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나라 한(환)국/역사 이야기

[스크랩] 부여 장자 고구려! 부여 동생 백제! 부여 갈래 신라!

설레임의 하루 2011. 8. 12. 23:58

 

(북)부여는 단군조선(대부여)47대 고열가 종가인 고(해)모수가 단군조선의 황통을 이어 받아 세운 나라이며, 해모수의 부여는 한나라를 몰아 내고 민심을 업고 부여 5대 단군에 오른 동명성왕 고두막에게 황통이 넘어 갔고, 고두막의 황통은 아들 고무서에게 계승되었고,고무서 단군의 황통은 고무서 단군의 유언에 따라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고추모에게 황통이 이어 졌다. 그래서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비문 기록 그대로 부여의 장자국(천제지자국)인 것이다.

 

 

대백제는 부여의 구태세력이 온조.비류세력을 통합한 나라다!

 

"후한 말 부여왕 구태는 요동태수 공손탁의 딸과 혼인하고 100가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우니 백가제해라 하였다."청나라 황실사서[만주 원류고]

 

"동명(고두막)의 후손으로 신의가 돈독한 구태가 요동태수 공손탁의 딸과 혼인하고 나라를 세우니 동이강국이 되었다..백제는 시조 구태에게 1년에 4번 제사지내며 웅진에 고마성을 쌓았다..백제는 정복지를 담로로 삼고 22담로지역에 왕의 자제나 왕족을 담로의 왕으로 임명하여 다스렸다"[북서]등 지나문헌 기록내용들이다.

 

지나문헌[수서 백제전]에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고마성에 짓고 일년에 4번 제사지낸다(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는 문구가 나온다. 이를 보면 백제는 대방고지에서 건국하여 온조'십제'와 마한연방을 정복한 A.D 205년경에 수도를 고마(웅진)에 두고 그때부터 담로제를 시행하였다.

 

[양서 백제전]"왕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일컬어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다. 백제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나 종친으로 분할 통치하였다."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擔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擔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也」 

 

[구당서]"백제의 영역은 바다건너 북으로 고구려와 접하고 서해를 건너 절강(양자강 지역)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 건너 왜(일본열도)에 이른다.

 

구태세력이 세운 백제는 본국 한반도지역 외에 일본열도나 지나지역에도 22명의 후왕(侯王)들을 두었던 것이다.

 

지나남부의 '남제'라는 나라의 역사책 ‘남제서’에는 북위 장군으로 훗날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아버지도 참전하였던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북위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니, 동성왕이 장군 사법명ㆍ찬수류ㆍ해례곤ㆍ목간나를 파견해 북위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이 기록을 보면 백제가 물리친 적의 규모만 해도 기병 수십만이라고 했다. [남제서]에는 동성대왕이 북위를 물리쳤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490년에 북위가 쳐들어 오자 사법명 장군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목간나 장군은 적의 성문과 선박을 때려 부수는 공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동성대왕은 사법명을 비롯한 여러 장군과 신하들에게 벼슬을 주었는데,지나대륙의 동해안 담로지역을 다스리는 직책으로 제후급이다.

 

이 처럼 백제의 경우 후한말에 요동지역을 떠나 한반도(대방고지=대방의 옛땅=해외동경)지역으로 이주하여 서해를 따라 웅진(공주)에 고마성을 쌓고 백제를 개국한 부여의 구태세력이 서기 205년 한강지역의 온조 십제를 통합하고 구태왕권을 실현함으로써 대백제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백제역시  개국연대를 높이고 통합차원에서 시조는 고구려인 온조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 백제를 온조백제(한반도백제)와 비류백제(일본백제)로 구분하는 어불성설의 역사논리는 펴지 말아야 한다. 대백제(구다라)라고 했을 때는 모두 그 왕통이 부여의 구태세력을 의미한다. 구태왕통 중에 근초고대왕 시기에 일본열도를 포함한 마한연방을 완전히 정벌,복속함으로써 대백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나문헌에서 백제가 시조 구태에게 1년에 4번 제사지내고 22담로를 설치하여 왕의 자제들이나 왕족들을 파견하여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고로 백제세력을 지역적으로 구분한다면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된 것 처럼 한성백제(백잔)와 웅진백제(이잔)으로 구분될 뿐이다. 광개토태왕이 수군과 육군으로 백제를 대대적으로 정벌할 때 웅진지역의 백제세력은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하여 근구수대왕이 태자시절에 일본열도를 평정하고 세운 야마토왕조(대화)로 귀속됨으로써 한반도백제와 일본백제로 분리되는 것이다.

 

신라는 흉노.선비족이 부여.마한세력의 사로국을 통합한 나라다

 

해민족 정통사서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에는 신화적 기법으로 박혁거세의 출생의 비밀을 감추고 기록한 [삼국사기]기록과는 달리 상세히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위서취급하는 자들이나 신라가 지나대륙에서 개국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얼마나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세력들인지를 알 수 있다.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抵辰韓奈乙村 時有蘇伐都利者 聞之 往收養於家 而及十三 岐祥然夙成有聖德 於是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斯盧 (사로)의 始王(시왕)은 仙桃山(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夫餘帝室(부여 제실)의 딸 婆蘇(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嫩水(눈수)로부터 도망쳐 東沃沮(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辰韓(진한)의 奈乙村(나을촌)에 와 닿았다. 이때 蘇伐都利(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데려다 집에서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이에 진한 6부 사람들이 존경하여 居世干(거세칸)으로 삼고, 도읍 徐羅伐(서라벌)을 세우고 나라를 辰韓(진한)이라 칭하고, 또한 斯盧(사로)라고도 하였다." 신라의 후예가 세운 청나라 황실사서 [만주원류고]에는 신라의 중심영역이 근세조선의 경상도.강원도임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통전 신라전]

新羅

新羅國, 魏時新盧國焉, 其先本辰韓種也。辰韓始有六國,稍分為 十二,新羅則其一也。初曰新盧 , 宋時曰新羅 , 或曰斯羅。 其國在百濟東南五百餘里,亦在高麗東南, 兼有漢時樂浪郡之地。 東濱大海。 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其後復歸故國, 留者遂為新羅焉, 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其國小,不能自通使聘。 (이하 생략)

"新羅國은 魏나라 때 新盧國(신로국)이였다. 그 선조는 본래 辰韓의 일종이였다. 辰韓은 처음에 6개 나라였다가, 점차 12개로 나뉘어져서, 新羅는 그 하나를 말한다. 처음에 新盧(신로)라 했으며, 宋나라 때는 新羅로, 혹은 斯羅(사라)라고 했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 500여리에 있었으며, 또한 고구려의 동남쪽이고, 漢나라 때는 낙랑군의 땅을 겸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大海에 접하였고, 魏나라 장군 毋丘儉(관구검)이 고구려를 치니, (주민들은) 옥저로 도망하였다. 그 후에 고국으로 복귀를 하였고, 잔류자들이 신라를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신라는 화하(華夏)족과 고구려.백제의 속민들로 잡스럽게 이루어 졌으며, 沃沮, 不耐, 韓, 濊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신라의 왕(석탈해)은 본래 백제(마한)사람으로. 바다(海: 일본열도의 완하국)로부터 도망을 하여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왕이 되었다. 신라는 처음에 나라가 작아서, 스스로 통신사(通使聘)을 보낼 수가 없었다..." (생략)   .[삼국사기-신라본기-지증왕 조]기록과 관련하여 모씨에서 김씨로 창씨개명한 모용선비족으로 법흥왕(모진=>김원종)의 아버지 지증왕 때 국호를 신라로 공식화했으며, 순장제도를 금지하고 농경문화를 정착시키는 등 초원문화를 버리고 농경문화로 접어 들게 되었다.

 

부여법에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그래서 박혁거세을 임신한 부여공주 파소는 부여를 떠나 진한6촌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신라가 시조로 삼았던 박혁거세은 부여공주 파소의 아들로서 부여에서 정분을 통하여 혼인전에 임신을 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사자, 부여를 떠나 옥저를 거쳐 배를 타고 동해안으로 내려 와 진한에 도착하여 박혁거세를 낳았고, 박혁거세가 13세가 되었을 때 진한(진조선)유민들의 마을인 진한6촌장들이 화백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왕으로 삼으니 사로국의 시조다.[환단고기]

 

박혁거세의 어머니의 이름은 파소로 부여공주다. 아마도 연대기상으로 계산해 보면 한나라를 몰아내고 부여영웅이 되어 부여 5대 단군에 오른 동명성왕 고두막의 아들로서 부여6대 단군 고무서의 첫째 딸이 아닌가 싶다. 둘째 딸은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고추모와 재혼한 소서노다. 고로 소서노는 박혁거세의 이모가 되는 셈이고, 고추모는 박혁거세의 이모부가 되는 셈이다.

박혁거세 어머니 파소는 혼인 전에 정분으로 박혁거세를 임신하여 백성들의 의심과 눈총을 받게 되자, 흑룡강의 갈래인 눈강(눈수)을 따라 동옥저를 거쳐 배를 타고 동해안으로 내려 와 경주의 진한6촌으로 들어 오게 된 것이다. 진한6촌장이 괜히 13세 소년에 불과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겠나? 박혁거세의 출신성분 자체가 부여 단군의 외손이기 때문이였다. 파소는 사로국의 시왕모로 모셔졌다.

부여에서 동해안을 타고 경주지역으로 들어 와 진한6촌과 연합하여 사로국을 세운 부여의 박혁거세 세력과 일본열도에서 경주지역으로 들어 온 박혁거세 세력과 연합하여 석탈해 왕조를 세운 석탈해 세력(마한세력)은 모두 부여.마한세력으로 구성된 사로국이다.

이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세운 기마세력이 바로 4세기 고구려와 전쟁과정에서 대패하여 흩어져 동해안을 타고 경주지역으로 들어 온 모용선비흉노족으로 구성된 전연잔당이다. 지나에서 세운 신나라가 망한 후 한반도로 들어 온 흉노계 김일제 성씨로 바꾸고 김씨 행세를 하며 신라 왕노릇을 한 것이다.

고로 박씨들과 석씨들은 자신들이 단군3조선 중에 부여(진조선).마한(마조선)족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제천의식.형수취수제 등 부여의 풍습과 동일한 유라시아 초원세력인 흉노.선비족은 모두 단군조선(부여)의 갈래들이다.

사로국(신라)는  본래 석.박.김씨들이 돌아 가며 왕위를 세습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마세력인 모용선비흉노족이 무력으로 박.석씨 세력을 제압하고 '골품제'를 통하여 왕위를 독점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개국연대를 높이고 통합차원에서 시조는 부여인 박혁거세로 삼은 것이다. 훈족이 세운 헝가리도 국가의 뿌리연대를 높이고 원주민들인 백인기독교세력과 융합차원에서 자신들의 시조를 노아의 둘째 야벳으로 삼았다.

 

 

통일한국KOREA 깃발은 만주까지 포함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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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KOREA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민족고토 만주까지 회복하는 나라다!

 



위대한 우리 민족사를 당당히 세계에 알리자!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에는 정당하게 논리적으로

 

대응하여 지나국과 일본의 비양심을 폭로하자!

 

지나국과 일본은 이미 간도협약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100년전 대한민국 영토인 간도에 대한 반환소송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다.

 

고로 지나국의 눈치나 보는 통치자나 권력가지고는

 

미래가 없다.

 

왜 우리 영토의 반환을 당당히 요구하지 못하는가?

 

비양심과 양심의 전쟁이다! 양심이 반드시 승리한다!

 

대국은 양심과 공의가 바로 서는 나라를 의미한다.

 

대국은 양심이 빛나는 태양의 나라를 의미한다. 

 

주객이 본래대로 회복되는 원시반본 시대

 

해민족은 인류만민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이념의 유전인자를 통하여

 

반드시 인류평화공존을 리드하는

 

중심민족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세계가 열광하는 한류열풍이 그러한 징조다!

 

씨알도 없는 가라지들은 바람에 날아갈 것이고

 

씨알로서 알맹이들은 살아 남을 것이다!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윤복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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