵으로 이전 가야시대의 문화와는 전혀 이질적인 북방유목민족의 문화가 대량으로 경남지방에 발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경상도지역에 유입된 흉노족의 유입이 김알지, 성한왕, 김수로의 탄생시기에만 그친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몇몇 비상한 시기에 2차 내지 3차에 걸쳐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즉, 최소 신라 김씨의 경우에는 4세기말부터 6세기초까지 고구려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으면서 고구려를 통해 흉노, 선비족 등 적지 않은 수의 북방유목민족이 신라땅에 유입되어 신라 김씨의 왕권을 공고히하고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한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부족한 제 역사적 소견에 의한 것이지만 저 북방의 초원지대에서 머나먼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인 신라땅에 북방유목민족이 유입되는 그 통로가 되어준것이 바로 고구려였다는 것이죠. 

이와 관련하여 아래의 그림과 내용을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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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보고서에는 벽화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고비(高鼻)'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고비(高鼻)', '코가 높고 크다'는 것이다.백희기악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40명, 그 중 코가 큰 사람은 모두 9명이다. 뭔가에 놀라 넘어진 이는 코가 크다.도망가는 남자도 맨발에 코가 높다. 남자들 뿐만이 아니다.수레를 끄는 여자들도 코가 높다.

 

마부로 보이는 두 남자들은 한눈에도 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도 코가 높고 큰 편이다.

 

 

 

벽화속에 등장하는 고구려 남자는 눈썹이 가늘고 코가 작은 편이다.따라서 고비인들은 고구려인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구려 여인도 코가 큰 여인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장천1호분 백희기악도에 등장하는 코가 높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역계 사람들입니다.이들의 머리모양은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를 늘어트린 상태에서 자기일들을 하고 있는데,아마도 이들은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교류 과정에서 북중국의 어떤 지역에서 흘러들었거나 아니면 내륙아시아의 유목 계통 사이에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5세기 중엽 고구려에는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북연이 멸망하자 주민들이 대거 고구려로 망명하는데 행렬이 무려 80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연나라 임금이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4년(436년)

 

 

 

 

그 사건이 일어나기 100여 년전, 갈족이 중국 동북구에 후조를 세웠다.후조는 이내 전연에게 멸망당하고, 갈족은 북연에 의해 통합된다.이때 살아남은 갈족은 훗날 북연이 망하자 고구려로 향하는 망명대열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용성에 살았던 민족구성을 보면 고구려인들도 있고, 중국 한족도 있고, 북연을 세운 선비족의 모용씨도 있는데, 그외 잡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물론 이 잡족에는 후조를 세우는데 활약한 갈족이라든가 여러 계통의 종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연 멸망 이후 흘러든 많은 종족 가운데 서역 계통의 사람들도 섞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그러나 학자들은 서역인이 들어온 가장 큰 이유로 문물교류에 두고 있다."불교 전래와 관계해서 얼굴이 거무튀튀한 서역 계통의 승려들이 고구려까지 오는거죠. 먼 지역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벽화가 보여주는 것이죠. 모델이 중국쪽의 미술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죠."-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고구려 벽화속에 서역인은 또 있다.씨름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매부리코에 눈이 부리부리하다.손으로 힘을 겨루고 있는 이 남자도 서역인이다.이렇듯 당시 고구려에 많은 서역인들이 살고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속에서 만날 수 있는 외국인들입니다.한눈에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벽화속에 이 외국인들이 서역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역이라는 말은 중국 한나라때 처음 등장했습니다.중국 서쪽에 있는 타림분지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일컬어 서역이라고 했는데요,그후로는 점차 범위가 넓어져서 멀리 인도까지 서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이곳 사람들이 멀리 고구려까지 들어가 살고 있었던 것이죠.

 

고구려 벽화속에 서역인들은 불교와 관련해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몰이꾼처럼 허드레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그것은 이들이 고구려사회에 오래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고구려와 서역의 교류가 그만큼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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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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