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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보다 천년 이상 빠른 신라와 백제의 면직물

설레임의 하루 2011. 8. 11. 02:05

문익점보다 천년 이상 빠른 신라와 백제의 면직물
공민왕 때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왔다는 기록은 허구인가?
 
심제 컬럼리스트 기사입력  2011/05/16 [15:30]
 
아직도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대유물은
충청,호남지역에서 나오면 백제유물이라하고

경상도지역에서 출토되면 신라유물이라하는
무지하기 짝이 없는 논리를 사학을 전공했다는 자들이 말하고 있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생존한 14세기 중후반 면화 씨앗을 몰래 숨겨서 가져왔다는 기록를 교육한 한국의 사학자들.. 그러나 중국사서,삼국사기에 이미 고구려에서 면포를 지어입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기록을 보기나 하고 사실화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한반도와 북부지역에는 적어도 6세기 이전 면직물이 생산되고 사용되었다..이로서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역사를 후세에게 가르친 죄과는 너무도 크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면직물(사진)이 확인됐다. 14세기 후반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시점보다 800년 앞선 것이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등 문헌에 나온 면직물인 ‘백첩포(白疊布 또는 白布)’로 추정하고 있다.
 
백첩포는 중국인들이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만든 면직물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고구려, 신라, 백제 당시 국내에서도 만든 기록이 나온다. 백첩포의 실물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부여박물관은 백제금동대향로(국보287호)가 출토된 부여 능산리사지 서쪽 돌다리 백제 유적층에서 지난 1999년 발견한 폭 2㎝, 길이 12㎝ 가량의 직물을 주사전자현미경(sem)으로 종단면을 관찰한 결과, 식물성 셀룰로오즈 섬유로 짜여진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15일 밝혔다.

이 면직물과 함께 출토된 ‘창왕명사리감’의 제작년도가 서기 567년인 것을 감안하면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1363년(공민왕 12년)에 비해 800년이 앞선 것이다. 국내에서 보고된 가장 오래된 면직물은 안동 태사자 묘에서 출토된 흑피화(검정색 소가죽으로 만든 장화) 안감에 쓰인 것이었는데, 그 시기는 고려 말 공민왕 때이다.

99년 발견 당시 이 고직물(古織物)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섬유와 실의 상태, 직물의 조직 등이 잘 남아 있어 분석이 가능했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고직물의 정확한 용도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의류의 안감보다는 단일 용도의 물품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물관은 “고대의 일반적인 직조법과 달리 강한 꼬임의 위사(緯絲)를 사용한 독특한 직조 방식의 직물로 중국에서도 아직 그 예가 보고된 바 없다”며 “백제인의 독창적인 직조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조사·분석에 참여한 심연옥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미술공예학과 교수는 면직물의 기원과 전래에 관련, “문익점이 면 종자를 유입하기 전에 국내에서 면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며 “면직물문화 발상지인 인도나 목화 재배에 적합한 아열대 환경이었던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서 전래돼 우리 풍토에 맞게 품종을 개량해 토착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 교수는 또 “<한원(翰苑)>에 ‘(고구려 사람들이) 백첩포(白疊布)를 만드는데 청포(靑布)가 특히 아름답다’는 구절이 나오고,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경문왕조(869년)에 사십승백첩포(四十升白布)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당시 백첩포는 일반적으로 사용된 직물은 아니며 외국과의 교류에서 예물로 사용되는 등 극히 귀하게 사용된 직물이었는데, 고려시대로 가면서 생산량이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박물관과 연구진은 오는 10월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열고 추가 분석 등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다.  (경향신문)

 
▲ 1999년 능산리 절터 조사에서 수습한 직물(폭 2cm, 길이 약 12cm의)이 면직물로 확인됐다. 이는 문익점의 목화론보다 800년인 앞선것이라 반도설보다는 백제 대륙설의 근거로 사진:중도일보     © 역사복원신문

 
# 다음은 문익점보다 1천년이나 빠른 신라의 면직물에 관한 기록이다.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가지고 온 시기 보다
1천여 년 앞서 실생활에 사용해 왔음을 보여주는 사서 기록이 있어
면(綿)에 대한 역사를 재 정립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1595년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그가 지은
기언(記言) 제33권 원집(原集) 외편  동사(東事) 신라세가(新羅世家) 상편에
"미추가 졸하니 조분의 아들 유례(儒禮)가 즉위하여 사도(沙道)에 성을 쌓고, 사벌주(沙伐州 경북 상주(尙州))의 호부(豪富)들을 사도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인관(印觀)과 서조(署調), 두 사람에게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 두 사람은 솜[綿] 장수로 서로 사양하고 이익을 다투지 않았는데, 유례가 소문을 듣고는 어질게 여겨 그들에게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 라 썼다. (味鄒卒。助賁子儒禮立。築城沙道。徙沙伐州豪富於沙道。賜印觀, 署調二人爵。二人者鬻綿。相讓不相取。儒禮聞之。賢而爵之)

유례는 신라 제14대왕으로 284∼298년간 재위했던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이다.
왕이 인관과 서조에게 벼슬을 주는데 이들이 솜 장수라했음을 보아
이미 이 시기에도 목화가 재배되었으며, 솜이 널리 쓰였음을 보여 준다.
672년  신라왕이 고구려왕 안승에게 면(綿:목화)를 주었다고 한 삼국사기 기록 보다 388년,  문익점이 가져 온 연대 보다 1079년이나 빠르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 기록을 보자
"1096년 고려 숙종(肅宗) 원년 8월 향연(饗宴)을 베풀었는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음식을 권하고  이어 의복ㆍ폐백ㆍ실ㆍ솜(綿)을 차등하게 하사하였다"

1221년 고려 고종 8년 8월 몽고(蒙古)의 사신 저고여(著古輿) 등이 왔다. 
"토산물(土産物)을 요구하여 왔는데,  세모시[細苧] 2천 필, 면자(綿子) 1만 근 등  그밖에 요구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목화에 대한 사서의 기록은,
1363년 고려 공민왕 12년에 문익점(文益漸1329-1398)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 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목화씨를 얻어 와 처음으로 번식시켰으며,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얻어온 목화씨를 재배 번식시키고, 씨아와 물레도 만들었다고 했다. 전하기로는, 문 익점이 초면(草棉)의 종자를 얻어 상투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다,
붓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다고 하여 그 과정이 목숨을 걸만큼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신흠(申欽 1566 ~1628)이 지은 승국유사(勝國遺事)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문익점(文益漸)이 원(元)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종자를 얻어가지고 돌아왔는데, 심은 종자가 다 말라 죽고 다만 한 줄기가 살아 남았으므로 이를 3년간 거듭 재배한 끝에 드디어 크게 번성하였다. 그의 장인 정천익이 취자거(取子車 면화씨를 빼내는 기계로 씨아이다)와 소사거 (繅絲車 실뽑는 기계)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큰 이익을 주고 있다." 고 썼다. 신흠은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앙엽기(盎葉記六)
일본 면화(綿花)의 시초에서 왜인(倭人)이 지은 일본일사(日本逸史)를 인용,  
"우리나라 문익점(文益漸)이 처음 목화씨를 얻어온 것이 일본보다 6백여 년이나 뒤진다. 우리나라의 생활을 부유케 하고 기용을 편리하게 하는 정치가 다른 나라에 뒤떨어졌으니, 아마 나라를 위한 계책에 마음쓰지 않았음이 예부터 그러했던 것이다"라고 비판하고있다.

조선조 대학자인 이들은 신라, 고려의 기록을 왜 놓쳤을까,
아니면 사대(事大)에 기인함인가 ?
 
(편집자 주) 
<고려사>에 나온 문익점의 기록도 사실로 보인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싶다.
면에 대한 기록으로 보더라도 고구려, 백제, 신라는 대륙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며, 고려 초기에도 대륙이 주무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몽고가 대륙으로 내려와 침범하자 고려가 한반도로 온 것 같다. 그러다보니 그 때 문익점이 대륙에서 목화씨를 한반도로 가져와 재배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 잘 연구해 볼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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