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해서는 이미 사학계 특히 이도학교수 및 재야사학계에서도 가장 신빙성있는 기록이라
정의된 바 있으나 성헌식 선생의 현지답사와 지리적 추론은 기존의 신라사와 또다른 내용을 선사합니다.
이미 본인 운영자는 번조선의 남부경계가 현 하남성 濟原으로 사서의 기록과 지리적 추적에 의해 정의한 바
있고 남서쪽으로 燕나라와 맞닿아 있어 진개의 고조선 정벌로 고조선의 남쪽 경계가 이천여리 북상했다는
기록은 허구라 밝힌바 있어 현 중공이 주장하는 연나라 경계가 한반도 평안도 지역까지 들어와 있는 그림은
目不忍見으로 결국 우리 식민사학의 손으로 그리 그리게 놓아둔 꼴이 된것이다. (운영자 주)
2008년 하반기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 BC134년~BC86년)가 신라 김씨의 조상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근거로는 AD 1796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명문이 소개되었다.
문무왕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하늘에 제사지냄이 7대를 이어져....15대조인 성한왕(秺侯祭天之胤傳七葉...15代祖星漢王)”라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한나라에서 투후 벼슬을 받았던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조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역사스페셜이 방영되자 대부분 사람들은 감숙성에 있던 흉노족의 후손이 어떻게 한반도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그나마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김일제의 후손이 멀리 한반도 경주까지 왔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의구심과 해석은 신라를 한반도 경주에 놓고 보는 식민사학의 이론으로는 잘 이해가 안되는 점이 많았다.
그러나 아래 글을 읽어보면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신라는 한반도가 아닌 산서성 임분시 일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나라와 신라 땅은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제의 후손들이 난을 피해 요동(임분일대)으로 도망가 거기서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 섬서성 서안에 있는 김일제의 묘비석. 흉노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는 신라 김씨의 시조이다. | |
조선연방의 일원인 흉노의 태자 김일제
우리는 흔히 흉노와 조선을 별개의 민족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따르면, “3대 가륵단군 B.C 2177년 열양(列陽)의 욕살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했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흉노는 초기부터 조선의 제후국으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세 소태단군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흉노)의 땅을 차지하고는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등의 손자인 우현왕 색불루는 정변을 일으켜 단군조선의 22대 단제(檀帝)로까지 등극한다. 이와 같이 흉노는 곧 조선의 일부로 한 몸이었던 것이다.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金日磾, BC 134년~86년)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부왕이 한무제(漢武帝) 때 곽거병(霍去病)과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국으로 끌려와 처음엔 말을 키우는 노비(馬奴)로 살다 한무제의 눈에 띄어 마감(馬監)이 된다. 그리고 한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제후인 ‘투후(秺侯)’라는 벼슬까지 받는다.
김일제는 한 무제로부터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는데, 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 성을 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마지막의 사관논찬과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이유가 잘 설명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무제는 죽을 때 김일제 등 3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에게 어린 소제(昭帝)를 잘 보필해달라는 유지를 내린다. 즉 김씨가 한나라 조정의 권력핵심에 들어간 것이었다. 죽어서는 곽거병과 함께 한무제의 묘역에 안장되기도 한다. 김일제의 투후(秺候) 벼슬은 자손들에게 세습되어 7세를 전한다.
▲ 섬서성 서안에 있는 한무제의 묘역에 있는 김일제의 묘. 그의 후손들이 한나라를 무너뜨렸다는 이유로 한족인 곽거병의 묘에 비해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 김일제는 김씨의 시조이다. | |
이러한 김씨 집안의 대략적인 내력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기록되어 있다. 김씨부인은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 서기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자신이 살던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그녀의 묘비명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있다.
"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김씨)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일제(김일제)이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전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한무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한(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김씨 부인의 먼 조상이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이고, 김일제는 소호금천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발견된 김씨부인(신라인)의 묘비. 신라 김씨의 기원이 적혀있다. | |
신나라를 세운 왕망과 김씨 집안과의 관계
그리고 한나라의 난리를 피해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 난리란 바로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이 망하고 후한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사학자 문정창(文定昌)선생은 왕망의 성이 왕씨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가 왕망이 흉노의 후예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출자(出自)와 계보를 달리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상당히 일리있는 지적이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로 기록된 사서도 있고, <한서 김일제전>에는 “김당의 어머니는 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다(當母南卽莽母)”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던 김당과 왕망은 동복형제임을 알 수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와 아주 가깝고도 깊은 관계였던 것이다.
왕망은 전한의 13대 황제로 9살짜리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5년 후(AD 5년) 평제를 독살하고, 9대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다음 보위에 올리고 3년간 섭정을 하다, 서기 8년에 아예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신나라(新帝國)’을 세워 황제가 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런 왕망이 김일제 이후 漢왕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집안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물론 왕망이 섭정으로 전권을 휘두를 때나 황제가 되었을 때, 투후 김씨 집안은 당연히 모두 정치실세가 되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왕망은 제도 개혁의 실패와 전국에서 일어난 호족들의 봉기와 한나라 왕족인 유씨(劉氏)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 만에 망하게 된다. 신나라 황제였던 왕망이 봉기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자, 신나라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들은 목숨을 보전키위해 요동(遼東)으로 필사의 탈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김씨 집안이 피신한 요동은 과연 어디일까? 당시 요동은 漢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국 즉 과거 조선의 땅이었다. 그 당시 동이족은 고구려.백제.서나벌(신라).가야의 사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당시 요동 땅은 과거 단군조선(삼한)의 도읍이었으며 초기신라의 발생지인 산서성 임분시 일대였다.
요동이 어디인가는 <한서지리지> 유주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유주에는 요동군, 요서군 외에 상곡군, 우북평군, 어양군, 낙랑군, 현토군 등이 속해 있는데, 김씨부인이 말한 요동이란 말 그대로 요서의 동쪽에 있는데, 그 요서군은 고죽국의 성이 있는 산서성 남부 운성시 일대이다. 따라서 아래 요동군은 산서성 남부의 동쪽으로 현 임분시 일대로 읽혀진다.
(辽东郡 요동군) 秦置。属幽州。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 :襄平(양평)。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대요수)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房,候城,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文,莽曰文亭。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영지에 고죽성이 있다)。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식민사학자들의 이론대로 섬서성 서안에 있던 김씨들이 난리를 피해 한반도 경주까지 도망쳐왔다는 것은 당시의 교통사정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당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씨들은 자신들의 조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조선의 옛 도읍지인 요동(遼東)에 있던 신라로 숨어 들어간 것이다.
▲ 요동군은 요서군의 동쪽으로 현 임분시 일대이다. 요서군이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 서쪽이라는 것을 밝히는 결정적인 유적이 고죽성으로 백이.숙제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
▲ 요서군에는 고죽성이 있다고 <한서지리지>에서 말하고 있다.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숙제의 무덤은 산서성 운성시 서쪽 영제시 황하변에 있다. 이곳이 요서군의 땅이다. | | |
▲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실각하자 김씨들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신들의 고향 땅에 있던 신라로 숨어든다. 서안에서 한반도 경주까지 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 |
신라에서 정치실세가 되는 김씨집안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성립되는 때가 AD 23년으로 서나벌(신라)의 2대 남해차차웅 20년이다. <삼국사기>는 “20년 가을 태백성(太白星)이 태미성(太微星)의 위치로 들어갔다. 21년 9월 왕이 죽으니 사능원에 장사지냈다.”로 기록하고 있어 뭔가 심상찮은 일이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것 같아 보인다.
AD 24년 등극한 “3대 유리이사금의 왕비는 갈문왕 일지의 딸이다. 혹은 왕비는 박(朴)씨로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왕비도 김씨로 보인다. 왜냐하면 5대 파사이사금의 왕비가 김씨로 갈문왕 허루(葛文王許婁)의 딸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김씨는 신라로 들어오자마자 갈문왕이 되고 왕비를 배출하는 등 신라에서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이후 신라 김씨의 시조라는 김알지가 태어나는 해가 4대 탈해이사금 9년(AD 65년)으로 이 때 서나벌이란 국호가 계림(鷄林)으로 바뀐다. 신라에서 김씨가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때는 5대 파사이사금의 왕비와 6대 지마이사금의 왕비가 김씨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김알지의 계통은 세한--> 아도--> 수류--> 욱보--> 구도--> 미추이사금(13대 임금)으로 이어져 김알지 탄생 약 200년만인 AD 262년에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다. 이후 14/15/16대는 석씨(昔氏)가 왕을 하다가, 17대 내물이사금부터는 김씨(金氏)가 계속 신라의 왕이 된다.
▲ 중국 산서성에 사는 김씨 집안의 족보는 흉노족 김일제로부터 시작한다. | |
초기신라의 국호와 그 위치는 어디인가?
신라의 초기 국호는 <삼국사기>에 서나벌-->계림-->신라로 바뀐다는 기록이 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국호를 사로(斯盧) 또는 진한(辰韓)으로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삼국사기>에 “AD 307년 신라라는 국호로 복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신라라는 국호는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분명 왕망의 신(新)나라와 뭔가 깊은 연결고리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삼국사기> 지증왕 4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하들이 아뢰기를 창업 이래 국호를 못 정해 사라/사로/신라라 하였는데, 이제 신라라는 국호를 정하면서 “신(新)은 덕업을 일신(德業日新)한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을 망라(四方網羅)한다는 뜻”이라 했다.
식민사학계는 한반도 경주를 신라의 천년 고도(古都)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신라의 조상이 흉노 출신 김일제라는 사실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으나, 역사의 진실대로 최초 신라를 산서성 임분에다 놓고 보면 김일제 스토리가 기가 막히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설명이 되는 것이다.
1998년 중국 언론은 산서성에 살고 있는 중국 김씨들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들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왜 중국 김씨들은 산서성에 살게 되었는가? 그리고 문무왕과 김씨부인의 비문에서 자신들의 조상은 김일제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중국 김씨와 신라 김씨는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초기신라가 있었던 곳은 바로 산서성 일대이다.
▲ 산서성에 있는 중국 김씨의 종사(宗祀)에 모셔져 있는 김일제의 화상 |
▲ 일제의 식민사학에 의해 만들어진 국사교과서의 삼국 지도 모습. 우리 역사의 진실은 한반도에 이렇게 조그맣게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을 지배했었다. 김일제 이야기만 봐도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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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 선생의 글 인용.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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