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반도조선사 이렇게 만들어 졌다.

설레임의 하루 2011. 8. 27. 10:18

반도조선사 이렇게 만들어 졌다.
일제는 무려 20만권의 사서를 불태웠다.
 
역사복원신문 기사입력  2011/08/25 [15:12]
 
▲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왜곡되고 편향된 인식이었음이 존스홉킨스대학의 데넷 교수가 발견하여 세상에 공개한 루스벨트 서한집의  한국에 관한 내용이다.       © 역사복원신문

 
[1] 일제는 한국 땅만 지배 할 통치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본래 대륙의 조선 땅과 중국 땅을 분할 통치하고 한반도 속의 대한제국 땅만을 지배할 통치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았다. 일제는 러.일 전쟁 승리와 동시에 1904년 2월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했다.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지금의 한반도 땅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고, 8월에는 제2차 영․일 동맹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으로부터도 한국 땅에 대한 식민지배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또 9월에는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마지막으로 러시아로부터도 같은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 왕은 1905년 11월 9일 특명전권대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을 체결하고 1905년 11월 18일 발표하였다. 조선 통감부는 조선의 관헌감독권, 병력동원권 등 국정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명실 공히 조선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최고 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 일제는 간도를 청국에 팔아넘겼다

1909(순종3)년 9월 일제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으면서 만주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일대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1910년 일제는 대한의 전국 영토를 13도 21부 218군 2도(島) 88읍 2259면으로 확정 발표했다.

1910년 조선 강역을 13도로 확정했다가 간도 땅을 청국에 팔아넘긴 후 다시 8도로 축소했던 것이다. 즉 조선의 제 25대 철종 3년(1852년)의 인구는 6,810,206명이었으나 1904년 5,928,802명으로 갑자기 881,404명이 줄어든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간도 땅을 청국에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권을 장악한 일제는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 한반도 땅 만, 식민지로 지배할 통치권을 승인 받은 후 본래 대륙의 광활한 조선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한 일본의 만행을 영원히 감추어 은폐하기 위한 10개년 계략을 세우고 중국과 공모하여 한국의 고대 역사를 말살, 왜곡, 변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도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한다.

[2] 반도조선사편수회의 중추원은 어떤 기관인가?


▲   국가기관인 조선사 편수회를 조직하라는 일왕의 측령문서,  일욍의 옥쇄가 찍혀있다.      © 역사복원신문

1910년 일황 칙령 제 319호로 초대조선총독에 취임한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킬 목적으로 먼저 전통적 민족문화와 고대역사를 말살, 왜곡, 조작한 조선사 교육으로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하여 민족존립자체를 말살하는 과업을 제1 국책으로 삼아 [반도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직속으로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신라, 백제, 가야의 3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편찬된 조선사와 한반도 속의 지명과 얽어 맞추어 한반도 땅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는 과업이었다. 즉 민족독립사상의 탄압, 역사문화 말살, 왜곡, 찬탈, 황민화 교육을 강화하여 ‘한민족을 일본인으로 동화하는 정책’으로 대한제국 존립 자체를 망치는 악질적인 통치정책기관이 바로 중추원이다.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하여 대한제국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조선사(현 국사)를 만들었다는 [조선사편수회 회의록]과 [조선사 편찬지침]이 대한민국 정부문서 보관소에 소장돼 있다. 한국인은 누구나 일제의 음모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3] 일제는 무려 20만권의 사서를 불태웠다

조선총독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10개년 계략을 세우고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한국의 국내는 물론 중국 각처를 수색하여 단군조선 삼한의 고사서등 51종 20여만 권의 사료를 색출 수거하여 없애고, 무려 7천여년의 우리역사를 단절하고 왜곡의 전초작업에 착수했다.

초대조선총독은 1915년『반도조선사 편찬과』를 설치하고 일인 역사학자와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이완용, 박영효, 이윤용, 권중현 등 역적을 임명하여 한국의 역사 왜곡 작업에 착수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한다는 미명으로 조선국민을 일본 사람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했다.

조선총독부는 정무총감이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여 1922년 12월 제64조로 [조선사편찬위원회]의 훈령을 발표했다. 또 1925년 6월 조선총독 훈령보다 일본왕의 명령에 의한 일왕 칙령 제218호로 격상을 높이고 [반도조선사편수회]의 이름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고쳤다. 즉 중국 대륙에 건국되었던 신라, 백제, 가야의 대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시키는 노골적인 이름의 [반도조선사편수회]를 [조선사편수회]로 고쳤던 것이다.

[4] 한국의 고대사는 오직 2권 밖에 없다.

♦ 일제는 중국 각처에 산재한 한국의 사료를 수거했다.
일제는 우리국사를 가장 공평하게 편찬한다는 미명으로 전국의 각 도,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0년 11월부터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한국의 국내 각처에 산재한 단군 조선 삼한의 고대 사료 등 51종 20만권을 불태워 없애거나 일본 왕실로 가져갔다.

일제는 중국 각처에 산재했던 우리나라의 환인, 환웅, 단군관계의 고사서를 전부 다 색출 수거하기 위해 1922년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 요시다(吉田東伍),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미우라(三浦周行), 와세다대학의 츠다(津田左右吉), 경도제국대학 이마니시(今西龍), 경성제대 교수 쇼우다(小田省吾),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등 8명의 관계자들이 연 122일 동안 중국을 출장가서 장기체류했다.

1923년에는 17명이 연204일 동안 중국을 출장하고, 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 1925년에는 15명이 연200일 동안 중국 대륙 각처를 누비며 수많은 조선 사료(史料)를 수거하여 한국으로 가져왔다. 일제는 그 얼마나 많은 한국의 고대 사료를 가져왔는지 도저히 알 수 가 없다.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조선 사료 총목록 종류가 4,950종이라고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사학자이며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씨가 저서하고 1981년 4월 25일 발행한 [역사와 현대]에서, 1923년 7월 조선사편수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 탐방했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대주구 번주(藩主․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 라고 밝혀져 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1908년 장서각 건립계획을 추진했으나 일제는 조선총독부의 황실령 제34호에 따라 황실이 관장하던 업무를 이관하는 이왕직관제를 새로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1911년 1월 9일 이왕직도서과(李王職圖書課)로, 이관했다. 같은 해 3월 30일에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이관하고 같은 해 6월 19일에는 이왕직장서각으로 이관되었다. 이들 도서는 1915년 창경궁(昌慶宮) 안에 일본식 건물의 장서각을 지었다.

창경궁의 장서각에 이관된 도서 내역은 우리 고대사 도서가 5,355종 10만 137책이었으며, 기록류가 1만 1730책, 주자(鑄字)가 65만 3721개 71분(盆), 판목 7,501장, 기타 부속품이 12종이었다. 그 후 한국의 고대역사를 말살하고 반도조선사(현행국사)를 편찬한 후 왜곡된 국사의 증서를 영원히 감추어 은폐하기 위해 이 도서들은 일본왕실로 옮겨졌다.

한편 한국의 역사적 증서가 될 [광개토호태왕비문, 모두루비문, 점제현신사비] 등 모든 비문을 훼손시키고 돌아왔다. 일본은 고사서는 불태워 없애고, 비문은 훼손하고 심지어 비를 옮겨서까지 우리역사를 말살, 왜곡했다. 지금 한국의 고대사는 오직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2사서 외에 없는 사유는 일제에 의해 불태워 없애거나 일본으로 가져간 명백한 증거입니다.

[5] 우리나라의 고사서가 일본왕실 문고에 소장돼 있다.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일본 황실문고에서 근무하다 해방직후에 귀국한 박창화(당시 56세 이미 사망)선생은 일본 왕실문고에 우리나라의 고대사 특히 단군관련 사서들이 대량으로 소장돼 있다, 라고 주장하고 해방 후부터 이들 자료를 되찾아야 된다고 정부당국에 수차례 호소했으나 끝내 호응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1998, 9, 26 한겨레 보도]

우리나라의 고사서가 일본황실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면 정부 당국자는 당연히 일제가 수탈해간 우리 고대사를 되돌려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한국정부는 일본 왕실문고에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목록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우리나라 고대 사료의 반환을 촉구해야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일본 정부는 조건 없이 되돌려 주지 않는다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하여 세계적 동참을 호소해야 마땅할 것이다.

또한 일본정부가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상기와 같이 일제가 우리사서를 수탈해간 명백한 증서가 있으므로 일본왕실문고에 소장된 [한국의 고대사서를 반환하라]는 제목으로 국제사법 제판소에 제소를 해서라도 되돌려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6] 이병도의 스승 금서룡(今西龍)

대한민국역사 왜곡의 핵심 이병도의 스승 금서룡(今西龍.1875~1931)은 1903년 동경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 한 후 한국에 들어와 [조선반도사]를 왜곡, 변조한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었다.

190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조선사편찬위원의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되어, 신라 천년의 왕도를 경주로 얽어 맞추기 위해 먼저 경주를 답사하여 각 유적물을 변조 조작하기 시작했다. 1914년 동경제국대학 교수 재직 중에 백제의 도읍지는 한성(漢城:서울)으로 지정하고 신라 천년의 도읍지는 경주(慶州)로 또한 가락국의 도읍지는 김해로 얽어 맞춘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도록 단군설화(檀君說話)· 백제국도한산고(百濟國都漢山考), 신라사연구, 백제사연구, 가야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の硏究) 조선사의 간(朝鮮史の栞) 등 가짜 위서(僞書)를 가장 많이 발표했다. .한편 안정복(安鼎福)이 주석을 단 중종본(中宗本)의 삼국사기 원문을 조작 변조한 작업을 주도 했던 인물이며 황국신민화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이다.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1922년부터 1925년까지 3년간 중국에 출장가서 중국 각처를 누비며 수많은 조선 사료(史料)를 수거하고 심지어 광개토호태왕비문, 모두루비문, 점제현신사비(棕蟬縣神祠碑)의 비문을 훼손시킨 장본인이다.

[7]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

1922년 조선총독 사이토마코토는 중국의 출장에서 돌아온 조선사편찬 실무자들을 독려하여 조선사 편찬 시책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국의 고대 역사, 전통적 문화를 알지 못하게 불태워 말살하면 민족정신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악행을 과장하게 들추어내서 편찬하라,

그렇게 조선사를 편찬해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하므로서 조선인 청소년들은 자국의 선조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되는 하나의 기풍이 조성될 것이다.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조선인들이 일본사람으로 동화되는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사를 만들어 주는 목적이며,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 결의에서 [환인, 환웅, 단군의 고조선과 북부여의 해모수까지 무려 7,166년의 역사는 짤라 없애고] 제1편「삼국이전」을 「신라통일이전」으로 정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제3편 「고려시대」, 제4편 「조선시대전기」, 제5편 「조선시대중기」, 제6편 「조선시대후기」로 결정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 했을 때 조선반도사(현행국사) 편찬지침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② 전편을 상고 삼한, 삼국, 통일 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7쪽, 47쪽)

1928년 12월 이병도,·신석호, 홍희·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崔南善)도 촉탁위원으로 참여했다. 1934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 육당 최남선은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 개찬한 사실에 대하여 지적했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또 숙신(肅愼)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는 민족이다. 나는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발해(渤海)의 역사도 우리 조선사에 중요한 나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인가?

일제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금서룡)이 대답하기를 숙신은 연대상 역사로 취급하기보다는 인류학 민족학의 연구범위에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발해 역사는 조선사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발해 역사는 생략하겠다. 또한 심의과정에서 정만조(鄭萬朝)·이능화(李能和)·어윤적(魚允迪) 등이 단군(檀君)·기자(箕子) 등 건국신화는 민족정신 발휘 상 중요하며, 삼국 이전을 고대조선으로 하고 신화는 첫 부분에 넣어야 할 것과, 강문(綱文)에 우리글을 넣을 것 등을 제안했으나 일본인 위원들의 독단으로 원안 그대로 결정되었다.

일제식민지 때의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 결의에서 제1편「삼국이전」을 다시 「신라통일이전」으로 정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 제4편 「조선시대전기」, 제5편 「조선시대중기」, 제6편 「조선시대후기:조선왕조 실록」으로 정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본래 7편으로 정했으나 6편으로 줄인 것은 「삼국이전과 삼국시대」를 줄여 「신라통일이전」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라 했다.

[8] 조국을 배신한 이병도의 만행

일제가 설치한 '조선사편찬회'에서 편찬된 조선사를 그대로 계승한 이병도는 1963년 5월 국사교과서 편찬에 관한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28명의 국사학자와 국사담당 교사들은 12차례 회의를 갖고 다음과 같은 세부지침을 세웠다.

(1) 단군 : 단군은 한민족의 신화로 취급하라. 기자·위만조선에 관란 사실(史實)은 고조선에 포함 취급하되 '기자, 한씨, 위만, 위씨 조선 등 용어는 쓰지 않는다. 기자동래(東來) 기자운운은 교과서에 수록하지 않는다.(중략)...

(2) 삼국의 건국 및 건국연대 : ① 주몽 ·온조 ·박혁거세는 부족사회의 부족장으로 다루고, ②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건국연대(BC 57,37,18)는 표시하지 않으며, ③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것은 고구려,백제, 신라의 순으로 정하고, ④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태조왕 ·고이왕 ·내물왕 때부터 또는 몇 세기부터라고 편찬 한다.

국사교육내용통일위원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연대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고대국가의 성격을 정의한 사학계에서는 BC 57,37,18년설을 부인하고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또 삼국의 시조를 삭제한 이유는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의 건국 시조가 여러 사람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고 이유를 달았다. [1986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 徐熙乾]

[9] 1938년의 조선사와 현행 국사는 똑 같다.

1938년 일제가 독자적으로 편찬한 ‘조선사’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5년 3월 1일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는 그 구성 형태와 근본적 내용은 똑 같다. 또한 일제가 조선사를 만든 목적의 요결문과 조선사 편찬 지침과 똑 같이 현행 국사는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의 국사로 곧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사는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을 근간으로 현행 [국사교과서]를 편찬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유구한 우리나라의 고대사가 도대체 어찌하여 오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 밖에 없게 되었으며, 일제는 무슨 목적으로 남의 나라 국사를 만들어 주었겠는가?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이케노우치(池內宏),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신석호․ 홍희 같은 한인역적들이 참여하여 1938년(소화13년) 3월에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인류최초로 개국했던 1, [환인의 환국 BC 7199년)]부터 ⇒ 2, [환웅의 배달국시대] ⇒ 3, 3황5제의 진단국시대 ⇒ 4, [단군왕검의 고조선 삼한시대)] ⇒ 5, [해모수의 북부여 후 삼한시대의 마지막 변한왕 계왕(稽王) BC 17년] 까지 무려 7천년의 우리나라 역사는 잘라 없애 버리고, 세계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이 우리나라를 강탈한 왜적이 남의 나라 역사를 말살, 왜곡, 조작, 유린해서 국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 침략자가 만들어 준 국사를 해방 65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그대로 교육하고 있는 민족이 도대체 세계에서 어느 나라가 또 있겠는가? 또한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만든 국사교과서에 대하여 오늘날 까지 단 한번의 비평과 검증도 없이 모두 수용하고 청년학도들에게 그대로 교육하고 있는 민족이 도대체 제 정신이 있는 민족인가? 왜독에 중독되어 넋을 잃은 얼빠진 민족인가? (글 : 네이버 블러그 아침이슬 parkseayun)

▲     © 역사복원신문
[10] 이병도는 누구인가?

호는 두계이고 1896년 서울 출생.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고 1934년 진단학회 이사장에 취임. 1941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였고 1945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에 취임.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에 선임.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 1976년 동도학원 이사장에 선임, 1980년 국정자문위원회에 위촉.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한국사(중세편)》, 《고려시대 연구》, 《국사와 지도이념》 등. 그리고 1989년에 죽었다. 이완용이 몸이라 할 수 있는 국체를 팔아먹었다면 이병도는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역사를 팔아먹었으니 두 매국노가 가히 쌍벽을 이룬다.

[11] 조선사편수위

조선사편수위는 나라를 뺏은 일제가 한민족의 정신마저 뺏어 영원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설치한 일제하 최고의 한민족말살 프로젝트의 전위기관이었으며 여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중추를 이루는 핵심관료들과 역사조작의 대가들인 일본의 황국사관을 대표하는 학자들과 식민지 치하에서 물력,권력, 금력등에 의해 매수되거나 이용된 내노라 하는 매국노들이 총동원되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등 친일 매국노들이 총집결하였고 위원장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 맡아 조선총독부가 진두지휘를 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대사업을 총지휘하였다.

최남선, 이능화, 어윤적, 정만조등 의 당대 국내 학자들도 매수 등으로 참여하였고 해방 후 식민사관을 주창하여 학계의 거목이 되었으며 당시는 일본으로부터 황국사관을 전수받은 신진 매국노세력인 신석호, 이병도 등은 수탈한 자료조사 등 세부적인 일의 진행을 맡은 수사관보, 수사관 등의 역할을 하였다.

한마디로 조선사편수위는 한민족말살의 첨병이었고 그들이 만들어낸 조선사36권은 한민족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 그들만의 바이블이었다.

현재, 우리의 교과서 또한 이들이 만들어낸 조선사 36권의 축약본에 지나지 않으니 그 해악이 아직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며 강단의 학자들은 대부분 신석호, 이병도 등 일제치하에서 부일하여 '조선사 36권'이라는 한민족말살프로젝트에 공헌을 세운 매국노들의 후계들로 아직까지도 반도사관이 진실인양 자신들이 민족사학자인양 떠벌이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기동, 이기백 등이며 식민사학 2대라 하는 이들은 대부분 죽었지만 이들이 구축한 세력을 그들의 제자들이 다시 이어받아서 단군은 신화라는 망언을 하며 잃어버린 고토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단군조선유물과 그 이전의 배달국시대의 유물조차도 부정하며 그것을 차이나민족의 것이라 외면하고 그들의 학계에서의 권위를 유지하기위해 사료나 유물조차도 부정하며 오로지 삼국사기만을 그것도 초기삼국사는 부정하면서 한국은 독자성이 없는 차이나문화의 아류라고 강변하며 현재까지도 강단 내에서 그들만의 철옹성을 지켜나가고 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직제 및 직원 명단]

1. 조선사편찬위원회 (1922~1925) 1기
<위원장>
위원장직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아리요시 주이치 (1922년 6월 15일 ~ 1924년 7월 4일)
시모오카 주지 (1924년 7월 4일 ~ 1925년 6월 8일)

<고문>
이완용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박영효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권중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위원>
나가노 모토키 (1922년 12월 28일 ~ 1924년 12월 1일)
오다 미키지로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9일)
유맹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능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어윤적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정만조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마니시 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 이병도의 스승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마쓰이 히토시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가시와라 쇼조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8월 16일)
이병소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윤영구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현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2월 3일)
홍희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이상영 (1922년 12월 28일 ~ 1923년 3월 25일)
후카가와 덴지로 (1923년 4월 18일 ~ 1924년 6월 8일)
오쓰카 쓰네사부로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이진호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4년 12월 12일 ~ 1925년 6월 8일)

<간사>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김동준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서기>
가네코 마사키요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가쓰라기 스에지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김용적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촉탁>
이나바 이와키치 (1922년 12월 1일 ~ 1925년 6월 6일)
마쓰이 히토시 (1922년 12월 1일 ~ 1923년 7월 31일)
홍희 (1922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가시와라 쇼조 (1922년 12월 10일 ~ 1923년 8월 16일)
이능화 (1923년 12월 31일 ~ 1925년 6월 6일)
다카하시 다쿠지 (1924년 6월 30일 ~ 1925년 6월 6일)
세노 바유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구로이타 가쓰미 (1924년 11월 30일 ~ 1925년 6월 6일)  

2. 조선사 편수회 (1925~1945) 2기
<회장>
회장직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시모오카 주지 (1925년 6월 6일 ~ 11월 22일)
유아사 구라헤이 (1925년 12월 3일 ~ 1927년 12월 23일)
이케가미 시로 (1927년 12월 23일 ~ 1929년 4월 4일)
고다마 히데오 (1929년 6월 22일 ~ 1931년 6월 19일)
이마이다 기요노리 (1931년 6월 19일 ~ 1936년 8월 5일)
오노 로쿠이치로 (1936년 8월 5일 ~ )

<고문>
이완용 (1925년 7월 20일 ~ 1926년 2월 12일)
권중현 (1925년 7월 20일 ~ 1934년 3월 19일)
박영효 (1925년 7월 20일 ~ 1939년)[5]
나이토 도라지로 (1925년 9월 22일 ~ 1934년 6월 26일)
핫토리 우노키치 (1925년 9월 22일 ~ )
구로이타 가쓰미 (1925년 9월 22일 ~ )
야마다 사부로 (1933년 9월 8일 ~ 1936년 1월 16일)
이윤용 (1934년 4월 17일 ~)
하야미 히로시 (1936년 3월 7일 ~ )

<위원>
이쿠타 세이자부로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1월 8일)
시노다 지사쿠 (1925년 7월 20일 ~ )
이진호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월 19일)
오다 쇼고 (1925년 7월 20일 ~ )
유맹 (1925년 7월 20일 ~ 1930년 3월 21일)
어윤적 (1925년 7월 20일 ~ 1935년 3월 7일)
이마니시 류 (1925년 7월 20일 ~ 1932년 5월 20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0일)
이능화 (1925년 7월 20일 ~ )
이병소 (1925년 7월 20일 ~ )
윤영구 (1925년 7월 20일 ~ )
고타케 마사요시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최남선 (1928년 12월 20일 ~ )
이마무라 다케시 (1929년 12월 4일 ~ 1931년 7월 22일)
다케베 긴이치 (1929년 12월 5일 ~ 1931년 7월 1일)
하리마 겐시로 (1930년 1월 18일 ~ 1932년 2월 12일)
하야시 한조 (1930년 7월 15일 ~ 1937년 10월 30일)
우시지마 쇼조 (1931년 11월 7일 ~ 1936년 5월 21일)
하야시 시게키 (1931년 11월 7일 ~ 1933년 8월 4일)
오타니 쇼신 (1931년 11월 7일 ~ )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3월 4일 ~ 1934년 11월 5일)
후지타 료사쿠 (1933년 4월 13일 ~ )
와타나베 도요히코 (1933년 9월 8일 ~ 1936년 5월 21일)
오타케 주로 (1936년 6월 3일 ~ )
도미나가 후미카즈 (1936년 6월 3일 ~ 1937년 7월 3일)
나가타 나오마사 (1937년 11월 9일 ~ )

<촉탁위원>
최남선(崔南善) , 이병도(1927년 이후)

<간사>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수사관>
홍희(洪熹)
신석호(1938년부터),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후지타 료오사쿠(藤田亮策, 1926년)

<수사관보>
신석호,  이병도 (1925 ~ 1927년)

[간행 서적]
《조선사》 전 37권, 1938년   《조선자료총간》   《조선자료집진》


기사입력: 2011/08/25 [15:12]  최종편집: ⓒ 역사복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