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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편찬「만주원류고에서 만주(길림에서 광령까지)는 신라땅
8출처:시간여행자 (parkyi****) 주소복사 조회 89 09.12.05 23:26
청나라 편찬「만주원류고에서 만주(길림에서 광령까지)는 신라땅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신라구주(新羅九州) 항목을 다시보면
청나라에서 편찬한 「만주원류고」에서 만주(길림에서 광령까지)는 신라땅
만주원류고」 이외의 기록에 만주가 신라땅이라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만주원류고」에서 신라에 관계되는 인용 사료는「北史, 梁書, 通志, 隋書, 冊府元龜, 舊唐書,
新唐書, 太平 宇記, 通考」등에 의하여 위치를 표현하고 있는데 「奉使行程錄」에서 " 自咸州北行至同州東望大山卽
新羅山深處與高麗接界"라 하였다.
案에 의하면 함주는 今함평부이고 동주는 금동산 在鐵嶺 開原之間, 동쪽으로 威遠堡 즉 吉林界, 남쪽으로 봉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許亢定行程錄」에 의한것이라 한다.
18세기에 나오는 지명 鐵嶺 開原과 吉林이 지금도 있다.
또 新羅九州 항목에는 「新唐書」 唐會要에 의하여 표현하였고 謹案에서 " 其疆土東南竝有今朝鮮之慶尙江原二道
西北直至吉林烏拉又西近開原鐵領"이라 하였고 개원 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결국 신라강역은 북쪽의 동쪽은 길림(吉林)에서 서쪽은 개월 철령(鐵嶺)까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 九州之設東至吉林西至廣 跨海蓋而包朝鮮幅員式擴矣"라고 하였는데 吉林 廣寧이 현재도 있고 廣寧 근처에 鐵嶺
開原이 있으니 신라의 서쪽은 개원(開原) 철령(鐵嶺) 광녕(廣寧)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나타내고 동쪽은 길림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18세기에도 있는 지명이 현재 요하의 瀋陽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철령(鐵嶺)과 개원(開原)이 있고
서쪽에 광녕(廣寧)이 北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北鎭=廣寧)
결국 「만주원류고」에서 신라는 동쪽 길림에서 서쪽의 개원 철령 광령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이를 신라가 高句麗 百濟를 멸한 뒤 설치한 9주에 포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쪽의 광령(廣寧)을 고구려(高句麗) 패망 지명인 은산 신성 용도 둥의 서쪽에 있는 代와 燕慶사이의 恒山이 있는 지역의
광영(廣靈)으로 볼수 있으나 다른 지명인 개원(開原) 철령(鐵嶺)과 같은 지역에 없기 때문에
철령(鐵嶺) 서남쪽 지역에 있는 北鎭 즉 광령(廣寧)으로 보아야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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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영역은 일제식민지때 축소된 역사-
<만주원류고>는 신라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긴 여진족이 그들의 원류를 찾고자, 중국의 역대 사서와 서적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관련된 자료를 모두 뽑아서 유목민의 관점에서 일일이 고증하여 수록한 책이다. 1,777년 청(淸)의 건륭제의 지시에 의해 43명의 학자가 참여하여 부족ㆍ강역ㆍ산천ㆍ국속(國俗) 등 4개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편찬된 책이기에 만주원류고는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역사서이자 문화사적 서적이라 볼 수 있다.
만주원류고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비중 있게 인용한 뒤로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번은 접하고 넘어가야 할 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다른 각도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유로 우리들의 주목을 받는다. 한민족과 같은 계열인 여진족의 청(淸)이 그들의 시각을 담아 고증하여 편찬했다는 점과 중국의 정통사서가 중국을 중심축으로 만주를 분절시켜 기술한 데 반해 만주가 중심이 되어 각 시대별로 사건 기사가 집대성되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이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만주와 한반도는 동일한 삶의 공간을 형성했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영위해 갔던 일관성 있던 삶의 족적들이 중원의 사가들에 의해 시공간대별로 분절되어 마치 다른 부족이 다르게 활동한 것처럼 지금까지 이해되어 왔었다. 그에 따라 만주는 온갖 서로 다른 부족들이 뒤엉켜 야만적으로 살아간 지역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예전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이 계속 그 지역에 뿌리를 두고 살아갔음을 생각해 보자. 중국의 만다린어를 구사하는 사람과 광동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현재 모두 중화족을 형성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만주 지역 부족들 간의 이질성은 지나치게 부풀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가 붕괴하고 그 자리에 발해가 건립되기까지 불과 한 세대(30여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고구려를 구성했던 주민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말갈인만이 남아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중국의 주장을 통해서도 만주와 만주의 사람들에 대한 중원 사서들의 기술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주원류고는 중국 사서에서 자의적으로 기술된 부분을 언어적 관점에서 집요하게 추적하여 교정하려 했다. 여진족의 용어를 뜻글자인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하나의 객체가 시대별로 사가들의 무지나 자의에 의해 서로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후대에 마치 서로 다른 것으로 오인되었던 것을 만주어의 관점에서 일일이 고증하여 바로잡으려 했다. 청대의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그 권위를 부여받은 이러한 자세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역시 중국 사서에 나오는 한민족 관련 용어를 치밀하게 검증하여 그 역사적 인과관계를 따져봐야 큰 것으로 언어학을 통해 역사적 용어를 검증하는 새로운 학문의 계열을 마련해도 될 정도의 치밀성을 보이고 있어 중원사서에 나오는 한민족 관련 용어 역시 치밀하게 검증하여 그 역사적 인과관계를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먼 훗날, 중국의 커커우컬러(可口可樂)가 미국이란 변방에서 코카콜라로 표기되고 한국에서는 가구가락으로 표기되어 콜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는 분석상의 우스꽝스러움을 피하기 위해서도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조선사연구초>를 통해 시도했던 언어학적 검증을 정통 사학계에서도 도입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만주원류고는 또한 만주와 한반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적 습속을 집대성하고 만주인의 시각으로 이를 분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신라구주(新羅九州) 항목을 다시보면
청나라에서 편찬한 「만주원류고」에서 만주(길림에서 광령까지)는 신라땅
만주원류고」 이외의 기록에 만주가 신라땅이라는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만주원류고」에서 신라에 관계되는 인용 사료는「北史, 梁書, 通志, 隋書, 冊府元龜, 舊唐書, 新唐書, 太平 宇記, 通考」등에 의하여 위치를 표현하고 있는데 「奉使行程錄」에서 " 自咸州北行至同州東望大山卽 新羅山深處與高麗接界"라 하였다.
案에 의하면 함주는 今함평부이고 동주는 금동산 在鐵嶺 開原之間, 동쪽으로 威遠堡 즉 吉林界, 남쪽으로 봉천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許亢定行程錄」에 의한것이라 한다.
18세기에 나오는 지명 鐵嶺 開原과 吉林이 지금도 있다.
또 新羅九州 항목에는 「新唐書」 唐會要에 의하여 표현하였고 謹案에서 " 其疆土東南竝有今朝鮮之慶尙江原二道 西北直至吉林烏拉又西近開原鐵領"이라 하였고 개원 이후 발해가 성할 때 압록강으로 경계하였다.
결국 신라강역은 북쪽의 동쪽은 길림(吉林)에서 서쪽은 개월 철령(鐵嶺)까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 九州之設東至吉林西至廣 跨海蓋而包朝鮮幅員式擴矣"라고 하였는데 吉林 廣寧이 현재도 있고 廣寧 근처에 鐵嶺 開原이 있으니 신라의 서쪽은 개원(開原) 철령(鐵嶺) 광녕(廣寧)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나타내고 동쪽은 길림으로 이어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18세기에도 있는 지명이 현재 요하의 瀋陽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철령(鐵嶺)과 개원(開原)이 있고
서쪽에 광녕(廣寧)이 北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北鎭=廣寧)
결국 「만주원류고」에서 신라는 동쪽 길림에서 서쪽의 개원 철령 광령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주원류고」에서는 이를 신라가 高句麗 百濟를 멸한 뒤 설치한 9주에 포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쪽의 광령(廣寧)을 고구려(高句麗) 패망 지명인 은산 신성 용도 둥의 서쪽에 있는 代와 燕慶사이의 恒山이 있는 지역의 광영(廣靈)으로 볼수 있으나 다른 지명인 개원(開原) 철령(鐵嶺)과 같은 지역에 없기 때문에
철령(鐵嶺) 서남쪽 지역에 있는 北鎭 즉 광령(廣寧)으로 보아야 타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석 평가했다는 점에 그 소중함이 돋보인다. 모계사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제천의식을 거행하며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즐기는 축제의 모습, 민주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제 부족집단들의 의사결정 모습 등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만 역사를 이해하려 많은 사람들의 선입관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도 남는다.
여진은 신라의 후예라는 것, 통일신라의 강역이 길림에까지 미쳤다는 것, 삼한의 한(韓)은 지역명이 아니라 징기스칸과 같은 리더의 이름이라는 선언적 기술은 어쩌면 만주원류고가 우리에게 정신적 대리 만족을 주는 즐거움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을 보는 관점을 중원에서 만주 중심으로 변화시킨 것에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관점을 변화시키면 역사에 대한 해석이 변할 수 있다. 중국이 진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길은 그들의 중화 제일주의에 기인한 시각보다 우리의 시각이 동아시아 역사를 이해하는 데 더 합리적이고 실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 나가는 것이다. 만주원류고는 이런 측면에 우리의 훌륭한 반면교사가 된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통독할 수 있는 번역본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했었는데, 늦게나마 만주원류고의 전 텍스트가 번역된 책이 나오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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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같은 날, 고구려인-백제인-신라인-일본인(왜인)
[한겨레] “돛배 띄워라, 동방의 이상향 신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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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이웃하면서 한 문명권에서 살아온 중국이나 일본말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먼저 알고 찾아와서 교제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들일까?
그러나 루브루크보다 4~5백년, 더 세스페데스보다는 무려 7~8백년 앞서 신라에 많은 아랍인들이 오갔을 뿐만 아니라, 정착까지 했다는 기술과 더불어 신라에 관한 귀중한 사료들이 중세의 여러 아랍문헌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요컨대, 한문명권 밖에서 처음으로 한국(신라)을 알고 그 존재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람들은 다름아닌 아랍인들로서 그 역사는 자그만치 1천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으며, 그들은 어떻게 신라를 세계에 알리고 있었던 것일까 ? 그 모습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화상이기도 하고, 세계 속에서 일찍이 우리 겨레가 누리던 드높은 위상이기도 하여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랍인들에게 신라는 한마디로 ‘동방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세상에는 ‘행운의 섬’이나 ‘불멸의 섬’으로 알려진 이상향이 두 곳에 있는데, 그 하나는 서방의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대서양 상의 신비의 섬 아틀란티스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동방의 신라다.그러나 같은 이상향이라도 아틀란티스는 무인도인데 반해, 신라는 사람이 사는 유인도로서 경작지와 과수원이 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아틀란티스는 전설 속의 한낱 이상향에 불과하지면, 신라는 속세의 살아숨쉬는 이상향이라는 것이다. 물론,
문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는 신라가 동경과 선망의 대상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동경과 선망은 신라에 대한 그들 나름의 지견이나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 쇠사슬도 금붙이인 나라”
아랍인들은 지구상에서 신라가 어디에 있는가를 일찌감치 제대로 알아냈다.
섬과 산이 많은 신라가 중국의 동편, 지구의 동단에 있으며 바다(태평양)로 에워싸여 있다고 한 지리서가 지적한다.
이것은 중국보다 더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육지의 동단을 오로지 중국으로만 보아 오던
종래의 그리스-로마의 지리관을 타파하고 동방에 관한 새로운 지리지식을 첨가한 엄청난 발견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지리와 관련한 아랍 학자들의 기술에서 특별히 주목을 끄는 것은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이드리시가 그린세계지도에 신라가 자리한 사실이다.
그는 전래의 지리지식을 집대성하여 지은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1154년)이란 책 속에 한 장의 세계지도와 70장의
지역세분도를 그려넣었다.
그는 아랍의 전통적 ‘7기후대설’에 따라 지구를 7개 지역으로 나누고, 매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다시 10등분하여 각기 지도
한 장씩을 제작함으로써 총 70장의 지역세분도를 완성하였다.
그 제1지역도 제10세분도에 5개 섬으로 구성된 신라를 명기하고 있다.
아랍인들은 이렇게 신라의 위치나 지형뿐만 아니라, 신라의 자연환경에 관해서도 놀라운 기록들을 남겨놓고 있다. 열사에 찌들고 풍랑에 지친 그들에게 자연경관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소기의 안주처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떠나지 않고 정착하고야 만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그들의 눈에 비친 신라는 황금이 지천에 깔려 있는, 말 그대로의 ‘황금의 나라’다.
금이 너무나 흔해서 가옥은 금으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하고 금제 식기를 쓰며,
심지어 개의 쇠사슬도 금으로 만든다는 것이 그들이 믿고있는 신라의 황금상이다.
비단·담비가죽·계피등 풍부
이와 더불어 그들은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심정에서 신라인들의 유족한 생활상과 쾌적한 환경을 세심한 필치로 이모저모
묘사하고 있다. 지리학자 까즈위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절호의 나라이다. 그곳에서는 공기가 깨끗하며 물이 맑고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를 볼 수없다.
만약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이 풍긴다고 한다. 전염병이나 질병은 드물며 파리나 갈증도 적다.
다른 곳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 알라만이 시혜자이다.”
그 환경이 얼마나 정갈했으면 물 뿌린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외지에서 온 환자는 금새 치유되겠는가
하는 극찬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이슬람적 세계관에 훈육된 사람답게 그는 신라의 이와 같은 윤택한 생활환경을 유일신
알라의 시혜로 돌린다.
그런가 하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는다.
인종학적으로 인간 외모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또한 무모한 일이지만, 그들이 지적한 ‘가장 아름다운
외모’란 무구무병한 환경에서 사는 신라인들이야말로 그 외모가 준수할 수밖에 없다는 하나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신라인들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대인관계에서의 친절성이나 유화성, 신뢰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라인들의 외모가 아름답다거나 성격이 양순하다고 한 것은 그들의 높은 문화수준과 윤리도덕성에 대해 아랍인들이품고있는 일종의 선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해 바닷길 통해 물산 교류
그밖에 신라인들의 종족적 기원이나 신라의 대외관계,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관한 기술에서도 눈길을 끄는 여러 대목이
있다.
예컨대, 신라인들은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주고 받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신라인들이 중국 황제와 서로 선물을 교환한다는 내용이다.
신라와 중국(당나라)간의 관계는 모화사상이나 사대주의에 바탕한 조공관계가 기본이었다는 통념에 반해, 양국간에는상호성에 입각한 선물교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기술은 양국관계의 다른 한 측면을 음미해 보게 한다.
서로가 선물을 교환하지 않으면 천벌로 가믐이 들게 한다는 것은 천리를 빌어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동방의 이상향으로 선망하는 신라에서 나는 물산이 아랍인들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세기 후반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신라에서 비단(하리르), 검(피린드), 사향(미스크), 말안장(수루즈), 흑담비(삿무르)가 죽, 오지그릇(가돠르), 계피(다루쉰) 등 물품(그밖에 몇 가지는 확인 안됨)을 수입해 갔다.
그 통로는 주로 중세 아랍 상인들의 활동 무대였던 남해의 바닷길로서, 여기에는 아랍 특유의 돛배가 이용되었다.
비단이나 검, 오지그릇이 국제무역품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신라의 대외교류사에서 자못 의미있는 일이다.
‘은둔의 나라’는 왜곡된 시각
… 일본사람들은 엉뚱하게도 신라에 관한 중세 아랍문헌의 기술은 신라가 아닌 일본에 관한 기술이라고 아전인수하는
이른바 ‘신라일본비정설’을 들고 나와 반세기 동안이나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 여파는 우리네 학계까지 던져졌다.
나라가 힘이 약하고 학문이 뒤쳐지면 참 역사가 난도질 당한다는 뼈저린 교훈이다.정수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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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서라벌에는 약 17만호의 가구가 있었다. 이는 대략 90만-100만의 인구가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훗날 조선의 한양보다 4-5배나 더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혹자는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과 함께 서라벌을 당시 세계 4대 도시로
꼽는다.
인구가 많다고 세계적 도시로 꼽는 것이 아니다. 신라, 특히 서라벌에는 초가집이 없이 모두가 기왓집이었다.
온통 금으로 뒤덮은 집도 수십채나 되었다. 그들의 부유함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신라는 차도와 인도가 나란히 잘 정비된 도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인도 옆에 마차가 수월하게 다닐 수 있도록 바퀴 자국에 맞춘 도로의 흔적이 아직까지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도로 옆으로는 배수구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다.
우선 서민층 거주 지의 경우, 집집마다 우물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굴을 통해 밝혀졌다.
이처럼 서민층에서도 각 집마다 우물을 하나씩 갖고 있을 정도면, 당시의 서라벌이 얼마나 위생이 청결한 곳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온돌을 사용하지 않고 숯으로 난방을 했는데 이를 뒷받침 해주기라도 하듯, 대규모의 숯 가마가 발견되기도 했다.
숯으로 난방을 할 경우,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을 것이다.
상류층 거주 지역의 경우에는 본채 건물 외에도 별채와 화장실까지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계획적으로 잘 정비된 도시였던 서라벌은 마치 바둑판과도 같은 형태로 도시 주거지를 이루고 있었는데, '방'으로 나뉘어지는 이러한
거주 구역은 한 방당 약 8천평 규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골목마다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다.
그래서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을 찾는 일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인구조사 또한 치밀하고 완벽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가구당 가축의 수까지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천년 전의 도시가 오히려 지금의 대도시보다 더욱 계획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KBS 역사 스페셜>
신라인들은 그 여유로운 상태에 만족했고, … '삶의 질'이나 높일 것이지 왜 피 흘려가며 전쟁을 해야하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인들은 정복이나 전쟁에 대한 야욕이 적은 편이었다. … 자기들의 피해를 감내하면서 까지 정복 국가가 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좋은 땅과 좋은 기후, 부유함 … 자연스레 신라는 고도의 문명과 문화 수준이 장점이 된다.
반대의 상황이었던 고구려는 신라와 달리 많은 정복전을 거치며 영토가 넓어지고, 군사력이 장점이 된다.
그렇게 신라와 백제, 고구려는 각자의 상황에 맞게 특징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 우리 역사의 찬란한 문화는 신라의 문명을 기반으로 하여
나온 것이다.
(신라는 로마와도 교역하였다.)
21세기를 관ㅋ통ㅋ하는 치장술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신라인들의 서역문물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하였다.
귀족 사대부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앞을 다투어 서역에서 들어온 호화품들을 장만하고 남용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무분별한 사치풍조까지
일고 있었다. … 진골은 타고 다니는 수레에, 육두품에서 백성까지는 가마와 침상에 향료인 동남아시아산 자단과 서아시아산 침향 …
아랍산 유향도 있다.
진골녀의 빗과 관을, 육두품녀의 빗을 슬슬로 꾸미는 것 … 슬슬은 투명하고 푸른색의 진귀한 보석이다. … 보석에 대한 신라인들의 소유욕과
애착심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말해준다. … 서역산 고급모직 옷감인 ‘계’는 여인들의 바지나 버선, 신, 목수건, 옷고름에 장식 … 인도를 비롯한
서남아시아에서 나는 공작새 꼬리 … 비취새 털을 목수건 같은 장신구에 … 신라인들의 사치성이 엿보인다.
신라의 남자들은 나이와 신분에 상관없이 향낭(향기 주머니)을 차고 다녔다.
종교행사나 제사 때 향료를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기도나 맹세를 할 때, 그리고 부부가 함께 침실에 들 때도 향료를 사용했다.
… 향료는 향기가 진한 식물을 그늘에서 말린 후 가루로 만들거나, 향나무 조각, 사향노루 같은 동물의 향료 주머니 등으로 만들었다.
신라 사람들은 이 향료를 옷고름이나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KIST 이종호 박사 색다른 해석 "그리스·켈트 특유의 무늬 있어"
TV 사극 '선덕여왕'에서 묘사되는 7세기의 신라는 국제무역 중심지다.
대불림(大拂臨·동로마) 말을 쓰는 서역 상인이 서라벌에 온다. 신라 도박업자는 "여헌국(黎軒國·이집트)도 여왕
(클레오파트라)이 나라를 다스렸다"고 말한다.
신라는 통일 전에도 서역과 활발히 교류하던 '실크로드의 종착지'였을까?
신라 말 아라비아 상인들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다. 9세기 헌강왕 때의 처용(處容)이 그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8세기 원성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괘릉의 무인석상,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유리잔 등도 그렇다.
여기서 그 정체가 아주 모호한 유물 하나가 주목된다. 5~6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黃金寶劍·사진)'이다.
정식 명칭이 금제감장보검(金製嵌裝寶劍)인 이 칼은 보물 635호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유물에 대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장기(長期)전문위원인 이종호(李鍾鎬) 박사기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유럽 켈트 왕(王)의 보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릴까? 황금보검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73년이었다.
경북 경주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는 200여개의 무덤이 있다.
도로 공사를 하면서 배수로를 파고 있을 때 땅속에서 돌무지(적석·積石)가 드러났다. 계림로 14호분이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황금보검과 함께 금귀걸이와 금으로 만든 사자머리 형상의 띠고리(버클) 등도 발견됐다.
무덤 주인공의 가슴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은 철제 칼집과 칼은 없어지고 길이 36㎝의 금 장식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누금(鏤金·금에 무늬를 새김)과 붉은 마노 장식이 돋보이지만 '우리 유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학계에서는 페르시아 같은 서역에서 만들어져 수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서교역로가 옛 신라 때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호 박사는 "가운데 태극무늬를 닮은 무늬가 세 개 들어간 것과 표면의 나선무늬를 주목하라"고 했다. 태극무늬 안의
꽃봉오리 장식은 고대 켈트인들이 사용했고 나선무늬는 그리스 특유의 소용돌이 무늬였다는 것이다.
본거지가 유럽 도나우 강 중부였던 켈트인은 이베리아 반도·스코틀랜드·아일랜드와 트라키아(Thracia)에 정착했다.
트라키아는 지금의 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 일대에 해당한다.
트라키아인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이곳에서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다.
일본의 고대유물 전문가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는 계림로의 황금보검을 제작한 금세공 기술자는 로마 문화에 정통한
사람이며, 주문자는 켈트족 출신의 트라키아 왕이라고 보았다.
함께 출토된 사자머리 버클은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 그리스·로마 지역에서 쓰이던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 버클은 원래 황금보검을 차기 위한 허리띠에 달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 고구려, 백제나 중국에도 없는 이 유물이 신라에서만 나왔을까?
이런 일급 보물이 상거래 대상이었을 리는 없기 때문에 트라키아 사절이 신라까지 왔거나 신라 사절이 트라키아에서
가져왔을 거라는 게 요시미즈의 추측이다.
중·동부 유럽이 근거지였던 트라키아 왕은 왜 신라에 이런 보물을 보냈을까?
이 박사는 "그곳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던 훈(Hun)족의 근거지여서 여전히 트라키아에 훈족 세력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북방 기마민족인 훈족(흉노)는 한(漢)왕조에 패한 뒤 동서로 갈라졌다.
만일 서쪽으로 간 세력은 훈족이 되고 동쪽으로 간 세력은 신라와 가야의 지배민족이 됐다는 설(說)이 맞는다면 트라키아와
신라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셈이다.
이 박사는 "최근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당시 트라키아의 장식류에 쓰이던 석류석의 원산지가 스리랑카와 인도라는 것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트라키아에서 스리랑카·인도까지는 어떻게든 무역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신라까지 연결되는 해상로가 존재했던 건 아닐까?
어쩌면 그건 가야의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이야기를 증명할 루트일지도 모른다.
이 박사는 "KIST와 루브르측의 협동연구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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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전 해상 강국 만든 신라배,장보고
신라 배는 … V자형 가까운 첨저형 추정
작지만 날렵 … 파도에 강해
해상왕 장보고를 만든 신라배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주도로 이원식(한국해양대 명예교수) 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 김용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등이 연구해 복원한 배는 첨저형(V자·사진)에 가까운 배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장보고는 해류 이용한 천재”=고선박연구가인 마광남씨는 “거친 파도를 이겨내려면 바닥이 평평하기보다는 뾰족한
형태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먼바다를 다니려면 현대의 원양어선처럼 뾰족한 형태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울산과학대학 이창억(해양조선학과) 교수는 “장보고의 무역 항로는 북방항로뿐 아니라 서해 남부 항로도 다녔다”며 “이런
곳을 다니기 위해서는 밑바닥이 평평한 배로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신라 배도 한국 고유의 배 형식과 같은 밑바닥이 평평한 모양”이라고 주장한 고 김재근 서울대 명예교수 등을 반박하는
논리다.
일본의 구법승인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신라 배는 작지만 날렵하고 강하다’고 표현했다.
또 신라 배는 동남풍과 서남풍을 이용해 남쪽으로 항해하는 ‘역풍항해’까지 했다고 기록했다.
마광남씨는 “역풍 항해를 하려면 지그재그 방식으로 이동을 해야 하고, 능숙한 돛 조절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의 항해 각도는 목표지점을 향해 50도에서 60도 정도로 움직여 줘야 한다는 얘기다.
장보고 선단은 항법도 앞서 있었다. 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은 “장보고 선단 항해사는 지문항법·천문항법·수문항법
등을 모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지문항법은 육상이나 섬의 모양과 목표물을 보고 항해하는 것이고 천문항법은 해와 별자리 등 천체를 활용하는 것이다.
수문항법은 물의 깊이나 색깔을 파악해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다.
장보고는 이들 항해술로 해류와 바람이 다른 한반도 남해와 서해, 남중국해 등을 자유자재로 다녔다.
1992년 완도 일대를 답사한 동서교역사 권위자인 휴 클라크(미국 얼시누스 대학) 교수는 장보고의 동북아 해상 장악을
아라비아인들의 남해무역 지배와 비교하면서 “지형과 해류를 잘 이용한 장보고는 천재”라고 평가했다.
◆파손돼도 침몰은 안 돼=고선 전문가들은 신라 배는 한 쪽이 바위 등에 부딪쳐 파손돼도 가라앉지 않도록 앞부터 뒤까지
칸막이를 여러 개 한 것(수밀격벽구조)으로 보고 있다.
엔닌의 기록에 선체의 밑바닥이 모두 부서지고 찢어진 가운데 밀물이 밀려왔지만 계속 항해을 했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선체에 물이 차도 한번에 침몰하지 않고 긴급 항해가 가능했다.
이원식 소장은 “2006년 중국 산둥성 펑라이시에서 발견된 고려 선박이 이런 구조인 것으로 보아 원양항해를 했던 신라 배
역시 비슷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신라 배는 튼튼했다. 강상택 전 한국해양대 교수는 “신라 배는 배 측편을 만들 때 판끼리 겹치는 방식으로 한 뒤 참나무
쐐기를 박아 고정시켰을 것”이라며 “일본 배는 판자들을 수평으로 이은 뒤 못으로 고정시켜 약했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
▶팀장=김시래 산업경제데스크
▶취재=김문경 숭실대(역사학) 명예교수, 천인봉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창규·염태정·이승녕·문병주·강병철
기자
▶사진=안성식·오종택·변선구 기자
<도움말 주신 분들>
▶강봉룡 목포대 교수(역사문화학)▶권덕영 부산외국어대 교수(역사학)▶김용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김종식 완도군수▶김재철 동원그룹 회장▶김진숙 박사(성균관대 강사, 차학)▶김호성 서울교대 교수(전 총장, 윤리교육학)▶김희문 전 완도문화원장▶마광남 고선박 연구가▶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정보실장▶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역사학)▶윤명철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역사학)▶이승영 동국대 교수(국제통상·전 한국무역학회장)▶이원식 한국해양대 명예교수(원인고대선박연구소 소장)▶이주승 완도군청 학예연구사▶이창억 울산과학대 교수(해양조선학과)▶정준영 전 삼성재팬 사장(고 이병철 회장 전 비서팀장)▶정필수 한국종합물류연구원장▶조범환 서강대 박물관 교수(역사학)▶최장현 국토해양부 제2차관▶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황상석 뉴시스 광주전남취재본부장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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